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수 혁명 - 안전한 식수를 향한 인간의 권리와 투쟁
제임스 샐즈먼 지음, 김정로 외 옮김 / 시공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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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우리 몸의 70%를 차지하고 있는데, 몸을 이루는 기본 단위인 세포와 세포 사이를 채우는 기질의 주요 성분일 뿐 아니라 세포가 필요로 하는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하거나 노폐물과 이산화탄소를 운반하는 혈액을 비롯한 림프액 및 조직액의 주요 구성요소입니다. 대사활동을 통하여 소변과 대변, 호흡 그리고 땀 등을 통하여 우리 몸을 빠져나가는 물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우리 몸이 하루에 필요로 하는 물의 양은 체중 1kg당 30ml라고 합니다. 우리 몸은 수분의 부족에 민감한데 적정 수분량에서 1~3%가 부족하면 심한 갈증과 피로감을 느끼고, 5%가 부족하면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며, 10%이상 부족하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물이 소중한 존재입니다만, 우리 옛말에 ‘OO을 물쓰듯 한다.’는 말도 있듯이 물의 소중함을 실감하지 못해온 것 같습니다.

 

유엔 평가에 따르면 2030년에는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물이 부족한 곳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역시 물부족 국가에 포함될 것이라고 하니 미리 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여름철에 집중되는 비를 충분히 저장할 수 있는 수리시설을 갖추어야 할 것인데, 그러다보니 강물의 흐름이 줄어 오염이 심화되는 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강의 수심을 깊게 유지하여 수량을 확보하고 홍수를 예방하는 다목적의 개발사업은 타당성이 충분하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물관리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시점에서 듀크대학교의 제임스 샐즈먼교수의 <식수혁명>은 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안전한 식수를 향한 인간의 권리와 투쟁’이라는 부제가 시사하는 것처럼 이 책에서는 특히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물을 확보하기 위하여 어떠한 노력을 해왔는지 그 역사적 흐름을 정리하고, 최근에 부각되고 있는 문제 현상을 짚고 있습니다. 1부 ‘인간, 물을 찾아나서다’에서는 좋은 물을 찾아 나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리했는데, 청춘을 돌려준다거나 치유의 효능이 있다는 샘에 관한 이야기라서 마실 물을 확보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노력의 역사를 제대로 짚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낍니다. 옛날 한양에서는 아침마다 물을 길어다 파는 북청 물장수가 유명했다고 합니다만, 기원전 312년에 첫 번째 도수관 아피아를 건설한 이래 5세기에 걸쳐 모두 열 개의 도수관을 추가로 건설하여 매일 1억리터의 물을 공급한 로마의 먹는 물 공급체계는 정말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오로지 중력에 의지하여 도시의 각 가정으로 흘러들도록 설계가 되었고, 그 절반 정도는 개인용도로 판매가 되었다고 합니다.

 

2부 ‘누가 마시는 물을 위협하는가’에서는 먹는 물의 안전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먹는 물을 안전하게 공급하기 위해서는 수원을 발견하고, 수원을 보호하고, 정수처리 해서 최종소비자에게 공급하는 4단계로 나누어 접근해야 합니다. 필요한 만큼의 물을 공급할 정도로 풍부한 수원확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며, 물을 소비하는 사람의 건강을 위협할 수 있는 생물학적, 화학적 위험요인으로 오염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문제가 다음 단계에 검토되어야 합니다. 먹는 물을 정수하는 장치는 람세스 2세의 무덤에 새겨진 비문에도 기록될 정도로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기본적인 과정이 되었습니다만, 수돗물에 염소를 투입하여 소독하는 법은 1908년에 처음 적용하였다고 합니다. 최근에 북미에서 셰일가스를 채취하기 위하여 개발된 프래킹공법이 지하수를 오염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도 새겨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3부 ‘물, 시장에서 문화까지 점령하다’에서는 청량음료시장보다 훌쩍 커진 생수시장이 만들어진 과정과 생수를 담은 용기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까지 다루고 앞으로 예상되는 물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도 검토하고 있습니다. 식수공급을 늘리기 위하여 폐수를 재활용하는 문제로부터 심지어는 우주공간에서 물을 채굴하는 기상천외한 방법도 설명합니다. 상수도 공급체계를 민영화했을 때 예상되는 문제점도 짚고 있습니다. 예전에 미국에서 공부할 때 오대호 근처에서 살았던 탓인지 오대호의 물을 6억 리터를 탱커에 담아 물이 부족한 아시아시장에 내다 팔겠다고 승인요청했다는 캐나다의 노바그룹의 사업계획에 비판이 쏟아졌다는 사실도 흥미롭습니다.

