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길잡화점
이민혁 지음 / 뜰book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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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깊으면 그리움의 꼬리가 길다. 석양의 햇살을 받은 시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지 않는 것처럼 그리움의 시간이 두려워서 눈앞의 사랑을 밀쳐낼 수 없는 게 인간의 운명이다. 우리는 그저 사랑에 맹목적일 수밖에 없는 사랑의 청맹과니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닥치는 인생의 모든 비극은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사랑이 없으면 인생 자체도 무의미하며 우리에게 닥칠 그 어떤 비극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사랑의 품은 넓고 크니까.


이민혁의 소설 <복길 잡화점> 역시 사랑 때문에 울고 웃는 한 집안의 2대에 걸친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1970년대에 시작된 경석과 연화의 사랑과 이제 막 꽃을 피우는 그들의 아들 복길과 민정의 이야기.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알게 모르게 그들의 사랑은 닮아 있다. 그리고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닌 그들을 둘러싼 주변 이웃들의 내면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사랑도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을 한결 따뜻하게 한다.


"세상 모든 것을 녹이려는 듯 벌벌 끓던 태양도 주황빛 숯처럼 식어버린 저녁. 막차를 몰고 온 버스 기사는 "안 탈 거요?"를 외치다 먼지를 일으키며 떠나갔고 경석과 연화는 다시 뜨겁게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할 때까지 정류장과 아까시나무 사이를 수없이 걷고 또 걸었다."  (p.2)


좌판에서 장사를 하던 경석은 고등학생인 연화를 사랑한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입대를 하게 된 경석은 연화에게 사랑 고백을 하고 제대할 때까지 기다려 줄 것을 부탁한다. 월남전에 파병되었던 경석이 무사히 제대를 한 후 결혼과 함께 열게 된 복길 잡화점. 부지런하고 올곧은 성격의 경석과 마음씨 착한 연화는 작게 시작한 가게 복길 잡화점에 이어 복길 마트를 개업함으로써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어렵게 낳은 복길이 결혼을 하여 딸 소리를 얻었지만 병으로 아내를 잃고 만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소리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보살핌 속에서 밝게 성장한다. 게다가 어려운 시기에 경석 부부의 도움을 받았던 민정이 잡화점을 똑소리 나게 운영하는 한편 엄마처럼 혹은 언니처럼 소리를 돌본다. 철이 없는 복길은 자신이 벌였던 사업을 말아먹고 결국 경석으로부터 복길 마트를 넘겨받게 된다. 그러나 복길 마트 주변에 대형 마트가 입성함으로써 고객을 잃은 복길 마트는 사양길로 접어든다. 그런 와중에 청천벽력과 같은 연화의 치매 소식이 전해지고 어떻게든 연화의 병을 극복하려는 경석의 눈물겨운 노력이 진행되는데...


"연화는 저녁마다 '벅시'에서 풍겨오는 이국적인 버터 향을 맡으며 계산대에 앉아 군침을 삼켰었다. 지금껏 한 번도 저기 가서 식사를 해보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경석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저곳을 얼마나 동경했는지⋯. 하지만 과거의 기억대로 움직이는 것이지만 좀처럼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은 경석이 우뚝 멈춰선다. "내가 꼭 한 번 당신 데리고 가고 싶었단 말야." 경석은 이미 새 원피스를 사주며 과거의 기억을 왜곡해버렸음에도 또다시 '벅시'에 데려가고 싶은 마음에 떼를 쓰고 있다."  (p.157)


연화가 세상을 뜨고 결국 혼자 남게 된 경석. 그의 곁에는 아들 복길이 사랑하는 민정과 손녀 소리가 있다. 복길이 연화의 치매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직원들과 함께 벌였던 눈물겨운 헌신은 철이 없었던 아들 복길을 움직였다. 복길은 자신의 부모가 걸어왔을 고난의 세월을 경석이 연화를 위해 재현했던 과거의 경험들을 통해 보고 배웠다. 복길의 행동은 그렇게 서서히 바뀌어 갔다. 곁에서 복길과 경석을 위해 노력하는 민정의 헌신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제 그들의 온기는 영원히 사라졌고 그 온기를 채워야 할 세대가 바로 자신이 됐음을 알게 된 복길은 두려움부터 앞선다. 그들이 나에게 주었던 만큼 나도 해낼 수 있을까. 이 집의 온기는 영원히 식지 않을 거란 믿음을 아이들에게 줄 수 있을까. 이 집의 지붕은 온갖 비바람을 막아줄 거란 인식을 가족들에게 남겨 줄 수 있을까. 복길은 이제 이 집의 새 주인이자 경석의 자리를 물려받은 가장이 되었다."  (p.224~p.225)


