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부채'
비 그치고 물내음 물씬 풍기는 시간 길을 나셨다. 섬진강 상류 덕치에서 순창 장구목에 이르는 강가를 지나다 차를 세우고 왕원추리 사이로 본 물길이 거세다. 강가 한 모퉁이에 야생화 공원을 조성하여 용머리, 백합, 부처꽃, 하늘말나리, 원추리 등 제법 다양한 종류의 꽃밭을 만들고 있다.


황적색 바탕에 붉은 점이 무수히 박혔다. 꽃잎에 나 있는 이 붉은색 얼룩무늬가 호랑이 털가죽처럼 보이고 처음 싹이 나면서부터 질서 있게 퍼지며 자라는 모양이 부채꼴 같다 하여 범부채라 불린다.


매일 새롭게 피는 꽃은 그날로 시들고 다음날 다른 꽃이 피어나는데 감촉이 부드러운 가죽처럼 매끄럽다. 꽃이 질때는 세끼를 꼬듯 말리는 것이 독특하다.


수고로움으로 꽃을 피우고도 하루만에 지고마는 것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정성 어린 사랑'이라는 꽃말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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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볕이다. 그 뜨거움에 살갗이 데일 것만 같아 나서기를 주저한다. 점심시간 게으른 마음을 부추켜 강가에 서 있는 벚나무 그늘 아래에 들었다. 매미도 숨죽인 한낯의 정적이다.

"진정한 약속이란, 말이나 새끼손가락을 거는 일이 아니라 
마음속의 그리움을 읽는 것입니다.

그대가 내 그리워하는 마음 다 읽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나무 그늘 아래에서 그대 기다리는 
나를 찾아올 것이라 믿습니다."

*정일근의 시 '약속, 나무 그늘 아래서'의 일부다. 동구밖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하루에 두 번 밖에 없는 군내버스가 마을로 들어오는 모퉁에 시선을 붙인채 허는둥마는둥 힘없이 부채질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선명하다.

나무 그늘은 품이다. 돌아올 것을 믿는 기다림의 마음을 품어주고 엄마를 기다리는 소년의 두려움을 품어 주며 소나기를 피하는 급한 마음도 더위를 피하는 조급함도 품어 준다. 소리를 품는가 하면, 생명을 품고, 쉼을 품으며 삶의 시간을 품는다. 그 너른 품을 위해 나무는 잎을 내어 한여름 그늘을 드리울 초록으로 물들었을 것이다.

새소리도 매미소리도 어쩌다가 들리던 피리소리도 멈춘 벚나무 그늘아래 달콤한 오수午睡의 시간은 빨리도 지나 갔다. 

바람은 먼 곳에서만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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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품은 선비'
-강판권, 위즈덤하우스

성리학으로 무장하고 철저하게 자신의 일상을 절제했던 조선의 선비를 떠올리는 것에서 가무악歌舞樂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선비의 학문하는 내용에 분명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나무를 비롯하에 화초 역시 같은 맥락에서 살필 수 있다. 강희안의 '양화소록'이 그 대표적이다.

조식과 매화나무, 장유와 산수유, 이건창과 목련, 이상적과 살구나무, 장승업과 해당화, 조임도와 배롱나무, 이계호와 포도나무, 조성환과 회화나무, 조팽년과 구기자나무, 신흠과 박태기나무, 곽종석과 버드나무, 서해와 은행나무, 서유구와 단풍나무, 조덕린과 오동나무, 강희안과 석류나무, 박인로와 감나무, 지엄스님과 소나무, 이봥진과 백송, 윤선도와 대나무, 김종직과 차나무, 김득신과 잣나무

이와같이 이 책은 조선 선비들이 살았던 성리학 관련 공간을 직접 찾고, 그 내용을 사계절로 구분하여 글과 사진으로 담았다. 몽골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심은 이건창 생가 앞 탱자나무, 조임도가 자신의 보금자리 주변에 심은 소나무, 국화, 매화, 대나무 풍경을 보며 그만의 무릉도원을 상상해보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사계절 나무에 담긴 조선 지식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를 통해 다시 나를 돌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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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 Maudie'


누구나 자신만의 장애를 가지고 산다. 그 장애가 눈에 드러나는 외형적인 것일 수도 있고 잠재해 있으며 드러나지 않은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그 장애로 인해 사회적인 벽과 스스를 가둔 벽에 틈을 내면서 관계를 형성한다. 그 틈의 크기와 모습은 제 각각이라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며 더 깊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다양한 모습으로 작용하게 된다. 관계를 형성하는동안 겪는 갈등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 속 주인공 역시 신체적 장애를 가진 모드와 정신적 장애를 가진 에버렛의 만남 이후 각자가 가진 틈으로 상대를 받아들이며 관계를 형성해 간다. 순탄할리 없는 이 관계의 형성에서 겪는 두 사람의 갈등은 자신과 상대의 틈을 확인하며 넓혀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 과정을 통과하였기에 두 사람의 사랑은 꽃으로 피어날 수 있었으리라.


“어차피 여행은 나랑 어울리지 않는다. 손에 붓이 쥐어져 있고 눈앞에 창문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부자연스런 몸으로 나들이가 여의치 않은 모드가 세상과 만나는 통로였을 창은 그녀의 말대로 이미 창문 그 자체로 자기자신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담는 그릇이었던 그림이 곧 그 창문이었다. 실존했던 캐나다의 화가 모드 루이스와 그의 남편인 에버렛 루이스의 사랑을 이야기다.


잔잔하게 마음을 울리는 여운이 깊은 감동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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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 떨어지고 나니 기대하지 않았던 다른 모습이 보인다. 분명 꽃의 중요한 구성요소이기는 하지만 주목하지 않아서 몰랐던 것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 새로움에 주목한다. 이렇게 우연한 계기를 통해 드러난 모습은 어쩌면 꽃이라는 표면의 한가지 단면에 집착한 생각에 틈을 내서 일상에서 놓치고 살아가는 무엇을 다시 주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닐까.

하늘을 향해 활짝 웃는 하늘말나리의 주홍색 꽃잎이 때를 알고서 자신을 키워준 몸을 떠났다. 떠난 꽃잎보다 더 진한 색으로 남아 훗날을 기억하는 것이 남아있는 존재의 사명일 것이다. 꽃이 피고 지는 일이 이와 같다.

때론, 마음에는 있었으나 잠재워 두었던 일이 뜻밖의 계기를 통해 표면화되기도 한다. 잡을 것인지 아니면 다시 수면 아래로 잠재워둘 것인지는 순전히 내 몫으로 남는다. 때가 되어 다가온 기회를 잡는 일이 지금인지 아닌지는 오직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일이기에 다소 번잡해진 숨을 고르고 내면의 울림에 귀기울인다.

꽃이 피고 지는 일은 꽃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는 순리를 따르는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어쩌다 문득 듣게되는 내면의 울림에 귀기우려야 한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화양연화花樣年華가 따로 있지 않고 삶의 매 순간이 꽃 아닌 때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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