 

흥미롭고 다양한 사례를 인용하고 있기도 하지만 우리의 당면문제이기도 한 때문인지 단숨에 읽어내게 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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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다른 곳에 밀란 쿤데라 전집 3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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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두 번째 장편소설입니다. ‘프라하의 봄’ 무렵 집필을 시작해서 1968년 소련군의 체코 침공 이후에 마쳤고, 1973년 프랑스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소련군의 침공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상이 작품에 반영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삶은 다른 곳에>는 한 시인이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일생을 7부로 나누어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제2부는 주인공 야로밀이 만들어낸 상상의 인물, 자비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어 그의 정체를 두고 다소 헷갈릴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주인공이 현실에서 해보고 싶어 상상했던 일들을 자비에를 통하여 그려내는 일종의 소설 속의 소설 형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자비에는 마지막 7부에서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제6부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40대 남자는 주인공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주인공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누구나 이런 사람이 주변에 있을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우연히 만난 갈색머리의 우아한 아가씨를 뒤쫓다가 만난 빨간 머리 아가씨의 유혹으로 사랑이 시작된 것입니다. 빨간 머리는 야로밀이 그때까지 꿈속에서만 그려왔던 이성과의 관계를 현실화한 첫 번째 사랑인 셈입니다. 아무래도 첫 번째 사랑이다 보니 사랑의 기술이 정교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어느날 그녀는 약속한 시간보다 늦게 나타났고, 야로밀은 왜 늦었는지 추궁하기 시작합니다. 빨간 머리 역시 그때까지도 야로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모양, 남자친구와 헤어진 친구를 위로하다보니 늦었다고 둘러대는데, 여기서 야로밀은 빨간 머리에게 나를 사랑하기는 하냐고 몰아붙이기 시작합니다. 친구를 챙기다 자신과의 약속을 소홀히 했다는 점에서 자존심이 상한 것이지요. 사실은 약속시간에 15분 정도 늦은 정도는 양해가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빨간 머리가 거짓말을 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야로밀을 달래려드는 빨간 머리를 밀쳐내자, 빨간 머리는 사실은 오빠를 만나러 갔던 것이라고 말을 바꾸게 됩니다. 오빠가 몰래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가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거짓말이었던 것으로 나중에 드러나는데, 이 거짓말은 최악의 선택이었던 셈입니다. 야로밀은 당시 불길처럼 일어나던 사회주의 공화국 운동의 신봉자였던 것입니다. “난 너 없이는 살 수 없을 것(416쪽)”이라고 말한 야로밀은 “나도 네가 없다면 엄청나게 슬플 것”이라는 빨강 머리의 대답에 실망합니다. 야로밀은 그녀가 엄청 나게 슬퍼도 살 수는 있을 것이란 말로 해석한 것입니다. 빨강 머리는 재차 확인하는 야로밀의 의중을 읽지 못한 셈입니다.