사랑이 깊으면 그리움의 꼬리는 더욱 길고 어둡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우리가 마지막에 가져가야 할 것은 사랑했던 기억들뿐이기 때문이다. 날이 차다. 그러나 성탄절 연휴를 맞는 사람들의 가슴은 왠지 모르게 따뜻하다. 사랑은 그렇게 사람들의 온기 속으로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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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지듯 당신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을에 이어 겨울 이야기가 덧붙여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낭만도 뭣도 아닌, 어느 월간지의 별책부록처럼 누군가의 이야기가 우연처럼 끝없이 덧대어져 마침내 관계의 미로를 형성하게 됩니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관계의 미로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속한 시대를 함께 살아온 어느 악인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늘 그렇듯 시대를 이끌어가는 것은 그 시대의 악인이 담당해야 할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그 악인의 이야기에 수없이 많은 당신의(혹은 당신이라는 익명의) 이야기가 덧붙여집니다. 역사는 그런 것이지요.


맹위를 떨치는 동장군의 기세는 한낮에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하의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은 저마다 플라스틱 썰매를 한 손에 거머쥐고 아파트 인근의 공원 잔디밭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잔디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은 한낮이 되어서도 녹지 않았던 것입니다.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아이들은 해맑은 웃음과 함께 아래로 아래로 내달립니다. 썰매의 매력은 내가 적응할 수 있는 속도를 적당히 추월하는 데 있습니다. 내 예상을 앞지른 썰매의 속도는 약간의 긴장감에 공포와 스릴을 더하곤 합니다. 그럴 때 삶은 마냥 더디게 흐를 것만 같습니다.


"최근의 여론 조사는 미국인들이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자산이 버텨주는 나이보다 오래 사는 일을 더 두려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조사에서는, 나이 많은 미국인 대부분이 여전히 은퇴를 ‘휴식의 시간’으로 보고 있음에도, 자신이 전혀 일하지 않으면서 말년을 보내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겨우 17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p.109~p.110)


저널리스트 제시카 브루더의 저서 <노마드랜드>를 읽고 있습니다. 2008년 금융 위기의 여파로 타격을 입은 이들의 삶의 형태가 어떻게 무너지고 변화되었나를 차분하고 날카롭게, 그리고 인간미 넘치는 시선으로 조명하는 이 책은 각자도생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되짚어보게 합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고가의 명품백을 장난감처럼 수집하기도 하고, 탐욕에 눈이 먼 재벌들을 대동하여 소맥 파티와 떡볶이 먹방을 선보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어느 악인의 이야기에 수없이 많은 당신의(혹은 당신이라는 익명의) 이야기가 덧붙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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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밖의 모든 말들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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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이미 전조가 있었다. 목요일 오후부터 시작된 비가 주말을 앞둔 금요일 오후까지 이어지더니 주말을 맞는 사람들의 들뜬 기분에 찬물이라도 끼얹겠다는 것인 양 바람이 불고 풀풀 눈발이 치고 있었다. 스산한 날씨였다. 목요일부터 시작된 스산한 날씨에 대한 전조는 주말까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아파트 인근의 중학교 운동장에는 운동을 나온 어느 할머니의 무거운 발걸음이 십여 분째 이어지고 있다. 어두운 구름 사이로 잊혔던 햇살이 문득 고개를 내밀고 거세지는 바람결을 따라 불현듯 사라지곤 했다. 자맥질을 하듯 언뜻언뜻 겨울 햇살이 되살아나는 동안 나는 운동을 하는 할머니의 지친 발걸음을 주시하고 있었고, 발끝에 매달린 삶의 무게에 나의 생각이 잠깐 머물렀다 사라지곤 했다.


