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달을 보았는가

 

 
개기월식이라고 붉은 달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다. 늘 다른 모습의 달이지만 달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그 모습으로 있다. 다만, 눈에 보이는 것이 다른 달로 느끼게 할 뿐이다. 달에 주목하며 살아온 시간이 제법 된 나에게 달을 담은 그림 하나가 언제나 머릿속에 있다. 깊어가는 가을 밤 아주 잘 어울리는 그림이다.

이 그림을 떠올리게 된 계기가 있다. 이른 퇴근으로 억새 사이로 반짝이는 석양을 바라보다 익숙한 무엇이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분명 비슷한 이미지를 어딘가에서 봤는데...잠시 후 김홍도의 그림 한 점이 오버랩 되었다.

‘소림명월도’ 우리가 익히 아는 조선 후기 화가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다. 풍속화가로 인식된 측면이 강하지만 산수, 인물, 화조, 시 등 다양한 부분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이 ‘소림명월도’를 김홍도의 작품이라고 하면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흔하게 보이는 풍경이고 눈을 사로잡을만한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강한 끌림이 있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을 보고 있는 듯 현장감이 살아있다. 겹쳐진 나뭇가지 사이로 달이 가려져 있지만 그 존재가 확실히 드러난다. 조선시대 유명했던 산수화, 진경산수와는 다른 맛이 분명하다. 일상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으나 일상에서 느끼는 평범함 보다는 달과 나뭇가지들이 품어내는 아우리가 심상치 않다. 익숙하지만 그 익숙함을 넘어선 경지가 있다.
 
살아 당시 이미 절정기에 이르고 왕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화가 김홍도에게는 자신을 거듭나게 할 무엇이 필요했을까? 추운 겨울을 대비하여 자신을 돌아보는 계절이 가을이다. 자연뿐 아니라 사람도 이와 닮았다. 유독 가을을 건너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말없이 더 튼 울림으로 전달되는 성찰의 이미지가 전해진다.

김홍도를 김홍도답게 알게 하는 가장 어울리는 그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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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 나는 그들의 비밀을 알고 있다
이재운 지음 / 책이있는마을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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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믿지 말라

권력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 한 나라의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의 생각은 그 나라 온 국민의 일상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정치가 일상과는 멀어져 보이지만 숨 쉬는 것 빼고 하루를 살아가는 전 과정에서 정치와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숨 쉬는 것조차 정치와 관련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일상에서 그것을 느끼며 정치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간극이 정치가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이나 개인의 사익을 추구하는 바탕이 아닌가 싶다.

 

오늘날 대통령을 중심으로 정치가들이 보여주는 모습에서 권력의 근거가 되는 국민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국민의 일상이나 삶에는 관심 없고 권력의 유지나 집권을 위한 그들의 밥그릇 싸움 말고는 보이지 않으니 한심하기만 하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면에는 그들을 뽑은 국민들의 선택도 반성해아 할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권력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의 역사와 그 시간을 함께해 온 것이기에 우리 역사에서도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역사적 사실로 꼽을 수 있은 것이 조선사의 얼룩을 만들었던 당쟁이 아닐까 한다. 특히, 아버지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사건을 보면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없다는 권력의 속성을 여실히 볼 수 있다.

 

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야기는 다양한 장르에서 다뤄져왔다. 하지만, 각기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여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한 문제제기만 있을 뿐 이렇다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미흡한 것이 아닌가도 싶다. 사도세자의 사건을 바라보는 눈은 노론응 중심으로 하는 그동안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이재운의 사도사제는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역시 자신만의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고 했다. 이는 자신의 가문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기존 노론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소론 온건파의 시각에서 살핀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조선의 당파는 동인과 서인, 그리고 서인에서 확장된 노론 소론 등으로 깊이와 무게를 더하며 갈라져 왔고 이 과정에서 당파의 권력을 잡기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며 심지어 왕도 바꾸는 일이 일어났다. 왕권이 약했던 왕은 그들의 세력에 의해 독살을 당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으니 얼마나 치열한 권력 싸움이었는지 잠작도 못할 정도다.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 역시 경종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이들 당파와 무관하지 않게 왕위 올라 그들의 지지 없이는 왕의 자리조차 위협받을 지경이었다. 이런 힘의 역학관계에 의해 희생된 비운의 왕세자가 바로 사도세자라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당파와는 상관없이 유지된 시각이다.