 

결국 야로밀은 경찰인 학교친구를 찾아가 빨강 머리의 오빠가 몰래 국경을 넘을 작정이라는 사실을 고발하고, 경찰은 빨강 머리를 체포하게 됩니다. 그 현장을 목격하게 된 야로밀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오직 혁명적 과업을 수행했다는 만족감을 담은 시(詩)를 짓지만, 그의 시에 열광하던 주위사람들의 실망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결국 싸늘해진 주변의 시선 밖에서 돌던 야로밀은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게 되는데, 총망받던 시인의 예기치 못한 죽음은 우연으로 엮인 빨강머리가 4이름도 모를 40대 남자와 야로밀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쳤던 것이 빚어낸 거짓말이 화근이었음으로 밝혀지는 허무한 결말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 책을 번역하신 방미경교수님은 체코의 특정한 역사적 상황과 그 시대 한 시인의 삶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소설 같은 인생의 함정에 빠져 고군분투하다가 삶의 의미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쓸쓸한 죽음을 맞은 한 인간의 삶을 냉철하게 조명한 것이라고 요약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야로밀의 아버지로부터 아이를 원한 적이 없었다는 말을 듣고서 우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그들은 나란히 누워 있었고 엄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잠시 울음을 터뜨렸고, 밤새 흐느껴 울었고,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건드리지도 않았고, 눈물의 파도 맨 끝자락에조차 스며들 수 없는 몇 마디 진정시키는 말을 겨우 내뱉었을 따름이다.(41쪽)” 야로밀을 가졌기 때문에 결혼하게 된 아버지였지만, 두 사람은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고, 그러기에 어머니는 야로밀에게 집착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 아들의 관심에 흘리는 눈물은 이런 의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그녀에게서는 여러 종류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버림받았으므로, 슬픔의 눈물, 아들이 자신을 소홀히 했으므로, 질책의 눈물, (새 시들의 선율적 구절들을 보면) 마침내 아들이 자기에게 돌아오려 하는 것 같으므로, 희망의 눈물, 그가 그냥 어정쩡하게 서서는 머리카락이라도 좀 쓰다듬어 주지도 않고 있으므로, 노여움의 눈물, 마음이 약하지게 만들어 자기 곁에 그를 붙잡아두려는 책략의 눈물.(311쪽)” 정말 여성의 눈물을 이렇듯 다양한 의미가 담겨있는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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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와 베르사유 궁정
생시몽 지음, 이영림 편역 / 나남출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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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다양한 문학작품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생시몽의 <회고록>의 경우는 콩브레의 이웃 스완이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중략) 오늘 아침 저는 생시몽의 글에서 어르신께서 재미있게 생각하실 구절을 읽었습니다. 생시몽이 스페인 대사로 재직했을 때의 일들을 기록한 것인데, 그가 쓴 것 중에 가장 훌륭하진 않지만, 그것도 일기에 불과합니다만, 그래도 아주 경탄할 만큼 잘 쓴 일기입니다. 그 점이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읽어야만 하는 저 지루한 일기들인 신문들과는 첫 번째로 다른 점일 겁니다.(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집 쪽으로(1), 54쪽, 민음사)”라고 평하면서, 그 가운데 ‘나는 그것이 무지(無知)인지 또는 덫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우리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려고 했을 때 재빨리 눈치를 채고는 막았다.’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할아버지는 ‘무지(無知)인지 또는 덫인지’라는 표현에 감탄하셨다고 적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모할머니 옥타브 부인과 하녀 프랑수와즈의 관계를 묘사하면서도 생시몽이 <회고록>에서 적고 있는 루이14세와 그의 신하들 사이의 묘한 관계를 이끌어오기도 합니다.