"나는 요즘 할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보다 더 자주 할머니에 대해 생각한다. 원래 할머니는 내게 북쪽과 남쪽의 거리만큼 아주 멀리 계셨던 분이므로 나는 그 부재에 대해 실감이 없고 그러니 마치 살아 계신 듯 느껴지기도 한다. 여전히 실감과는 거리가 있는 태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점은 이제 비로소 어떤 용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할머니와 가까웠든 가깝지 못했든 할머니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찾아든 할머니의 부재, 그 공평한 부재 속에서 '나의 할머니'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모두 다 보고 싶다는 할머니의 말, 그 말을 곱씹는 데서 시작해, 조금씩 그러나 오래오래."  (P.21~P.22)


김금희 작가의 산문집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을 읽었다. 데뷔 11년 만에 펴낸 작가의 첫 번째 산문집이라는 이 책은 데뷔 직후 발표한 글부터 2020년 3월 초 문을 연 '주간 문학동네'에 연재한 글들 중 42편을 뽑아 묶었다고 한다. 대학시절 이야기나 친구와의 일화, 엄마를 잃은 엄마에 대한 관찰과 할머니에 대한 회상, 특이한 택시를 탔던 기억, 출판 노동자 시절 이야기 등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이 작가의 올곧은 시선에서 재해석된다. 누구나 그렇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내는 일은 마치 스산한 겨울 날씨를 견디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어느 할머니의 발걸음처럼 무겁고 힘겨운 일일 터, 그와 같은 작은 발걸음들이 모여 지금의 김금희 작가를 있게 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아픈 기억을 버리거나 덮지 않고 꼭 쥔 채 어른이 되고 마흔이 된 날들을 ㅜ회하지 않는다. 아프다고 손에서 놓았다면 나는 결국 지금보다 스스로를 더 미워하는 사람이 되었을 테니까. 그리고 삶의 그늘과 그 밖을 구분할 힘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대개 현명하지 않은 방법으로 상처를 앓는 사람들이지만 그래서 안전해지기도 한다고 믿는다. 삶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갖게 될 것이고, 느끼게 될 것이고, 마음먹게 될 것이며 결국 나가서 걸을 수 있을 것이다."  (P.5~P.6 '서문' 중에서)


1부 '언제나 귤이었다', 2부 '소설 수업', 3부 '밤을 기록하는 밤', 4부 '유미의 얼굴', 5부 '송년 산보' 등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김금희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애독자들에게 작가에 대한 또 다른 매력을 선물하는 귀중한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소설가의 실제 모습을 소설 속에서는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죽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근원적으로 품고 가야 하는 고통이자 딜레마다. 죽음이 어떻게 다루어지는가는 어떻게 사는가만큼이나 중요하다. 죽음을 덮거나 피하지 않고 진정으로 애도할 수 있는 사회 그럴 수 있도록 사회의 공기를 조성하고 충분히 슬퍼하고 분노할 수 있게 하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만이 삶은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죽음이 고유해질 때 우리 모두는 숫자 속에 숨은 익명이 아니라 고유한 개인이 되어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안녕이라고 말하지 못한 이별들은 은폐되거나 덮이는 것이 아니라 기억되고 말해져야 한다."  (P.208)


숨었던 햇살이 제 속살을 내보이며 다시 나타났다. 빈 운동장을 하염없이 걷던 할머니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바람은 여전히 거세고 밀려난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언뜻언뜻 고개를 내밀고 있다.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 관객을 목전에 두고 있다. 누군가의 죽음을 익명으로 처리하려 했던 자들, 자신이 얻은 권력을 마치 전리품처럼 인식하여 사적인 욕심을 극대화하려 했던 자들, 그들에 의해 저마다의 고유성을 상실한 채 익명의 죽음을 맞아야만 했던 사람들의 영혼이 우리를 영화관으로 이끌고 있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하여, 세월호 참사에 대하여, 그리고 이태원 참사에 대하여 우리는 충분히 슬퍼하고 분노할 수 있었던가. 안녕이라고 말하지 못한 이별들이 가슴에서 응어리로 맺힌 기억들이 우리에겐 너무도 많았던 게 아닌가. 빈 운동장을 걷는 누군가의 발걸음이 한없이 가벼워질 그날이 오기를 기원하며 나는 김금희의 산문집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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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하는 날씨를 몸이 못 따라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일주일 쌓인 피로가 주말에도 풀리지 않는다. 20도를 넘나드는 기온에 봄인지 겨울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날씨. 나는 께느른한 몸을 이끌고 친구와의 점심 약속에 나갔었고, 자리를 옮겨 차를 한 잔 마셨고, 의자 아래로 가라앉을 것만 같은 무력감에 귀가를 서둘러야만 했다. 해가 갈수록 삶이 녹록지 않다고 느끼는 까닭은 기후 변화에 적응하는 일조차 점점 힘에 겹기 때문이 아닐까.


