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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nametests.com의 아이템들이 흥미 있어 자주 이용한다. 반신반의하게도 하고 흥미를 끄는 요소도 있는 가운데 종종 기막히게 하는 면도 있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반적인 성격 특성을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특성으로 받아들이는 바넘 효과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볼 수 없는 것들도 꽤 있다. 오늘 마주친 아이템은 “당신을 성경의 인물에 비유하면 누구와 같을까요?“이다. 역시 흥미 만점의 것이어서 그냥 갈 수 없었다.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성경 속 누구를 좋아하거나 이상시 또는 동일시하기나 하고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을 뒤로 하고 답을 구한 결과 남자인 내게 뜻 밖에도 살로메라는 여자가 나왔다. 결과 아래에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똑똑한 여자‘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성경에는 두 명의 살로메가 나온다. 예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 살로메, 세례 요한을 처형하는 데 직접적 원인이 된 살로메가 그들이다.


이복형과 이혼한 헤로디아와 결혼해 세례 요한의 비난을 받았지만 민심이 두려워 그를 죽이지는 못하고 감옥에 가두어 둔 헤롯은 연회에서 의붓딸인 살로메가 춤을 추자 그녀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은 살로메는 세례 요한의 목을 잘라 쟁반에 받쳐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고 헤롯이 이를 수용한다.


살로메는 주로 예술작품에서 애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로 묘사된다. 헤롯은 로마제국이 유대를 간접 지배하기 위해 유대의 왕으로 임명한 자이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헤롯은 잔인하고 음흉한 광기어린 군주였지만 도시를 건설하고 농업을 장려하여 유대의 경제적 기반 확충에 힘쓴 선견적인 통치자였다. 헤롯이 구세주 예수를 죽이기 위해 유아들을 학살했다는 성경의 이야기는 근거가 불확실하다.


어떻든 그림에는 예수의 무덤이 아닌 헤롯, 헤로디아 등으로 보이는 인물과 살로메가 있는 장면이 연출되어 있으니 살로메는 헤로디아의 사주(使嗾)를 받아 세례 요한을 죽이게 한 그 살로메가 분명하다. 물론 성경은 살로메란 이름을 기록한 대신 헤로디아의 딸이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서, 헤롯과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왕이 소녀에게 말하였다.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 내가 들어주마.’(마가복음 6:22)처럼.


살로메는 여러 예술가들에게 영감으로 작용했다. 쥴 마스네의 오페라 ‘헤로디아드’,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소설 ‘헤로디아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처럼. 그림으로는 앙리 르뇨(Henri Regnault: 1843 - 1871)의 ‘살로메의 춤’,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 1490 - 1576)의 ‘세례 요한의 머리와 살로메’, 로비스 코린트의 ‘살로메’ 등이다.


이 가운데 티치아노의 ‘세례 요한의 머리와 살로메’가 눈길을 끈다. 살로메의 미모가 출중(出衆)하고 로마의 도리아 팜필리 궁전(Plazzo Doria Pamphilj)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살로메를 이상적인 미(美)의 전형으로 생각한 타치아노는 몇몇 다른 그림들에 그녀를 등장시켰다. ‘거울과 함께 하는 여인‘, ’허영‘, ’성(聖)과 속(俗)의 사랑‘ 등...


도리아 팜필리란 이름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비로 이탈리아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인 QVL(Quella Vecchia Locanda)의 ’빌라 도리아 팜필리(Villa Doria Pamphili)'란 곡에서 만날 수 있다.(참고로 Quella Vecchia Locanda의 뜻은 저 낡은 여인숙이다.) 빌라 도리아 팜필리는 현재 이탈리아 총리의 전용 영빈관(迎賓館)으로 쓰이고 있다. 정리하면 플라초 도리아 팜필리는 미술관, 빌라 도리아 팜필리는 영빈관이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 - 1610)도 살로메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세례 요한의 머리를 받는 살로메’이다.(이 그림을 나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후 어머니인 성모의 무릎에 놓인 예수를 그린 ‘피에타’와 대조적인 그림으로 보았다. 전자가 세속적이라면 후자는 성聖스럽다.) 귀도 레니(Guido Reni: 1575 - 1642)도 살로메 그림을 그렸다. ‘세례 요한의 머리를 움켜쥔 살로메'이다.


