歸, 
돌아가다. 처음 떠나온 곳으로.
서예가 항백 박덕준의 글씨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간, 처음 떠나온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시작과 다르지 않음을 안다. 무심히 건너온 시간이라 모든 것이 고맙다. 그 시간을 함께 누려온 이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돌아갈 그곳이 어딜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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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梅花
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피었더군요. 가난한 살림도 때로는 운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수목 빛깔로 퇴색해 버린 장지 도배에 스며드는 묵흔墨痕처럼 어렴풋이 한두 개씩 살이 나타나는 완자창 위로 어쩌면 그렇게도 소담스런 희멀건 꽃송이들이 소복한 부인네처럼 그렇게도 고요하게 필 수가 있습니까.

실례의 말씀이오나 “하도 오래간만에 우리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청하신 선생의 말씀에 서슴지 않고 응한 것도 실은 선생을 대한다는 기쁨보다는 댁에 매화가 성개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때문이요, 십 리나 되는 비탈길을 얼음 빙판에 코방아를 찧어가면서 그 초라한 선생의 서재를 황혼녘에 찾아간 이유도 댁의 매화를 달과 함께 보려 함이었습니다. 매화에 달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흔히 세상에서 매화를 말하려 함에 으레 암향暗香과 달과 황혼을 들더군요.

선생의 서재를 황혼에 달과 함께 찾았다는 나도 속물이거니와 너무나 유명한 임포林蒲의 시가 때로는 매화를 좀 더 신선하게 사랑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한 방해물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화초를 완상玩賞하는 데도 매너리즘이 필요한 까닭이 있나요. 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자못 성관盛觀으로 피어 있는 그 앞에 토끼처럼 경이의 눈으로 쪼그리고 앉은 나에게 두보의 시구나 혹은 화정和靖의 고사가 매화의 품위를 능히 좌우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하고 많은 화초 중에 하필 매화만이 좋으란 법이 어디 있나요. 정이 든다는 데는 아무런 조건이 필요하지 않는가 봅니다.

계모 밑에 자란 자식은 배불리 먹어도 살이 찌는 법이 없고, 남자가 심은 난초는 자라기는 하되 꽃다움이 없다는군요. 대개 정이 통하지 않은 소이라 합니다.

연래로 나는 하고많은 화초를 심었습니다. 봄에 진달래와 철쭉을 길렀고, 여름에 월계와 목련과 핏빛처럼 곱게 피는 다알리아며, 가을엔 울 밑에 국화도 심어 보았고, 겨울이면 내 안두(책상머리)에 물결 같은 난초와 색시 같은 수선이며, 단아한 선비처럼 매화분을 놓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철따라 어느 꽃 어느 풀이 아름답고 곱지 않은 것이 있으리요마는 한 해 두 해 지나는 동안 내 머리에서 모든 꽃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내 기억에서 종시 사라지지 않는 꽃 매화만이 유령처럼 내 신변을 휩싸고 떠날 줄을 모르는구려.

매화의 아름다움이 어디 있나뇨? 세인이 말하기를 매화는 늙어야 한다 합니다. 그 늙은 등걸이 용의 몸뚱어리처럼 뒤틀려 올라간 곳에 성긴 가지가 군데군데 뻗고 그 위에 뛰엄뛰엄 몇 개씩 꽃이 피는 데 품위가 있다 합니다. 매화는 어느 꽃보다 유덕한 그 암향이 좋다 합니다. 백화百花가 없는 빙설리에서 홀로 소리쳐 피는 꽃이 매화밖에 어디 있느냐 합니다. 혹은 이러한 조건들이 매화를 아름답게 꾸미는 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매화를 사랑하는 마음은 실로 이러한 많은 주관이 멸시된 곳에 있습니다. 그를 대하매 아무런 조건 없이 내 마음이 황홀하여지는 데야 어찌하리까. 매화는 그 둥치를 꾸미지 않아도 좋습니다. 제 자라고 싶은 대로 우뚝 뻗어서 제 피고 싶은 대로 피어오르는 꽃들이 가다가 훌쩍 향기를 보내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제가 방 한 구석에 있는 체도 않고 은사隱士처럼 겸허하게 앉아 있는 폼이 그럴듯합니다.