최근 우리나라 국민 중 많은 이들이 뉴스를 보지 않는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종편을 포함한 지상파 언론사에서 송출하는 뉴스의 보도 행태나 질이 어느 유튜버의 코멘트보다도 못한 실정이니 누가 굳이 시간을 내어 그 같은 저질의 뉴스를 시청할까마는 그럼에도 대한민국 정치 수준은 나날이 떨어져 80년대 군부독재 시절 이전으로 회귀하는 듯한 모습을 볼 때마다 그저 씁쓸하기만 하다. 이와 같은 현상을 초래한 데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지금까지 수면 아래에서만 존재하던 '꼴통 보수'가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여 대한민국 정치판을 흔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극우'나 '정통 보수'가 아닌 '꼴통 보수'라는 용어는 세계 어느 나라의 정치 사전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특수한 언론지형에서나 가능한 단어일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꼴통 보수'는 첫째 나와 사상이 다른 이는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여 대화가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생각하며, 둘째 나의 이익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물론 어느 정도의 불법 행위는 언제든 용인되며), 셋째 자신이 믿는 종교의 유일신도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으면 언제든 배신할 수 있으며(이를테면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말했던 어느 목사의 발언처럼), 넷째 나와 사상이 다른 상대방에 대해서는 최고 권력자라고 할지라도 입에 담을 수 없는 갖은 욕설을 퍼부을 것이며(대통령을 향해 공산주의자 또는 간첩이라고 지칭하였지만 처벌은 받지 않음), 다섯째 자신의 모국인 대한민국보다 일본을 더 사랑하며, 여섯째 검찰이 자신을 기소하지만 않는다면 자신이 지닌 권력을 축재의 정당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좋게 말하면 '돌+아이'이고 나쁘게 말하면 '꼴통 보수'인 그들이 대한민국에서 활개를 치고 다닐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들에게 우호적인 언론지형과 검찰을 포함한 권력의 비호와 두둔이 늘 그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위에서 나열한 '꼴통 보수'의 특성은 순전히 나의 판단이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혹여라도 현재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인 어떤 사람을 떠올린다면 그것은 오해라고 말하고 싶다. 교수신문이 선정한 2023 올해의 한자성어는 '견리망의(見利忘義)'가 꼽혔다고 한다.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다'는 뜻의 견리망의는 '꼴통 보수'의 모토가 아닌가. 그와 같은 사자성어가 뽑히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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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3-12-10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의 한자성어가 시사하는 바가 크네요.

꼼쥐 2023-12-16 13:03   좋아요 0 | URL
교수신문이 선정하는 올해의 한자성어가 대개는 뜬금없지만 올해는 비교적 적당하지 않았나 싶어요.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비비언 고닉 지음, 서제인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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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관심은 오히려 부담스러울 때가 많다. 평소에 가깝다고 느끼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나에 대한 세세한 질문을 퍼붓거나 지난달보다 살이 조금 빠졌다거나 쪘다거나 하는 식의, 나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추측성 정보를 마치 사실인 양 단언하면서 살갑게 다가서려는 모습 등은 거북하기 이를 데 없지만 악의가 없는 상대방을 야멸차게 밀어내는 것도 차마 못할 짓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고 마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사회생활에 있어서 타인과의 적당한 거리를 산정하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닥치는 갈등 중 8할 이상은 서로 간의 거리를 잘못 책정한 탓일지도 모른다. 가깝지도, 그렇다고 너무 멀지도 않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반응의 부재는 내 삶에서 하나의 존재로 변했다. 이 존재에서는 고립의 감각이 흘러나왔고, 그 감각은 점점 더 꾸준하게 구석구석 스며들었다. 그 스며듦에서 하나의 진공 상태가 만들어졌다. 그 진공 상태 속에서 나는 외로움뿐 아니라 내가 단절되었음을, 피해야 할 인간 본연의 상태가 됐음을 느꼈다.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다는 극심한 욕구에 사로잡힌 나머지, 나는 스스로 생각해왔던 것보다 한층 더 즉각적인 경험을 중시하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나는 내면의 균형을 잃어가고 있었는데, 그 균형의 불안정함은 나를 놀라게 했다."  (p.193~p.194)


