스치듯 보았다. 다시 볼 요량으로 고개를 돌리는 사이 바람에 흔들린 나뭇잎에 사라져버린 빛이다. 언제 다시 올지몰라 꽃짝하지 못하고 눈여겨 보지만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모든 기다림이 늘 안타까운 이유다.

가을 속으로 질주하는 숲은 소란스럽다. 수고로움으로 건너온 시간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더딘 발걸음일망정 멈추지 말아야함을 알기 때문이다. 나무도 풀도 시간과 사간을 이어주는 분주함에 몸을 맡기고 제 할일을 한다.

큰키나무 아래 터를 잡아 바람의 도움으로 어쩌다 볕과 마주하는 꽃무릇이 붉다. 콫대를 올리기 전부터 붉었을 속내가 잠깐의 빛으로 오롯이 돋보인다. 봐주는 이 없어도 저절로 붉어져야 하는 것이 숙명임을 알기에 찰라의 빛마져 고맙기만 하다.

머물러 있음이 소중한 것은 시간이 지난 후 그 자리가 빛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빛남을 찾으려해도 다시 기회를 얻기란 쉽지 않다. 하여, 그 순간에 집중해야 함을 배운다.

빛이 내려앉은 순간, 그 간절했던 소망을 비로소 불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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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벼룩아재비'
가을로 가는 숲 언저리 양지바른 잔디밭에 앙증맞은 꽃들이 무리지어 피었다. 아주 작은 크기지만 녹색의 풀속에 흰색이 모여 있어 금방 눈에 띈다. 발길에 밟히기라도 어쩌랴싶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환한 미소를 보낸다.


이른봄 봄맞이 있다면 가을을 맞이하는 꽃으로 벼룩아재비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꽃의 크기도 색깔도 비슷하다. 계절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알아주는듯 반갑다.


벼룩아재비와 유사한 꽃인데 구분하기 위해 큰벼룩아재비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아직 벼룩아재비 실물을 접하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둘이 많이 흡사하여 구분이 어렵다. 야생에서 흔하게 관찰되는 것이 큰벼룩아재비라고 한다.


이런 식물을 만날 수 있도록 마주하는 순간을 지나치지 않고 걸음을 멈추어 눈맞춤할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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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베어낸 잔디 함줌한큼 가벼워졌다. 어쩌면 이 한줌정도 무게를 덜어내고자 새벽길을 나서서 6시간 동안 그곳에 머무른 것은 아닌가 싶다.


개운하다. 자란 잔디를 벗어버린 묘역도 단정해진 모역을 바라보는 어미의 눈도 그 어미를 등 너머에서 엿보는 지식의 마음자리도 다르지 않다. 한줌 덜어낸 마음의 무게보다 백배는 무거워진 몸을 일으켜 이제 다시 내 자리로 간다.


겨우 할 일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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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능스님 4주기 기념음악회


범능 정세현, 음악에 물들다


2017. 9. 23(토) 오후 6시30분
화순 개천사


*까만밤 절로 오르는 숲길에 반딧불이가 길안내라도 하듯 앞선다. 세상과 벽을 두르듯 하늘만 빤히 보이는 깊은 산 속에 단정하게 앉은 절, 개천사開天寺다.


소리로 맺어진 속세의 인연들이 한자리에 모여 생전 스님의 뜻이 사후에도 넓고 깊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등불 하나하나를 밝히나 보다.


밤도 깊어가고 가을도 깊어가는 시간, 사람들의 마음에 켠 등불이 모여 산 속 절은 밝아지고 깊고 푸른 밤하늘로 올라가는 소리공양은 청아하다. 간혹 반딧불이가 밤의 허공을 가로지른다.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전각에 갇혔던 천불千佛이 절마당에 나투어 합장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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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달

나는 그믐달을 사랑한다. 그믐달은 요염하여 감히 손을 잡을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린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 버리는 초생달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에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과도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생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客窓 한등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들어 하는 분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 잡은 무슨 한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달을 보아주는 이가 별로이 없을 것이다. 그는 고요한 꿈나라에서 평화롭게 잠들은 세상을 저주하며, 홀로이 머리를 흩뜨리고 우는 청상과 같은 달이다. 내 눈에는 초생달 빛은 따뜻한 황금빛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는 듯하고, 보름달은 치어다 보면 하얀 얼굴이 언제든지 웃는 듯하지마는, 그믐달은 공중에서 번듯하는 날카로운 비수匕首와 같이 푸른 빛이 있어 보인다. 내가 한이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러한지는 모르지만, 내가 그 달을 많이 보고 또 보기를 원하지만, 그 달은 한 있는 사람만 보아주는 것이 아니라, 늦게 돌아가는 술 주정꾼과 노름하다 오줌누러 나온 사람도 혹 어떤 때는 도둑놈도 보는 것이다.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있는 사람이 보는 동시에, 또는 가장 한 있는 사람이 보아주고, 또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 준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나도향의 수필 '그믐달'이다. 몇달 사이 번번이 그믐달을 보지 못하여 달없어 이 글 '그믐달'만 읽으며 아쉬움을 다독였다. 그렇게 애만 태우던 그 그믐달이 달의 벗이랑 함께 버젓이 나타나 눈맞춤 한다.


밝아오는 동쪽 고운 하늘 이마 위에 '깜찍하고 예쁜 계집같은' 딱 그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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