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작가들의 유유자적 여행기 박람강기 프로젝트 1
찰스 디킨스.윌리엄 윌키 콜린스 지음, 김보은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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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과거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을 떠나 다른 지방을 여행하는 것은 통상이나 외교, 혹은 전쟁에 참가하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하는데, 순수하게 유람을 목적으로 한 여행은 18세기 무렵에서야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볼프 슈나이더는 <인간이력서; http://blog.joins.com/yang412/13296412>에서 “관광산업의 시작은 여행을 즐기는 영국인들의 습성과 영국적 ‘스포츠’ 정신의 산물이었다. 영국의 출판업자 존 머리는 1836년 <여행자를 위한 핸드북>을 펴냈다.(246쪽)”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유럽에서 세상구경하는 일은 영국사람이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여행을 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잘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작가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게으른 작가들의 유유자적 여행기>야말로 영국의 유명한 작가 두 사람이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정리한 것인데, 이 작품을 소설이라고 해야 하나, 에세이라고 해야 하나 헷갈립니다.

 

영문학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찰스 디킨스와 미스터리 소설의 초창기에 지대한 공헌을 한 윌키 콜린스 두 작가는 게으름계의 독보적인 존재였던 모양으로, 완벽히 유유자적한 도보여행을 계획하게 됩니다. 1857년 가을, 번잡한 도시와 자신들의 주인인 문학이라는 부인으로부터 도망쳐 북잉글랜드를 향해 떠나지만, 이내 도보여행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기차역으로 향하고 맙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 프랜시스 굿차일드와 토머스 아이들은 각각 찰스 디킨스와 윌키 콜린스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여행을 떠난 두 사람은 제일 먼저 칼라일에 도착해서 잡은 여관에서 빈둥거리다 컴벌랜드의 케록산에 대한 글을 읽고 정상에 오르기로 결정하지만, 쏟아지는 비와 안개를 뚫고 올라갔다가 길을 잃고 헤매고, 설상가상 토머스가 발목을 접지르는 부상을 당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프랜시스는 보고들은 광경을 토머스에게 설명하는 역할을 하고, 토머스는 그야말로 늘어져서 설명을 듣는 입장을 고수하게 됩니다.

 

부상을 치료하기 위하여 부른 의사는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야기의 주인공 아서 홀리데이는 경마를 구경하기 위하여 돈캐스터에 간 적이 있는데, 돈 케스터의 경마는 아주 유명해서 경마가 열리는 기간 동안에는 미리 숙소를 예약하지 않으면 길거리 잠을 자야 한다는 것입니다. 숙소를 찾아 헤매던 홀리데이씨는 우연찮게 얻은 여관방에서 방금 사망한 젊은이와 밤을 지내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는데 공포와 싸우던 가운데 죽었다던 젊은이가 소생하는 기미를 발견하고 의사를 부르게 됩니다. 그렇게 소생한 젊은이는 아서의 배다른 형제로 아서가 좋아하는 여성과 이미 약혼한 사이라는 비극적 상황으로 엮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살아온 젊은이가 바로 그 여성의 약혼자 였고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하여 파혼하게 되지만, 그 여성은 삼년 후에 병으로 죽게 된다는 슬픈이야기입니다.

 

의사가 전하는 슬픈 사랑의 이야기는 두 사람의 발길을 돈캐스터 경마로 이끌어가게 됩니다. 중간에 멈춘 해변도시 엔론비에서 두 사람이 하루를 보내는 모습은 이렇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프랜시스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사람과 사물을 끊임없이 관찰한 내용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으며 줄곧 자신이 현존하는 생명체 중 가장 빈둥거리고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동안, 부상당한 토머스가 집 안에 갇혀서 하루 종일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독자들이 궁금해 할만하다.(107쪽)” 정답은 “토머스는 시간을 보내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소파에 엎드린 채 가만히 시간이 흘러가도록 두었다.” 정말 초절정의 빈둥거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토머스의 이런 삶의 태도는 유년기에 잠시 근면에 눈을 떴다가 동무들로부터 내침을 당한 쓰라린 추억에 기인하는 것임이 여기에서 밝혀집니다.