티치아노, 카라바조, 레니 모두 팜필리 미술관의 주요 화가이다. 세 화가가 그린 살로메는 조금 또는 많이 다르다. 티치아노의 살로메가 가장 아름답다. 하지만 이 세 화가들 중 미술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인물은 카라바조이다. 물리학자 레오나르도 콜레티는 카라바조가 그린 ’바울의 회심(回心)’을 예로 들어 막스 플랑크가 단행한 개종(改宗)에 비유될 행동을 설명한 바 있다.


콜레티는 이렇게 말한다. “물리학의 역사를 보면 모든 물리학자들이 실제로 개종을 할 수 있는 능력 그러니까 바로 플랑크처럼 자신의 이론을 포기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든 것은 아니“라고.(‘명화로 보는 32 가지 물리 이야기’ 68 페이지) 흑체(黑體) 복사(輻射)와 관해 플랑크는 복사가 연속적인 값이 아닌 특정 값을 갖는다고 봄으로써 즉 자신의 기존 이론을 포기함으로써 에너지는 근소 범위에서 변화하고 그 범위도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양자론(量子論)의 기초를 세웠다.


카라바조는 한편 백상현 교수의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에서는 매너리즘의 신비주의에 대립하는 상당히 직접적인 그림을 그림으로써 매너리즘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 화가로 설명되었다. 성스러운 인물도 범속하게 그린 화가가 카라바조이다. 레오나르도 콜레티가 그림의 내용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백상현 교수는 그림의 기법에 초점을 둔 것이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물리학자와 예술학을 전공한 정신분석학자의 차이인가?


이제 카라바조가 매너리즘의 한계를 넘어서려 했다는 설명을 듣고 살로메를 그린 그림을 비교하면 티치아노와 카라바조의 그림에 나타난 살로메의 미(美)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티치아노의 살로메는 아름답고 요염한 반면, 카라바조의 살로메는 범속하고 남성적이기까지 하다. 사실적 재현의 전통에 반기를 들고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에 따라 예술작품을 구현한 예술 사조를 말하는 매너리즘은 만질 수 있고 인식 가능함을 의미하는 '양식(manner)'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maniera'에서 나왔다.


흥미로은 것은 박우진 학예연구사의 ‘미술, 과학을 탐하다’에 나오는 카라바조에 대한 설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성(聖) 도마’를 설명하며 17세기 로마의 시민들이 너무나 사실적인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며 깜짝 놀랐다고 덧붙인다. 카라바조의 그림이 실제 손으로 만진 것 같은 촉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카라바조의 어떤 면이 매너리즘에 대립한 그림을 그리게 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카라바조 개인의 독특함이 그런 점을 이끌었지만 시대적 성숙도도 한 몫 했으리라 본다면 너무 도식적일까? 아니 카라바조를 잘못 평가하는 것일까? 카라바조는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의 주요 화가이다. 일그러진 진주라는 말에서 온 바로크는 카라바조를 잘 설명하는 듯 하다. 카라바조의 그림 가운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나르시소스‘이다. 리처드 체식(Richard D Chessick)의 ’자기 심리학과 나르시시즘의 치료‘의 표지를 장식한 인상적인 그림이다. 이 그림은 탄식하는 나르시소스의 면모를 절묘하게 표현해냈다.


나르시소스는 물 속에 비친 자기 얼굴을 사랑하는 이룰 수 없는 소망으로 좌절해 죽은 신화 속 인물이다. 우리는 카라바조에 대해 잘 모른다. 틸만 뢰리히의 ’카라바조의 비밀‘(소설), 김상근 교수의 ’카라바조, 이중성의 살인미학‘, 질 랑베르의 ’카라바조‘, 로돌포 파파의 ’카라바조: 극적이며 매혹적인 바로크의 선구자‘, 윤익영 교수의 ’카라바조‘, 로사 조르지의 '카라바조 : 빛과 어둠의 대가’, 프란체스카 마리니, 레나토 구투소의 ‘카라바조’ 등 출간된 많은 관련서들 가운데 골라 읽어야겠다.


