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가까이 바짝 엎드려 자리잡고 피어나지만 가슴에 품은 꿈은 하늘을 넘어서고도 남는다. 이른 봄 서둘러 싹을 내고 꽃을 피우는 가녀린 풀꽃들의 세상에 꽃보고자 하는 이가 덩달아 낮아진 몸과 마음으로 만나는 자리가 있다.


이름 모르는 새싹에게


이제 매운바람 다 가시고
갯버드나무에 보얗게 보얗게 꽃 피었으니
어디론가 가야겠구나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옥양목 두루마기 한벌
쌍그렇게 지어 입고
정처 없이 떠나야겠구나
휘파람을 불면서.


*민영의 시다. 눈밭에서 부터 나뭇가지에 꽃망울 터지는 지금까지 밖으로 떠돌던 마음을 어쩌면 이리도 잘 담았을까.


이때 쯤이면 유독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붉고 푸르게 연약한 모습으로 세상 구경 나오는 새싹들이다. 생명의 생동하는 기운인 봄빛을 대표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없이 연약해보이지만 그 속에 당당함을 가득 채운 빛과 색이다.


봄, 그 중심에 새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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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몸이 느끼는 것보다 늘 한발짝 빠릅니다. 마중나간 마음 앞엔 언제나 더디기만 하더니 왔는가 싶으면 저만치 앞장서 서둘러 내빼는 것이 봄입니다. 곧 무엇이 그리 급한지 짐작도 못하는 사이에 여름 앞에서 버거워하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서둘러야 합니다. 물오른 수양버들도, 앙증맞은 봄맞이꽃도, 청초한 산자고도, 숲 가득 넘치도록 춤추는 얼레지도, 이제는 귀한 몸이 된 할미꽃도 다 봐야하니까요.


하지만 무엇보다 놓치지 말아야할 것은 또 있습니다. 진달래 꽃잎 사이의 스민 핏빛 서러움과 옥빛 섬진강 물에 고개 떨군 벚꽃의 무상함, 산벚꽃 피었다 지는 틈에 벌어지는 황홀한 색의 잔치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봄비는 오고 지랄이야/꽃은 또 피고 지랄이야"라며 주책부리고 싶은 마음 단단하게 부여잡고 이 봄날을 야무지게 건너가야 합니다. 따로 또 같이 이 봄을 건너는 꽃마음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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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레지
숲 속의 여왕이다. 추위에 움츠렸던 몸과 마음이 봄기운에 익숙히질무렵 숲에는 춤추듯 사뿐히 날개짓하는 꽃을 만난다. 한껏 멋을 부렸지만 이를 탓하는 이는 하나도 없다.


햇볕따라 닫혔던 꽃잎이 열리면 날아갈듯 환한 몸짓으로 숲의 주인 행세를 한다. 꽃잎이 열리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다. 과한듯 싶지만 단정함까지 있어 우아하게 느껴진다. 숲 속에 대부분 무리지어 피니 그 모습이 장관이지만 한적한 곳에 홀로 피어있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넓은 녹색 바탕의 잎에 자주색 무늬가 있는데, 이 무늬가 얼룩덜룩해서 얼룩취 또는 얼레지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씨앗이 땅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4년 이상 자라야만 꽃이 핀다고 하니 기다림의 꽃이기도 하다.


뒤로 젖혀진 꽃잎으로 인해 '바람난 여인'이라는 다소 민망한 꽃말을 얻었지만 오히려 꽃이 가진 멋을 찬탄하는 말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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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에게 
나를 지키는 법을 
배우다
-설흔, 위즈덤하우스


'책, 조선 사람의 내면을 읽다',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퇴계에게 공부법을 배우다' 등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설흔의 책이다. 역사기록에서 차용한 '문장과 문장 사이'의 내면을 읽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스토리텔링의 진수를 보여주는 글쓰기를 한다.


추사를 ‘나’로, 추사의 서얼 아들을 ‘너’로 설정하고, 추사를 동경하는 아들에게 아버지인 추사가 전하는 인생 메시지를 편지 형식이다. 행간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여 놓치기 싫은 문장들이 많다.


이 책은 2013년에 출간된 '추사의 마지막 편지, 나를 닮고 싶은 너에게'의 개정판이다. 5년만에 개정판을 다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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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花譜序 꽃에 미친 김군
벽癖이 없는 사람은 버림받은 자이다. 벽癖이란 글자는 질병과 치우침으로 구성되어 편벽된 병을 앓는다는 의미가 된다. 벽이 편벽된 병을 의미하지만 고독하게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전문적 기예를 익히는 자는 오직 벽을 가진 사람만이 가능하다.


김군은 늘 화원으로 날래게 달려가서 꽃을 주시한 채 하루 종일 눈 한번 꿈쩍하지 않는다. 꽃 아래 자리를 마련하여 누운 채 꼼짝도 않고 손님이 와도 말 한 마디 건네지 않는다. 그런 김군을 보고 미친 놈 아니면 멍청이라고 생각하여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자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그를 비웃는 웃음 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 웃음 소리는 공허한 메아리만 남긴 채 생기가 싹 가시게 되리라.


김군은 만물을 스승으로 삼고 있다. 김군의 기예는 천고千古의 누구와 비교해도 훌륭하다. 백화보를 그린 그는 '꽃의 역사'에 공헌한 공신의 하나로 기록될 것이며, '향기의 나라'에서 제사를 올리는 위인의 하나가 될 것이다. 벽의 공훈이 참으로 거짓이 아니다!


아아! 벌벌 떨고 게으름이나 피우면서 천하의 대사를 그르치는 위인들은 편벽된 병이 없음을 뻐기고 있다. 그런 자들이 이 그림을 본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을사년(1785) 한여름에 초비당苕翡堂 주인이 글을 쓴다.


*박제가朴齊家(1750~1805)의 글 백화보서百花譜序다. 꽃 피는 봄이 오면 어김없이 찾아서 몇번이고 읽는 글이다. 이 글에 나오는 김군은 규장각 검서관을 지냈던 김덕형이다.


지난 주말 꽃보러간 길에서 유난히 하얗게 보이는 꽃을 만나 '옳거니 이것이다'라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직 펼쳐지지 않은 꽃잎이지만 조금 후 모습이 충분히 그려지기에 베낭을 벗고 눌러앉을 작정을 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조금씩 벌어지는 꽃잎을 보면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앞에서 뒤에서 밑에서 위에서 옆에서 그렇게 이리보고 저리보고 동안 시간이 멈추듯 두어시간 이상이 훌쩍 지났지만 전혀 지루한줄 몰랐다.


김군은 김군만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무엇에 벽을 가진 이들의 공통점이다. 봄날 꽃하나 보려고 낮은 자세로 산과 들판을 헤매는 모든 이들이 다 김군이다. 김군들이 펼쳐놓은 꽃이야기들이 화창한 봄날 꽃처럼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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