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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운 사랑들 밀란 쿤데라 전집 2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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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는 프랑스 작가 드니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을 바탕으로 쓴 희곡 <자크와 그의 주인>에 붙인 변주서설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나 자신을 정의해야 한다면 나는 극도로 정치성을 띤 세상의 덫에 걸려든 쾌락주의자라고 말하겠다.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투영하기에 어느 것보다 애착이 가는 작품인 <우스운 사랑들>은 바로 그 상황을 얘기한다. 묘한 우연이다. 그 단편들(1960년대에 쓴 것들이다.) 중 마지막 작품을 러시아군이 도착하기 사흘 전에 끝냈으니 말이다.(밀란 쿤데라 지음, 자크와 그의 주인, 16쪽)”

 

<우스운 사랑들>에는 사랑 이야기를 다룬 일곱 편의 단편이 담겨있습니다. 심오하다기보다는 경박한 쪽에 가까운데 언젠가는 들어본 적이 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 ‘누구도 웃지 않으리’는 흔히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기를 더해가다 보면 결국은 수습할 수 없게 된다는 만고의 진리를 적용한 것인데, 다들 총대매기를 피하다가 막차를 타게 된 사람이 결국은 큰 피해를 입게 된다는 웃지 못할 상황입니다. 생즉사(生卽死)요 사즉생(死卽生)인데, 처음에 진솔하게 말했더라면 오히려 믿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 이유로 쿤데라는 “우리는 눈을 가린 채 현재를 지나간다. 기껏해야 우리는 현재 살고 있는 것을 얼핏 느끼거나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나중에서야, 눈을 가렸던 붕대가 풀리고 과거를 살펴볼 때가 돼서야 우리는 우리가 겪은 것을 이해하게 되고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12쪽)”고 미리 예고편으르 쓰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이와 반대로, 마지막 이야기 ‘에드바르트와 신’의 경우는 ‘누구도 웃지 않으리’와는 달리 죽을 각오로 문제해결에 나선 결과 상황을 주도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소설가 김연경님이 <밀란 쿤데라 읽기>에서 한 “형이상학인 것(철학과 종교)과 형이하학적[성(性)과 배설]을 뒤섞고 또 뒤집는 희(비극)이야말로 쿤데라 소설의 핵심적 요소가 아닌가 싶다.(밀란 쿤데라 읽기, 17쪽)”는 말이 꼭 들어맞는 작품들이 바로 <우스운 사랑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만, 사랑을 하는 연인들에게 흔히 사랑을 시험하지 말라는 조언을 하기도 합니다. ‘히치하이킹게임’에 등장하는 남녀 주인공은 휴가를 떠나는 길에 갑작스럽게 시작하는 상황극을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하지 못하고 극단으로 몰고 가는 안타까운 선택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살짝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히치하이킹게임’이 시작되면서 운전하시는 분들이라면 격하게 공감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연료 계기판 바늘이 갑자기 0을 행해 흔들리자, 이 컨버터블은 대체 기름을 얼마나 먹어대는 건지 모르겠다고 운전하던 젊은이가 말했다.(105쪽)” 습관처럼 연료 계기판에 빨간 경고등이 들어올 때가 되어서야 주유소로 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도 미국에서 여행할 적에 인가가 없는 산골로 들어가면서도 기름을 미리 채우지 않는 바람에 간이 조마조마한 상태로 운전해야 했던 경험이 있고, 후배의 차를 타고 도시고속도로를 빠져나가는 순간 엔진이 멎는 바람에 주유소까지 몇 십 미터 거리를 차를 밀고 간 적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끝나면서도 무언가 찝찝한 것이 마음 한 구석에 진하게 남는 느낌입니다만, ‘콜로키움’은 조금 다르게 마무리되는 느낌입니다. 병원 당직실에 모인 두 명의 여자와 세 명의 남자들은 서로 물리는 애정관계를 짜고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내비치거나 상대가 내비치는 욕망을 거절하는 상황이 펼쳐지다가 간호사 엘리자베트가 옷을 모두 벗은 상태로 가스가 새고 있는 방에서 발견되어 자살을 시도한 것인가? 아니면 가스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일어난 해프닝인지 해석이 엇갈리는 가운데 의과대학생 플라이슈만이 프로포즈를 하는 것으로 해피앤딩으로 마무리하고 있어서인 것 같습니다.