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밍고의 미소 스티븐 제이 굴드 자연학 에세이 선집 2
스티븐 J. 굴드 지음, 김명주 옮김 / 현암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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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진화에 관한 책들을 열심히 읽어오고 있으면서도 막상 스티븐 제이 굴드의 작품으로는 처음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자연학을 주제로 한 그의 에세이는 1974년부터 2001년까지 미국 자연사 박물관이 펴내는 월간지 <내추럴 히스토리>에 연재되어 왔다고 하는데, 300여 편에 달한다고 합니다. 27년의 기간 동안 써온 것이라고 한다면 매월 한편씩의 에세이를 써온 셈입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에세이라기보다는 한편의 논문이라고 할 정도로 정교하고 풍부한 근거자료를 바탕으로 쓰인 글이라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아마도 “나는 에세이를 쓸 때 하나의 원칙을 따른다. 타협은 없다. 즉 전문용어를 명확하게 정의하거나 없앰으로써 접근성을 높이되 개념은 결코 단순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하는 자신만의 글쓰기 원칙에 충실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1997년에 <다윈이후>라는 에세이집으로 묶어서 내놓은 이래 2002년 <I have landed>에 이르기까지 모두 10권의 책으로 출판이 되었고, 우리나라에는 <다윈 이후(1998)>, <판다의 엄지(1998)>, <레오나르도가 조개화석을 주운 날(1998)>, <여덟 마리의 새끼 돼지(2012)>에 이어 <플라밍고의 미소>가 다섯 번째로 소개되었습니다. <플라밍고의 미소>는 1985년에 출간된 에세이집이기 때문에 1980년대 초반에 쓰인 글들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읽어도 생생한 느낌을 얻게 되는 것은 앞서 소개한 굴드의 글쓰기 원칙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가는 서문에서 자신이 에세이집을 낼 때의 시점과 관련하여 통일된 주제가 있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플라멩고의 미소>에서는 ‘연쇄적인 함의를 낳는 한 가지 특정한 발견’이라는 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궤도를 벗어난 소행성, 혹은 혜성 소나기가 백악기 멸종을 일으켰다는 가설은 지금 ‘매우 있음직한’ 일처럼 보인다. 게다가 그토록 철저하게 우연적이고 일시적인 생명의 재구성은 여러 차례 일어났으며 심지어는 2,500만년 내지 3천만 년이라는 규칙적인 주기로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라는 점입니다. 주제와 관련된 사실을 광범위하게 다룬 글은 이 책의 15번째 에세이 ‘죽음과 변모’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8부 ‘멸종과 연속성’에서는 곳곳에서 대규모 멸종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구환경은 새로운 생명체로 채워져 왔다는 점에 대하여 적고 있습니다. 당시 고생물학이나 진화생물학 분야에서는 멸종이 그만큼 중요한 주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플라멩고의 미소>에 실린 글들이 모두 생물학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만, 이례적인 에세이 한편이 있습니다. 바로 14번째 에세이 ‘양극단의 소멸’입니다. 이 에세이를 쓸 무렵 미국 프로야구계에서 4할을 치는 타자를 볼 수 없게 된 현상을 통계학적으로 분석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굴드가 이 주제와 관련된 연구를 할 수 있었던 배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 직업은 고생물학자다. 생명의 역사를 공부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생의 대부분을 장기적 경향에 대해 생각하면서 보낸다. (…) 우리가 경향을 설명할 때 하나의 미묘하지만 강한 편향에 사로잡힌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극단은 우리를 매혹시키고, 우리는 극단을 시스템 내의 특별한 값으로 고려하지 않은 채 그 극단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 하지만 우리가 극값을 더 큰 시스템이 갖는 한계치로 간주한다면 매우 다른 종류의 설명이 나올 수 있다.(270쪽) 얼마 전에 읽은 최재승교수님 등의 <백인천 프로젝트; http://blog.joins.com/yang412/13216425>가 출범하게 된 배경이 된 에세이라고 합니다.