 

여기에 이재운 작가는 노론의 시각으로만 이야기되어온 그동안의 시각에서 소론 그것도 온건파의 시각으로 사도세자 문제를 살핀다. 이는 권력의 싸움에서 밀려나 일정정도 거리르 유지한 사람들의 시각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점은 있다. 하지만, 작가 이재운이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그동안 회자된 당파싸움이나 영조의 이야기 등을 지나치게 반복하고 있고 실질적인 시도세자의 이야기는 뒷부분에 극히 짧은 분량만을 할애하여 당파싸움의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도 내명부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라 텔레비전 역사 드라마의 흥밋거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한계를 노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될 정도다. 특히, 사족과도 같은 자신의 가문이야기를 중간 중간에 끼어 넣어 소설적 흥미도 반감시키고 있다. 뛰어난 성군의 자질을 가진 이미지와 정신병자의 이중적 모습에서 벗어나 사도세자의 진면목을 찾아간다는 출발점에 부합하지 못한 이야기 전개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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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야묘도추도(野猫盜雛圖)’

 

 

어이할꼬!

도둑고양이 잡으려다

우리 영감 먼저 잡겠소

 

그림이든 사진이든 순간의 포착이 생동감으로 살아나게 마련이다. 한가로웠을 한낮의 어느 시골집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혼비백산이다. 도망가고 쫓아가고 넘어지고 따라가는 장면을 기가 막히게 포착하고 화폭에 담았다.

 

야묘도추도’(野猫盜雛圖)'들고양이(야묘)가 병아리() 훔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김홍도, 신윤복과 함께 조선시대 3대 풍속화가로 불린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이 그렸다. 긍재 전신첩에 실려 있는 그림으로 종이에 수묵 담채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시골집에 한번은 봤을 것만 같은 장면이라 친근감이 앞선다. 고양이, 어미닭, 병아리의 움직임도 생동감 있지만 무엇보다 남자의 품이 그럴 듯하다. 탕건이 벗겨지는 것도 마루에서 넘어지는 것도 아랑곳없이 들고양이에게로 모든 관심이 쏠려 있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그림에서 오주석은 이 장면의 압권으로 마나님을 주목한다. 병아리쯤이야 별거 아닌데 귀하디귀한 서방님이 다칠세라 야단이다. "어이할꼬! 도둑고양이 잡으려다 우리 영감 먼저 잡겠쏘!!!"

 

주제가 요란하다 보니 그림의 구성요소들도 어디라 초점이 없이 화폭 전체에 널브러져 있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보면 구도가 치밀하기 그지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흐르는 시선이다. 뜰이 살구나무 가지도 이 방향으로 뻗어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시선은 바로 마나님은 영감을 보고, 영감 앞에는 암탉이 있고, 암탉은 다시 들고양이를 쫓고, 고양이는 영감을 놀리듯 뒤돌아본다. 떨어지는 탕건조차 이 중심선 위에 놓여 있다.”

 

야묘도추도를 통해 오주석이 본 김득신은 맺힌 데 없이 쓱쓱 그어댄 붓질로 생동감을 살렸고, 특히 잔가지를 바깥에서 안쪽으로 툭툭 쳐 넣어 봄날의 움트는 생명력을 시사한 솜씨가 단원 김홍도와 어금버금하다고 평한다.

 

그림을 읽어가는 맛은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은 자신의 감정일 것이다. 그 모든 구성요소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그 그림만의 감성이 자신과 만나 공감을 일으키는 지점이 그림을 보는 멋과 맛의 절정이 아닌가 싶다.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책 속의 그림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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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에 비친 달
정찬주 지음 / 작가정신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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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글에 주목한다

모든 것은 변한다. 사람의 마음을 표기하고 전달하는 도구로써의 문자 역시 변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한글도 만들어지는 당시와 비교하여 수많은 변화를 겪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의 가장 큰 변화는 1933.10.19 조선어학회 한글맞춤법통일안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던 것을 다시 외국문자의 표현에 불리한 것이 있다고 하여 다시 변화를 거쳤다. 이로부터 사라진 글자로 인해 한글 창제 당시의 정신이 조금은 후퇴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인류가 만든 수많은 문자 중 가장 탁월하다고 평가받는 한글은 그 창제과정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보니 다양한 추측을 낳았지만 그 중심에 세종이 있었다는 점은 확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과 집현전 학사나 세종의 자식들이 밀접히 관련된 이 창제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그동안 드라마나 문학작품에서 다루어왔지만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한 점이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작품이 있다.

