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집을 나설 때 흰 와이셔츠에 검은색 양복바지와 검은 색 재킷을 입었더니 만나는 사람마다 다들 '어디 장례식장 갈 일이 있느냐'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5주기라서 그렇게 입었을 뿐이라고 했더니 반응들이 참 재미있었다. '벌써 5년이나 지났느냐' 묻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노빠라고 오해받아요'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노골적으로 그렇게 하면 욕 먹어요'하는 사람이 있기에,

"아니, 내가 돌아가신 분과 썸 좀 탔기로서니 그게 왜 욕까지 먹어야 되지? 죄없는 사람을 붙잡아 죽도록 팬 것도 아니고, 무단횡단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했더니 다들 웃었다.

 

겉으로는 다들 '평화와 공존'을 주장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괜한 트집과 비난으로 분열을 조장하는 위선적인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나는 누가 박정희와 썸을 타든, 히틀러와 영혼 결혼식을 올리든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다. 다만 자신의 생각을 나에게 강요하거나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비난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을 비난해야 마땅한가.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 "천안함 사건으로 국군 장병들이 숨졌을 때는 온 국민이 경건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애도하면서 지나갔는데, 왜 이번에는 이렇게 시끄러운지 이해를 못하겠다"며 "박근혜 대통령이 눈물을 흘릴 때 함께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은 모두 다 백정"

 

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또 어찌해야 하는가.

“여러분 아시지만 한국은요. 이번에 정몽준씨 아들이 (세월호 희생자와 실종자 가족들을 향해) ‘미개하다’고 했잖아요. 사실 잘못된 말이긴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거든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위에 인용한 두 사람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일 뿐이다. 비난이나 트집은 적어도 이성이 있는,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사람에게나 할 일이다. 개과천선의 소지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 말이다. 위의 두 사람은 변화의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이성이 없는 가엾은 영혼일 뿐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가엾은 영혼을 구제해 달라고 조용히 기도를 올려야 한다.

 

재킷을 입고 나왔더니 덥기는 덥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영혼이 없는, 웃기는 짬뽕들이 너무도 많이 보인다. 그들 모두를 위해 기도하자면 오늘 저녁은 기도 시간이 많이 길어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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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큰 유리창이 있는 버스를 탔다
레이첼 사이먼 지음, 이은선 옮김 / 홍익 / 2004년 3월
평점 :
절판


한여름처럼 뜨거웠던 날씨가 뭉근하게 풀어지는 시간입니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감정의 기복이 심했던 하루였어요.  내 속에 감춰진 모든 감정들을 낱낱이 끄집어내서 주변 사람들에게 전시라도 하려는 듯 감정 절제가 맘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날씨 탓이려니 하기에는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해지고, 인간의 성숙도라는 게 고작 이것이구나 생각했었습니다.  레이첼 사이먼의 <세상에서 가장 큰 유리창이 있는 버스를 탔다>를 꺼내 읽었습니다.  오래 전에 후다닥 읽었던 탓에 마치 오늘 처음으로 읽는 책처럼 새롭습니다.  작가 레이첼 사이먼이 자신과 정신지체 장애가 있는 동생 베스의 이야기를 마치 소설처럼 담담하게 써내려간 이야기.

 

"내가 성인군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버스에서 처참한 가족사를 재현하는 베스에게 연민의 정을 느낄 만큼 마음이 넓은 언니였으면 좋겠다.  바꿀 수 없는 걸 순순히 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바꿀 수 있는 걸 바꾸는 용기와, 둘의 차이를 알 만한 지혜가 있었으면 좋겠다.  베스가 저 정도인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베스가 운전기사 70명의 스케줄을 외우고, 인종차별주의자한테 당당히 맞서고, 글을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내 주변 사람들처럼 정신지체인은 신이 내린 천사라고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베스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p.292)

 