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도록’에서 그리고 있는 스무 살이 넘는 나이차를 둔 남녀 사이에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은 과연 가능할까 의심을 하면서도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충분히 일어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쿤데라가 말한 것처럼 가장 행복했던 시기에 썼던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치열한 맛보다는 가벼운 느낌이 강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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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부르는 숲 - 미국 애팔래치아 산길 2,100마일에서 만난 우정과 대자연, 최신개정판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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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미국 여행에 관한 글을 읽고 있습니다.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은 미국 동부의 애팔래치아 산맥을 종주한 여행에 관한 글이라고 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워싱턴까지 여행하면서 루레이동굴을 구경하러 가면서 셰난도어 국립공원을 자동차를 타고 지나간 인연때문입니다. 그때가 4월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마른 나무들이 어린 싹을 티워 내려고 물을 끌어올리는 느낌만 있을 뿐 아직은 겨울느낌이 많이 남아있었던 것 같습니다. 산에서 굽어보는 셰난도어 계곡 역시 떠난 사람으로 아쉬움이 남아 있는 듯 조금은 쓸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미국은 땅덩어리가 크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입니다만, 저자가 밟았다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미국 동부의 끝에 있는 메인주에서 남쪽에 있는 조지아주에 이르는 애팔래치아 산맥의 등성이를 따라, 14개 주에 걸쳐 조성되어 있는 2100마일(3360km)에 이르는 장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데, 1,500미터가 넘는 봉우리만 350개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계절적으로도 제한이 있어 보통은 겨울을 지나고 3월초 눈을 보면서 남부 조지아주 스프링어 마운틴에서 출발할 해서 북쪽 끝 메인주에 있는 마운트 캐터딘까지 도착하면 아름다운 단풍을 보는 사계절을 지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힘든 여정이기 때문에 당연히 사전준비를 철저하게 한다고 해도 걷는 과정에서 만날 수 있는 사건 사고에서 큰 위험을 피할 수 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저자는 즉흥적으로 시작한 여정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라서, 이 책을 읽은 독자들도 같은 식으로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도전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 걱정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자는 트레일을 따라가다가 곰이나 뱀과 같은 위험한 동물을 만날 수 있다거나, 예상치 못한 폭풍설, 한파, 폭풍우로 인해 조난을 당해 죽음을 맞는 경우가 아주 드물지 않다는 사실도 적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발적인 범죄로 보이는 사건에 말려 희생된 사람도 있는데, 워낙이 다니는 사람이 적은 탓에 목격자가 없어 사건이 미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1921년 몽상가 벤턴 매카이가 아이디어를 만들었는데, 워싱턴의 해사법 전문 변호사이자 실력있는 등산가 마론 에버리를 만나게 되면서 1930년에 첫삽을 뜨게 되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토록 험난한 길을 내는데 자원봉사 인력을 활용하여 7년 만인 1937년 8월 14일 공식적으로 완성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한번에 종주하는 사람을 스루 하이커라고 하는데, 요즈음도 1년에 2000여명이 도전하지만 전코스를 완주하는 사람은 10%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저자 역시 1,392킬로미터, 즉 전체 트레일의 3분의 1이 조금 넘는 정도를 걸었을 뿐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영국에서 활동하다가 20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간 저자는 살고 있는 마을에 애팔래치아 트레일이 지나는 것을 알고는 종주에 도전할 생각을 하는데, 성공 가능성을 먼저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에 도전하겠다는 사실을 친구들은 물론 출판사에 먼저 떠벌인 것을 보면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걷는 것을 통해서 나름대로의 성장을 꾀하려는 의도보다는 걸었다는 사실을 포장해서 글을 팔려는 생각이 더 많았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평소 연락도 없던 고등학교 동창이 느닷없이 동행하게 되는 것이나, 그 동창이 알고 보니 알코올중독에 빠져있었다는데, 자신은 물론 그 동창이 험난한 여정을 견딜 수 있을 것인지도 확인하지 않은 무모한 여행을 시작한 것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 동창은 트레일을 걷기 시작한 첫날 단지 무겁다는 이유만으로 배낭에 넣었던 의복, 식량 등을 내버리고 말았는데, 이것을 보더라도 두 하이커가 얼마나 계획없이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도전했는지 알만합니다.