 

엔론비를 떠난 두 사람은 고택을 조한 랭카스터 여관에서 여섯 노인을 만나게 되고, 그들이 유령이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되고, 그(들)로부터 사연을 듣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두 사람이 북잉글랜드를 느긋하게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적은 여행기이면서도 아마도 작가적 상상으로 빚어낸 두 편의 유령이야기를 잘 배합한 새로운 형식의 소설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두 사람의 여행기를 읽으면서 예약없이 관광지를 찾았다가 숙소를 구하지 못해 다시 돌아 나오던 추억도 떠오르고, 안개를 헤치고 차를 몰던 여행길도 다시 생각납니다. 역시 뛰어난 작가들의 손끝에서 탄생한 여행기는 읽는 매력을 더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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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기 - 빙하기 6000만 년의 비밀을 파헤친 과학자들의 열정
존 그리빈.메리 그리빈 지음, 김웅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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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온난화가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어가는 가운데 13년 여름에 촬영된 위성사진에 의하면 북극을 덮고 있는 해빙의 면적이 최저를 기록했던 12년 여름에 비하면 눈에 띌 정도로 늘었다고 해서 혼란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3230085). 이 결과를 두고 고(古)기후학자들은 미니빙하기의 도래를 나타내는 표시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최근 들어 기후변화가 심해지고 있는 탓도 있어서 빙하기연구에 관한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빙하기>의 저자들은 ‘빙하기가 오고 있다’는 제목의 머리말을 “과거의 지질학적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는 지금 빙하기에 살고 있다. 세상이 오늘날처럼 추웠던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오래되지 않은 과거가 지금보다 더 추웠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을 빙하기라고 부르지 않으며, 지금보다 더 추웠던 그때를 빙하기라고 부른다.(7쪽)”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의 겨울은 정말 추웠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지구적 관점에서의 기후는 대기의 변화뿐 아니라 해류의 순환에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수온이 높은 표층해류가 대서양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고위도에 이르는 과정에서 바닷물이 증발되어 염분이 증가되는 한편 수온도 떨어져 밀도가 높아지게 되는데, 밀도가 높아진 바닷물은 심층으로 가라앉게 되고, 심층에서는 반대방향으로 흐르는 순환을 이루게 된다고 합니다. 만약 북극의 기온이 상승하여 만년빙이 녹게 되면 표층해수의 염분농도에 영향을 미처 해양수의 표층과 심층을 연결하는 순환이 무너지면서 해류의 이동에 영향을 미쳐 적도 부근의 해류가 북쪽으로 열에너지를 이동시킬 수 없게 되어 북극의 수온은 다시 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구 차원의 기후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워낙이 복잡하기 때문에 짧은 기간 동안 일어나는 기후변화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점은 빙하기 사이에 일시적으로 얼음이 줄어든 짧은 기간의 간빙기인데, 이 비교적 오래 지속되었던 빙하기와 짧은 간빙기를 묶어 말하는 빙하기는 수백만 년 동안 계속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이 책 <빙하기>에서는 빙하기의 주기를 발견하게 된 과정과 그와 관련된 지구상의 생물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거대한 빙하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18세기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원래 있던 암석층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집채만큼이나 큰 바윗덩어리 표석(漂石; boulder)이 발견되는 현상을 설명하기란 쉬운 노릇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특히 북유럽에서는 분명히 어떤 힘의 작용으로 운반된 것으로 보이는 바위덩어리와 퇴적물이 뒤섞여 있는 곳이 많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역시 알프스의 험준한 산에 둘러싸여 있는 스위스사람들은 계곡 아래서 발견되는 표석이 산꼭대기에서 흘러내리는 빙하에 의하여 쌓인 것이라고 생각했고, 1787년 스위스의 성직자인 베르나르 쿤에 의하여 이론의 형태를 갖추었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초기에는 표석들이 물에 의하여 이동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거대한 빙하가 흘러내리면서 바위에 긁힌 자국을 만들기도 하고, 부서진 바윗덩어리를 얼음 속에 품어서 이동시키기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흘러내리던 빙하가 기온이 따듯한 곳에 이르면 녹아서 표석들이 쌓이게 되는 것을 빙퇴석(氷堆石)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빙퇴석에 관한 이론은 1837년 7월 지질학회에서 아가시에 의하여 발표되어 충격을 주었는데, 지구가 짧은 시간에 벌어지는 격변에 의하여 만들어져왔다는 격변설과 오랜 세월을 두고 조금씩 변화한 것이 축적된 결과라는 단일설이 맞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되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싹튼 ‘빙하기’라는 개념은 지구의 공전과 세차운동 등, 천문학적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빙하기의 주기를 찾는 과정과 탄소 등의 방사성 동위원소의 반감기를 이용하여 빙하기의 주기를 밝히는 과정을 2장에서 요약하였습니다. 이어서 심해의 바닥에 쌓여 있는 해저 퇴적물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빙하기의 증거를 수집하는 방법은 20세기 말에 들어서야 가능해졌습니다.