미국의 에세이스트이자 비평가인 비비언 고닉의 저서를 처음 만났던 건 지난여름, <사나운 애착>을 통해서였다. 회고록 장르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그 책 덕분에 나는 비비언 고닉이라는 에세이스트의 매력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손에 잡은 고닉의 저서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는 책에 대한 소개보다도 제목에 이끌려서 읽게 되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주변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과 간섭 탓에 몇 번 마찰을 빚었던 나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나만의 공연을 펼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결혼은 친밀감을 약속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면 유대감은 부서져 내린다. 공동체는 우정을 약속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면 참여는 끝이 난다. 지적인 삶은 대화를 약속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 삶의 신봉자들은 괴상해진다. 사실은 정말로 혼자 있는 게 더 쉽다. 욕망을 불러일으키면서 그것을 해결해주려 하지 않는 존재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p.216)


비비언 고닉이 관찰하는 세계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 지구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풍경들이지만 그녀의 눈은 마치 현미경과 같아서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사소한 것들, 그 무수히 많은 세세한 조각들을 통하여 마음에 의문으로만 남았던 여러 정황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 이를테면 우리가 바쁘다는 핑계로 그냥 지나쳤던 여러 실마리들을 고닉은 하나하나 찾아내어 우리 앞에 펼쳐놓는 것이다. 그리고 차근차근 설명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러이러해서 슬펐으며, 저러저러해서 외로웠으며, 그것에서 벗어나려면 이러이러한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그 후에 내가 외로움에서 나 자신을 비틀어 떼어냈던 게 기억난다. 외로움은 나를 겁에 질리게 했다. 몸이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알기로 균형이야말로 모든 것이었다. 나는 내 주위 잔디밭을, 건물들을, 주차장을, 직무가 무엇보다 중요한 이 조그맣고 빈틈없는 세계를 둘러보았다. 이 세계에서 내가 훌륭하게 작동하는 방법을(다시 말해 무례한 모욕을 피하고 어디까지 굴복할지 한도를 조절하는 방법을) 익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 똑바로 앞을 보고, 입을 다물고, 온전하게 균형을 잡는 것이었다. 삶의 크기가 얼마나 되든, 그것이 무엇으로 구성되든, 삶은 순간이라는 좁고 똑바른 길을 걸어 나가는 데 달려 있다고 나는 단호하게 생각했다."  (p.102~p.103)


책에 실린 일곱 편의 글에서 고닉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알아가는 과정이 다른 어느 것보다 소중하다고 말한다. 때로는 어려운 일에 몰두하고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살아갈 동력을 얻기도 하고,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낯선 이들을 통해 삶의 에너지를 얻는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으며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홀로 있는 것보다 더 외롭고 고독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감기 몸살 후유증으로 인해 최악의 컨디션으로 한 주를 보냈던 나는 비비언 고닉의 몇몇 문장을 통해 위로를 받는다. 20도에 육박하는 이상 고온으로 인해 계절은 다시 가을의 어느 시점으로 회귀하는 듯하다. 급변하는 날씨 탓에 사람도 자연도 몸살을 앓는다. 기후 위기가 아니라 기후 전쟁이 시작된 듯한 느낌. 전쟁과 같은 이 삶에 전하는 비비언 고닉의 위로,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는 읽는 이의 기억에 남지 않고 가슴 밑바닥에 찰랑찰랑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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