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우리 영혼은
켄트 하루프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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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하기만 하던 삶의 시간들이 썰물처럼 쓸려 가버렸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결국 오고야 마는 법이지요. 인생에 있어서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말입니다. 켄트 하루프의 소설 <밤에 우리 영혼은>의 리뷰를 쓰기에 앞서 몇 년 전 내가 겪었던 경험 하나를 소개하려 합니다. 어쩌면 나의 경험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조금쯤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여름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부인의 암 발병 소식에 모든 걸 정리한 후 단양의 작은 마을로 이사를 단행한 지인 한 분이 있었습니다. 정년 퇴임을 한 후 부부만의 호젓한 생활을 이어오던 지인 A 씨에게 있어 부인의 암 발병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었던 듯합니다. 서둘러 살던 집을 내놓고, 가재도구를 정리하여 단양의 외딴 시골 마을로 이사를 가버렸으니 말입니다. 지인 A 씨로부터 물심양면의 도움을 받아왔던 나로서는 어떻게든 찾아뵙고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내가 지인 A 씨를 만나기 위해 단양으로 향했던 것은 말매미의 울음소리가 밤잠을 설치게 하던 늦은 여름이었습니다. A 씨가 이사한 집은 마을로부터 수 킬로미터나 떨어진 산중의 외딴집이었습니다. 단출한 가구와 필수 가재도구뿐인 집안에 복잡하게 놓인 병원 장비는 방문객의 마음을 몹시 심란하게 했습니다. 병원으로부터 암 4기 판정을 받았던 A 씨의 부인은 침대에 누워 나를 맞았고, 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 안부를 묻자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세상을 뜨고 싶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남편분을 위해서라도 기운을 내시라는 인사와 함께 사람은 따뜻한 체온만으로도 위로를 느낄 때가 있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밤에 우리 영혼은> 역시 그런 소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있는 남녀 두 노인이 서로의 체온으로 삶의 고독과 인생의 덧없음을 위로하고, 젊은 시절의 격정적인 사랑이 아닌 따뜻한 말 한마디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랑의 이어짐만으로도 남은 삶을 성실히 살아갈 수 있는 의지와 힘을 갖게 되는 듯한 그런 이야기 말입니다.


"아주 좋아요. 그녀가 말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요. 좀 신기해요. 여기 깃든 우정이 좋아요. 함께하는 시간이 좋고요. 밤의 어둠 속에서 이렇게 함께 있는 것.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잠이 깼을 때 당신이 내 옆에서 숨 쉬는 소리를 듣는 것."  (p.102)


소설의 구성과 스토리는 단순하기 짝이 없습니다. 켄트 하루프가 자신의 작품에서 공간적 배경으로 즐겨 사용하는 콜로라도 주의 '홀트'에 70대의 독신 남녀인 루이스와 애디가 살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배우자와 사별한 후 혼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애디가 루이스의 집을 찾아가 본인의 속마음을 전합니다. 자신의 집에서 섹스 없이 함께 잠을 자지 않겠냐는 게 그녀의 제안이었습니다. 오해받기 십상인 제안이었지만 루이스는 애디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남남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왔던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너무도 많았습니다. 해가 지면 루이스는 애디의 집으로 가 '침대에 친구처럼 나란히 누워' 자신이 지나온 삶의 여정을 들려줍니다. 애디의 어린 딸의 죽음, 루이스가 근무했던 학교의 여선생과의 불륜으로 가정이 파탄날 뻔했던 사건 등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우리 둘 다 인생이 제대로, 뜻대로 살아지지 않은 거네요. 그가 말했다. 그래도 지금은, 이 순간은, 그냥 좋네요. 이렇게 좋을 자격이 내게 있나 의심스러울 정도로요. 그가 말했다."  (p.109)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마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고 결국 덴버에 사는 애디의 아들에게도 알려집니다. 가정불화를 겪던 애디의 아들 진은 자신의 아들이자 애디의 손자인 여섯 살 된 제이미를 애디에게 맡깁니다. 두 사람은 제이미를 함께 돌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진의 강한 반대에 부딪힌 두 사람은 결국 관계를 정리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요, 아직은 아니죠. 애디가 말했다. 나는 이 물리적 세계가 좋아요. 당신과 함께하는 이 물리적 삶이요. 대기와 전원, 뒤뜰과 뒷골목의 자갈들, 잔디, 신선한 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당신과 함께 누워 있는 것도요."  (p.141)


이전의 관계를 정리한 후 어느 날 혼자 외출에 나섰던 애디가 길에서 넘어져 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아들 진은 자신의 어머니를 덴버에 있는 병원에 입원시킵니다.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잇던 루이스는 동네 사람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덴버의 병원 이곳저곳을 수소문하여 애디가 입원한 병원을 알아냅니다. 갑자기 병문안을 온 루이스와 이에 당황한 애디는...