 

연대측정이 잘 되어있는 지질학적 증거는 공룡멸종으로부터 현재 빙하기의 시작까지 약 6,000만년 동안 대륙이 직의 표면에서 움직여 해류의 흐름을 바꾸어 놓고, 햇볕이 흡수되고 다시 우주로 복사되는 방법의 결과로써 우리 지구의 온도가 천천히 다소 불규칙적으로 내려갔던 것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것이 약 10만 년 전에 시작된 간빙기였고, 반복되는 빙하기의 천문학적인 주기 덕에 우월한 종으로 진화해올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기후변화가 극심해지고 있는 미묘한 시기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는 분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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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학 강의 - 탈근대의 관점으로 읽는 현대미학 진중권 미학 에세이 1
진중권 지음 / 아트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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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사년에 마지막으로 쓰는 리뷰입니다. 저자가 재판 서문의 모두에 적은 것처럼 ‘딱딱한 이론서’로 이 분야에 겨우 관심을 두기 시작한 수준에서는 아직 의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용어들이 난무하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점이 있었습니다. 다만 저자가 논리를 펼치는 바탕이 된 책을 읽은 부분에서도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제목을 보면서 기대했던 현대적 의미에서의 미학에 대한 앎을 넓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만, 탈근대적 접근, 즉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시기의 미학사조를 검토한 것으로 아직은 그에 필적할 만큼 뚜렷한 미학사조는 드러나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을 통하여 저자는 발터 베냐민, 마르틴 하이데거, 테오도르 아도르노,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장-프랑수와 리오타르 그리고 장 보드리야르 등 구대륙의 근대 철학자들의 미학에 대한 논지를 분석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서문에 오늘날의 철학과 미학의 패러다임이 크게 변하고 있어서 업데이트가 필요한 상황에서 “최근 등장한 미학의 주요 흐름을 소개하면서, 근대미학과 탈근대미학의 반복적 대비를 통해 이 패러다임 변화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려고 했다.(8쪽)”고 적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이제야 주목을 받고 있는 베냐민의 탈근대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것과  현대예술이 ‘숭고’와 ‘시뮐라크르’라는 서로 대립하며 보족하는 두 개념으로만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로 다루고 있는 베냐민에서 등장하는 ‘숭고’와 ‘시뮐라크르’라는 단어의 개념을 먼저 정리해야 할 것 같은데, 손에 분명하게 잡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자를 병기했더라면 보다 쉽게 이해될 수도 있었겠다 싶은데, 베냐민이 제시하고 있는 ‘근원관계’라는 관념에서 시작해보면, “‘근원’의 개념은 현전'(prèsence)의 미학, 숭고의 미학을 지시한다.(59쪽)”고 하였으니, 쉽게 이해하면 원본과 복제본의 관계로 보면 되는 것 같습니다. 미학의 논의대상이 되는 예술작품은 존재하는 대상을 작가의 사고를 통하여 분석되고 다양한 형태로 표현된다고 본다면 원본과 복제본의 관계가 모호해질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베냐민에게서 숭고와 시뮐라크르는 어지럽게 교차한다. 위에서 본 것처럼 그의 숭고는 시뮐라크르를 함축하고, 또 그의 시뮐라크르는 숭고를 배제하지 않는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시뮐라크르 미학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안에는 상사와 유사의 차이, 원본과 복제 관계의 전도 등 시뮐라크르의 모든 요소가 들어있다.(60쪽)”라는 구절에는 앞서 말씀드린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위키백과사전에서는, “시뮬라크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을 지칭한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때로는 존재하는 것보다 더 실재처럼 인식되는 대체물을 말한다. 우리말로는 <가장假裝>으로 번역하는 것이 제일 근사하겠지만 다른 유사어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대개 원어 그대로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이데거로 넘어가면 결국 하이데거의 미학비판은 근대의 예술문화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데, “예술작품과 예술가가 존재하는 것은 예술이 양자의 근원으로서 존재하는 한에서가 아닐까?(67쪽)”라는 물음으로 출발합니다. 그리스 문명이 남겨놓은 신상(神像)에 대한 저자의 견해가 눈길을 붙잡습니다. “신상은 그 모델이 된 인간의 모방도, 눈으로 볼 수 없는 신의 재현도 아니다. 그들은 먼저 존재하는 신을 본떠 신상을 만든 게 아니라, 신상을 만듦으로써 신을 비로소 존재하게 하고, 그로써 자신들의 민족적 삶의 세계를 세웠던 것이다.(80쪽)” 아도르노에 이르러 겨우 현대미학의 어려움이 가늠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현대예술은 낯설다. 미술은 보이지 않고, 음악은 들리지 않으며 예술 감상은 더 이상 즐거운 체험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절대적 부정을 통해 예술은 견딜 수 없는 현실을 증언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유토피아를 그리워한다. 또한 우리는 한없이 외로워진 미술과 음악에 말을 걸기 위해서는 철학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현대예술은 철학과 비평을 동반하지 않으면 완성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라고 출판사가 요약한 글이 바로, 저자가 여덟 명의 철학자들을 통하여 현대미학을 논하게 된 이유가 손에 잡히는 것 같습니다.

 