 

생시몽(1675~1755)은 루이 14세의 치하에 생존했던 인물로 당시 프랑스 궁정에서 겪은 일들을 <회고록>이란 이름으로 정리하였는데, 그 분량은 56줄짜리 2절판 공책 총 173권 분량의 방대한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다양한 발췌본과 선집이 출판되었다고 하는데, 국내에는 다니엘 데세르가 1994년에 쓴 <루이와 그 궁정>을 우리말로 옮긴 <루이 14세와 베르사유 궁정>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옮긴이가 데세르의 책을 옮기게 된 것은 원문을 요약하거나 수정을 가한 다른 축약본과는 달리 원문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았고, 루이 14세의 성격과 그의 궁정운영방식을 드러내는 부분이 중점적으로 발췌되었다는 점을 고려하였다고 합니다. 생시몽의 <회고록>의 일부를 발췌하였음에도 <루이 14세와 베르사유 궁정> 역시 752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옮긴이는 서문에서 “생시몽의 문체는 아카데미의 통제를 받는 당시 문인들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 문인들이 엄격한 형식에 묶인 반면 생시몽의 글은 세련되거나 규격적이지 않다. 대신 끝없는 수사로 이어지는가 하면 짧고 명쾌한 격언구와 대화투의 문장이 자유롭게 등장하는 생시몽의 <회고록>은 생생하며 신랄하다.(7쪽)”라고 적고 있습니다.

 

편저자인 데세르는 소위 회고록이라고 하는 저작물들이 기술하고 있는 연대기의 신빙성이 의심받고 스스로의 멋진 역할을 부각시키고, 자신의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자기변명으로 일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많은 학자들이 생시몽의 <회고록>의 편파성과 오류, 누락을 지적하면서 증거물로서의 가치를 문제 삼고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하지만 생시몽 자신은 위대한 왕의 궁정에서 보고들은 것을 가장 ‘실증주의적’ 방식으로 기술했다고 믿었고 스스로를 공정한 관찰자로 규정하였었다고 적기도 했습니다. 즉, 선입관, 과장, 날조된 인과관계에도 불구하고 생시몽은 믿을 만한 증인임이 확실하다고 하였는데, 생시몽이 호사스럽고 전지전능하며 화려한 연극무대 같은 베르사유에서 고립상태에 빠져 있던 왕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왕에 대하여 분명했던 통찰력을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베르사유궁전을 짓고 태양과 같은 절대권력을 휘둘러 후대에 태양왕이라 불린 루이14세가 사실은 군사와 행정 주도력의 결함뿐 아니라 전통적이고 경박한 신앙심으로, 제한된 능력의 소유자였던 루이14세는 결코 진정한 의미의 절대군주가 될 수 없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루이 14세와 베르사유 궁정>을 읽다보면 이래 가지고 패권을 두고 수시로 갈등을 붙던 유럽대륙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인 것 같습니다.

 

왕과 왕족을 둘러싼 귀족들과 대신들의 암투 그리고 사랑노름들이 1부와 2부로 나뉘어 서술되고 있는 가운데,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할머니의 우상인 세비녜부인(1626~1696)이나, 역시 마르셀이 관심을 쏟던 연극과 관련하여 인용하곤 하는 희곡작가 라신(1639~1699)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생시몽은 세비녜부인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편안하고 선천적으로 우아하며 재치를 겸비한 그 여인은 대화를 통해 재치를 지니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치를 나누어주었다. 게다가 그녀는 매우 친절할 뿐 아니라 모든 것을 꿰뚫고 있으면서도 결코 아는 척하는 법이 없었다.(86ㄸ쪽)” 한편 라신에 대하여는 “그보다 더 심오한 정신세계를 지난 사람도 더 정교하게 다듬어진 글을 쓰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대인관계에서 그는 전혀 시인답지 않았으며 예의바르고 겸손했다.(116쪽)”라고 적었습니다.