"오늘 밤에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 너머는 칠흑이었다. 당신, 거기 지금 추워요?"  (p.194)


결혼한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배우자와 한날한시에 죽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가능성은 기적에 가까우리만치 어렵다는 걸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최후에는 결국 혼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우리들 각자에게 지워진 셈이지요. 홀로 남아 살아야 할 날들이 길고 짧다는 차이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깊은 상실감과 고독 속에서 우리를 지탱해주는 건 곁에 있는 사람의 따뜻한 체온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칠흑과 같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딛고 조금이나마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호사는 곁에 있는 누군가의 체온과 나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시선 덕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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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퇴근 무렵에 자동차 타이어를 교체하기 위해 타이어 전문점을 들렀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궂은 날씨 탓에 평일보다 손님들이 적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은 타이어 판매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어림잡아 대기 차량만 족히 예닐곱 대는 되는 듯 보였다. '이걸 어쩐다. 되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다려서 교체를 하고 가야 하나?' 갈등을 거듭하다 결국 교체하는 쪽으로 결론을 짓고 사무실에 눌러앉았다. 다들 나처럼 날씨만 믿고 어떻게든 대기 시간을 줄여보겠다는 심산으로 이 궂은 날씨를 뚫고 예까지 온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니 제 발등을 찍은 사람들의 면면이 참으로 딱하게 여겨졌다. 동병상련의 마음이랄까, 아무튼.


어두워진 하늘에서는 눈이 하염없이 쏟아지고 끝도 알 수 없는 무한 대기의 긴 기다림만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휴대폰 액정에 코를 박고 있는 사람들과 별 내용도 없는 텔레비전 화면을 맥 놓고 바라보다 이유도 없이 채널만 돌리는 사람 등 기다림은 나를 포함한 사람들 모두에게 몸이 배배 꼬일 정도의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나 역시 딱히 할 게 없었던 건 매일반. 답답함도 풀 겸 야외에 놓인 대기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테이블에 놓인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했고, 누가 피우다 불을 끄지도 않고 버린 담배꽁초에서는 가늘고 푸른 연기가 길게 피어올랐다. 허술한 차양막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바람이 불 때마다 시린 눈발이 안쪽까지 들이쳤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던 어느 순간 웬 노인 한 분이 의자를 끌어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다짜고짜 야당에 대한 욕을 쏟아내는 게 아닌가. 자신이 여당의 지구당 위원장이라면서. 어떤 양해도 구하지 않고 나에게 말을 걸어온 것도 불쾌했지만 지지율 16%(모닝컨설트 조사)의 대통령을 찬양하는 정신 나간 사람과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누구나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있는 것이지만 그가 나보다 나이가 더 많다고 해서 내게 자신의 사상을 강요할 권리는 없지 않은가. 그는 60대 후반이나 70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인상을 쓰며 자리를 피하는 나를  쫓아오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중간중간 육두문자를 섞어가면서 말이다. 나보다 나이만 어리다면 "정신 차려, 이 미친놈아!" 하고 한마디 따끔하게 충고를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뻘의 그 사람에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대한민국 국민 중 16%에 해당하는 개, 돼지의 모습을 엊그제 직접 내 눈으로 목격하고 들었던 생각은 나는 앞으로 저렇게 늙지 말아야겠다는 것이었다. 타인의 의사를 무시한 채 내 주장을 함부로 지껄여서도 안 되겠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저 본인이 싫다는 이유로 타인을 비방하고 16%의 국민이 마치 전체 국민인 양 포장하는 그런 미친 짓은 하지 말자는 다짐을 새롭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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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황보름 지음 / 클레이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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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면 우습지만 어렸을 적 나의 꿈은 서점 주인이었다. 좋아하는 책도 원 없이 읽을 수 있고, 더불어 책을 팔아 생계도 유지할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셈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서점을 둘러싼 그때의 환경과 지금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고, 서점 주인을 꿈꾸는 일은 마치 경제적 행위에서 자유로운 어느 갑부의 소소한 일탈이나 가벼운 취미생활쯤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말하자면 서점 운영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택가의 작은 동네 서점을 열고 싶어 하는 이들의 소식을 인터넷이나 주류 언론을 통하여 더러 접하게 되는 걸 보면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꿈을 먹고 사는 이들이 건재하다는 걸 재차 확인하게 된다.


