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만들어준 인연들이 먼데서 온다는 소식에 봄바람 살랑이듯 들뜬 기분이다. 전날 밤 중부지방의 폭설과 남쪽으로 내려오는 도중에 만난 안개로 길을 잘못들어 도착 예상 시간을 훌쩍 넘기고도 한참이나 더 남았단다.


기다리는 동안 관방제림 나무들 사이를 걸었다. 봄날인냥 볕은 좋고 바람마져 잠자듯 온순하다. 느긋한 마음으로 오랜시간을 살아온 나무들과 악수하듯 푸조나무, 팽나무, 느티나무 등등 한그루씩 빼놓치 않고 만져보며 걸었다.


그 키 큰 나무들 틈에서 햇볕에 한껏 제 자랑을 하는 질경이를 만났다. 한해 동안 수고로움으로 품고 키웠을 씨앗을 이미 보내고 난 후의 느긋함이 한껏 여유로움으로 넘치는 모습이다. 볕을 품은 온기가 제 몸을 충분히 감싸고도 남아 가슴을 활짝열어 나눔하고 싶은가 보다.


먼 길을 돌아온 이들이 도착했다. 두번째 만남이든 처음 만나든 반기는 마음이야 차고넘치지만 겨우 머쓱한 눈인사로 대신한다. 그것으로도 충분한 마음들이 만나 얼굴에 피어나는 밝은 미소가 질경이가 발산하는 넉넉한 온기와 다르지 않다.


마치 그날 그 따뜻한 마음들이 만나 정담을 나누던 때처럼 볕이 좋다. 먼 길을 와 짧게 만난 아쉬움으로 돌아오는 봄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다지만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날 불쑥 어제 만났던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다시 만날 것만 같다.


겨울날 볕이 참으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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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파잡기綠波雜記'
-한재락 지음, 신위 비평, 안대회 옮김, 휴머니스트


녹파잡기는 "한재락이 1820년대 평양에서 가장 뛰어난 기생 66명과 기방 주변 명사 5명을 직접 인터뷰한 책이다. 한재락은 그들의 예술 세계와 삶의 애환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냈다. 여기에 당대 문인으로 명망이 높았던 신위, 이상적, 강설이 각각 비평과 '제사', '서', '제시'를 덧붙였다."


조선시대 문화예술의 한 축을 담당했던 기생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를 끈다. 더불어 이 책을 쓴 한재락 역시 주요한 관심사 중에 하나다. 박지원, 이가환, 박제가, 이학규, 유득공, 이상적, 신위 등 조선 후기를 독특하면서도 당당하게 살았던 이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고 하니 그 흥미로움이 배가 된다.


조선시대 문화예술의 현장을 엿보는 재미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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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움, 애써 찾지 않아도 아침마다 다가와 감각을 깨우는 이 기운이 좋다. 

산을 넘어오는 해의 움딕임이 조금씩 빨라지는 것을 확인하며 차가움과 동반한다.


싸ᆢ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이 시간을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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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竹'
겨울 눈을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가 눈내리는 대나무 사이를 걷고 싶은 까닭이 크다. 푸르고 곧은 것에 하얀 눈이 쌓이면 그 극명한 대비가 주는 청량함이 겨울을 느끼는 멋과 맛의 선두에 선다. 그뿐 아니라 그 단단한 대나무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쩍하니 벌어지는 소리와 모양도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모습 중 하나다.


"나모도 아닌 거시 플도 아닌 거시/곳기난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뷔연난다/뎌러코 사시四時예 프르니 그를 됴하하노라"


고산 윤선도가 오우가에서 노래한 대나무다. 옛사람들 눈에는 줄기가 굵고 딱딱한데다 키가 큰 것은 나무이며, 부름켜가 없어 부피 자람을 못 하니 나이테가 생기지 않고, 봄 한철 후딱 한 번 크고는 자람을 끝내기에 '풀'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대나무는 나무인듯 풀인듯 묘한 식물임에 틀림없다.


옛날의 선비들이 대나무를 가까이 두고 벗으로 여겼던 마음이 반영되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지조', '인내', '절개'라는 꽃말을 가졌다.


눈이 귀한 올 겨울 눈 쌓인 대밭을 걷는 것은 고사하고 푸른 댓잎에 하얀눈이 얹어진 모습도 구경 못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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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꼭 봐줄 것만 같아서
살짝 고개 숙여 드러난 속내가 부끄러운 것일까. 일부러 낮에 나왔음에도 수줍은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겨울날의 어색한 하늘빛에 선명하게 자신을 내보였다.


"있는가 하면 없고, 없는가 하면 있는
오래된 흰죽 같은"


*이규리의 '낮달'이라는 시의 일부다. "무슨 단체 모임같이 수런대는 곳에서/맨 구석 자리에 앉아 보일 듯 말 듯/몇 번 웃고 마는 사람처럼" 낮달이 떳다.


볕이 참으로 좋은 크리스마스다. 시린 가슴들에게 하늘이 보내는 마음은 선물 처럼 온기가 가득하다. 그 하늘 한가운데 빼꼼히 낮달이 보인다. 크리스마스에 하늘 보며 낮달과 눈맞춤하는 이 몇이나 될까.


누군가 꼭 봐줄 것만 같아서 수줍은 미소가 이쁜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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