하이데거와 자크 데리다의 미학비판을 논하면서 구두를 그린 고흐의 작품을 공통의 매개체로 삼고 있는 것도 재미있게 읽은 부분입니다. 앞서도 적었습니다만, 질 들뢰즈의 경우는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을 논한 <감각의 논리; http://blog.joins.com/yang412/13157096>를 일독한 바 있어 그나마 조금 이해되는 부분도 있었던 것을 보면 역시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텍스트를 읽은 다음에 다시 읽어야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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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카베 요 지음, 현정수 옮김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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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은 12월 5일 발표한 ‘2012년 생명표’에서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 기대수명이 81.4년으로 추정하였습니다. 남자는 77.9년, 여자는 84.6년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 발표한 건강기대수명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남자의 건강수명은 65.2년, 여자는 66.7년으로 추정되며 평균은 66년이라고 합니다. 결국 남자는 12년을, 그리고 여자는 18년을 질병으로 고통을 받다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최근 가족들 간에 학대행위가 빠르게 늘고 있고, 학대행위가 일어나는 가장 큰 이유는 부양에 대한 부양에 대한 부담이 원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연합뉴스 2013년 12월 18일자 기사, “경남 노인학대 5년 새 83% 증가…부양 부담 등이 원인”) 이와 같은 사회현상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우리나라의 고령화속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역시 통계청이 12월 19일 내놓은 ‘한국의 사회동향 2013’에 따르면, 2000년에 7% 수준이던 65세 이상 인구의 비율은 2005년에는 8.9%로, 그리고 2010년에는 10.9%로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추세가 유지된다면 2020년 15.7%, 2040년 32.3%로 10명 중 3명 이상이 노인일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아동을 제외하고 생산활동이 가능한 젊은이 한 사람이 노인 한 사람 부양해야 하는 시기가 곧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거시적으로 보면 노인부양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커지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과거 대가족중심의 사회에서는 가정에서 이루어지던 노인부양이 요양시설로 옮겨질 것으로 예상하고, 정부는 노인요양보험제도 등 사회적 보장 장치를 서둘러 마련한 것입니다. 제도가 출범할 당시 의료계 등 관련 분야에서는 여건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 등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즉 사회적 분위기라든가, 제도를 순탄하게 이끌어갈 전문인력 등, 다양한 영역에서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지적된 사항들의 일면이 최근 노인복지시설에서 학대행위가 만연되고 있는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금년 들어 개별 지방자치단체별로 노인생활시설에 대한 노인학대현황을 조사하고, 노인학대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아산투데이 2013년 6월 19일자 기사, “충청남도, 노인생활시설 학대실태 점검”)

 

노인요양병원에서도 유사한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뉴스가 이어지는 가운데 특히 노인환자를 감금하거나 속박대를 채우는 등의 행위에 대한 관리규정이 없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습니다.(메디컬 투데이 2013년 8월 30일자 기사, “믿고 맡기는 노인요양병원? ‘노인 학대의 현장’”) 이와 같은 지적에 대하여 정부는 <요양병원 입원환자의 안전과 인권 보호를 위한 지침>을 제정하여 환자의 안전관리와 인권침해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도 요양병원에 대한 급여적정성평가를 통하여 요양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진료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노인의료와 관련하여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할 다양한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미래에 등장할 수도 있는 노인의료의 문제를 다룬 소설 <A 케어>는 충격적일 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마취과와 외과를 전공한 구사카베 요의 데뷔작으로 일본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던진 바 있다고 합니다. 1955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구사카베 요는 오사카 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하고, 오사카 대학교 부속 병원에서 외과와 마취과의 수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사카 부립 성인병 센터에서 마취과의사, 고베 에키사이카이 병원에서 일반외과의사, 재외 공관 의무관으로 각각 근무했고, 2003년, 현직 의사로 일하면서 노인 의료의 실태를 다룬 <A 케어>를 발표하며 작가로 데뷔하였습니다. 소설 이외에도 일본의 의료 현실을 비판한 에세이를 발표하며 ‘메디컬 르포 작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합니다.

 

소설 <A 케어>는 르포르타주를 읽는 느낌이 드는 독특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마치 이미 발생한 사건을 뒤쫓는 것 같은 긴박한 분위기에 빠져들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소설 <A 케어>는 고베에 있는 ‘이진자카 클리닉’ 원장 우루시하라가 노인환자들을 대상으로 ‘A 케어’을 고안하여 시술하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한 글과 우루시하라원장의 ‘A 케어’와 관련하여 일어난 사건들을 추적한 야구라 슌타로편집자의 주석-봉인된 ‘A 케어’란 무엇이었나-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인 것처럼 헷갈리게 하는 것 같습니다.