살로메가 내게 제시된 것은 의외이지만 놀랍지 않고 어느 면 만족스럽기까지 하다. 그녀의 똑똑함이 마음에 들고 미모도 그렇다. 당연히 나는 카라바조의 남성적이면서 범속한 살로메보다 티치아노의 아름다운 살로메가 마음에 든다. 가끔이지만 wanna be와 fall in love 사이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나는 살로메가 내게 제시된 것이 만족스럽다. 오버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성의 내면에 자리한 이브와 다른 릴리스가 생각난다.


참하고 순종적인 이브적 본능과, 모성애를 거부하며 쾌락적, 적극적인 릴리스적 본능....이브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만들어졌다면 릴리스는 아담과 대등하게 흙으로 빚어졌다. 릴리스(Lilith)는 유태 신화에 나오는 여성으로 기원 전 3 - 5세기에 바빌로니아 탈무드에서 주요 인물로 형상화되었다. 릴리스는 여성 데몬이다. 존 콜리어(John Collier: 1850- 1934)가 그린 릴리스를 한 번 볼 것. 클라리사 에스테스의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과 비교할 수 있을까? 야성(野性)과 여성성(女性性)의 행복한 결합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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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판미동 출판사 입니다.

신간 도서 『차크라의 힘』의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세계적인 요가 지도자가 알려 주는 일상 속 간단한 차크라 명상법


건강과 자기 확신, 깨달음을 얻으려면
차크라 에너지를 깨워라
 
명상 초보자부터 숙련된 요가 수행자까지
삶의 균형을 잡아 주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방법

몸과 마음의 이분법에 빠지지 않고

건강과 깨달음을 향해 가는 에너지 명상법

 

인도철학에 바탕을 둔 차크라 명상은 몸과 마음을 따로 다스리려고 하지 않고 통합적인 에너지 명상법을 제시한다. 차크라 에너지는 감정, 지성, 생기 에너지와 관련되므로 이를 강화하면 두려움, 죄책감, 분노나 왜곡된 사고, 생각과 행동의 불일치 등의 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 또한 차크라 에너지가 원활히 흐르면 각 차크라들이 관장하는 힘, 창조성, 집중, 사랑, 소통, 지혜, 참자아를 발견하고 나의 근원적 에너지를 일깨울 수 있다. 지금 나 자신에게 필요한 차크라 에너지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고양할 수 있을지 알아보는 것은 지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긍정적인 인생을 시작하는 첫걸음이다. 이를 통해 몸과 마음, 감정과 이성을 고루 조화시키면 자연스럽게 건강과 내면의 평화, 부족함 없는 대인관계와 이루고자 하는 꿈을 이루는 데 성공적인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요가와 명상을 수련해오던 사람들은 물론, 삶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들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정비하고 싶은 사람, 감정을 잘 다스리거나 몸과 마음의 균형을 잡고 싶은 사람,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이 있게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똑똑하고 신비로운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이벤트 참여방법>

 

1. 이벤트 기간  : 7월 7일 ~ 7 월 13일

   당첨자 발표  :  순착순 (기간내에 모집인원이 달성되면 자동종료)

   발송  :  아래 참여 조건(3.)에 충족한 당첨자 분들에게 발송 해드립니다.

                *본 이벤트 페이지 SNS 홍보 누락시 당첨이 취소 될 수있습니다.

 

2. 모집인원  :  5명 

 

3. 참여방법

- 이벤트 페이지를 스크랩하세요. (필수)

- 스크랩한 이벤트 페이지를 홍보해주세요. (SNS필수)

- 책을 읽고 싶은 이유와 함께 스크랩 주소를 댓글로 남겨주세요.

 

4. 당첨되신 분은 꼭 지켜주세요.

- 도서 수령 후, 7일 이내에 '개인블로그'와 '알라딘' 에 도서 리뷰를 꼭 올려주세요.