 

이 책에서 몇 가지 배울 점이 있다면, 아무리 짧은 길이라도 산길에서 만날 수 있는 위험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는 점,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관한 모든 것-트레일이 설치된 역사, 그곳에서 만날 수 있는 동물, 식물, 심지어는 위험까지도-을 알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트레일을 걸으면서 저자가 깨닫게 된 인류의 자연파괴의 역사, 그리고 숲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것들에 공감할 수 있다는 점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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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와 그의 주인 - 드니 디드로에게 바치는 3막짜리 오마주 밀란 쿤데라 전집 15
밀란 쿤데라 지음, 백선희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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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대중의 주목을 받은 작품을 다른 장르에서 다루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는 경우는 너무 많고, 반대로 영화가 소설로도 독자를 만나게 되는 경우는 일상적인 것이 되었고, 인기몰이를 한 영화가 연극으로 혹은 뮤지컬로 각색되어 무대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자주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장르마다 특출한 창작물이 이어지기 어려울 정도로 작가적 인프라가 척박한 탓일 수도 있겠고, 한 장르에서 이미 검증된 대중적 인기에 편승해보려는 얄팍한 상술일 수도 있겠습니다.

 

‘드니 디드로에게 바치는 3막짜리 오마주’라는 부제가 달린 <자크와 그의 주인>은 밀란 쿤데라가 작품의 모두에 붙인 ‘변주서설’에 밝히고 있는 것처럼, 1968년 소련군이 체코를 점령한 이후 그를 도와주려는 연출가의 요청으로 드니 디드로의 소설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을 희곡으로 각색한 작품입니다. 쿤데라는 자신이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이 빠진다면 소설의 역사는 이해될 수 없고 불완전해질 것이다. 심지어 나는 세계 소설의 맥락 속에서 고려되어야 할 이 작품이 오직 디드로의 전체 글 속에서만 고려되는 고초를 겪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 작품의 진정한 위대성은 <돈키호테>나 <톰 존스>, <율리시스>나 <페르디두르케>와 견줄 때 드러난다.(17쪽)” 디드로의 원작을 아직 읽기 전이라서 쿤데라의 확신에 대한 저의 생각을 적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최근에 코맥 매카시의 시나리오 <카운슬러>를 읽으면서 영화보다 시나리오를 먼저 읽게 되면 스스로 장면을 머릿속에서 그려가면서 등장인물의 대사를 곱씹어야 하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희곡 역시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대학시절 연극반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습니다. 처음 연출부에서 작품을 고르고 전체 단원을 소집하여 초독을 하면서 연출방향이 결정되면 각 파트에서는 연출방향에 맞추어 아이디어를 모으게 됩니다. 배우는 등장인물의 성격을 창조하고 장면마다 관객에게 전해야 하는 메시지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쿤데라는 디드로의 원작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썼음이 분명한데도, <자크와 그의 주인>이 각색이 아니라 온전한 자신의 작품이고, 고유의 ‘디드로에 대한 변주’이며, 디드로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만든 작품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쿤데라가 밝히는 이 희곡의 구성은 자크와 그의 주인의 여행을 바탕으로 세 가지의 사랑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주인의 사랑, 자크의 사랑 그리고 포므레 부인의 사랑입니다. 그는 이 세 가지 이야기를 폴리포니 기법(일종의 옴니버스 스타일로 이해했습니다만, 세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서로 뒤섞이지는 않도록 하는 기법이라고 합니다.)과 변주 기법(이 세 가지 이야기는 사실 제각기 다른 아야기의 변주라는 것입니다.)을 적용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을 읽으면서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면 같은 배우가 여러 등장인물을 연기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기법을 표현하는 일이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밀란 쿤데라 읽기>에서 백성희님은 쿤데라가 이 작품에 집어넣은 이중적 장치는 “인물들도 닮고 인물들의 사랑이야기도 모두 닮았으며, 인간사가 결국 반복의 역사라는 생각(밀란 쿤데라 읽기, 180쪽)”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점은 주인과 자크의 대사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주인: 너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잖으냐! 자크: 제가요? 반복을 해요? 나리, 자기 말을 반복한다는 말보다 더한 모욕은 없습니다.(110쪽)“