 

우루시하라원장이 고용되어 근무하고 있는 고베의 이진자카 클리닉은 ‘노인 데이케어’를 중심으로 하는 노인의료시설입니다. “데이케어란 마비가 있는 사람이나 치매에 걸린 노인을 낮 동안에만 맡아서 돌보며 물리치료나 작업치료를 하는 시설입니다.(9쪽)” 문제는 ‘노인의료’가 낫게 하는 의료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치료(cure)보다는 간병(care)에 중점을 두고 있는 의료행위로 저자는 간호보험으로 커버된다고 차별화하고 있습니다. 우루시하라원장은 노인의료의 한계를 뛰어넘을 새로운 의료가 없을까 고심하게 되는데, 의료를 ‘과학’이라기보다는 ‘서비스’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 없을까 하는 바탕에서 나온 아이디어라는 것입니다. 노인들을 안심시키는 의료서비스를 찾아내기 위하여 노인들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가운데, 의외로 노인들이 ‘죽고 싶다’는 바람이 크다는 점을 찾아냈다고 하는데, 죽고 싶다는 노인들의 바람이 사람들의 3대 거짓말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오랫동안 내려온 금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모르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인가요? 어쩌면 수명연장과 관련하여 건강수명이 끝나고 망신창이가 된 몸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등장하게 된 변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루시하라원장은 노인들의 죽음에 대한 바람에 더하여 노인들에게 다양한 형태의 학대가 가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게 됩니다. 오랜 시간에 걸친 간호에 지친 가족들, 심지어는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적인 노인간호에서 오는 심리적, 육체적 스트레스가 쌓인 의료진까지도 저지르고 있는 노인학대를 발견하고 이를 해결할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고민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우루시하라원장은 우연히 방청하게 된 시드니 패럴림픽의 하이라이트와 베스트셀러 <오체미완성>의 저자 오토사다 고헤이씨의 다큐멘터리에서 힌트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우리나라에서도 소개된 <오체불만족>의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씨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90킬로그램이나 되는 체구에 뇌졸중으로 하반신과 왼쪽 팔이 마비되어 아내와 아들의 학대를 받고 있는 이와카미 다케가즈씨의 경우, 마비된 거동에 오히려 짐이 되고 있는 하지와 왼쪽 팔을 잘라내면 단숨에 가벼워진 그를 돌보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개념입니다. 저자는 잘라낼 신체의 일부를 ‘폐용신(廢用身)’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마비가 생긴 사지에 대한 재활치료에 대하여 일본의 건강보험에서는 일정 기간이 경과하면 비용을 내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치료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족의 학대로 인하여 욕창이 감염되면서 생긴 가스괴저로 이와가미씨가 생명의 위기를 맞게 되자 자연스럽게 왼쪽다리를 절단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차제에 우루시하라원장은 가족들이 이와가미씨를 학대하는 원인을 과체중으로 인한 간호부담으로 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른쪽 다리와 왼쪽 팔도 절단하는 방안을 논의에 부치게 됩니다.

 

우루시하라원장은 찬반이 엇갈려 혼란에 빠진 스태프들을 “저도 머리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와가미 씨의 폐용신 절단을 생각했을 때, 뭔지 알 수 없지만 이 방법은 잘될 거라는 영감 같은 것이 머릿속에 번뜩였습니다. 이 요법을 시행하면 이와가미씨는 분명히 좋아질 거라는 치료자로서의 감이라고 할까요(93쪽)”라고 설득하고, 최종적으로는 가족들과 환자의 승낙을 얻어내게 됩니다. 이진자카 클리닉은 요양시설이기 때문에 수술을 해줄 의사를 찾는 일도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스괴저로 인한 다리 절단은 보험의 적용이 가능하지만, 마비상태라는 이유로 오른쪽 다리와 왼쪽 팔을 절단하는 수술은 보험수가의 적용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편의상의 병명을 붙여서 수술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인 것입니다. 보험적용을 받지 않으면 자비로 수술을 받아야 하므로 환자의 부담이 커지는 문제가 있습니다. 당연히 불법진료가 이루어진 셈입니다. 이 상황을 우리나라의 의료체계에서 검토해본다면 ‘A 케어’라는 개념 자체가 시술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환자의 심리상태의 변화 등을 포함하여 시술의 효과와 안전성 등에 관하여 전문가들의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된다는 절차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시술이라고 하겠습니다.