황보름의 소설 <어서오세요 휴남동서점입니다>를 읽는 동안 내 어렸을 적 꿈에 대한 대리 만족을 느낄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휴남동 서점을 개업한 주인공 영주의 자본주의 논리에서 벗어난 비현실적 행동이 답답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나 역시 꿈과 현실의 이분법적 논리에 충분히 젖어든 까닭이다. 낭만을 잃고 빠르게 변화하는 경제 논리에 너무도 쉽게 순응해 온 탓인지도 모른다. 낭만을 잃는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주도권을 다른 누군가에게 아주 손쉽게 넘겨버리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나뿐만 아니라 다들 그렇게 살아가니까, 하는 자위가 선택권을 잃은 내 삶에 대한 완전한 보상으로 작용할지 나는 여전히 그 문제에 대해 물음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


"휴남동 서점의 생활이 안정되려면, 그래, 돈을 벌어야 한다. 하지만 영주는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말을 돈을 벌어야 한다는 말로 바로 치환하기가 싫었다. 돈을 벌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대신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휴남동 서점이 안정되려면 무엇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라고."  (p.185)


다니던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며 늘 일에 치여 살던 영주. 어느 날 갑자기 그녀에게 찾아온 번아웃 증후군과 남편의 무관심으로 영주는 결국 이혼을 하고 그 길로 서점 자리를 찾아 나섰다. 낡은 집을 수리하고 서점을 개업한 후에도 영주는 언제나 자리에 앉아 책만 읽거나 우울한 표정으로 자주 울었다. 그리고 얼마 후 반도 채워져 있지 않았던 책장도 채우고, 자기 대신 커피를 내릴 바리스타도 채용한다. 책도 늘고, 독서 모임도 생기고, 글쓰기 강의도 시작되면서 휴남동 서점은 명실공히 서점의 면모를 갖춰간다.


"영주는 지금 마음껏 창인을 생각하고 있다. 과거를 떠올리고 있다. 꾹꾹 눌러두었던 생각과 감정을 꺼내놓고 있다. 과거의 이미지와 기억들이 가슴을 쿡쿡 찔러 오지만 이제는 버틸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껏 눌러두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썼기에 여전히 그녀 안에 그 모든 것이 고여 있는지도 몰랐다. 앞으로는 흘려보내야 할 것이다. 다시 얼마간 울어야 한대도 그래야 할 것이다. 그렇게 과거를 흘려보내고 또 흘려보내다 이젠 과거를 떠올려도 눈물이 나지 않게 될 무렵이 되면, 영주는 가볍게 손을 들어 그녀의 현재를 기쁘게 움켜쥘 것이다. 더없이 소중하게 움켜쥘 것이다."  (p.301)


서점 대표인 영주기 힘을 내면서 그녀 주변에 하나둘 모여드는 사람들. 대학 졸업 후 끝없는 구직 실패에 지칠 대로 지친 민준이 영주를 대신하여 2년 계약의 바리스타 알바를 시작하였고, 남편 때문에 화날 일이 많았던 로스팅 업체 대표 지미, 사는 게 아무 재미가 없다는 고등학생 민철과 그런 아들이 걱정되면서도 늘 응원 격려를 아끼지 않는 희주, 서점 구석에 조용히 앉아 뜨개질과 명상을 하는 정서, 좋아하던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삶을 그만둔 후 공허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한국어 문장 공부에 매달렸던 작가 승우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휴남동 서점을 이끌어가는 후원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매출에 신경쓰지 않고 쉬면서 딱 2년만 해보겠다고 계획했던 영주도 결국 처음 생각을 접고 다시 휴남동 서점의 미래를 구상하는데...


"영주가 해외 독립책방을 둘러보며 깨달은 점은 모든 책방이 그만의 개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개성은 책방을 운영하는 주인에게서 나왔다. 그리고 개성을 만들어가는 데 필요한 건 용기였다. 주인의 용기가 손님에게 가닿기 위해 필요한 건 진심이었다. 그러니까, 영기와 진심."  (p.358)