 

방대한 분량인데다가 루이14세를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어 다소 지루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만, 적어도 17세기 프랑스 궁정의 모습을 가늠해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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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리라이팅 클래식 15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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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평론가 고미숙박사님의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를 책꽂이에 넣고서 참 오랫동안 묵혀두었습니다. 한의학의 본산이라 할 동의보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해볼 요량이었는데, 의학과는 기본틀이 다른 한의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에 자칫 길을 잘 못 들어서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한때 한의학과 관련된 책들을 읽고 부정적으로 이해한 적도 있습니다만, 앎이 늘어가면서 점점 중도적 위치로 선회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일단 책을 읽은 소감을 한 줄로 정리하면 종합의학서라고 할 <동의보감>을 인문학적 시각으로 해석한데 그치고 말았구나 싶습니다. 인트로(책을 읽으면서 처음 만나는 단어입니다. 재즈나 댄스음악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우리말로는 서주(序奏)라고 번역되는 단어를 동의보감이라는 고전을 해석하는 책에서 굳이 영어로 적은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의 모두에서 인용하고 있는 ‘신형장부도’를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가 쓴 <말과 사물>의 모두에서 인용하고 있는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과 연결하는 것도 의서인 <동의보감>을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읽히는 듯 합니다. 새로운 접근방식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아무래도 한의학에 대한 기본적 학습이 충분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저자가 전통의학이나 현대의학에 관한 글에서 읽은 지식들을 바탕으로 동의보감을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직접 환자진료를 담당하는 요즘으로 치면 임상의가 있었는가 하면, 유의(儒醫) 즉 학문적 관심으로 의학을 공부한 유학자로서 요즘으로 치면 의학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의서를 탐구하여 스스로 이치를 깨달아 의학적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유의는 돈을 받고 진료행위를 하지는 않았지만, 내의원에서 중요한 의학적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개입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동의보감에 담긴 내용을 살펴 이해하기에 이르렀다면 그 내용을 두고 충분히 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합니다. 게다가 저자는 한의과대학생의 도움으로 동의보감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하셨는데, 허준이 동의보감에 담은 한의학적 사상을 어디까지 이해하실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이 시대의 의학이 국가가 공인하는 전문가의 몫으로 폐쇄적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환자들은 자기가 왜, 어떻게 아픈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즈음처럼 질병에 관한 정보가 책이나 미디어, 심지어는 인터넷 공간을 통해서 넘쳐난 적은 없었습니다. 특히 비전문가들이 의학분야의 책을 읽고 피상적으로 파악한 내용을 정통한 정보인양 확산시키고 있는 것이 일반인의 건강을 위협할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생명을 다루는 의학분야에 대하여 국가가 면허제도를 통해서 관리하고 있는 이유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전문가의 영역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다만 자신과 관련되었을 때, 충분하게 설명을 들을 수 있으면 될 것입니다.

 