 

실험을 하다보면 간혹 튀는 값을 만나게 되는데, 이 값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많이 하게 됩니다. 간혹 버리면 간단하게 해결될 수 있다는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과학이 과학답기 위한 전제라고 할 수 있는 대목은 꼭 새겨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과학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데이터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새로운 사고 틀과 맥락이 필요하다. (…) 과학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우연성과 예측 불가능성도 그런 작업의 본질적인 어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 틀림없다.(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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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양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7
앙드레 지드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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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제대로 읽기 위하여 공부하고 있는 책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대비가 되는 <좁은문; http://blog.joins.com/=yang412/13192256>의 저자 앙드레 지드를 더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지상의 양식>은 1897년에 발표되었는데, 작가가 1927년판 서문에서 “나는 문학의 견딜 수 없을 만큼 인공적 기교와 고리타분한 냄새로 찌들어 있던 시기에 이 책을 썼다. 당시 나는 문학이 다시금 대지에 닿아 그저 순박한 맨발로 흙을 밟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겼다.(12쪽)”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 책을 쓸 무렵 결혼하여 생활의 안정을 이룬 저자는 예술작품으로 승화될 작품이 되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시 문학의 일반적인 형식과는 달랐던 이 작품은 독자들의 외면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프랑스 문학계의 분위기를 지드는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프랑스 문학, 특히 이상하게도 낭만주의 문학은 슬픔을 찬미하고 배양하고 전파해왔다. 가장 영광스러운 행동에 나서도록 인간을 부추기는 저 능동적인 슬품이 아니라 이른바 우수라고 일컫는, 시인의 이마를 창백하게 만들어 돋보이기 하고 눈빛에 향수가 깃들게 하는 일종의 물렁물렁한 영혼의 상태 말이다.(266쪽)” 오직 당시 열아홉 살이던 비평가 에드몽 잘루만이 이 책의 가치를 볼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다음처럼 평했다.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책들 중 하나이다. (……) 우리가 가장 초조하게 기다려왔고 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이다. (……) 금세기가 베르테르와 르네의 영향을 받았듯이 아마도 다음 세기의 문학은 이 책의 주인공인 메날크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지상의 양식>을 읽으면서 먼저 눈에 띈 단어는 ‘선택’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무수한 선택의 순간에 어떤 감정을 느낄까요? “생각해보면 선택이란 어떤 것이든 무서운 것이다. 의무를 인도해 주지 않는 자유란 무서운 것이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낯설기만 한 고장에서 하나의 길을 택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거기서 ‘자신만의’ 발견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 발견이란 오직 자기 만을 위한 것이다.(20쪽)” 그래서 선택을 신중해야 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언제나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선택이 내게는 고르는 것이라기보다는 고르지 않는 걸 버리는 것으로만 보였다. 시간이 좁다는 것과 시간이 하나의 차원밖에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끔찍한 마음으로 깨달았던 것이다.(76쪽)”

 

“대낮인데도 켜놓은 등불 앞에서 나는 시간을 잊은 채 행복감에 잠겼다.(85쪽)” “욕망들이여! 아름다운 욕망들이여! 나는 너희에게 짓이겨 터진 포도송이를 가져다주리라.(111쪽)” “존재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굉장히 쾌락적인 것이 되었다. 삶의 모든 형태를 나는 맛보고 싶었다.(127쪽)” ‘지상의 양식’을 통하여 저자가 바라보는 세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새로운 인생’에 담긴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하여 태어났음을 물론, 자연의 모든 것이 가르쳐주고 있거늘’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런 점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정한 방식이나 삶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뜻하는 노마디즘(nomadism; 유목주의)이라는 개념에 관한 이야기도 읽을 수 있습니다. 노마디즘은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1968년 발표한 <차이와 반복>이라는 저서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여 철학용어로 쓰이게 되었다고 하는데, “어떤 이들은 나의 에고이즘을 비난했다. 나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힐난했다. (…) 한 사람에게 사랑을 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서 그것을 빼앗는 결과가 될까 봐 나는 나 자신을 줄 뿐이었다. (…) 자연에 대하여 그랬듯이 여기서도 유목민인 나는 어디서도 멈추지 않았다.(86쪽)”

 

<지상의 양식>에는 지드가 젊은 시절 발표한 ‘지상의 양식(1897)’과 그로부터 38년이 지나 발표한 ‘새로운 양식(1935)’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을 옮기신 김화영교수님은 작품해설을 통하여, ‘지상의 양식’에서 우리는 저자인 지드 자신, 다시 말해서 그가 만난 여러 사람들과 다양한 사건들이 만들어낸 한 인간의 다면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정리하였고, ‘지상의 양식’의 흐름과 영감에 잇닿아 있는 ‘새로운 양식’에서는 전작의 역동성과 함께 희열과 자유에 대한 열망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죽었다.’라고 한 니체와는 달리 지드는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245쪽)”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 법칙에 좀 더 고분고분 따르도록 해야 해. 그러는 것이 신상에 좋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거야.(248쪽)”라고 말하는 신을 소개하는 것을 보면, 신학자들이 궤변으로 신의 말씀을 왜곡하고 있다는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그래서 “신은 나를 붙잡고 있다. 나는 신을 붙잡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한다.(251쪽)”고 고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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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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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습니다. 니체는 1부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에 있는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라는 글을 “나는 모든 글 가운데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피가 곧 정신임을 알게 되리라.(63쪽)”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 게으름뱅이들을 미워한다(63쪽)”고 일갈하고 있습니다. 진실이 담기지 않은 허접스러운 글에 정신을 팔지 말라는 경고로 이해하였습니다.

