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책 한 권 전체를 주목하기보다 영감을 주는 몇몇 오브제들에 주목해 자유로운 글을 쓰는 읽기를 하고 싶다. 어제 광화문 교보문고 아트 스페이스에서 본 강요배(姜堯培: 1952 - ) 화가의 ‘적벽’, ‘입동 - 초승’, ‘산정(山頂)의 달’ 등의 작품을 보며 하게 된 생각이다. 몇몇 작품들만을 보았기에 단언할 수 없지만 나는 그의 그림들에서 신비스럽고 상징적인 화법을 보았다.(오브제는 예술 작품으로 대할 때 의미를 지니는 사물이지만 내가 여기서 쓴 오브제란 말은 글쓰기를 염두에 두고 대하는 소재들을 의미한다.) 신비와 상징은 핵심적인 부분에 주목해야 제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드러냄과 감춤이 적절한 긴장을 이룰 때 나타나는 것이기도 할 터이다. 자료를 찾다가 내 나이 무렵의 화가를 인터뷰한 지난 2004년의 기사를 읽었다. 그의 작업실에는 ‘주역’에서부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까지 고루 갖춰져 있다고 한다. 그 책들이 화가의 작업 공간에 놓인 것은 화가가 그 책들의 내용을 그림으로 옮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들로부터 영감을 얻기 위해서일 것이다. 나도 이런 길을 가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난 금요일 끝난 출판 강의 중 책 제목 설정 부분에서 ‘나는 한국에서 어른이 되었다‘란 책이 거론되었다. 이 책의 원제는 ’Brother one cell‘이다.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미국 청년이 대마관리법 위반으로 하게 된 교도소 생활을 기록한 책이다. 중요한 것은 세포, 전지(電池), 벌집의 방 외에 수도원이나 교도소의 독방 등을 의미하는 cell이란 단어에 대한 해석이다. 교도소 생활을 그린 책이니 cell은 당연히 교도소의 독방을 의미하지만 나는 cell이 중의적으로 쓰인 표현이 아닌가 싶다. 즉 그 미국인 영어 강사에게 교도소가 수도원의 독방과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싶은 것이다. 다짐 만큼 운동을 하지 못하는 나는 내 방에서 서서 책을 읽으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이 돌아다님을 불교에서 말하는 걷기 명상 즉 경행(經行)이라 할 수 있다. 수도원 생활이 이렇게 소란스럽지는 않겠지만 나는 내 방을 수도원의 독방으로 여긴다. 봉쇄(封鎖) 수도원이 아닌 일반 수도원의 방...인생을 여전히 배우고 수행하는 곳이라 생각하는 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난 2일 압구정동의 한 한의원에서 열린 ‘떨지 않고 말 잘하는 법‘ 강의. 10여명이 들어설 수 있는 작은 방에서 분위기 좋게 시간이 갔다. 두 사람씩 파트너가 되어 3분씩 무작위로 주어진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당황(?)스러웠던 점은 당시 내가 떨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누구에게(또는 누구 앞에서) 말을 하느냐,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 등에 따라 떨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은 당연하다.

 

지난 번 아프가니스탄 황금유물전 전시회가 열린 국립중앙박물관 강당에서 관련 강연회가 끝나고 질문을 하는 자리에서 나는 심하게 목소리가 떨리는 경험을 했다. 그때와 그제는 상황이 다르다. 그때는 400여명이 들은 큰 자리였고 질문 주제도 민감한 것이어서 자연스럽게 떨렸다. 반면 그제는 열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인 평화로운 자리였고 과제도 단순했다. 내 파트너는 30세 정도의 여자분으로 신뢰에 대해 말을 하게 되었다.

 

나는 어리석게도 그 분이 먼저 말을 하도록 순서가 정해지자 한편으로는 그 분의 말을 들으며 공감도 표하고 한편으로는 무슨 말을 할까를 궁리했다. 내게 주어진 주제는 열정(熱情)이었다. 내 파트너는 마지막 30여초 정도를 남겨두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래도 끝까지 이야기를 했다. 듣건대 왠만한 사람들은 1분 30초 정도를 넘기기 어렵다고 한다. 나는 열정을 영어로 passion이라 하는데 수난(受難)도 Passion이라 한다는 말로 운을 떼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 요한수난곡 등을 예로 들며 나는 열정적인 사람은 상처를 받기 쉬운데 그것이 바로 수난이 아닌가 한다는 말을 했다. 반면 냉정한 사람은 상처받는 것과 거리가 멀지만 사람과의 거리감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말, 인간에게는 갭이 있고 다름이 있으니 극단은 피해야 한다는 말 등을 더했다. 강연자는 즉흥성(순발력), 일관성, 구성(기, 승, 전, 결 또는 서론, 본론, 결론의 체계를 갖추는 것), 논리성(명확한 근거 제시), 유머 등으로 연습해야 할(또는 중점을 두어야 할) 우선 순위를 두었다.

 

SK에서 오래 스피치 리더십 강사를 지낸 강연자는 삶에 활력을 주고 위험에 대처하게 하는 등 인간과 필수불가결한 긴장, 떨림 등을 모두 없앨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는 말을 하며 그런 점에서 책 제목(’떨지 않고 말 잘 하는 법‘)이 적절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을 더했다. 이 말을 듣고 내가 생각한 것은 (얼마나 맥락이 일치하는지 자신할 수 없지만) 정신분석가 백상현 교수가 ’라깡의 루브르‘에서 한 말이었다.