현대의학이 폐쇄적이고 기술적인 반면 한의학을 포함한 동양의학은 기술이나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도 터득할 수 있어 보편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동의보감>이 술술 읽혀 별 거리낌없이 독파할 수 있었다는 점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선조께서 허준에게 명하신 의서편찬의 방향 가운데 세 번째, “궁벽한 고을에 치료할 의사와 약이 없어 요절하는 자가 많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약재가 많이 산출되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니 종류별로 나누고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명칭을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라.(39쪽)”는 말씀을 새겨보면 <동의보감>이 대중을 위한 의학백과사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전문가를 위한 깊이 있는 의학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학문은 시대에 따라서 발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의보감>은 편찬 이래 중수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것 같지 않습니다. 즉 죽은 의학서라는 것이지요. 박물관에 가야 할 옛날 의서에 목을 메고 있는 한의학계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단편적인 앎은 생각을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마련입니다. 한 가지만 예로 들면, “시체를 해부해서는 아무 것도 배울게 없다. 해부학은 진정한 자연과 자연의 본질, 특징, 존재, 힘을 보여주지 못한다. … 참된 해부학은 … 살아 있는 인체이다.(28쪽)”라는 16세기 의학자 파라셀수스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는데, 16세기 서양의학의 해부학적 기술은 아주 저급한 수준에 머물고 있었고, 게다가 파라셀수스는 “모든 독은 약이다, 다만 용량의 문제일 뿐이다.”라는 말로 유명한 약리학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분입니다. 해부학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지 의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동의보감>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저의 기대가 지나쳤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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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시대 - 고대 그리스에서 21세기 현대까지 끊임없이 모습을 바꾼 불안의 역사
앨런 호위츠 지음, 이은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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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수산업계는 난데없는 불황으로 한숨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쓰나미가 덮치면서 파괴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한 방사능오염수가 태평양으로 유출되고 있다는 증거가 속속 발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 일본총리는 ‘방사능오염수는 철저하게 차단되고 있다’는 망언을 반복하고 있어 일본 국민들조차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수산물에 대한 불안이 커지기 시작해서 이제는 걷잡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른 것이라 하겠습니다. 최근에는 오염수를 바다로 내보내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오폐수를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은 사실상 없는 모양입니다. 일본정부가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가 파괴된 상황에서 지금까지 사고와 관련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고조되고 있는 불안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하여 우리가 일상 먹고 있는 생선이 방사능에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례를 인용하였습니다만, 불안은 어제 오늘 갑자기 생긴 정서가 아니라 역사 이전부터 존재해왔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다만 문명이 발전하면서 보다 다양한 요소들이 우리의 삶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불안의 정체와 역사 그리고 불안에 대한 대응방법이 변해온 역사를 살펴보는 것으로 불안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학자이며 정신건강 분야를 연구하는 러트거스대학의 앨런 호위츠교수의 <불안의 시대>를 읽으면 불안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존스홉킨스 의대의 ‘질병의 역사’ 시리즈 편집위원인 찰스 E. 로젠버그교수는 <불안의 시대>의 서문에서 불안과 불안장애를 질병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자는 “불안과 불안장애는 편도체, 전두엽, 해마 등 두려움을 인지하는 뇌 영역과 감마 아미노산(GABA), 에피네프린, 도파민, 세로토닌 등의 신경화학물질과 관련이 있다.