레이첼에게는 언니 로라와 11개월 차이의 동생 베스, 남동생 맥스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이혼한 후 한동안 엄마와 함께 살았지만 엄마가 전과자인 남자와 재혼을 한 후 레이첼은 학교 기숙사로, 맥스와 로라는 아버지의 집으로, 그리고 베스는 엄마와 함께 떠돌게 됩니다.  가정폭력의 성향이 있던 엄마의 새 남편으로부터 간신히 도망친 베스는 다시 어버지에게 맡겨집니다.  베스를 차에 태우고 출퇴근을 하던 아버지는 그 기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지쳐가고 어느 날 베스는 정신지체 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공동주택으로 보내집니다.  그리고 가족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베스는 그곳을 나와 독립을 합니다.  베스가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마을을 여행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작가이자 대학 교수인 레이첼은 언제나 바쁜 생활입니다.  베스를 잊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딱 1년만 자신과 함께 버스 여행을 하자는 베스의 제안에 레이첼은 그렇게 하기로 결심합니다.       

 

"베스에게는 하루하루가 독립기념일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인생의 절반을 살기까지는 독립기념일과 거리가 멀게 지냈고, 이후로 인생의 4분의 3 지점까지는 흡사 반군(叛軍) 간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혼자 살기 시작한 이후로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모두에게 나름대로의 인생과 자유와 행복 추구권이 있다는 결의를 날마다 새롭게 다지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베스의 이런 면이 좋다.  베스는 선택권의 횃불을 당당하게 지켜든 용감한 전사인 셈이다."    (p.227~p.228)

 

연인이었던 샘과 헤어진 후 느꼈던 외로움과 절망에서 비롯된 레이첼의 약속은 결코 녹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버스를 타는 베스를 뒤쫓는 것도, 버스에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베스를 이해하는 것도,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는 베스를 지켜보는 것도 레이첼에게는 버겁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나도 좋은 언니가 되는 가이드북을 언제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으면 좋겠다.  진정한 자립심이 무언지 가르쳐줄 수 있게.  아끼는 마음과 구속하려는 마음 사이에 경계선을 확실히 그을 수 있게."    (p.237)

 

38살인 베스는 버스 여행을 통하여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우정을 나눕니다.  때로는 그녀를 무시하는 승객들과 언성을 높이며 다투기도 하지만 베스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버스 노선과 스케줄을 외우고 자신을 좋아하는 버스 기사를 기억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버스를 갈아탑니다.  베스와 동행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레이첼도 그들과 친구가 됩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버스 기사는 베스에게도, 레이첼에게도 삶의 진실을 가르쳐주는 스승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친구와 함께 배꼽을 쥐며 웃고 있는 베스의 얼굴을 쳐다본다.  베스는 지금까지 많은 절망과 공포를 겪었지만 자기연민의 표정을 지은 적은 없다.  단 한번도 그 비슷한 표정조차 지은 적이 없다.  그래.  자기연민부터 없애기 시작해야겠다."    (p.315)

 

"파란 버스의 주인공 멜라니는 오래전에 가까운 친구를 교통사고로 잃은 적이 있다고 말한다.  조금 전까지 통화를 했던 친구인데, 30분 만에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10분 뒤를 짐작할 수 없는 게 인생이에요.  나만 하더라도 저 모퉁이를 돌면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걸요?  그러니까 친구가 되자 이거예요.  많이 베풀며 살자 이거예요."  나는 그 말을 내 기억의 수첩에다 적는다. '모퉁이를 돌면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게 인생이다.'  멜라니의 말이 다시 뇌리를 때린다.  내가 먼저 누군가의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그 말이."    (p.317) 

 

