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걸음 하시는 이들을 위해 들고나는 길목에다 두었다. 가녀린 줄기 하나가 담장을 타고 오르더니 제법 튼실해지면서 몇해를 지나는 동안 어느해 보다 풍성하다.

"가슴을 물어라. 뜯어내면 철철 피흘리는
천근 사랑 같은 것"

*김명인의 시 '저 능소화'의 일부다. 속내를 숨기지 않고 하늘을 보는 능소화는 지고 나서야 시든다. 담장을 넘어서 피어야 제 맛인데 그 모습을 그려낸 시 중에서 종종 찾아본다.

"꽃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화무 십일홍
비웃으며
두루 안녕하신 세상이여
내내 핏발이 선
나의 눈총을 받으시라"

이원규의 시 '능소화'의 일부다. 담을 넘어서 피어야 제 맛이라 했지만 대놓고 들이대면 능소화가 아니다. 담을 넘는 당돌함은 있지만 동시에 수줍음이 있어야 더 간절한 법이다.

무지막지하게 쏟아붓는 비로 하루를 연다. 능소화 피고지는 동안 여름은 그 열기를 담아 열매를 키워갈 것이다. 덩달아 나도 여물어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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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絃琴 줄 없는 거문고

도연명은 음률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줄 없는 거문고를 하나 가지고(畜) 있어 매양 술기운이 오르면 그럴 때 마다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실어 달래곤 하였다.

*항백 박덕준 선생님의 작품 無絃琴 무현금 (47×27, 2009. “No-stringed Harp”)을 산벚나무에 새겼다.

몇날며칠을 몸부림쳤는지 모른다. 내가 품고 있는 소리를 듣고자 스스로에게 집중했다. 보이지도 않은 글자를 새기는 일이 몸 속 잠자고 있는 세포를 깨우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줄없는 거문고를 무릎에 올려 넘치는 속내를 얹는다.




*칭구의 무현금
칭구가 걸어 놓은 죽은 나무를 파고든 '살아난 세포'의 흔적을 걸어 놓자 맑은 미소를 지었을 얼굴이 떠올랐다. 하루 동안 댓글을 달 수 없었다. 마음에 파도를 만들었지만 흐름이 짐작되지 않았다. 결국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사맞는 음악이 들린다. 책상에 앉아 오랫만에 시나위를 걸었다.
죽은 나무 조각판에 흐름이 읽힌다. 나무의 흐름은 칭구의 속으로 깊게 파고 들었다. 의미를 알수 없는 글자는 나무결을 따라 소리를 만들었다. 줄 없는 거문고에 음악이 떠오른다. 죽은나무도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을 새삼 까닫는다. 진양을 따라가는 슬기둥일까, 중모리 얹은 쌀갱일가? 칭구는 나무결을 타고 꺽고, 흔들고, 내질렀다. 이렇게 풍류 가락에 젖은 자신을 새겨 산위에서 죽은 나무를 살렸다.
2021년 7월 12일 항백 선생 서, 일재 각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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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주머니란'
올봄엔 유독 먼길을 나선 꽃나들이가 잦았다. 멀어서 못 본 꽃을 볼 요량이고 때를 놓치면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모를일이라 선듯 나선 것이다. 무엇보다 꽃보자고 청하는 벗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짧은 꽃쟁이 기간에 비해 제법 많은 종류의 꽃을 봤다고 생각하는데도 만나고 싶은 꽃들은 천지다. 그 중 한가지가 이 꽃이었다. 올해는 먼곳까지 포함하면 두어곳에서 적절한 때에 좋은 상태로 만났다.
 
붉게 염색한 조그마한 항아리를 달고 당당하게 서 있다. 특이하고 이쁜 꽃이 키도 제법 크니 쉽게 보인다. 이로인해 급격한 자생지 파괴가 일어났으리라 짐작된다. 그만큼 매력적인 꽃이다.
 
처음엔 "개불알란"이라고도 한다는데 이는 꽃이 개의 불알을 닮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냄새 때문에 까마귀오줌통, 모양 때문에 요강꽃이라하며, 복주머니꽃, 개불알꽃, 작란화, 포대작란화, 복주머니 등 다양한 이름이 있다.
 
산림청에서 희귀식물로 지정한 보호대상종이다. '튀는 아름다움'이라는 꽃말은 이꽃이 수난당할 것을 예고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매년 같은 곳에서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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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앵초'
높은 산 숲속에 꽃들의 잔치가 열렸다. 기꺼이 발품 팔아서라도 눈맞춤하고 픈 꽃이다. 무리지어 아름다움을 뽑내는 것이 장관이지만 홀로 피어도 그 빛을 감추진 못한다.
 
홍자색 꽃들이 꽃대 끝에 모여 피어 머리에 화관을 쓴 듯하다. 앙증맞은 꽃이 넓은 잎과 어우러져 서로가 서로를 더 빛나게 한다.
 
앵초라는 이름은 꽃이 앵도나무의 꽃과 비슷해서 붙여진 것으로 큰앵초는 앵초보다 크다는 의미다. 잎의 모양과 크기 등으로 구분이 어렵지 않다.
 
갈길이 멀어 서두르거나 다소 여유로운 걸음의 사람들이 보랏빛 꽃에 눈길을 주지만 친근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이는 몇명이 되지 않는다. 꽃 이름을 물어보는 사람은 여행길에서 오래된 벗을 만나듯 반갑다. 하지만, 꽃이 있는지도 모르고 걷기에만 바쁜이들에겐 꽃의 인사가 무색하기만 하다.
 
초여름 지리산 노고단으로 발걸음을 이끄는 꽃이다. 순탄한 길을 걷다가 행운이라도 만나듯 큰앵초를 본다. '행운의 열쇠'라는 꽃말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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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잡았으니 키를 키워야하고 품도 풍성하게 넓혀야 한다. 꽃 피우고 열매 맺으면 끝이 아니다. 곱게 단풍도 들겠다. 타고난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소명이다. 그때까지 굳건히 버티길 빈다.

댑싸리라고 한다. 빗자루를 만들어 유용하게 쓸 수 있다. 골목 어디쯤이다. 이렇게 크는 동안 눈길 한번 주지 못한 미련함을 이렇게라도 덜어야하지 않겠는가.

비는 먼곳에서만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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