 

정찬주의 천강에 비친 달은 바로 한글이 창제되는 과정에 깊숙이 관여한 사람으로 신미 대사라는 승려를 주목하여 한글창제 당시의 상황을 문학작품으로 엮은 것이다. 한글 창제과정에 세종과 더불어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기록에 남겨질 수 없었던 사연을 소설로 그려가며 당시 시대적 조건을 뛰어 넘는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세종은 원경왕후의 4재를 기리는 천도재가 있던 날(세종 2(1420) 86) 아버지 태종에 의해 만들어진 사찰에서 신미와 만난다. 세종 당시 왜의 대장경 요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자문을 위해 다시 신미와 그의 스승 함허는 궁궐에서 세종과 만난 자리에서 새로운 글자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비밀스러운 문자 창제의 과정이 시작된다. 불교를 놓고 사대부들과 밀고 당기는 실랑이 속에서도 비밀스런 임무는 계속되고 세종이 밝힌 글자의 원리를 바탕으로 신미의 범어 문자의 원리를 적용하여 우리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들어 간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문자로 신미에 의해 불교 경전이 번역되고 이후 8년 만인 세종 25(1443) 1230일에 집현전 학사들을 모아 놓고 공식적으로 훈민정음의 창제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이렇게 훈민정음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깊숙이 관여한 신미 대사는 어떤 사람일까? 신미 대사의 친동생 집현전 학사 김수온이 쓴 복천보강, 효령대군 문집, 조선실록, 영산김씨 족보등에 기록된 문헌자료와 신미 대사의 부도탑(보물 제1416)이 있는 복천암의 복천암사적기(福泉庵事蹟記)"세종은 복천암에 주석하던 신미대사(信眉大師)로부터 한글 창제 중인 집현전 학자들에게 범어의 자음과 모음을 설명하게 했다"는 기록 등에 의해 그의 존재와 한글 창제과정에 관여한 흔적을 살필 수 있다.

 

작가 정찬주는 이러한 기록들에 의해 확인된 사실들을 바탕으로 신미 대사를 중심으로 한글 창제 과정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세종 제위 당시 조선의 분위기와 불교가 처한 현실,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선택한 사대부와 수백 년 이어온 불교의 사이의 마찰 등을 세밀하게 그려가고 있다.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세워나가는 과정에서 왕가 속에 유지되는 불교에 대한 믿음은 문자에 소외되었던 백성들에게 불교의 경전과 부처님이 생애를 알리고 싶은 양자의 교착점이 되는 것으로부터 문자의 창제가 시작되었다는 시각이다.

 

남송시대의 선승 야보 도천이 남긴 대나무 그림자는 섬돌을 쓸어도/티끌 하나 움직이지 않고/달빛이 연못을 깊이 뚫어도/물에는 흔적하나 없네에서처럼 섬돌에 미련을 두지 않은 대나무 그림자나 연못에 자신의 흔적을 새기려 하지 않는 달빛처럼 신미 대사의 한글 창제에 관한 흔적은 미련 없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찬주의 소설 천강에 비친 달은 한글 창제 정신 속에 깃들어 있는 자유와 문명의 꽃을 피워 새 시대를 열어나가려는 열망과 의지는 국가나 국민들의 오늘날 한글에 대한 자긍심이 얼마나 있는지를 살펴 다시금 한글에 대해 주목해야 함을 일깨워주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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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있어도 그 존재가 드러난다.
굳이 자신을 내 보이지 않으려 해도 내면에 깃든 세월의 흔적이 넘쳐나는 자연스러움의 멋이다. 햇살이 바람에 기대어 억새 품에 안기는 동안 그 속에 머무는 그 무엇 하나 햇살과 바람 그리고 억새의 흔들림에 물들지 않은 것이 없다.

햇살을 등지고 바람 따라 고개 숙인 저 너머에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를 시간을 향한 그리운 마음일까? 다시, 하늘 향해 고개 들어 아직 남아 있는 마지막 시간을 향한 아우성으로 풍성한 가을 햇살온몸으로 가득 담아 햇살과 바람 그리고 억새의 흔들림에 물들어 간다.

...

무엇이든 그 홀로 빛나는 것은 없다.
단풍이 시간을 담아 붉고 억새가 햇살에 기대어 빛나고 사람이 세월에 농익어 가듯 그렇게 서로 기대어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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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5-01-14 2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빛나기 위해서는 태워야하고. . 타기 위해서는 산소와 그외 조건이 필요하니 홀로 빛나는 것은 없네요. . 별이 스스로를 태워야 빛을 낼 수 있듯이. . 사람도 그런 걸까요. . 내면을 태우는 과정이 있어야 빛이 나는 사람이 될 수있을까요. .?

무진無盡 2015-01-14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 부지런히 태워온 시간이지만 빛나기 보다는 스며들기였나 봐요

나비종 2015-01-14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며들기. . 도 어떤 방식이냐에 따라 괜찮을 수도 있겠네요. .
부드럽거나 혹은 따스하거나. .

무진無盡 2015-01-14 21:34   좋아요 0 | URL
틈, 사이, 거리 등을ᆢ인정해야 비로소 부드럽거나 혹은 따스하거나가 가능하다는걸 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