 

<A 케어>에서는 하지와 왼쪽 팔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은 이와가미씨가 재활치료를 받고서 심리적인 면에서도 긍정적이고, 재활치료를 통하여 오히려 활동성도 향상되는 것으로 묘사괴고 있습니다. 이런 이와가미씨의 변화를 지켜본 마비 환자들이 같은 시술을 받게 되는 상황을 넘어 치매환자까지도 불편함을 느끼는 팔을 절단해달라고 요구하는 상황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A 케어는 절단(amputation)을 의미하는 영어단어의 머리글자에서 따온 것 것입니다. 이 시술은 우루시하라 원장의 주도로 이진자카 클리닉의 스태프들의 협의를 거쳐 당사자가 동의하는 경우에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3건의 시술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A 케어를 적용하는 기준도 마련하게 됩니다. 1. 절단하는 것은 폐용신일 것, 2. 본인의 명확한 희망이 있을 것, 3. ADL(Activity of Daily Living; 일상생활의 활동성)의 개선, 혹은 간호의 경감이 기대될 것, 4. QOL(Quality of Life; 삶의 질)의 향상이 기대될 것, 5. 생명에 위험이 없을 것. 이처럼 만들어진 기준은 오로지 이진자카 클리닉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의 논의를 통하여 만들어지고 적용된 것으로 의학 분야에서 새로운 시술을 환자에 적용할 때 동료평가라고 하는 엄중한 심사절차가 생략되었다는 중대한 하자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시술이 처음 시작된 지 1년이 경과할 무렵 모두 열두 명이 A 케어를 받게 됩니다. 우루시하라원장은 A 케어를 받은 환자들이 활기가 넘치는 듯했으며, 기능면에서도 효과를 나타낸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물론 객관적인 측정기구를 통하여 입증된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성과에 고무된 우루시하라원장은 의료는 과학이 아니라 서비스업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게 됩니다. “‘의학’이 과학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의료’는 과학이 아닙니다. ‘의학’은 과학적이 되면 될수록 ‘의료’에서 멀어져 갑니다. 즉 환자에게는 직접 관계없는 연구자의 취미가 되는 것입니다. (…) 애초에 의료는 과학인 척하는 것뿐이지 사기 같은 짓을 당당히 하고 있습니다.(190쪽)” 어쩌면 일본의 의료시스템에 대한 저자의 불만을 담은 메시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자가 A 케어 문제를 제기한 궁극적인 배경은 우루시하라원장의 보고서 말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간호력은 자원입니다. 한정된 간호 자원을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도 ‘A 케어’ 같은 과감한 수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203쪽)” 바로 이 부분에 대하여 우리 역시 심각하게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초고령사회에 진입하게 되면 노인의료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이 급증하게 될 것이고, 의료자원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이 극단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고자 하는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A 케어>의 후반부, 즉 이 책의 두 번째 주인공 야구라 슌타로 편집자가 앞서 우루시하라원장의 A 케어에 관한 글에 대한 주석형식의 글입니다. 