누구나 그렇겠지만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가다 보면 '과연 성공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한 번쯤 빠져들게 된다. 이것은 마치 생각의 늪과 같아서 한 번 빠져들면 들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악순환을 경험하게 된다. 생각의 늪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숫제 생각도 하지 않는 게 최선의 방책이겠지만 사람의 생각이라는 게 어디 그런가. 생각하지 말자고 생각하는 순간 딱 멈추고, 생각하자 싶으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인간은 늘 갈등하고, 엉뚱한 결정을 내리기도 하면서 자신의 삶을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하긴, 자신이 계획한 대로, 예상 가능한 모습으로 삶이 흘러간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밋밋하고 재미없을 것인가. 나의 삶도 그리고 다른 모든 이의 삶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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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날씨라고 해도 믿을 만큼 순하고 부드러운 날이었다. 12월도 중순을 향해 치닫고 있는데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파트 주변을 거니는 사람들의 표정은 날씨만큼이나 가볍고 여유로워 보였다. 어린 손자와 함께, 반려견의 목줄을 잡고, 혹은 연인이나 가족과 함께 기울어가는 겨울 햇살을 받으며 느리게 걷는 사람들. 우뚝 솟은 아파트 단지의 유리창에 반사되는 햇살의 눈부심. 누렇게 마른 잔디 위로 마른 햇살이 번진다.


사람들은 이따금 아무것도 아닌 일에 괜한 거부감이나 부담을 느끼곤 한다. 오늘처럼 순한 날씨에도 부담 아닌 부담을 느끼기도 하고, 산책을 하는 사람들의 담담한 시선에도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진한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연민과 거룩함, 그리고 공감과 애정이 빚어내는 저 진한 무념의 시선.


오늘 발표된 올해의 사자성어가 '과이불개(過而不改)'라고 보도되었다. 매년 교수신문이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뽑아 온 사자성어는 그해의 정치상황이나 사건에 영향을 받는 것이지만 올해는 유독 그런 느낌이 강했다. 지난달 23일부터 30일까지 교수 93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476명의 교수(전체의 50.9%)가 '과이불개'를 뽑았다고 한다. 논어의 '위령공편'에 등장하는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 즉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을 잘못이라 한다."는 구절에서 앞의 네 자만 딴 것이다.


어디 정치인들 뿐이랴. 소위 나라를 이끌고 있다는 모든 엘리트 집단이란 집단은 모두 저마다의 이익을 챙기기에 분주할 뿐 국가 전체의 안위나 서민의 삶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게 일반적이지 않은가. 비근한 예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2003년부터 논의되었고, 2007년 유엔 인권이사회의 권고에 따라 법무부가 입법 예고한 이래 현재까지 제정은커녕 공청회조차 열리지 않는 '차별금지법'만 보더라도 우리나라 기득권 세력의 공고한 이기심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오늘따라 겨울 햇살은 저리도 따사로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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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 다산책방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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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소설을 통해 작가가 독자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했던 다양한 모습을 성공적으로 그려낸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주는 쪽의 욕심이 과하면 과할수록 받아들이는 쪽의 거부감 역시 비례하여 증가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느 작가는 자신의 가치관이나 철학이 소설 속에서 더 두드러지게 드러나기를 바랄 수도 있고, 또 다른 어느 작가는 자신이 구상했던 스토리가 소설 속의 여러 인물을 통해 생동감 있게 그려지기를 바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 무게중심이 쏠리는 순간 소설은 실패로 끝나게 마련이다. 철학이나 가치관에 중점을 두면 스토리는 사변적으로 흐르게 되고 이를 읽는 독자들은 지루함에 몇 번이고 책을 덮었다 펴기를 반복하거나 인내심이 약한 독자라면 결국 완독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반면 스토리의 구성이나 인물의 생동감만을 중시하는 작가는 책을 읽는 독자들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지 도통 모르겠군.' 하는 비판을 여러 번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렇듯 까탈스러운 독자들의 욕구를 십분 만족시킨다는 건 아무리 노련한 소설가라고 할지라도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김주혜의 장편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은 그런 면에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수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600쪽이 넘는 장대한 서사이다 보니 뒤로 갈수록 재미와 긴박감이 떨어지고, 주제나 결말을 도출하기 위한 작위적인 장면이 더러 표출되기도 하지(물론 이런 평가는 나의 주관적인 사견에 불과하지만)만 1917년에서 1965년에 이르는 장대한 서사를 이끌어감에 있어 이야기의 끊김이나 어색한 장면도 없이 유려하게 마무리한다는 건 작가의 역량이 돋보이는 수작이라고 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가장 놀라운 사건들은 아무도 눈치챌 수 없이 작은 바늘 하나가 툭 떨어지듯 시작하여 꼬리를 물고 연쇄한다. 길 잃은 개 한 마리의 출현만큼이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저 세월 속에 묻혀 흘러가는 여느 일탈로 말이다."  (p.78)


소설의 뼈대가 되는 한반도의 긴 역사가 시작되는 곳은 1917년 눈 내리는 겨울 평안도의 깊은 산속이다. 사냥꾼인 경수는 그곳에서 길을 잃고 쓰러졌는데 일본 장교 야마다에 의해 겨우 목숨을 건진다.  이후 일본군과 함께 이동하던 경수는 호랑이의 공격으로부터 그들을 구하고 마을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돕는다.


