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아주'
쪽파를 심어둔 텃밭에 보일듯 말듯 숨어 있다. 알알이 맺혀 봉우리를 만들었다. 꽃이라 부르기 민망하지만 꽃잎이 없어 꽃인가 싶지만 분명 꽃이다. 잡초로 잘려나가길 반복하여 키를 키우지 못했다고 주어진 사명에 소홀할 수 없는 일 아니더냐. 그래서 무수한 꽃을 피워 그 소명을 다하고자 한다.


꽃은 꽃잎이 없는 황록색의 꽃이 가지 끝에 조밀하게 이삭모양으로 붙어서 핀다. 꽃받침 안에 씨앗이 있다. 열매는 꽃받침에 싸여있고, 씨앗은 흑갈색으로 광택이 난다. 명아주와 비슷한 종으로는 좀명아주, 취명아주, 청명아주, 얇은명아주, 버들명아주 등이 있는데 잎과 꽃의 모양이 서로 비슷해서 구별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를 ‘청려장’이라 하는데, '본초강목'에 '명아주 줄기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 중풍에 걸리지 않는다.'라고 하여 옛날사람들이 즐겨 사용하였으며, 70살이 된 노인에게는 나라에서, 80살이 된 노인에게는 임금님이 직접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꽃 아닌듯 꽃으로 피었다고 그런 것일까. 딱히 연유는 알 수 없으나 '거짓', '속임수'라는 꽃말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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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해지는 달이 밤하늘 한가운데 올랐다. 달빛이 뜰에 가득하니 닫힌 창호문 밖으로 나서지 않을 도리가 없다. 서리가 내려앉아 차분해진 가을밤을 즐기기에 충분하다.


달에 주목하면서도 정작 보름달은 외면한다. 오히려 초승달에서 상현달이나 하현달에서 그믐달에 이르는 과정에 더 관심을 갖는다. 이유를 찾는다면 없진 않지만 저절로 마음과 몸에서 하늘을 향하는 시간만 따져봐도 금방 표시가 날 정도로 차이가 난다. 차오르고 꺼져가는 매 순간순간을 마주하는 때마다 달라지는 감정의 흐름이 신기하다.


생백生魄, 음력으로 열엿샛날 또는 그날의 달을 이르는 말이다. 기망旣望, 십육야十六夜도 같은 의미로 쓰인다고는 하지만 이제는 모두 생소한 말이 되었다.


생백生魄의 밝은 달 아래 만추의 밤 정취를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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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추'
어디에 관심을 두고 있었을까. 물매화 피는 곳으로 가는 숲길에도 지천으로 피던 것을 늦게서야 만났다. 못 보고 지나가나 싶었는데 그나마 다행으로 여긴다. 때를 놓치면 다시 만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홍자색으로 피는 꽃이 줄기 끝에서 조밀하게 많이도 달렸다. 꽃술을 길게 빼고 하나하나 거꾸로 달린 모습도 이쁘지만 이 자잘한 꽃들이 모여 둥근 꽃 방망이를 만들어 눈에 쉽게 띈다.


익히 아는 채소 부추의 야생종이라고 한다. 산에서 자라니 산부추로 이름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식물로 산마늘, 산달래, 참산부추, 두메부추 등 제법 다양한 종류가 있다.


산부추 역시 부추 특유의 똑쏘는 맛을 내는 성분이 있어 스스로를 지켜간다는 것으로 보았는지 '보호'라는 꽃말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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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위에 새긴 생각'
-정민, 열림원


한시 미학 산책, 우리 선시 삼백수, 다산의 재발견, 비슷한 것은 가짜다, 미쳐야 미친다, 일침, 조심, 와당의 표정 등으로 일찍이 매우 깊은 인상을 남긴 정민 교수의 책이다.


'돌 위에 새긴 생각'은 명나라 말엽 장호張灝가 엮은 학산당인보學山堂印譜의 내용을 정민 교수가 간추려 소개하고 있다. 학산당인보는 옛글에서 좋은 글귀를 간추려 당대의 대표적 전각자들에게 새기게 해 엮은 책이다.


"전각은 서예와 조각, 회화와 구성을 포괄하는 종합예술이다. 돌 하나하나의 구성과 포치도 그렇지만, 그 행간에 옛사람의 숨결이 뜨겁게 담겨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민 교수가 학산당인보를 주목한 이유다. 전각 하나하나를 마주하며 담긴 글귀의 뜻과 새김된 모양이 주는 느낌을 마음으로 담아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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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마한 틈에서 시작되었으리라. 땅에서 솟아난 바위에 바람과 물, 차갑고 더운 공기가 서로서로 조금씩이나마 수고로움을 보테는 동안 영겁의 시간이 흘렀고 이만큼 크기의 문을 열었다.


안과 밖, 들고 남, 이곳과 저곳을 구분해주는 경계로 작용하지만 닫아두지는 않는다. 바람이 전해주는 이야기로 세상 소식을 듣는다. 붙박혀 있지만 한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다. 때론 걷고 날고 기어가는 생명들이 안식처를 찾아 들고나는 문이기도 하기에 스스로를 닫는 일은 결코 없다.


일없다는 듯 들고 남을 수없이 반복해 본다. 어둠도 보고 밝음도 보고, 바닥도 천장도 보면서 벽에 기대기도 하고 살며시 쓰다듬어 보기도 한다. 영겁의 시간이 쌓여오는 동안 유정무정의 생명들에 의해 무수히 반복되었을 장면을 떠올리면서.


저물녘의 성급함처럼 급격히 어두워지던 하늘에서 기어이 비를 쏟아내고 만다. 언제나 가을 단풍이 내장산을 넘어와 강천산 계곡에 당도할 때 쯤이면 비가 내려 가을을 더 깊은 곳으로 몰아가곤 했다. 그런날들 처럼 은근히 기다리던 비라 반가운 마음이지만 겉으로는 민망하여 내색도 못하는 속내가 단풍처럼 울긋불긋 물들고 있다.


오는 비 그치면 바위문을 나서 다른 세상을 만나듯 경계를 넘어선 다른 가을을 만날 것이다. 이제부터 난 내 가을을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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