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했습니다.

오늘도 냉장고를 가득 채웠습니다.
내가 배터지도록 먹은 밥이 아이의 밥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것으로 부족해 남은 음식을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곳간에 양식이 넉넉한데 내일 다음 달 먹거리를 걱정했습니다.
읽지도 못할 책을 다섯 권이나 주문했습니다.
우리 문 앞에 실례를 했단 이유로 옆집 개를 미워했습니다.
바쁘다는 핑개로 배고픈 아가 길냥이를 외면했습니다.
연둣빛 싹을 밟으면서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잘못 걸려온 전화를 5초도 못 참고 끊었습니다.
손빨래를 하자해놓고 세탁기를 돌렸습니다.
게으르자 하면서 바빳고 바쁘자 해놓고 게을렀습니다.
페절한 친구에게 감사는커녕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회사를 쫓겨난 친구를 위로해 주지 못했습니다.
애인에게 버림받은 후배에게도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골목에서 제 어미를 욕하는 아이를 방관했습니다.
교만이 하늘을 찌를 때도 나는 나를 못 본 척했습니다.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1분도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내 아이를 챙기느라 하늘같은 부모님을 잊었습니다.
햇살이 눈부시다는 이유로 하늘을 보지 않았습니다.
바람을 탓했고 들판의 풀잎을 시샘 했습니다.
꽃을 보고도 웃지 않았습니다.

*김인자 시인의 세계여행 포토에세이 '사과나무가 있는 국경'에 나오는 글이다. 문지방을 넘어 걸음을 옮겼던 사람의 사색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햇살이 눈부셔 하늘을 자주 보고, 꽃을 보고는 자주 웃는다. 이것이 내게 의미 있는 것은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다. 문지방을 넘어 걸음을 옮기는 일은 내 마음을 가둔 벽에 틈을 내는 일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저자와 마음으로 동행하고 싶었던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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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가리'
골목이나 숲길을 지나다보면 다소 이상한 향기에 이끌려 두리번거리게 된다. 요사이 흔하게 볼 수 있는 계요등과 박주가리가 주인공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에겐 그리 싫지 않은 냄새다.


흰색 또는 연한 보라색으로 피는 꽃은 털이 유난히 많다. 별도 닮았고, 불가사리도 닮았다. 하늘과 바다가 함께하는 듯 신기하다. 덩굴로 무리지어 핀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열매는 길고 납작하며 겉이 울퉁불퉁하다. 씨는 흰색 우산털이 있다.


박주가리라는 이름은 박처럼 생긴 열매가 흰색 털을 달고 층을 이루며 매달려있는 모습에 연유하여 '단으로 묶은 곡식이나 장작 따위를 차곡차곡 쌓은 더미'를 뜻하는 '가리'란 말을 덧 붙여 박주가리라고 한다. 다른이름으로는 박조가리, 새박덩굴, 노아등, 뢰과, 비래학, 학광표, 천장각, 작표 라고도 한다.


가을부터 한겨울까지 열매가 벌어지며 날아가는 씨앗이 더 주목되는 식물이기도 하다. 깃털을 단 씨앗이 바람에 의지해 새 생명을 꿈꾸는 비행은 꽃말처럼 '먼 여행'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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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스럽다. 맑은 소리의 경쾌함이 눈으로도 보이는 양 그 맑음이 보는 이의 마음으로 전해져 소나기를 닮아가나 보다. 발치엔 빗방울 소리가 머물고 먼산엔 구름이 가볍게 산허리를 감싸고 돈다. 저 들판 어디 나무그늘엔 소나기를 피해 잠시 숨을 고르는 생명이 있을 것이다.

https://youtu.be/NlxSniYfqWY

오늘은 숲길이 아니어도 좋다. 벼이삭 패는 남도땅 허허벌판 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음악과 함께한다. 빗소리와도 저절로 어우러지는 거문고 가락에 고인 빗물을 밟는 발걸음에도 가락이 스며들었다.

번개에 천둥으로 요란스럽게 점점 굵어지며 정도를 더해가지만 이내 그칠 것을 아는 소나기라 마냥 바라보는 마음에 여유가 있다. 머리에 쓴 우산을 가만히 내려도 좋을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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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장구채'

"화암사, 내 사랑/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라며 안도현 시인이 노래한 화암사를 찾아가는 숲길에서 첫 눈맞춤을 했다. 이후 안개 자욱한 남덕유산 서봉 가는 길에서 다시 본다. 처음으로 만나는 꽃은 장소와 함께 기억된다.


유난히 가는 줄기에 그만큼 가는 꽃대를 올리고 하얀색의 여린 꽃을 피웠다. 작은 물방울에도 스스로를 의지하는데 버거워보이지만 거칠것 없다는 듯 당당하다. 다섯 갈래인 꽃잎은 가운데가 약간 갈라져 귀여운 맛을 더해준다.


장구채는 꽃자루가 가늘고 길어서 얻은 이름으로 워낙 가늘어서 약한 바람에도 쉴새없이 흔들린다. 장구채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더욱 가늘게 자라는 것이 바로 가는장구채이다.


여리고 작지만 환하게 웃는듯한 모습이어서 더 이쁜 모습이다. '동자의 웃음'이라는 꽃말이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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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꽃이 피었다. 말복이 지나면 올라온다던 벼이삭에 올해도 어김없이 꽃이 핀 것이다. 벼꽃을 부르는 말로 도화稻花, 인秵, 자마구라고도 한다지만 '벼꽃'이 주는 어감만큼 정다운 것이 없는듯 싶다.


벼꽃 피면 푸르기만하던 들판이 조금씩 색의 변화를 가져오는 때다. 벼이삭이 여물어 고개를 숙일때쯤 벼잎도 누렇게 말라 황금들판으로 풍성한 가을의 진면목을 보여 줄 것이다.


벼꽃


지은 죄 없으면서
잎 뒤에 숨어
눈곱처럼 초라하게 피어나
하늘 점점 높아지고 바람 살랑대면
서로 꽃술 비비다 지는 꽃


세상에서 제일 귀한 꽃
떨어진 자리
만백성 먹여 살릴 벼이삭 달리더니
흙냄새 땀 냄새 이슬로 씻고
여물어 갈 때
온 들판 가득 퍼지는
천 년을 맡아도 물리지 않을 구수한 냄새
아하, 이제야 알겠네
벼꽃은 숭늉냄새를 남겨놓고
떨어지는 것을


*정낙추 시인의 시 '벼꽃' 전문이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꽃'이라는 문장에 공감할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마는 그러건말건 '숭늉냄새' 품고 벼꽃은 피었다.


배꼽 아래 쯤 벼꽃 피었으니 이제 무논 논두렁 풀섭에 필 여리디여린 벗풀, 수염가래, 물달개비를 보기위해 논둑 서성이며 몇번이고 허리를 숙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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