(16쪽)”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보면, 불안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측면에서는 과거에 비하여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고 하겠지만, 서로 다른 시간, 문화에서는 각기 다른 다양한 요소들에 의하여 불안이 정의되어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앞으로 풀어야할 문제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 불안연구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즉 불안 연구는 생물학적 특성을 밝히고 이를 문화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저자는 “옛날 아주 옛날에는 뱀도 전갈도 하이에나도 사자도 들개도 늑대도 걱정도 두려움도 없었고 인간은 겁낼 것이 없었네.(36쪽)”라고 기원전 4,000년에 새겨진 수메르 석판의 글귀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글귀를 새긴 시점에는 두려워할 무엇이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시각, 또는 불안을 도덕적 결함이나 영적 불완전함의 결과로 인식하던 시각은 시대에 따라 불안을 정의하는 기준에 포함되었다가 배제되기를 반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대의 불안과 불안장애에 대한 개념의 뿌리는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경 고대 그리스 문명의 출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 시대의 의학적, 철학적 기록은 신화와 종교에서 벗어나 인간의 행동에 대한 생각을 새로이 정립했고, 건강과 질병에 대한 연구에 경험적이고 관찰적인 기반을 제공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의학에서는 착란증, 광증 그리고 울병 등 기본적인 종류의 정신질환만 독립적 질병으로 분류하고 있을 뿐 불안은 울병의 필수적 요소로 간주되었습니다. 즉 불안 증세는 이유 없는 두려움, 침울함이나 자살 충동, 또는 지나친 의심과 같은 편집증적인 증세와 더불어 울병의 특징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스 의학에서는 불안 치료를 위하여 특별한 처방을 내리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방침이었지만, 술과 아편을 사용했다거나 신화적 대모신을 섬기는 코리반트라는 집단이 춤과 음악을 통한 의식을 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4세기 초,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종교적 세계관은 불안을 비롯한 정신질환에 대한 경험적 개념을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스 시대에 의학적으로 접근하던 불안을 종교적으로 대응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는 불안을 다스리는 수단을 제공하는 동시에 죄의식, 영생, 구원에 대한 걱정 등 불안의 근원도 된다는 점이 특이하다고 하겠습니다. 중세 프란체스코교회 수도사가 남긴 기록을 보면, “1239년 일식이 일어났다. 한낮의 빛은 끔찍하고 공포스럽게 어두워졌고 곧 별들이 보이자 밤이 온 것만 같았다. 모든 남녀가 겁에 질려 미친 듯이 돌아다니고 두려움과 슬픔에 벌벌 떨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해성사를 하고 죄를 고백했고, 이를 통해 곧 마음의 평안을 되찾았다.(33쪽)”라고 적어, 종교적 믿음으로 불안을 제거할 수 있었던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타이거교수와 맥과이어교수는 최근에 개발한 뇌기능검사장비를 활용하여 ‘종교적 경험과 행동은 많은 스트레스를 줄여준다. 그리고 신도와 종교 당국 간의 우호적 분위기는 뇌를 편안하게 해준다.(라이오넬 타이거, 마이클 맥과이어 지음, <신의 뇌; http://blog.joins.com/yang412/13285467>, 197쪽)”는 점을 확인하고, 종교를 통한 교류, 의식 그리고 믿음이라는 종교의 세 가지 특징적 요소가 신앙인들의 스트레스를 체계적으로 그리고 확실하게 줄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기도하는 동안에는 감정, 행동을 통제하는 전두엽과 사고, 연상, 인식기능을 하는 하두정엽이 활성화되는데, 기도는 신을 만나는 행위이기 이전에 자신의 뇌와 마음을 달래고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5세기부터 16세기에 이르는 약 1,000년 사이에 질병에 대한 개념이 경험적 관점에서 영적인 관점으로 대체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의학에 대한 인식은 종교나 마법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시대에 들어서면서 과학적 연구기법이 자리를 잡으면서 정신질환 역시 종교적 관점에서 의학적 관점으로 조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불안을 개별정신질환으로 처음 정의한 것은 영국의 윌리엄 배티입니다. 그는 1758년 출간한 <광증에 대한 논고>에서 “불안은 열병, 두통, 염증, 나병과 마찬가지로 광증과 반드시 연관되는 것은 아니다. (…) 불안은 우리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만일 괴롭지만 유용한 이 경고가 없다면 몇몇 종은 빠르게 멸종되고 말 것이다.(95쪽)”라고 적어 불안을 광증과 구별되는 기능을 설명하였습니다. 불안을 마음의 병에서 몸의 병으로 인식하게 되는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는 정신질환 전반에 대한 인식의 변화였기 때문에 불안은 여전히 정신질환의 범위에 포괄적으로 섞여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19세기 말에 들어서 불안과 불안장애는 세분화되는 경향을 나타냈는데, 신경쇠약과 히스테리라는 포괄적 분류에서 ‘히스테리는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의식, 감각, 행동에 생기는 이상으로, 다른 병적인 증상으로 전이되어 나타나며, 정신쇠약은 불안, 공포증, 강박증, 탈력, 우울 등 증상의 집합으로 정의한 것’은 1903년 피에르 자네에 의해서입니다.