 

그에 의하면 정신분석은 증상의 소멸이 아닌 주체가 증상과 화해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증상(을 유지하려는 것)은 주체가 큰 쾌락을 즐기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김승희 시인의 ’객석에 앉은 여자‘를 읽어야겠다. 아프기 때문에 삶을 열렬히 살 수 없다고 말하지만 열렬히 살지 못하는 삶의 알리바이를 마련하기 위해 아마도 병을 기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심을 받는 여자에 대한 시. 물론 이 경우는 상황이 복잡하다. 그녀는 병을 길러 행복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스마트폰과 그에 기반한 카카오톡 및 카카오스토리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성경 속 인물인 바울 사도(司徒)의 말과 우리나라 한 중견 시인의 시를 가져다 쓰는 것은 다소 생뚱맞은 처사일 수 있다. 그래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두 분의 생각이 내 마음을 잘 설명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졌듯 바울 사도는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고린도 전서 13장 12절)란 말을 했다. 스마트폰에 서툰 나는 지금은 스마트폰이 희미한 거울 같지만 그때 가서는 직접 맞대고 보는 얼굴처럼 명확해질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다.


거짓말 같지만 스마트폰 유저가 된 지 불과 사흘만에 지하철 정차 역을 두 번이나 지나친 사람이 나다. 한이나 시인의 ‘능엄경 밖으로 사흘 가출’이란 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은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능엄경 밖으로 사흘 무단가출해 돌아오지 않는 마음을/ 안으로, 조용히, 불러들였어요...마음을 허방에 빠뜨리고, 껍데기/ 만 거리를 오고 가면서, 왜 그리, 허둥대고 사방 분주하였/ 던지요...” 이 시를 읽고 나는 내 카카오스토리를 설명하는 문구로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로 가출‘이란 표현을 썼다.


양가감점에 익숙한 나는 경계에 속한 나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스마트폰 역시 내게 양가감정의 대상임을 이미 사용 첫날에 페북 댓글로 밝혔다. 스마트폰에 빠진 나는 이번 주(8월 29일 ~ 9월 3일) 겨우 책 한 권을 읽고 말았다. 어제 강남의 한 한의원에서 열린 ‘떨지 않고 말 잘하는 법‘ 강의에서 나는 또 한번 경계에 처한 나를 확인했다. 내 떨림 지수 27점은 주의를 요하는 시작점인 30점에 근접한 수치이지만 안정적인 수치인 10점과 20점 사이를 웃도는 수치이다. 나와 스마트폰의 접점은 어떤 모양으로 그려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시 한편을 인용하기 위해 시인에게는 6만원, 해당 출판사에는 3만원 등 모두 9만원의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하는 현 저작권 보호 정책에 따르면 50편의 시를 인용해 시 해설서를 낼 경우 지불해야 하는 돈은 450만원이다. 3000부 이상은 판매해야 수익을 낼 수 있는 상황이다. 요즘처럼 시(그리고 시 해설가나 시 비평가의 글들)가 잘 읽히지 않는 세상에서 이루기 어려운 고지라 할 만하다. 장석남 시인의 ‘시의 정거장’은 이런 이유 때문에 시 인용은 일체 하지 않고 해설만 실은 책이다. 독자로서는 해당 시들을 찾아 읽으려 할 수도 있고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시인은 시집 한 권을 내는 것을 집 한 채를 짓는 것에 비유했다. 타당한 말이다. 물론 궁금증이 없을 수 없다. 

 

비평가나 문인이 소개한 시가 유명해져 판매 수익 증가로 이어질 경우 시인이 해설서나 비평서의 저자들에게 사례 성격의 돈이든 거래 성격의 돈이든 지불하는가, 란 궁금증이다.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시인들은 시도 잘 안 읽히지만 시 비평이나 시 해설서는 더 안 읽힌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장석남 시인의 경우 자신의 수익을 위해 시를 인용하는 시 해설서를 쓰려 했을 것이고 결국 저작권 보호 때문에 시 없는 시 해설서를 쓴 것이지만 재수록 비용 지불과 무관한 연구나 교육, 비평 등을 목적으로 한 책으로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경우 앞서 말한 두 경우(해당 시들을 찾아 읽으려는 경우와 불편함을 느끼는 경우) 중 전자에 해당한다. 즉 해당 시들을 찾아 읽으려는 부류에 속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시 없는 시 해설서’들이 시의 정거장’처럼 일정 수준 이상을 담보했다 해도 계속 될 경우 피로감을 줄 수 있으리라 보인다. 저작권 보호 때문에 해설과 시 원문을 함께 실은 좋은 시 해설서의 출판이 위축될 수 있다는 생각은 자연스럽다. 시인, 독자, 해설가가 상생하는 길은 없을까? 장석남 시인은 언젠가 대학로인가를 지나다가 ‘물의 정거장’이란 글귀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는 말을 한 바 있다. 자신이 쓰는 글들이 문득 그런 것은 아닐까, 란 장석남 시인의 생각을 따르면 ‘시의 정거장’은 시인과 독자를 매개하는 의미가 깃든 제목이 아닐 수 없다. 매개(媒介)라는 말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시 없는 시 해설서 같은 파격적인 매개가 아닌 평범한 매개여야 의미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