 

 * (미서평시 서평단 선정에서 제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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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결국 흥행을 우선시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이지만 대중적인 작가들을 저는 반기지 않습니다. 작품성이 없어 보인다는 생각 때문인데 그들도 작품성에 비중을 두었다면 흥행이 잘 안 되는 작가들 이상으로 잘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성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것 자체가 이론의 여지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인기도 있으면서 작품성도 갖춘 작가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인기 작가들이 대중에 영합하느라 작품성을 발휘할 여력이 없는 것과 실제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라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올해 한강 작가의 수상을 보며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20년 전부터 그 작가의 작품을 아끼듯 읽어온 저로서는 숨겨둔 애인을 빼앗긴 것 같기도 합니다.(오늘 경복궁 공부를 함께 한 한 여자분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자 남자들 중에서 그런 감정을 갖는 경우는 아예 없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하더군요.) 참 많은 사람들이 그 작가의 다양한 작품들을 소급(?)해 읽는 것을 보며 보는 눈을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강, 채식주의자 깊게 읽기’ 같은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작품성과는 별개로 한강 작가와 함께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작가를 집중적으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작가를 찾아 읽는 것도 창의적으로 해야겠지요? 오늘 이정우 교수의 ‘소은(素隱) 박홍규와 서구 존재론사’를 읽다가 “어떨 때는 엘레아학파를, 어떨 때는 헤라클레이토스를 써먹는 소피스트들의 양동작전을 분쇄하는 길이기도 하다.”(13 페이지)는 글을 읽었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며 지난 해 읽은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를 떠올렸습니다. 상반되는 아르미니우스적 가치관(자유주의)과 칼뱅주의(예정론)를 널뛰듯 오가는 기회주의적 신앙의 목회자들에 대한 비판서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경복궁 어디 어디인가를 넘어서는데 선생님께서 문지방을 밟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생각납니다. 경계인 문지방을 밟는 것은 중간자적 존재 즉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존재도 아닌 좀비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창의력(이라고 할 것까지 없겠지만)은 이런 방식으로 건져올리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엘레아학파의 사상은 다(多)와 운동(運動) 즉 물리적 세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상이고,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은 만물유동론(萬物流動論)이다.: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 참고)


수상을 계기로 그간 작품성이 있음에도 아니 어쩌면 그렇기에 많이 읽히지 않은 작품들이 읽히고 한국 문학 - 한강 작가의 수상이 한국 문학의 영광인 양 떠들어대는 것은 무리한 끼어 맞추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 도 더불어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오랜 즉 선호(選好) 즉 노쇠함 때문인지 이제 (한강 작가 본인이 이런 글을 읽을 가능성이 거의 없겠지만) 한강 작가가 소설 만큼은 아니더라도 시도 자주 출간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울러 (대체로 흥행과 관계 없는 장르인) 시를 쓰시는 분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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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특성은 명쾌함과 단순함을 거부한다는 데 있다.‘(2016년 6월 10일 한겨레신문)는 문강형준의 말에 김재인은 “니체의 말을 빗댄 뻘소리. 인문학은 명료하다.“(2016년 6월 11일 자신의 페이스북)는 말로 응수했다. 흥미롭다. 내가 누구의 말이 맞는지를 판단할 여력은 없다. 다만 인문학자들 사이에도 관점의 차이는 있다는 생각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굳이 말하자면 문강형준은 영문학, 독문학, 사회학을 공부했고 김재인은 미학, 철학을 공부했다. 이 차이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모르겠다. 덧붙인다면 그들의 차이에 초점을 맞추어 인문학을 체계 없는 학문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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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쌩 2016-08-24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자신의 학문적 기반을 무엇으로 삼고 출발했냐에 따라, 이런 인식의 차이를 불러온게 아닐까요?
제가 아는 모교수도 철학적 아포리즘이 매혹적인 이유는 그것이 간결하고 함축적이며 명석함을 가지기 때문이라고 말하더군요.

기하학 공준이 다섯개가 아니라, 오십개였다면 유클리드체계의 우아함은 증발했을 것이라고...

벤투의스케치북 2016-08-24 20:45   좋아요 0 | URL
네. 반갑습니다. 저는 세상이 불확실하고 불분명한 점이 있지만 인문학은 그런 점을 최대한 명료하게 다룰 줄 알고 분석하고 견해를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들려주신 말씀과 상응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