 

막이 오르면서 등장한 주인과 자크의 대사는 작품 전편을 통하여 흐르는 불확실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신들이나 관객들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또 그 사실을 아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건 저기 높은 곳에 씌어 있다”는 것입니다. 등장인물들이 섞여드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면, “전체 공연 동안 무대는 바뀌지 않는다. 무대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쪽은 조금 낮고, 뒤쪽은 조금 높아 연단 형태를 이룬다. 현재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는 무대 앞쪽에서 연기된다. 과거 일화들은 뒤쪽 연단 위에서 표현된다.(38쪽)”라는 작가의 무대설명을 꼼꼼히 읽지 않은 탓일 것입니다.

 

한 번 읽고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일단은 디드로의 원작도 읽어보아야 할 것 같고, 연극인들이 반복작업을 통하여 작가가 희곡에 담은 생각을 잡아내어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처럼 반복해 읽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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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포도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4
존 스타인벡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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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이러저런 이유로 찾아 읽게 되는 고전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는 몇 차례 인상적인 인용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선은 이시 히로유키의 <세계 문학 속 지구환경 이야기; http://blog.joins.com/yang412/13225840>입니다. “명작에 등장하는 환경 문제를 날실로 하여 문제가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이나 그 후의 전개를 꿰고, 동시대 인물·사건과의 연관성을 씨실로 하여 사람과 환경이 촘촘히 엮인 역사를 펴 보이려 한 것이 이 책이다.(6쪽)” 라는 기획의도에 걸맞게 다양한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환경문제를 짚어내고 있습니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는 집약식 농업으로 지력을 상실한 초원이 이어 닥친 가뭄으로 황폐화하면서 그 땅을 붙이며 살던 사람들이 유랑하는 신세에 빠지는 과정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당시 미국의 사회상에서부터 기후변화, 그리고 작가의 성향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챙겨 작품을 분석적으로 읽어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습니다.

 

두 번째 계기는 미국의 남서부로 돌아보는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김영주님의 <태양, 바람 그리고 사막; http://blog.joins.com/yang412/3242002>입니다. 농사짓던 땅을 은행을 앞세운 자본에 빼앗기고 고향을 등져야 하는 조드 일가가 오클라호마에서 LA로 이어지는 66번 고속도로에 들어서는 장면을 그린 구절, "긴 콘크리트 도로는 붉은 땅과 잿빛 땅을 넘어 산을 휘감아 올라갔다가 로키산맥을 지나 햇빛이 쨍쨍한 무서운 사막으로 내려선다. … 사막에서는 멀리 있는 것들이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것처럼 보이고, 중앙에 자리한 검은 산들은 멀리서 감질나게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을 인용하면서 조드 일가가 이동한 길을 따라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이어지는 <분노의 포도>에 대한 유혹은 결국 그 길을 거슬러 올라갔던 저의 경험을 되새겨보기 위해서라도 읽어보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던 것입니다.