자신의 피로 썼다는 차라투스트라는 1부에서 3부를 각각 열흘에서 보름 정도, 그야말로 신들린 듯이 썼다고 하고, 마지막 4부는 여섯 달에 걸쳐서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작가가 신들린 듯 쓴 글을 역시 저도 단숨에 읽어냈습니다.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을 포함하여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이라는 제목을 단 제1부에서는 산에서 내려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차라투스트라가 방랑을 떠나는 과정을, 2부에서는 도래할 인간인 '초인'을 찾아가는 여정을, 3부에서는 '영원회귀'의 오솔길을 더듬어가는 차라투스트라의 고난을, 그리고 마지막 4부에서는 차라투스트라를 깨닫게 되는 자들과의 만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의 정체가 궁금했습니다. 서른에 입산해서 십년의 세월을 정진한 끝에 깨달음을 얻은 자라고 이해되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아침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그대 위대한 별이여! 그대가 빛을 비추어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존재가 없다면, 그대의 행복은 무엇이겠는가!(11쪽)”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오도송(悟道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산을 내려와 시장에서 군중을 만난 차라투스트라는 “신은 죽었다. (…)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려 하노라(15쪽)”고 선언합니다. “초인(超人; Übermensch)은 '영원회귀‘의 진리를 체득하고, ’힘의 의지‘를 실현시킬 미래의 인간을 가리킨다.”고 각주에서 설명되어 있습니다. 니체는 <반그리스도교>에서 유대인의 역사를 기록한 구약성서를 사제들이 왜곡하여 서술하여 신도들을 구속하려 들었다고 통박하였던 것(니체 지음, 비극의 탄생/즐거운 지식, 동서문화사; http://blog.joins.com/yang412/13023753)을 고려한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우리말로 옮기신 장희장교수님이 작품해설에서 이전의 신의 율법은 인간의 선악을 규정하는 고정불변의 절대 명령으로 인식되어 왔지만, 니체는 도덕을 특정한 시대, 특정한 조건 하에 주어진 하나의 결과일 뿐이라고 보았고, 그 결과가 주인노릇을 하면서 인간을 노예로 전락시킨 것이라고 보았다는 설명에 일면 수긍이 가는 것 같습니다.

 

죽은 신을 대신하여 인간사회에 ‘힘의 의지’를 실현시킬 미래의 인간, 즉 초인의 세상을 준비하는 일이 차라투스트라가 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이룬 대로 가장 정직한 존재인 자아가 정직하게 말하는 것을 배우고, 몸과 대지를 찬양하고 경의를 표하게 되도록 안내하는 역할입니다. 그런데 대중을 이끌어갈 초인은 누구일까요? 읽어가다가 생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될 수도 있는 구절을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또한 초인이라는 말을 길 가다 주웠으며,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어떤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그곳에서 인간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고, 새로운 아침놀에 이르는 길로서 행복에 겨워 자신의 정오와 저녁을 찬양한다는 것을 알았다.(351쪽)”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시인으로서, 수수께끼를 푸는 자로서, 그리고 우연을 구제하는 자로서 나는 그들에게 미래에 창조적으로 관여하고 과거에 있었던 모든 것을 창조적으로 구제할 것을 가르쳤다”고 하였습니다. 꾸준하게 정진한 자아가 종국에는 깨달음을 얻어 스스로를 극복하는 단계에 이르면 초인(超人)이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대중은 누구나 초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닫도록 안내하는 것이 차라투스트라의 역할이 아닐까요?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서 과거를 구원하고 일체의 그러했었다를 개조하여 의지가 마침내 ‘나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게 되기를 나는 바랄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가르쳤다.(352쪽)”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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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뇌 - 당신의 위장이 스스로 생각한다
마이클 D. 거숀 지음, 김홍표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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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뇌>라니, 머리 안에 담겨 있는 뇌 말고도, 우리 인간은 모두가 제2의 뇌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2의 뇌는 우리 몸의 소화 기관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광의의 소화기관이라고 한다면 음식물을 받아들이는 입에서부터 소화가 다되어 몸 밖으로 배출하는 항문에 이르는 경로를 포함할 수 있겠습니다. 소화 기관을 따라 약 100미터에 이르는 신경계가 존재하고 위장관을 조절하는 신경계는 제2의 뇌라고 부를만하다는 것이 <제2의 뇌>를 쓴 마이클 거숀교수입니다. 거숀교수는 컬럼비아대학 해부학과에 재직하면서 신경생물학을 전공하고, 특히 신경위장관학의 대부로 통한다고 합니다.