 

20세기 초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등장으로 불안과 불안장애에 대한 인식이 커다란 변환을 맞게 됩니다. 프로이트는 과거에 서로 다른 질환으로 정의되던 신체적, 정신적 증상들을 불안장애라는 커다란 틀로 통합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초기 이론은 상당한 변화를 보여 불안에 대한 인식을 신체적 관점에서 심리적 관점으로 이동하기에 이릅니다. 전쟁은 불안이 본능적이거나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현재의 환경적 요인의 산물이라는 인식이 정신의학자들 사이에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프로이트에 의하여 창시된 정신분석학은 심리학으로 대체되는데,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은 전쟁과 더불어 성장하여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은 병사들의 두려움을 다스리는 방법을 개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심각한 심리적 이상을 겪는 참전군인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통하여 정신의학이나 심리학 전공자들이 확대된 것은 정신질환에 대한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20세기 중반까지 주류를 이루던 정신분석 치료법인 후반기에는 인지적 접근법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습니다. 두 가지 방식의 차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신역학적 접근과는 달리 인지행동치료법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에 집중했다. 이 문제들은 무의식의 안쪽에 숨어 있는 것들이 아니라, 의식적인 생각을 통해 접근 가능한 것들이었다.(187쪽)” 20세기를 통하여 불안이 서구문화의 핵심 키워드로 비중이 커지게 된 데는 대중적인 인기몰이에 성공한 프로이트 덕분이기도 하며, 하이데거나 사르트르 등과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과 진보적인 이론가들의 중심화두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끔찍함이나 핵무기의 위협이 급증하게 된 것을 비롯하여 인구의 가파른 증가에 따라 복잡해진 사회구조 등이 불안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20세기 중반에 등장한 약물치료가 성공을 거두면서 제약산업계가 초미의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도 한 몫을 하게 된 것입니다.

 

불안에 대한 인식의 확대에 제약산업이 기여했다는 생각은 “특별한 병리증상이 보이지 않는 이런 환자들에게는 발리움이 유용합니다.(200쪽)"라는 발리움의 광고에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또한 정신의학과 심리학이 큰 몫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1920년대 후반 언론매체들이 정신분석을 실험적인 형태의 심리치료로 간주하면서 ‘확산되는 불안, 정체성 상실, 창조성 상실, 불행’을 토론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는데서 얻은 것인데, 여느 분야와 마찬가지로 의학 역시 연구대상이 축소되는 분야는 존재의 의미도 같이 축소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슈를 만들어내야 하는 강박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불안을 권하는 사회를 만들어온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미 정신분석 혹은 심리분석을 통하여 얻은 결과를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닐까요?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2008년 제2차 광우병파동이 확산되는데 일부 전문가들이 대중의 불안심리를 확대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 2008년 당시 광우병이나 인간광우병과 관련된 모든 지표들은 유행의 절정을 지난 지 오래되어 소멸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묘한 수사적 표현으로 사실을 감추고 위험을 부풀리는 작업을 벌였던 것이고, 과학적 혹은 사회학적 데이터가 이미 통제단계에 들어서 대중적 위험 가능성은 의미를 둘 수 없는 단계라는 점을 설명하는 전문가들을 사기꾼으로 몰아치는 비열함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번 불붙으면 쉽게 진화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불안 심리를 제대로 꼬드겨냈던 것입니다. 당시 상황을 보면 표면상으로는 미국산 쇠고기를 다시 수입하게 된 것을 순수하게 걱정한 아이들이 시작한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지만, 내막은 대선패배를 인정하지 못한 세력들이 쟁점화에 성공한 사례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어쩌면 현대 불안의 뿌리가 생물학적 또는 심리학적 보편성이 아니라 각 사회의 특수한 조건에 있다고 본 에릭 프롬의 시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불안’은 1952년 미국 정신의학회가 처음 발표한 이래 개정을 거듭하고 있는 정신질환 진단통계편람(DSM)의 분류체계의 핵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불안장애는 전염병학자들에게도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는데, ‘사회공포증의 첫 증상은 다른 증상의 추가적인 발생을 예고한다.(222쪽)’라는 사실을 전염병학자 로널드 케슬러가 밝혀냈기 때문입니다. 불안장애가 발생하면 그 증상이 낮은 학습과 업무 성과, 청소년 임신, 이혼 등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다른 부정적인 영향으로 이어진다는 추측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손자병법은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고 했습니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알면 휘둘림을 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의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는 불안도 그 정체를 알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는 대상에 불과할 것입니다. ‘불안’을 걱정하지 않기 위하여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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