 

친구와의 우연한 충돌이 생각지 않은 살인으로 이어져 형무소에 수감된 톰 조드가 가석방되어 오클라호마의 고향에 도착하지만, 이미 고향은 가뭄과 대공황의 이중고에 땅을 은행자본에 빼앗기고, 그래도 가뭄피해가 없어 일손을 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서부로 이주하기로 결정한 가족을 만나게 됩니다. 가재도구를 팔아 몇 푼 되지 않는 돈으로 중고차를 구입하고 개조하여 할아버지 할머니를 포함하여 스무명이 넘는 대식구가 서부로 향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은 차치하고서라도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서부는 그들의 희망을 채워주는 곳이 아니라 또 다른 고난의 연속이었을 뿐입니다. “뒤쪽에서 해가 떠오르더니 갑자기 아래쪽에서 거대한 계곡이 나타났다. (…) 포도원, 과수원, 크고 평평하며 초록색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계곡, 줄지어 서 있는 나무들, 농가들. (…) 곡식을 심어 놓은 밭들이 아침 햇살 속에서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고, 버드나무와 유칼립투스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1권 477쪽)”

 

겉으로 보아서는 분명 희망에 넘쳐야 할 서부는 일꾼들의 임금을 착취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서부로 끌어들이려는 자본의 사탕발림에 속아 몰려든 이주민들에게는 다른 형태의 삶과의 싸움터였던 것입니다. 무엇이라도 먹을 것을 얻기 위하여 그나마 일자리를 두고 처절하게 싸우는 모습을 작가는 국외자의 시각으로 담담하게 그리고 있을 뿐, 조철원 교수님이 작품해설에서 지적한 것처럼 인간의 존재 자체에 대한 진지한 통찰이나 문제제기가 없다는 거센 비판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공황 당시의 미국 사회의 바닥을 살았던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작가의 생각으로 재단하지 않고 기록하여 전하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서부로 이동하는 동안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차례로 죽음을 맞고, 그 죽음을 정리하는 일가족의 모습에서 삶을 달관한 모습을 보거나 혹은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캘리포니아에 들어서면서 톰의 동생이, 그리고 캘리포니아 난민촌에서는 여동생의 남편이 차례로 가족들로부터 이탈하는 과정에서도 작가는 충분한 설명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사실, <분노의 포도>라는 제목은 다음의 구절에서 왔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눈 속에 패배감이 있다. 굶주린 사람들의 눈 속에 점점 커져 가는 분노가 있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간다. 수확기를 향해 점점 익어 간다.(2권 255쪽)” 사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아, 이제 등장인물들이 무언가 상황을 바꾸려는 행동에 들어갈 것이라는 예감에 긴장감이 고조됩니다만, 작가는 그저 농장주의 횡포에 맛선 케이시목사가 허망하게 쓰러지고, 그 과장에서 톰이 사람을 죽이고 다시 쫓기는 신세로 몰리는 과정을 그려내고 말아 실망에 빠지게 합니다. 아이를 사산한 샤론의 로즈가 폭우를 피해 옮겨간 대피소에서 만난 굶주린 노인에게 젖을 물리는 장면으로 긴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것도 무언가 더 할말은 없었을까 싶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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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슬러 민음사 모던 클래식 64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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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패스벤더, 페넬로페 크루즈, 카메론 디아즈, 하비에르 바르뎀이 출연하는 리들리 스콧감독의 신작 <카운슬러>가 14일 개봉한다고 합니다. 홈페이지에서 요약하고 있는 줄거리를 보면, “젊고 유능한 변호사인 주인공(제목 ‘카운슬러’에는 상담역, 고문이라는 뜻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변호사’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은 아름다운 약혼녀 로라에게 프로포즈하기 위해 최고급 다이아몬드 반지를 마련한다. 호화로운 삶에 빠진 타락한 사업가 라이너는 재정 위기에 몰린 카운슬러를 유혹해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마약밀매 사업을 제안한다. 라이너가 소개한 미스터리한 마약 중개인 웨스트레이는 지독한 범죄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카운슬러에게 경고하고, 라이너의 치명적인 여자친구인 말키나는 그들 주변을 맴도는 가운데 운반 중이던 거액의 마약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지는데…(영화 스토리를 스포일러 시비 때문에 시시콜콜 적기가 눈치 보이기도 합니다.)”