 

먼저 3부로 구성된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1부에서는 위장관에 분포하고 있는 신경계가 제2의 뇌라고 할 만하다는 특별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 배경을 그동안의 과학적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적고 있습니다. 2부에서는 음식물이 입으로 들어와서 소화되고 배설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사실상 신체의 외부환경이라고 할 위장관 내부에서 우리 몸을 위협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어떻게 방어하고 있는지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3부에서는 위장관에 분포하는 신경계통이 어떻게 발생하고, 그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질병은 어떤 것이 있는지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미경검사를 통하여 질병을 진단하는 병리학을 전공하면서 흔히 만나는 위장관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서 적지 않은 신경조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위장관을 구성하고 있는 근육층의 사이에 아우어바흐 신경총과 점막 바로 아래 있는 마이스너 신경총이 있습니다. 위장에 음식물이 들어오면 우선 잘게 부수는 작업을 마쳐서 소장으로 넘어가는데, 소장에서는 간에서 만드는 담즙과 췌장에서 만드는 소화액과 잘 섞이도록 하면서 흡수가 일어나도록 아래쪽으로 밀어내게 됩니다. 바로 연동운동입니다. 연동운동이 제대로 일어나려면 전체 장이 꼬임이 없이 율동적으로 운동해야 하는데 이러한 운동을 조율하는 것이 바로 위장관에 풍부하게 분포하고 있는 신경조직들인 것입니다. 위장관에 분포하고 있는 신경계에는 뇌와 척수로부터 나오는 말초신경이 연결되고 있습니다만, 수술 등으로 인하여 절단이 되더라고 위장관의 운동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뇌의 통제를 받지 않더라도 자율적인 운동이 일어나도록 통제하는 위장관의 신경계통의 역할을 ‘생각하는 소화기관’이라는 설명을 달아서 ‘제2의 뇌’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 몸을 총괄하는 뇌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중추신경계에 속하는 뇌와 척수에 들어있는 수많은 신경세포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극을 수용하여 분석하고 그에 맞는 반응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그 자극들을 기억하고 통합하는 높은 수준의 의식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위장관계통에 분포하고 있는 신경조직이 전체 위장관의 활동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조정하는 기능까지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범위는 위장관 그리고 위장관과 연관을 가지고 있는 담낭이나 췌장 등 일부 기관과 연계하고 있는 정도일 것이라는 짐작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위장관 신경계) 그들은 뇌의 노예가 아니고, 종속되지도 않았으며, 독립적인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신경계의 독자적인 영역이다. 말초신경계 무리에서 그들은 뇌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반란군이다.(21쪽)”라는 근거가 입증되지 않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2의 뇌>를 요약하면 위장관신경계에 관한 저자가 이룩해온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설명하고 있는데, 연구에 참여한 연구원들의 이름까지도 거론하는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으나, 사족처럼 읽히는 부분도 적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사실 신경과학은 아무래도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전문적인 영역으로 용어에서부터 연구방법 등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데,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독자의 수준을 어디에 두었는지 분명하기 않습니다만 일반인이 읽기에는 적지 않게 어려울 듯합니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두고 연구를 했던 파킨슨병과 관련하여, ‘대뇌에서 볼 수 있는 레비소체(Lewy body)가 소화기관의 신경세포에서도 볼 수 있다.(323쪽)’는 언급은 좋은 참고사항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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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의 안식처, 에르미타를 찾아서 - 스페인에서 만난 순결한 고독과 위로
지은경 지음, 세바스티안 슈티제 사진 / 예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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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타(Ermita)”는 스페인 북부 피레네 산맥 사이에 흩어져 있는 작고 소박한 건축물들을 부르는 이름으로, 이 말에는 ‘은둔지’, ‘사람이 살지 않는 장소’, ‘세상과 뚝 떨어진 집’, ‘사막과 같이 황량함’ 처럼 쓸쓸함과 연관되는 모든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깊은 산속에 세워진 작은 암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제목에 곁들인 부제 ‘스페인에서 만난 순결한 고독과 위로’는 순례자들의 쉼터에서 그들의 고난의 흔적을 보면서 마음을 정화시키는 여행을 떠올렸습니다. 사진작가와 작가의 환상적인 팀웍이 만들어낼 스토리에 대한 기대도 컸습니다. 어쩌면‘에르미타에 매료되어 7년째 에르미타를 찍어온 벨기에의 사진작가 세바스티안 슈티제(Sebastian Schtyser)와 도시를 떠나본 적 없는 작가 지은경이 에르미타를 찾아 스페인 북부에서 보낸 4개월간의 여정을 담고 있다.’는 설명을 흘려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슈티제가 에르미타를 찾아 사진을 찍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파비올라 여왕 재단의 후원으로 스페인 북부에 흩어져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에르미타들을 찍고 있다.(221쪽)”고 하는 것으로 보아 재단에서는 산재해있는 에르미타를 확인하고 사진으로 남기려는 의도에서 후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에르미타라는 독특한 건축물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보존하려고 한다면 사진작가가 아니라 건축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맡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슈티제는 오로지 청명한 계절은 다 제켜두고 겨울철에만 그것도 핀홀 카메라를 가지고 에르미타를 찍어오고 있다고 하는데, 화려하고 발랄한 파란 하늘은 에르미타를 위한 빛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빈자를 위한 교회, 에르미타를 담아내기에는 외롭고 쓸쓸한 작업을 더욱 심화시켜주는 우울한 회색빛이 감도는 겨울날이 제격인데, 이 특별한 빛은 주변을 고요히 잠재우고 구름에 반사된 햇살을 받은 에르미타는 영롱하고 섬세하게 반짝이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22쪽) 게다가 고요한 빛을 부드럽게 묘사하는 핀홀 카메라는 가장 원시적인 사진기로 몽롱한 콘트라스트를 자아내지만 에르미타의 외로움이 가진 모든 디테일을 정성스럽게 세세히 담아내는 재주를 지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핀홀 카메라로 찍은 에르미타는 몽롱하게 보이는 자연의 배경 속에서 조금 더 선명한 모습으로 떠오르는 듯 합니다.

