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위에 새긴 생각'
-정민, 열림원


한시 미학 산책, 우리 선시 삼백수, 다산의 재발견, 비슷한 것은 가짜다, 미쳐야 미친다, 일침, 조심, 와당의 표정 등으로 일찍이 매우 깊은 인상을 남긴 정민 교수의 책이다.


'돌 위에 새긴 생각'은 명나라 말엽 장호張灝가 엮은 학산당인보學山堂印譜의 내용을 정민 교수가 간추려 소개하고 있다. 학산당인보는 옛글에서 좋은 글귀를 간추려 당대의 대표적 전각자들에게 새기게 해 엮은 책이다.


"전각은 서예와 조각, 회화와 구성을 포괄하는 종합예술이다. 돌 하나하나의 구성과 포치도 그렇지만, 그 행간에 옛사람의 숨결이 뜨겁게 담겨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민 교수가 학산당인보를 주목한 이유다. 전각 하나하나를 마주하며 담긴 글귀의 뜻과 새김된 모양이 주는 느낌을 마음으로 담아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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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마한 틈에서 시작되었으리라. 땅에서 솟아난 바위에 바람과 물, 차갑고 더운 공기가 서로서로 조금씩이나마 수고로움을 보테는 동안 영겁의 시간이 흘렀고 이만큼 크기의 문을 열었다.


안과 밖, 들고 남, 이곳과 저곳을 구분해주는 경계로 작용하지만 닫아두지는 않는다. 바람이 전해주는 이야기로 세상 소식을 듣는다. 붙박혀 있지만 한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다. 때론 걷고 날고 기어가는 생명들이 안식처를 찾아 들고나는 문이기도 하기에 스스로를 닫는 일은 결코 없다.


일없다는 듯 들고 남을 수없이 반복해 본다. 어둠도 보고 밝음도 보고, 바닥도 천장도 보면서 벽에 기대기도 하고 살며시 쓰다듬어 보기도 한다. 영겁의 시간이 쌓여오는 동안 유정무정의 생명들에 의해 무수히 반복되었을 장면을 떠올리면서.


저물녘의 성급함처럼 급격히 어두워지던 하늘에서 기어이 비를 쏟아내고 만다. 언제나 가을 단풍이 내장산을 넘어와 강천산 계곡에 당도할 때 쯤이면 비가 내려 가을을 더 깊은 곳으로 몰아가곤 했다. 그런날들 처럼 은근히 기다리던 비라 반가운 마음이지만 겉으로는 민망하여 내색도 못하는 속내가 단풍처럼 울긋불긋 물들고 있다.


오는 비 그치면 바위문을 나서 다른 세상을 만나듯 경계를 넘어선 다른 가을을 만날 것이다. 이제부터 난 내 가을을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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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괴불주머니'
식물의 꽃 모양은 늘 새롭게 다가온다. 비슷한 모양으로 피는 익숙한 꽃 들 속에서 독특한 모습을 빌견하는 재미는 외외로 대단하다.


노랑색에 붉은 반점이 있다. 꽃의 색 보다는 작은 물고기를 닮은 모양에 주목한다. 응달진 곳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때부터 늦가을까지 피어 보는이를 반긴다.


이른 봄부터 색을 달리하며 피는 현호색 식구들 중 괴불주머니의 한 종류다. 비슷한 식구로는 눈괴불주머니, 산괴불주머니, 염주괴불주머니, 가는괴불주머니, 자주괴불주머니 등이 있다. 피는 시기, 꽃의 색깔, 잎 모양 등으로 구분하지만 알아보기 쉽지 않다.


괴불주머니의 꽃말은 보면 금방이라도 알 수 있는 독특한 모양에서 유래했을 것이라 추정되는 '보물주머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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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건네다
윤성택 지음 / 북레시피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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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을 건너는 사이 가을이 끝났다

어느 해 늦가을떨어진 상수리나무 잎의 바삭거리는 소리에 취해 공원을 걷다 나무의자에 앉아 책을 펼쳐 들었다문장과 문장 사이를 건너가는 시간이 길어지며 한기가 파고들어 어께를 움츠리는 순간이었다하고 떨어진 상수리가 발밑까지 굴러와 멈추기까지 짧은 시간동안 문장과 문장 사이를 촘촘하게 막아서던 혼란스러움은 이내 사라지고 난 뒤 뭔지 모르게 머리가 맑아지는 경험을 했다상수리 열매가 떨어져 발밑에서 멈춘 순간까지의 '데구르르그 소리는 상수리가 건네는 마음의 온기였는지도 모른다.

