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의 세 딸
엘리프 샤팍 지음, 오은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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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나라의 종교, 문화, 정치 등 삶의 전반을 두루 감싸는 여러 외부 요인들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책만 한 게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물론 그런 용도라면 영화도 그에 못지않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겠으나 영화는 단편적 역사를 이해하거나 역사 속 특정 사건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용이할 뿐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전후의 맥락을 이해하고 그 나라의 발전 단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는 분명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어 보인다. 예컨대 고인이 되신 박경리 여사의 <토지>를 읽음으로써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전후의 시기에 대한민국 민초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볼 수 있으며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을 통하여 한국전쟁의 비극과 극심했던 이념 대결을 마치 그 시대를 살아본 것처럼 눈에 그릴 수 있지 않은가.


엘리프 샤팍의 소설 <이브의 세 딸> 역시 튀르키예의 종교, 정치, 문화 등을 사실적으로 파악하는 데 매우 유용한 소설이라고 하겠다. 사실 튀르키예는 오르한 파묵을 제외하면 문학적으로 매우 낯선 나라인 게 사실이다. 한국전쟁의 참전국으로 정치적으로는 '형제국'이니 '우방'이니 하면서 매우 가까운 나라인 것처럼 말하지만 튀르키예의 종교와 문화 혹은 문학이나 예술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손으로 꼽을 정도로 드물지 않을까 싶다.


국내에서는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엘리프 샤팍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외교관인 어머니를 따라 미국과 영국, 요르단과 스페인 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현재는 이스탄불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소설가이자 정치학자, 역사학자로서 튀르키예의 역사, 종교, 젠더 문제, 정치적 혼란에 관한 통찰력 있는 글을 쓴다고 알려진 그녀는 이 책에서도 자신의 문학적 역량과 특색을 잘 드러내고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날반트오올루 가의 구성원들이 튀르키예의 모든 국민들을 대변할 수는 없겠지만 작가는 그들 각자에게 하나하나의 집단을 대신할 수 있는 특징을 부여함으로써 가족 간의 갈등이 곧 현재 튀르키예가 처한 여러 갈등의 축소판일 수도 있음을 넌지시 말하고 있는 듯했다.


"페리는 창밖으로 햇빛에 반짝이는 은빛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물고기나 시인에게 일어났던 일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삶의 슬픈 조각들을 찾아 조심스럽게 숨겨 두었다. 다른 사람들이 우표, 냅킨, 동전을 모으듯이 그녀는 '슬픔 수집'을 했다."  (p.146)


소설은 날반트오올루 가의 막내딸인 페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날반트오올루 가에는 선박기관사이자 진보적 성향의 아버지 멘수르, 광신적 무슬림 원리주의자인 엄마 셀마, 좌익 성향의 큰오빠 우무트, 무슬림이자 극우 성향의 작은 오빠 하칸이 있다. 막내딸인 페리는 극과 극으로 대립하는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지만 아버지를 지지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진보적 성향의 큰오빠가 공산주의 가담 혐의로 감옥에 수감된 후 아버지인 멘수르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고 술에 빠져 살게 되며 엄마와의 갈등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아버지를 좋아하는 페리는 변해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평소 책을 좋아하던 페리는 아버지와의 대화가 뜸해지면서 더욱 책에 빠져든다. 결국 페리는 그토록 갈망하던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여 영국으로 떠난다. 대학에서 페리는 이집트 출신의 미국인 학생 모나와 이란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성장한 쉬린과 어울리며 그녀의 인생 자체를 뒤흔든 아주르 교수를 만나게 된다.


"지적인 논쟁에 참여하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것이 끝나면 변하고 다른 사람이 된다. 물론 옆에 있는 사람도 변한다. 자신의 의견을 재고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어떤 문제로든 누구와도 논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 변화에 열린 사람만이 진정으로 토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자아가 우리의 마음을 닫아 버릴 것이다. 기꺼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화할 수가 없다. 과거에 나는 이렇게 말했고 지금도 그렇다."  (p.281)