 

이런 분위기는 존 러스킨이 <건축의 일곱 등불; http://blog.joins.com/yang412/13284036>에서 기록한 ‘기억의 등불’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합니다. “실제로 건물의 가장 위대한 영광은 돌이나 금과 같은 재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영광은 건물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에 달려 있고 말하고자 하는 바의 울림과 엄밀한 관찰의 깊이에 달려 있으며, 또한 찬성이나 비난이 교차하더라도 인간애의 물결로 오랫동안 씻긴 그 벽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불가사의한 공감에 달려 있다. (…) 우리가 기대하는 건축의 진정한 빛과 색과 고귀함은 시간이라는 저 황금의 얼룩 안에 있다.(존 러스킨 지음, 건축의 일곱 등불, 240쪽)”

 

이 지역에 산재해있는 에르미타의 건축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하는데, 에르미타는 그 지방의 흙과 돌로 지어져 경관을 해치는 일 없이 매우 자연스럽게 주변의 풍경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빨간 흙이 많은 산속의 에르미타는 빨간 흙으로, 검은 돌이 많은 산속의 에르미타는 검은 돌로 지어졌다는 것입니다.(86쪽) 기본적인 모습이 비슷한 우리네 암자와는 다른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뾰족한 절벽 위에 홀로 세워져 있는 코르사의 마레 데 데우 데 라 페르투사 에르미타가 절벽의 지형에 의지하여 쌓아올린 것을 보면, 절벽 위의 지형을 살려서 세워졌다는 죽서루가 연상됩니다.(이희봉 지음, 한국 건축의 모든 것 죽서루; http://blog.joins.com/yang412/13210699)

슈티제가 담은 몽환적 분위기의 에르미타들이나, 그곳에 이르는 여정을 담은 사진과 에르미타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의 모습을 담은 수많은 사진들은 그들의 여정에 함께 하는 느낌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은경작가가 정리한 에르미타로 가는 여정, 사진작가의 작업 과정에 대한 기록이나, 오랜 세월 동안 그곳을 지키며 묵묵히 자연 속에 몸을 내맡겨온 에르미타의 모습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미 쇠락해가고 있는 에르미타들에 대한 상세한 자료가 없어서가 아닐까 생각도 해봅니다.

 

여행이 점점 고달파지자 ‘나는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또 애초에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다는 작가의 고백이 엉뚱하다는 생각과 함께 ‘이 책은 세상으로부터 믿음과 삶에 대해 다른 비전을 가졌던 수도자들과 은둔자들에 관한 이야기(7쪽)’라는 요약에 충실한 내용이었나 곰곰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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