언니라는 이름은, 혹은 가족이라는 단어는 처음부터 그 말 속에 사랑을 담고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요.  어쩌면 우리는 불편하다는 이유로, 바쁘다는 핑계로, 그 말 속에 마땅히 담겨야 할 사랑을 철저히 외면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레이첼은 어른이 된 베스의 몸을 간지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잊었던 사랑을 다시 불러오려는 것처럼.  나도 어쩌면 아주 오래 전에 잊었던 가족 간의 사랑을 영영 멀리한 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잊혀진 사랑을 되찾기 위해 나도 언젠가는 낡은 버스를 타고 익숙한 거리를 하루 종일 돌아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베스와 레이첼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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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나 자신을 방치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삶에 '직무태만'을 작정하는 이 시간이 어쩌면 세월의 잔물결이 짐짓 모르는 체 낙서를 하는 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기억의 백사장에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금세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되살아나곤 합니다. 이런 양가감정 중에 어느 게 우선이라고 말히기는 어렵습니다.

 

 

오늘 아내와 아들놈은 장인, 장모와 함께 여행을 떠났습니다. 6박 7일의 짧지 않은 여행입니다. 아내는 로밍을 해도 전화를 받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크루즈 내에서는 전화가 되지 않는다는군요. 한 번도 크루즈를 타본 적 없는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렇답니다. 저는 이제 일주일 동안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일을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아침부터 온몸의 기운이 쭉 빠져나간 기분이었습니다. 그 길을 따라 쓸쓸함이 되밀려 왔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무기력이 다 식은 배달 음식처럼 날라 왔던 것입니다. 때 이른 더위가 눅지근하게 내려앉는 한낮, 형광등 불빛마저 짜증스럽습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오늘이 '부부의 날'이라고. 시도 때도 없이 날아 들어 나를 곤혹스럽게 하던 아내의 문자 메시지도 오늘은 잠잠합니다.

 

 

넝쿨 장미가 흐드러진 5월의 끝자락입니다. 약간의 쓸쓸함이 바람에 실려 오가는 듯합니다. 주말부부로 지낸 지 한참 되었건만 마음에 이는 작은 파문을 어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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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논쟁 - 괴짜 물리학자와 삐딱한 법학자 형제의
김대식.김두식 지음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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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조직의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조직원은 열이면 열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고, 그 의견의 배후에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의도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직이 크면 클수록 통일된 의견을 취합할 수도 없을 뿐더러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고자 했던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편법과 권모술수만 난무하게 된다.

 

서울대 물리학과의 김대식 교수와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김두식 교수 형제가 대담 형식으로 엮은 <공부 논쟁>은 현재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 전반에 걸친 여러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  이런 까닭에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함을 느꼈다.  이 책의 내용에 나는 왜 적극적으로 수긍하지 못했을까?  형제이면서 둘 다 교수 직함을 갖고 있는 두 명의 엘리트에 대한 반감일까, 아니면 그들에 대한 부러움에서 오는 열등의식일까?  나는 리뷰를 대신하여 내가 느꼈던 불편함의 원인을 찾고자 한다.

 

첫번째 의문은 모든 조직의 문제점을 파악할 때 타 조직과의 비교는 필수적인가? 하는 문제이다.  내 생각을 미리 말하자면 '노(no)'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와 현실을 타 국가의 그것과 비교하는 일차적인 목적은 우리나라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개선 발전하기 위한 것인데 과연 그렇게 되는가.  예컨대 부모님이 자신의 아이를 자극하여 발전을 도모코저 할 때, 소위 '엄친아'와의 비교를 밥 먹듯이 하지만 과연 아이가 '엄친아'에 근접하거나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가.  그보다는 오히려 '엄친아'를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아이에게 좌절감과 패배의식만 심어주지 않던가.