소설은 아드난의 아내이자 딸 데니스의 엄마가 된 2016년 현재의 페리와 1980년대 유년 시절의 페리에서부터 2000년대 대학생이었던 과거의 페리를 교차하여 서술하는 방식으로 펼쳐진다. 페리가 대학생이 되기 이전의 시기에 있어서는 주로 날반트오올루 가의 가족 구성원들을 통한 종교와 이념의 갈등 문제, 빈부 격차와 정치적 혼란 등 튀르키예 내부의 문제가 거론되며 페리가 대학생이 된 이후에는 튀르키예 외부에서 바라본 여러 문제들이 등장한다. 예컨대 둘째 오빠 하칸의 결혼식에서 신부의 순결을 문제 삼아 처녀성 검사를 하기 위해 병원을 방문하는 것이나 9.11 테러를 바라보는 시각 등 문화와 전통이라는 탈을 쓰고 자행되는 구시재적 관습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다. 특히 페리가 아주르 교수의 수업(신에 대한 철학의 발전 과정을 연구하는 토론식 수업)에 참여하면서부터 깊어지는 이브의 세 딸들(페리, 쉬린, 모나)의 관계와 종교를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흥미롭다.


"그녀는 쉬린처럼 용감하지도 못했고, 자신감도 없었다. 그리고 모나처럼 독실하지도 않았고, 지구력도 없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신물이 났다. 페리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아무도 모를 것이고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p.494)


소설은 그렇게 끝을 향해 간다. 그럼에도 갈등은 봉합되거나 잘 마무리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내내 온갖 갈등과 분열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누군가에 대한 애착이 깊어져 서로를 '영혼의 단짝'인 양 기억할지도 모른다. 삶의 아이러니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종국에는 조금씩 닮아간다는 점이다. 시간이라는 믹서기 속에서 우리의 생각은 잘게 부서지고 또다른 누군가의 생각과 뒤섞이곤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을 온전히 지켜나간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자신의 내면에 남들로부터 스스로를 구분할 수 있는 단 한 톨의 정체성을 지켜낸다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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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파랗습니다. 몸 안에 스미는 공기도 더없이 맑고 깨끗한데 다만 코끝을 스치는 쨍한 추위가 어깨를 움츠러들게 합니다. 가뜩이나 명절 연휴 이후의 하루는 더욱 고되고 힘든 시간인데 동장군의 기세가 희미하게 남은 의욕마저 꺾어버립니다. 다 올랐다 싶은 산의 정상에서 가파른 계단을 만난 셈입니다. 삶은 이렇게 예상치 못한 의외의 현실로 인해 무너지곤 하는 법이지만 긴 시간으로 보면 이것은 다만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할 뿐일지도 모릅니다.


아들은 명절 연휴의 마지막날이었던 엊그제 새벽 친구들과 일본 여행을 떠났습니다. 대입 재수를 한 3명의 친구들을 위로하는 차원인지, 아니면 그들보다 1년 먼저 대학 생활을 경험한 선배로서의 입장인지 나로서는 알 수는 없지만 3박 4일 일정의 여행 계획을 세워 나에게 알렸을 때, 아비로서 혹은 삶을 먼저 살아 본 선배로서 거절할 명목은 딱히 없었던 듯합니다. 물론 아껴 쓴다고는 하지만 만만치 않은 여행 경비가 부담이 되었던 건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게다가 아들은 일본 여행 다음으로 제주도 여행이 잡혀 있습니다. '2023 제2회 전국 장애·非장애 대학생 창업경진대회' 참가 목적으로 2월 7일부터 2월 10일 일정의 제주도 여행이 있었던 것입니다. 같은 대학 여학생의 코딩 과제를 도와준 인연으로 함께 대회에 참가하자는 제안을 받고 얼떨결에 참가하게 된 행사인데 오프라인에서 미처 얼굴도 보지 못한 팀원들과 잘 지내게 될지 조금 걱정이 되긴 합니다. 게다가 팀원들 대부분이 여학생들인 듯한데 숫기 없는 아들이 어떻게 버텨낼지...