나는 구름같이 핀 매화 앞에 단정히 앉아 행여나 풍겨 오는 암향을 다칠세라 호흡도 가다듬어 쉬면서 격동하는 심장을 가라앉히기에 힘을 씁니다. 그는 앉은자리에서 나에게 곧 무슨 이야긴지 속삭이는 것 같습니다.

매화를 대할 때의 이 경건해지는 마음이 위대한 예술을 감상할 때의 심경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내 눈앞에 한 개의 대리석상이 떠오릅니다. 희랍에서도 유명한 피디어스의 작품인가 보아요. 다음에 운강雲岡과 용문龍門의 거대한 석불들이 아름다운 모든 조건을 구비하고서 내 눈앞에 황홀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수유(잠시 후)에 이 여러 환영들은 사라지고 신라의 석불이 그 부드러운 곡선을 공중에 그리면서 아무런 조건도 없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자세로 내 눈을 현황(어지럽고 황홀함)하게 합니다. 그러다가 나는 다시 희멀건 조선조의 백사기白砂器를 봅니다. 희미한 보름달처럼 아름답게 조금도 그의 존재를 자랑함이 없이 의젓이 제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 수줍어하는 품이 소리쳐 불러도 대답할 줄 모를 것 같구려. 고동古銅의 빛이 제아무리 곱다 한들, 용천요龍泉窯의 품이 제아무리 높다 한들 이렇게도 적막한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겠습니까.

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핀 그 앞에서 나의 환상은 한없이 전개됩니다. 그러다가 다음 순간 나는 매화와 석불과 백사기의 존재를 모조리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잔잔한 물결처럼 내 마음은 다시 고요해집니다. 있는 듯 만 듯한 매화 향기가 내 코를 스치는구려. 내 옆에 선생이 막 책장을 넘기시는 줄을 어찌 알았으리요.

요즈음은 턱없이 분주한 세상이올시다. 기실 내남 할 것 없이 몸보다는 마음이 더 분주한 세상이올시다. 바로 일전이었던가요. 어느 친구와 대좌하였을 때 내가 “×선생 댁에 매화가 피었다니 구경이나 갈까?” 하였더니 내 말이 맺기도 전에 그는 “자네도 꽤 한가로운 사람일세.” 하고 조소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먼 산만 바라보았습니다. 어찌어찌하다가 우리는 이다지도 바빠졌는가. 물에 빠져 금시에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그 친구 인사나 한 자였다면 건져 주었을걸.” 하는 영국풍의 침착성을 못 가졌다 치더라도 이 커피는 맛이 좋으니 언짢으니, 이 그림은 잘 되었으니 못 되었으니 하는 터수에 빙설을 루경屢徑하여 지루하게 피어난 애련한 매화를 완상할 여유조차 없는 이다지도 냉회冷灰같이 식어버린 우리네의 마음이리까?

[1947, 丁亥, 입춘 X선생의 老梅를 보다]

*김용준의 글 '매화'다. 이 글을 읽는 동안 가슴에 가득 '매화'가 피었다. 

느긋하게 일어나 난로에 불을 지피고 따뜻한 차 한잔 내렸다. 보름 정도 지나면 섬진강 소학정 매화가 필 것이다. 꽃 피거든 기별을 달라고 청을 넣어 뒀으니 소식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모월당慕月堂 마른 가지에 봄이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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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와 수치
-김남일, 낮은산

책을 가까이 하면서도 늘 어려운 것이 문학이었다. 나름 이유야 있었겠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과서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염상섭, 이광수, 변영로, 김동인, 심훈, 김명순, 최해서, 정지용, 임화, 김기림, 이효석, 이북명, 현진건, 백태원, 나혜석, 백석, 이태준, 신채호, 김남천, 김유정, 이상, 이광수, 이육사

한국 근대 문학의 풍경, '염치와 수치' 이 독특한 시각으로 만나는 익숙한 이름들이 오히려 낯선 이야기로 다가온다. 저저 서문에서 오랫동안 머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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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보러 산과 들로 다니면서 시작되었다. 나무를 보고 만지면서 하나 둘 구분할 수 있기까지 제법 시간이 흘렀다. 어느날부터 그 나무를 이용하여 물건을 만들면서 나무와 놀고 있으며 이제 그 위에 글자를 새긴다.