 

"일본의 장인 씨스템이 독일의 대학 씨스템을 만나 일본 과학의 발전을 일구어냈다면, 우리나라는 선비문화가 그대로 대학문화로 이어졌어요.  조선시대에 관직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장원급제도 해야 하지만 좋은 서원 출신일 필요가 있었잖아요.  이게 지금 우리나라의 학벌로 연결되는 거죠.  어느 대학 출신.  미국 박사라는 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에요.  공부로 끝장을 보면 문제가 없죠.  그런데 공부가 항상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한 수단인 게 문제예요."    (p.173~p.174)    

 

두번째는 잘못된 역사의 순환고리에서 그 사슬을 끊을 자신감과 실천의지는 문제점의 파악만으로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다.  어떤 문제점의 인식과 실천의 문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조직원이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포기하고, 때로는 조직원들로부터의 욕설과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밀고 나아가지 않는다면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  즉, 문제점의 파악과 인식만으로는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나도 안다.  자신이 속한 조직의 문제점을 스스로 지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그러나 대학 내부의 껄끄러운 제반 문제들, 엘리트주의의 한계와 우리나라 공교육 씨스템의 문제 등 나열하자면 끝도 없는 문제들을 언제까지 지적만 하고 있을 것인가.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나라의 교육 주체(학생, 교사, 학부모)의 통렬한 반성과 실천 의지가 아닐까.  그것이 없다면 역사는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 책의 대부분은 공부, 엘리트, 탁월성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이 나오지 못하는 이유, 장원급제 DNA와 장인 DNA의 차이, 과장된 이공계 위기, 영재교육의 문제점 등을 이야기하다보니 논의는 자연스럽게 비평준화 시대의 경기고와 현재의 특목고로 상징되는 엘리트주의의 한계로 모아졌고, 고교 평준화, 대입 단순화, 서울대 개혁이라는 대안으로 이어졌습니다."    (p.10)

 

자신이 속한 조직의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 타 조직과 비교함으로써 객관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쯤 생각해야 될 문제는 비교하는 대상을 비교 당하는 대상이 비교를 통하여 우상화하고 있지는 않는지, 조직원의 자격으로 조직의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써 '나는 비록 이런 더러운 곳에 속해 있지만 적어도 문제점을 말하고 비판할 수는 있다.  그러므로 나는 깨끗하다.'는 자기변명이나 자기합리화는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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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부탁이나 의견에 있어 오직 '예스(yes)'만 남발하는 사람이 자신은 성실하며, 책임감이 강하고, 윗사람을 존중할 줄 알며, 희생정신이 강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한편 사교적이며, 아랫사람에게는 모범이 되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 역겨움을 느낀다.  게다가 '노(no)'라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 거만하며, 성격이 까칠하고, 독선적이며 배려할 줄 모르고, 이기적이며, 예의가 없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고 비판한다면 나는 역겨움을 넘어 인간 이하로 본다.

 

사실 우리나라와 같은 서열 중시 문화에서 성장한 사람 중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노(no)'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말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 나름의 용기가 필요했을 터이다.  그 말을 겉으로 표현하기까지의 심리적 갈등과 불안 심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개중에는 어떠한 갈등도 없이 내키는 대로 내뱉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어린애가 아니라면 말이다.

 

나는 사람들이 '노(no)'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그 사람의 게으름과 비겁함으로 판단하고 있다.  예컨대 어떤 부탁에 대해 '노(no)'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이미지나 이해득실에 타격을 받지 않기를 바란다면 장황한 설명이나 변명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상황이 싫은 것이다.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사실 그게 편하다.  또는 어떤 논리에 대해 '노(no)'를 외칠 경우 분명한 근거로 상대방을 납득시켜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다거나 혹시 상대방으로부터 괜한 미움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대부분 '예스(yes)'라고 말하게 마련이다.  영혼도 없이 말이다.

 

나도 이제는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고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려야 할 위치에 서 있지만 무턱대고 '예스(yes)'만 외치는 사람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의사가 분명한 사람이 '예스(yes)'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의 진심과 정성이 담길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번 세월호 참사는 우리나라의 서열 중시 문화가 하나의 원인이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이야말로 떼거리 문화, 온정주의 비리를 혁파할 수 있는 방패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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