슌타로씨는 우루시하라원장이 개발한 A 케어 시술의 뒷이야기에 해당하는 사건이 전개되고 마무리되는 과정을 소설적 요소로 버무려서 읽는 이의 궁금증을 하나씩 풀어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 케어가 초고령사회에서 대두될 노인의료의 문제를 풀어줄 해답이라는 확신은 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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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호 교수의 동양 고전 강의 : 논어 3 - 물살처럼 도도히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심경호 교수의 동양 고전 강의 3
심경호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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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호교수님의 동양고전강의 시리즈 <논어>의 3권에는 위령공(衛靈公), 계씨(季氏), 양화(陽貨), 미자(微子), 자장(子張), 요왈(堯曰)편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물살처럼 도도히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라는 부제는 격동기를 살아내는 군자로서 지켜야할 덕목들, 그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지혜에 관한 담론을 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군자라고 하면 요즈음의 시각으로 보면 고답적이고 고루한 느낌으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만, 세상사는 이치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면 품격있는 신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위령공(衛靈公)편의 제18장을 보면, 君子病無能焉不病人之不己知也(군자병무능언이오 불병인지불기지야니라)라고 했습니다. 해(解)를 보면, “군자는 자신의 무능함을 병으로 여기지,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병으로 여기기 않는다.(58쪽)”라고 했고, 역시 위령공(衛靈公)편의 제20장을 보면, 君子求諸己小人求諸人(군자구제기소인구제인이니라)라고 해서 “군자는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찾는다(62쪽)”라고 하는 대목이나, 제22장에 나오는 君子不以言擧人不以人廢言(군자불이언거인하며 불이인폐언이니라)라고 해서, “군자는 말을 잘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등용하지 않고 사람이 나쁘다고 해서 그의 좋은 말을 버리지 않는다.(66쪽)”라는 대목은 요즈음 신사라면 갖추어야 할 덕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군주가 갖추어야 할 덕목도 논하고 있습니다. 요즈음으로 치면 위정자 혹은 지도자를 이르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양화(陽貨)편의 제6장에서 恭則不侮寬則得衆信則人任焉敏則有功惠則足以使人(공즉불모하고 관즉득중하고 신즉인임언하고 민즉유공하고 혜즉족이사인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저자는 “공손하면 모욕을 받지 않고, 너그러우면 많은 사람을 얻게 되고, 신실하면 남이 나를 의지하고, 민첩하면 공적을 세우고, 은혜로우면 충분히 사람을 부릴 수 있다.(160쪽)”라고 해설하셨습니다.