이번달에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생각자도 못한 도시가스요금 청구서를 받았던 일입니다. 집에서는 겨우 잠만 자고 나오는 나에게 있어 도시가스는 난방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난해에 비해 2배 이상 오른 고지서를 받고 보니 그저 웃음만 나왔습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많았던 듯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렸습니다. 1년에 월급이 2배씩 오르는 것도 아닌데 생활 물가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니 대통령 하야 투쟁이라도 해야 할 듯합니다. 지하철 요금, 도시가스 요금, 전기 요금 등 공공요금 인상은 우리와 같은 서민의 생활을 위협하는 수준입니다. 그럼에도 하늘은 맑고 동장군의 기세는 매섭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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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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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소설은 감각적인 반면 관념적이지는 않다. 그것은 곧 가독성을 중시하는 작가의 성향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이 지적이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소설가는 대개 관념적인 글에 매료되는 경향이 있게 마련이고, 작가와 독자들 사이의 간극이 멀어지는 지점도 바로 그와 같은 성향이 발현되는 시기라는 걸 작가들은 잘 모르는 듯하다. 독자들로부터 멀어지는 대신 관념적인 성향에 매몰되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고상하고 우아한 어떤 지식인을 닮아가는 양 생각하는, 일종의 지적 나르시시즘에 빠져버리고 마는 소설가들을 나는 많이도 보아 왔다. 독자들로부터 한참이나 멀어진 그들은 대개 세상이 자신의 재능을 몰라준다고 원망하는 데 자신의 시간을 탕진하곤 한다.


"우리가 사는 건물에 도착해 보니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고장나 있었다. 혹시 엘리베이터를 탔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인생이 선택에 달렸고 우리가 택한 길에 따라 삶이 결정된다는 말을 하는 이들도 잇지만 그건 순 헛소리다. 이 일만 봐도 알 수 잇다. 계단으로 올라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나 우리가 3층에 도착할 거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가혹한 운명이 장난을 걸어오면 어느 길을 택하든 똑같은 곳에 다다르게 된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p.15)


스티븐 킹의 소설 <나중에(LATER)>는 어린 소년 제이미 콘클린을 주인공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1인 작가 에이전시의 대표인 티아는 아들인 제이미를 돌보며 자신의 주 수입원인 작가들의 저작권을 관리한다. 어릴 적부터 죽은 이들과 대화를 할 수 있었던 제이미는 사람이 죽으면 죽은 직후부터 그 혼이 사라지는 며칠 동안만 대화가 가능하며, 이때 혼령들은 진실만을 답한다고 어머니인 티아에게 말했었다. 이런 아들의 능력을 반신반의하며 기이하게 생각하던 티아는 이웃에서 사망한 노부인(버켓 교수의 부인)이 숨겨둔 반지의 위치를 정확히 듣고 찾게됨으로써 아들의 능력을 확실히 믿게 된다.


2008년 리먼 사태에 휘말려 가세가 기울게 된 티아는 사무실을 외곽으로 옮기고, 씀씀이도 줄이면서 힘겹게 에이전시를 운영한다. 그녀가 의지할 만한 구원처는 시리즈물 베스트셀러 작가인 토머스가 유일했다. 그러나 토머스 씨는 그의 베스트셀러 시리즈의 완결편인 <로아노크의 비밀>을 쓰다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게 되고, 선인세까지 지불한 마당에 책을 출간하지 못하면 파산에 이르게 될 지경에 처한 티아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죽은 혼령과 대화할 수 있는 아들의 능력에 기대를 걸게 되는데...


티아의 가까운 친구인 리즈 더튼은 뉴욕 경찰청에 근무하는형사인데, 어느 날 그녀의 여벌 제복에서 코카인이 발견되고 티아는 이 일로 불같이 화를 낸 후 그녀와 결별한다. 마약 운반에 개입되어 있던 더튼 형사는 동료들의 눈밖에 난 상태였고, 직장에서도 해고되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돌파구가 필요했던 더튼 형사는 폭발물을 설치한 후 자살한 테리올트의 행젖을 쫓는다. 폭발물이 설치된 정확한 장소만 알 수 있다면 그 공로를 인정받아 해고는 면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 취한 행동이었다. 더튼 형사는 자신의 차에 제이미를 강제로 태운 후 테리올트의 혼령을 찾아 떠난다. 총기 자살로 엉망이 된 얼굴의 테리올트 혼령을 만난 제이미는 그 끔찍한 형상에 놀라 달아나고 싶었지만 더튼 형사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와 마주한다. 더튼 형사는 결국 폭발물이 설치된 장소를 제보함으로써 자신의 직장을 지키게 된다. 그러나 일주일이면 사라질 줄 알았던 테리올트 혼령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나타나 제이미를 괴롭힌다.