 

그때의 느낌이 온전히 살아나는 말 '마음을 건네다'를 손에 들고 소나무 밑에 앉았다첫 장을 넘기기가 주저해지는 것은 무엇을 알아서가 아니다시인인 저자도 알지 못하고 저자의 시도 접해보지 못했지만 순전히 당신에게 '마음을 건네다'는 말이 품고 있는 온도를 짐작하기 때문이다.

 

첫 장을 열고부터 쉽사리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못한다문장 하나하나가 발목을 잡고 좀처럼 놓아주지 않아서 읽기를 반복해보지만 그도 여의치 않다무엇이 문제일까단어와 단어를 이어가고 문장이 문장을 자연스럽게 넘겨줄 때 가독성이 좋은 글일 것이다하지만이 마음을 건네다에 쓰여진 거의 모든 문장에 마음이 걸려 넘어지기 일쑤다애써 붙잡고 일어서서 한발 나아가기가 무섭게 또 발목을 잡혀 좀처럼 나아갈 수 없다문장에 담긴 마음의 무게인지 문장을 읽는 이의 마음이 무거워서인지 오리무중이다.

 

좋은 시를 읽으면 그날은 하루가 선물입니다시가 곁에 있다는 느낌이 좀 더 고독해도 된다는 위로 같았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이해되는 이야기다저자 윤성택의 문장 역시 충분히 좋은 의미를 가졌다.하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가 깊고 넓어서 쉽사리 넘지 못한다저자의 의도를 빗나간 읽는 이의 마음이 문제일 것이다.

 

벽은 경계이면서 안과 밖을 구분 짓는 상징입니다./그러나 달리 보면/내가 속한 공간의/막다른 마지막 장소입니다./울어도 괜찮은 곳은/이처럼 나의 가장 먼 마음의 끝입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인력이 강해서/시간조차 휩니다그 틈에서 간신히 그립거나/간신히 미워지는 감정이/블랙홀처럼 인연을 휩쓸어 갑니다.”

 

비켜갈 수 없는 문장이다평소 주목했던 관심영역으로 심사숙고하며 벗어나려고 애를 쓰면서도 쉽지 않았던 속내를 누군가에게 들켜 얼굴 붉어지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문장 사이를 건너기가 버거웠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안의 미지로 여행을 나서는 것은 저자의 이야기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그렇게 완성된 문장을 읽는 독자 역시 자신만의 내적 여행을 떠나 도달할 수 없는 미지로 나아가게 된다.

 

마음을 건네다로는 저자 윤성택의 마음자리를 짐작하는 것이 너무도 미흡하여 그의 다른 글 그 사람 건너기를 찾았다올 가을은 단풍의 끝물도 구경 못하고 책에 빠져있을 것만 같다오랜만에 묵직하여 감당하기 버겁지만 매우 흥미로운 생각의 여운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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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끝자락과 겨울의 들머리가 공존하는 11월의 긴 하루가 깊었다. 새벽 찬서리를 마련하느라 밤기온은 내리막길을 치닫고 음력 9월 열사흘달 환하다.


밤의 차가움과 낮의 뜨거움이 서로에게 스며들어 단풍은 더 곱게 물들고, 꽃은 향기를 과일은 맛을 더하고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좁혀준다. 달빛의 속삭임에 손바닥만한 뜰을 거닌다. 달빛에 솟아나는 노오란 소국의 짙은 향기로 가을을 고유했던 시간의 흔적을 더듬는다.


경계라고 쓰고 공유라고 읽는다. 나와 너를 구분하고 벽을 쌓는 경계가 아니라 서로에게 스며들어 닮아가는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무엇을 나누고 가두어 대상과 나를 격리하기보다는 틈을 내어 벽을 허물고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 틈을 허락하는 마음씀의 자리다.


대상과 내가 공존하기에 가능한 눈맞춤의 순간이다. 마음에 틈을 내어 머뭇거림을 쫓는다. 굳이 먼동이 트는 시간이나 노울이 지는 때를 기다리지 않아도 좋다. 가을이 허락한 일이기에 순리에 따를 뿐이다.


"너인가 하면 열사흘 달빛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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