 

감히 비교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요즈음의 저의 심경이라고 할 대목도 발견했습니다. 양화(陽貨)편의 제5장, 子曰夫召我者而豈徒哉如有用我者吾其爲東周乎(자왈, 부소아자이기도재리오 여유용아자인댄 오기위동주호인저)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부르는 것이 어찌 공연히 하는 일이겠느냐? 나를 써 주는 자가 있으면 나는 동쪽의 주나라를 만들 것이다.’(158쪽)”라고 해석하셨는데, 이 구절은 노나라의 계씨의 가신 공산불요(公山弗擾)가 반란을 일으킨 다음에 공자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공자가 이 부름에 응하려 하자 자로가 왜 가시느냐고 따지자, 이처럼 답변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천하에 허물을 고칠 수 없는 사람이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는데, 결국은 공산불요가 잘못을 고치지 못할 위인이라는 것을 알고 찾아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공자와 같은 성인의 경우도 진퇴를 결심하는 일이 참으로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가슴에 품은 포부는 큰데 불러서 써주는 곳을 찾지 못한 답답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직마다의 특성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진심을 다하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습니다. 마침 양화(陽貨)편의 제4장 子之武城聞弦歌之聲夫子莞爾而笑曰割鷄焉用牛刀(자지무성하사 문현가지성하시다. 부자완이이소왈, 할계언용우도리오)라는 대목입니다. “공자께서 무성에 가시어 현악에 맞춰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들으셨다. 공자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 소위 문화예술의 정치를 뜻하는 현가지성(絃歌之聲)과 ‘소 잡는 칼로 닭을 잡는다’는 뜻의 우도할계(牛刀割鷄)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공자께서 제자들과 함께 자유가 맡아 다스리는 무성에 갔는데, 큰 정치의 도구라고 할 예악으로 작은 고을 무성을 다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는 자유의 통치기술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자유의 인물이 무성이라는 작은 고을에 머물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한데 기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조직을 다스리를 기술은 원리는 조직의 크기에 따라 달라질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예악은 어느 조직이라도 통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심경호교수님이 해설로 읽는 동양고전시리즈 <논어> 읽기를 마쳤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저 일독한 셈입니다. 곁에 두고 때때로 읽어 일상의 삶에 곁들여 새기다 보면 이해의 깊이가 더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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