 

영화를 보기에 앞서 민음사의 모던 클래식 시리즈로 나온 원작 시나리오를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모던 클래식은 오르한 파묵의 작품들과 지난해 노벨상 수상작가 모옌의 <개구리>를 통해 만나보았는데, 그야말로 모던한 느낌이 드는 소설을 소개하는 기획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영화화된 작품의 원작소설을 읽은 적은 많습니다만, 시나리오 형태로 된 영화의 스토리를 만나게 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색다른 경험이 되었습니다. 등장인물이 주고받는 대사가 당연히 중심이 되고 있는데,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을 구구절절이 설명하지 않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상황을 머릿속에서 그리면서 읽어가야 한다는 점이 어려운 것 같습니다. 물론 영화를 먼저보고 시나리오를 읽으면 이미 본 영화의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등장인물의 대사에 몰입할 수 있는 장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는 주인공 변호사와 약혼녀 로라가 아침을 맞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리뷰를 쓰기 위해서 첫 장면을 다시 읽으면서 매미와 사마귀와 참새에 관한 고사가 생각났습니다. 어느 날 아침 젖은 옷을 입고 손에 활을 든 젊은이를 만나게 된 오나라 왕이 그 이유를 묻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오늘 아침 일찍 뜰에 나갔더니 나뭇가지에서 매미가 한마리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매미의 뒤에서 사마귀 한마리가 살금살금 다가가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별안간 뒤에서 참새가 한 마리 날아와 사마귀를 물어가려고 했으나 사마귀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들고 있던 활로 그 새를 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 옆에 웅덩이가 있는 줄을 모르고 그만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옷이 젖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왕은 “눈앞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곧 다가올 화를 몰랐구나.”라면서 웃었고, 젊은이는 “천하에는 이런 예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제나라가 노나라를 치고 그 땅을 얻어 기뻐하였으나 우리 오나라의 공격을 받아 패한 것도 그런 경우입니다.”라고 진언을 했다고 합니다. 젊은이는 왕에게 외교정책에서 주의할 점을 에둘러 이야기한 것이고, 왕은 그점을 깨닫는 듯했지만, 결국은 새겨듣지 못하고 월나라의 공격을 받고 패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영화의 주인공 변호사는 예쁜 약혼녀와 결혼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데 팔려서 그 과정이 적절한지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고, 결국은 그로 인하여 패가망신을 하고 말았다는 스토리인 것입니다.

 

다시 원작 시나리오로 돌아가서, 시나리오를 읽으면 영화를 보면서 기억하려 애를 쓰다가 결국은 잊어버리고 마는 좋은 대사를 확인할 수 있는 점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시나리오에서는 대목으로는, “여자들은 도덕적 딜레마와 역설의 냄새를 맡지.(33쪽)”라는 대목이나 가톨릭 신자가 아닌 말키나가 성당을 찾아 고해성사를 하는 대목에서 “세상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없습니다.(73쪽)”라고 하는 신부의 대사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시나리오로 보아서는 미국의 텍사스주의 엘파소와 가까운 멕시코의 후아레스가 주요 무대가 되고 있지만, 변호사가 약혼선물로 다이아몬드를 사는 네덜란드 등을 오가면서 무대가 현란하게 바뀌기 때문에 영화 역시 빠른 호흡으로 진행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마약밀매와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배신과 복수가 전체 이야기의 줄거리를 이루고 있어 긴박하고 보기에도 끔찍한 장면으로 등줄기가 시원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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