"나는 귀갓길에도 줄곧 (그때쯤에는 이미 버릇이 되어서) 태리올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그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주 좋은 징조였으나 사실 놈이 영원히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은 포기했다. 놈은 언제든 나타날 수 잇는 불쾌한 존재였다. 그저 내가 대비하고 있을 때 놈이 나타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p.206)


제이미를 괴롭히는 테리올트와의 문제를 그 누구에게도 속시원히 털어놓을 수 없었던 제이미는 결국 예전에 살던 집의 이웃이었던 버켓 교수를 찾아간다. 사망한 부인의 반지를 찾아주었던 바로 그 집이었다. 지금까지의 일을 자세히 전해 들은 버켓 교수는 제이미에게 해결책을 알려준다. 그리고 제이미는 실행 과정에서 약간의 문제는 있었지만 테리올트를 쫓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직장에서 해고된 더튼 형사가 다시 제이미를 찾아와 협박을 함과 동시에 자신의 일을 도와줄 것을 강요하게 되는데...


"어린애로 산다는 건 불리한 점이 많다. 잘 들어보길 바란다. 그중에 세 가지만 꼽으면 여드름, 학교에서 비웃음을 안 사려면 어떤 옷을 입고 갈지 결정해야 하는 고뇌, 수수께끼 같은 여자아이들이다. 도널드 마스든의 저택에 다녀온 후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납치 사건 이후) 나는 어린애라는 사실이 유리할 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심리에서 기자들과 TV 카메라의 난투극을 겪을 일이 없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내가 직접 출석해서 증언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p.332)


내일부터는 민속 최대 명절이라는 설 연휴가 시작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읽거나 들어보았을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이번 연휴에 그의 작품 한두 권쯤 읽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캐리>, <샤이닝>, <미저리>, <돌로레스 클레이븐>, <쇼생크 탈출>, <그린 마일> 등 그는 공포 소설 뿐 아니라 SF, 판타지, 서스펜스를 넘나드는 방대한 작품 세계를 구축한 까닭에 독자들의 선택지도 충분하지 싶다. 1947년생인 작가가 지금도 여전히 작품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지만 천생 작가인 스티븐 킹의 소설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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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그런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학생들을 동원하는 웅변대회가 많기도 했다. 웅변대회의 주제는 대개 정부를 찬양하거나 정부 정책을 홍보하는 내용이 주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웅변 원고를 쓰는 일도 만만치 않아서 온전히 학생에게 맡기기에도 미덥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교내 웅변대회야 자체적으로 하는 행사이니 참가하는 학생들이 스스로 원고를 쓰고 자발적으로 웅변 연습을 하게 마련이지만, 군 대항 혹은 도 대항 나아가서 전국 대항일 경우에는 학교의 명예가 걸린 문제이니 선생님들도 뒷짐을 진 채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학생이 쓴 원고에 첨삭을 가하고, 방과 후에 남아서 웅변 연습을 지도하고, 다른 학교의 출전자 정보를 빼내는 등 온갖 노력을 다했었다. 학교 대표로 선발되는 학생은 주로 학업 성적과 비례하는 경향이 있었다. 성적이 좋은 학생이 선생님의 말귀도 잘 알아듣고, 주제에 맞게 원고도 잘 쓴다고 판단해서 그렇게 했을 테다.