'끌망' 제1회 서각 전시회


ㆍ전시기간 : 2019. 12. 28(토)~2020.1. 31(금)
ㆍOpen : 2019. 12. 28(토) 오후 3시
ㆍ전시장소 : 섬진강 가정역 주차장 내 갤러리
                   (전남 곡성군 오곡면 송정리 64)


끌과 망치, 또각또각 리듬 속에 절로 빠져드는 시간의 결과물을 사람들과 공유할 기회를 만들었다. 과정을 함께 건너온 동료들과 세심한 배려의 선생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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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에서 삶을 읽다 - 서러운 이 땅에 태어나
김경숙 지음 / 소명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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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찾아가는 시인의 삶

한자로 된 글은 내게 그림의 떡이었다한자로 기록된 옛사람들의 흔적은 그렇게 남의 나라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문장을 직접 이해할 수 없기에 이 어려움을 해결해줄 사람들이 필요했다다행히도 글을 대신 읽어주는 이들이 생겨나면서부터 가까운 이웃으로 어느 땐 친근한 벗이 되었다그렇게 친해진 것이 시와 산문을 비롯한 옛사람들의 글이다.

 

그동안 이런 옛사람들의 글을 접하는데 도움을 받은 것은 정민안대회이종목 등 문학을 전공한 여러 선생님들의 도움이 컷다그분들이 읽어주는 책들을 통해 옛사람들의 일상의 삶과 지향하는 뜻을 펼치기 위한 자기 수양을 어떻게 해온 것인지 알게 되었다옛사람들의 글은 단순히 책 속에 묻혀 있는 문장에서 벗어나 지금을 살아가는 일상의 지혜를 밝혀주는 등불과도 같았으며 때론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목마름을 해결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김경숙의 '한시에서 삶을 읽다역시 이와 같은 부류로 우선 반가움이 앞선다시에 주목하면서도 독특한 테마를 설정하여 옛사람들의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내용 구성이 이채롭다.

 

'서러운 이 땅에 태어나라는 부제가 이 책을 들게 했다어느 사회나 사회구조적 한계는 있을 수밖에 없다그들이 살았던 조선이라는 나라 역시 마찬가지다실의에 빠지거나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삶일지라도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과 가족을 꾸려갔던 이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시들과의 만남이 흥미를 끈다.

 

이세원신유한강백김도수이봉환박지원이덕무박제가신위김정희황현허난설헌이매창김삼의당김운초박죽서남정일헌강담운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다. ‘서얼 문사’, ‘지식인의 길을 걸어간 선비’, ‘새장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 여성’ 세 가지 테마로 구분된 작가 한 명에 작품 두 편씩이미 익숙하거나 새롭게 만난 낯선 이들 모두의 삶이 흥미를 넘어선 무엇이 따라 붙는다한계를 어쩌지 못하는 삶에서 오는 애틋함과 안쓰러움에 잘못알고 있는 편견에서 벗어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한편 한편의 글에 담긴 저자의 세심함이 빛나는 장면이다한편의 시를 통해 시인의 삶으로 접근해가는 방식이 차분하고 구체적이다한편의 시로는 시인의 삶을 추적해가고 다른 시 한편에서는 시에 집중하여 시인에게로 걸어가는 길을 보여준다이렇게 친절한 시를 읽어주는 글은 오랜만에 만났다.오랫동안 손에서 책을 내려놓지 못한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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