한편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가난한 농부의 맏딸로 태어난 옥희는 은실이 운영하는 기방에 팔려 간다. 1918년 10살이었던 옥희가 은실이 운영하던 평양의 기방에서 기생 견습생으로 시작해 서울에 있는 예단의 기방으로 옮겨간다. 그때 옥희와 함께 갔던 월향과 연화는 은실의 친딸이었다. 재색을 겸비했던 월향은 일본군 장교의 강간으로 원치 않는 임신을 했었고, 명랑한 성격의 연화는 옥희의 다정한 친구로 각별했었다. 기생이 익혀야 하는 다섯 가지 기예 중 시에 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옥희와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연화는 나중에 유명 배우와 가수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삶이 꾸준한 전진의 과정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태도는 젊음 특유의 요건이다. 옥희 역시 인생의 한 단계를 지나고 나면 바로 그다음 단계가 오리라는 걸 당연하게 여겼고, 가두 행렬에서 자신이 성년으로 한 발짝 들어서는 확실한 순간을 경험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날 이후 일상에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놀라움과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p.153)


옥희가 조선극장 소속 유명 배우로 승승장구하던 시절 옥희의 전속 인력거꾼 역할을 하던 한철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사냥꾼 경수의 아들이자 고아 출신의 깡패로 옥희를 짝사랑하던 정호는 모든 걸 접고 독립운동의 길에 나선다. 소설은 옥희와 더불어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조망한다. 독립운동 이후 국회의원에 오르는 정호와 인력거꾼에서 한국 최초의 자동차 제조 공장 회장이 된 한철, 원치 않았던 임신이지만 아이를 낳고 미국 부영사 커티스의 비서가 된 월향, 레코드를 내고 유명 가수가 되었지만 후원자였던 마사장의 첩이 되었다가 결국 버림을 받고 아편 중독에 빠져 행방불명이 되는 연화, 조선총독부 치하에서 온갖 특혜를 받고 사는 출판사 대표 성수, 상해와 만주를 오가며 비밀리에 독립군을 결성한 성수의 친구 명보 등 여러 인연으로 얽히고설킨 인간 군상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리고 있다.


"나이를 조금 더 먹고 나니, 인생이란 무엇이 나를 지켜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지켜내느냐의 문제이며 그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겠다."  (p.250)

"인생은 곧 바퀴였다. 영민한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그 바퀴를 잘 굴려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반면 어리석거나 운이 나쁜 사람은 그 바퀴에 깔려 무참히 짓밟힐 수도 있었다. 그 두 극단 사이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직 그 바퀴를 앞쪽으로 굴러가게 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p.544)


옥희는 결국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사랑했던, 학비 등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한철로부터 배신을 당하여 사랑을 결실을 이루지 못한다. 공산주의자로 몰려 죽음을 맞는 정호는 마지막 면회를 온 옥희와 재회하며 마음에 묻어 두었던 말을 꺼낸다. 사랑했던 인연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결국 혼자가 된 옥희. 그녀는 제주에 내려가 제주 해녀가 되는 길을 택한다.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에."  (p.603)


2022년도 벌써 12월! 삶의 굴곡을 따지자면 한 해 동안 낱낱이 보는 것이나 인생 전체를 통틀어 살펴보는 것이나 크게 다를 게 없겠지만, 하루하루가 늘 좋기만 했던 사람도, 그렇다고 일 년 365일이 모두 불행하기만 했던 사람도 찾을 수 없지 않을까. 남들보다 좀 더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더러는 기쁜 일이 있게 마련이고, 아무리 행운을 타고난 사람도 가끔은 슬프거나 불행한 일이 찾아오게 마련, 소설에서 말했던 것처럼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삶은 견딜 만한 것이 아닐까. 다만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추억이 우리들 각자에게 얼마나 풍성한 의미로 남느냐 하는 문제는 개별적인 것으로 남을 테다. 낙천적이라는 건 어쩌면 사랑 하나에 목숨을 건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사랑이 전부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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