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무릎을 지나 발 밑에 낙엽으로 머물렀을때 비로소 온전해 진다. 산 위에 도착한 가을이 주츰거리다 인심이라도 쓰듯 눈 앞 나뭇가지에 걸리면 비로소 가을이 온 것을 안다. 그때는 제 아무리 붉고 노랑 속내를 드러내 봐야 마음만 조금 싱숭생숭해질 뿐이다. 그렇기에 가을이라며 호들갑을 떨 수는 없다. 

눈 앞 나뭇가지에 제법 오랫동안 머물던 가을이 풀이 껶여 발밑으로 내려와 땅을 뒹글러야 비로소 농익은 가을인 셈이다. 발길에 채이는 낙엽을 가만히 밟아도 좋고, 두손 가득 담아 하늘 위로 더져도 좋지만 신발 위로 오른 낙엽을 툭툭 차며 걷는 맛을 이길 순 없다. 

저물녘 차가워진 공기를 피해 사람들이 떠난 관방제림을 걷고자 길을 나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을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온몸으로 누려야 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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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시선집
'그대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
-나태주 편역, RHK

가을날 깨끗한 긴 호수는
푸른 옥이 흐르는 듯 흘러
연꽃 수북한 곳에
작은 배를 매어두었지요.

그대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
멀리서 남에게 들켜
반나절이 부끄러웠답니다.

난설헌, 허초희(1563~1589)의 시 '연밥 따기 노래' 전문이다. 풀꽃시인 나태주의 편역으로 발간된 시집을 만났다.

"시문의 영원함이여. 영광이여. 난설헌, 시인은 죽었어도 여전히 오늘에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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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_읽는_하루

오늘

내가 걸어온 길 위에 도장처럼 발자국이 찍혀 있다
발자국에서 둥둥둥 심장 소리가 들린다
내 심장이 들려주는 생피 같은 말

하루는 길지만
일 년은 짧고
일생은 잠깐이다

*책 '오후 세 시의 사람'에 나오는 최옥정의 글 '오늘'이다. 유난히 뜨거웠던 올해 여름을 막 벗어나던 때 병마끝에 세상과 이별했다고 한다. 안타까운 마음을 이 글로 대신하고자 그분의 글을 다시 올린다.

'시 읽는 하루'는 전남 곡성의 작은 마을 안 찻집 #또가원 에 놓인 칠판에 매주 수요일 올려집니다.

#곡성 #곡성카페 #수놓는_농가찻집 #핸드드립커피 
전남 곡성군 오산면 연화리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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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벚나무'
어느 가을날 남쪽 바닷가 마을 벚나무 가로수가 꽃을 피웠다. 신기하기도 했지만 이상 기온의 영향일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꽃만 보고 말았다. 최근 가을에 피는 벚나무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우연찮게 만났다.


꽃도 시절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다. 무르익어 가는 봄에 흩날리는 벚꽃잎 속을 걸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가을이 주는 감성과 부조화라는 것이 어쩜 벚꽃은 봄에 피어야한다는 갇힌 생각 탓은 아닌지 돌아본다.


'춘추벚나무'는 국가표준식물목록에 버젓이 올라있다. 그것도 종류가 네 가지나 된다. 꽃만보고 이번에 만난 춘추벚나무가 어떤 종류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할머니 : 와~ 이 가을에 꽃이 피었네?
할아버지 : 응~
                 이 나무는 가을에 꽃을 피우는 추벚꽃이야~
할머니 : 오~ 그래요?
              당신 멋지다. 어떻게 그런걸 알아요?


꽃 핀 벚나무 아래서 나이 지긋하신 부부의 대화가 재미있다. 그 나무 아래 표지판에는 '춘'이라는 앞 글자가 지워진 채 있었다는 것은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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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세 시의 사람
최옥정 지음, 최영진 사진 / 삼인행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오후 세 시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볕 좋은 가을날의 오후가 볕바라기를 하다 문득 올려다 본 하늘만큼이나 여유롭다가을이 주는 독특한 햇살의 질감이 얼굴에 닿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이 햇살의 질감은 봄과 여름을 무사히 건너온 여유로움이 있기에 가능한 마음가짐일 것이다계절의 가을과 삶의 가을이 닮은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그 여유로움처럼 넉넉한 책을 만난다.

 

오후 세 시의 사람을 통해 사진작가 최영진과 글 작가 최옥정 남매가 건네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물음 속을 걷는다삼십 대 중반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한 글 작가 최옥정은 소설은 픽션이지만 한 줄도 삶과 동떨어진 가짜여서는 안 된다는 다짐으로 “'소설은 진짜여야 한다.”고 강조한다그에 걸 맞는 사진작가의 이야기를 담았다.

 

팽팽하게 돌아가는 일상의 긴장을 늦추고 사진과 글 사이를 서성이게 한다다소 느린 속도로 천천히 걸어야만 된다는 의무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여백이 넓고도 깊다정제된 언어로 군더더기 없는 글이 주는 담백함이 긴 호흡을 요구한다문장과 문장 사이를 건너는 속도는 느려지고 멈추길 반복하지만 끊어짐은 없다.사진 한 장에 글이 한 편씩 붙어 저절로 오는 긴장감을 사진이 주는 넉넉한 여백으로 인해 풀어지곤 한다.긴장과 이완의 적절한 조합이 남매의 깊은 정을 바탕으로 한 때문은 아닐까 싶다.

 

얻을 게 없어도 시선을 붙든 것에 마음을 한참 걸어 두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의 눈)

 

눈물을 훔치려 꽃밭에 간 사람이//꽃에게서 웃는 법을 배운다” (꽃의 말)

 

나는 좋아하는 건 너무 좋아하고 싫어하는 건 너무 싫어해서 탈이다//그리고 내 인생은 대체로 너무 좋아하는 것들 때문에 곤란을 겪었다” (비 맞은 풀잎이 되어)

 

뭐가 써 있을까//떨리는 마음으로 펼쳤던 당신의 첫 페이지” (당신의 첫 페이지)

 

사진도 글도 느긋하지만 늘어지지 않고채근하는 듯 하지만 오히려 다정한 미소로 인사를 건넨다오후 세 시, “그림자가 서서히 길어지는 시간이자 볕의 온기가 까칠함은 누그러뜨리는 때다가을날의 오후 세 시는 그렇게 다가온다.

 

이 책에 담긴 사진과 어울리는 글들이 유독 오랫동안 서성이게 하는 이유가 따로 있을까또 너무 늦게 만났는지도 모른다글맛에 이끌려 글 작가 최옥정에 대해 검색을 해보니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2018년 9월 13일 앓던 병으로 인해 세상과 이별을 했다고 한다지극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늦게나마 글로 만났으니 다행이라고 억지스러운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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