소심하여 남 앞에 서는 걸 무척이나 꺼리고 두려워했던 나도 웅변대회라면 지겹도록 많이 참가했었다. 대개는 담임 선생님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덕분에 발표력이 조금씩 좋아졌던 걸 감안하면 소득이 아주 없었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최근 아랍에미리트를 국빈 방문한 대통령의 연설이 야당과 일부 언론의 도마에 올랐다.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각) 아랍에미리트(UAE)에 파병된 아크부대 장병들에게 "아랍에미리트는 바로 우리의 형제 국가"라면서 "합동훈련을 하고, 작전을 하고, 교육을 하는 이 현장은 바로 여기가 대한민국이고 우리 조국"이라고 말했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무난했다. 이어서 말하길 "형제국의 안보는 바로 우리의 안보"라며 "아랍에미리트의 적은, 가장 위협적인 국가는이란이고 우리 적은 북한"이라는 맥락에도 맞지 않는 다소 엉뚱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이에 대하여 야당과 일부 언론은 '외교 참사'라는 평가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이란과 아랍에미리트는 한때 관계가 좋지 않았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관계를 완전히 복원하였고, 이를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런 면에서 '아랍에미리트의 적은 이란'이라는 대통령의 발언은 국제 정세를 모르는 무식의 발로는 맞지만 그게 만약 '아랍에미리트의 적은 이스라엘'이라고 했더라면 어쩔 뻔했는가. 전 세계적으로 난리가 나지 않았겠는가. 게다가 '아부다비 지속가능성 주간' 개막식 기조연설에서도 '원전 생태계를 빠르게 복원하고'와 같은 행사 주제와 맞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말을 연설 전문에 끼워 넣음으로써 우리나라 대통령의 무식을 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무식함이란 한 개인의 쪽팔림으로 끝날 수 있다. 물론 그가 대통령이라면 그 무게가 다르겠지만...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연설만 했다 하면 실수를 반복한다. 그건 아마도 자신이 모르는 내용에 대하여 다른 사람이 써준 원고로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수를 줄이려면 공부를 해야 하고, 공부를 하기 싫으면 아는 내용만 말해야 한다. 예컨대 모든 연설에서 폭탄주 제조법이라든가 대한민국의 술문화 등에 대하여 말한다면 실수는 거의 없거나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물론 연설의 주제에 맞지 않아 코미디 같은 느낌이 약간 들긴 하지만 그래도 뭐 어떠랴. 실수를 무한반복하는 것보다 남들에게 웃음을 주는 게 더 좋지 않은가. 국익에도 그리고 듣는 이의 정신건강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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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1-17 16: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뉴스를 보셨군요^^
제 생각이랑 어쩜 이리도 일치하시는지..
매번 실수 실수 실수..
대통령이 무식하고 무능한거 죄악이지 않습니까?
남편은 아니라고... 용서가 가능하다는데 전 그말에 반대합니다
참 너그럽기도 하죠!
제발 공부 좀 합시다!

꼼쥐 2023-01-17 18:27   좋아요 1 | URL
대통령을 대신하여 변명하자면 대통령을 처음 해보는 것이라서 그런 듯합니다. ㅎ
사법시험에 9수를 한 것처럼 대통령 선거에서 9번쯤 떨어져 봤거나 대통령을 두 번쯤 연임했더라면 좀 잘하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늘 술만 마셨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잘 모르겠네요. 대통령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해서. ㅎ

singri 2023-01-17 1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죽하면 아무것도 하지말고 관저에서 술만 먹어라 하고싶은심정입니다

꼼쥐 2023-01-17 18:28   좋아요 1 | URL
그게 국익을 위해서는 백 번 옳은 선택인 듯합니다.
해외순방만 나갔다 하면 사고를 치니...

북프리쿠키 2023-01-17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란이 아니고
˝이런˝으로 우기지 않을까요 ㅎㅎ

꼼쥐 2023-01-17 18:29   좋아요 1 | URL
그러면 이란이라고 최초 보도한 방송국을 먼저 찾아야 할 듯하네요. 그게 만약 TV조선이라면 어쩌죠? 정정보도를 요구할 수도 없고...

DYDADDY 2023-01-17 16: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설만 코메디면 좋겠습니다. 대통령의 정치는 코메디를 넘어 흉측해진지 오래라서 차라리 연설만 코메디면 좋겠습니다.

꼼쥐 2023-01-17 18:31   좋아요 3 | URL
다른 나라 국가가 나올 때도 가슴에 경례를 하고 있고 흠을 잡으려 들면 모든 게 코미디인 듯합니다. 이건 뭐 국격을 떨어트려도 너무 떨어트리고 있으니 대통령이 아니라 북한의 X맨이 아닐까 의심스럽습니다.

잉크냄새 2023-01-18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지지리도 모자란 놈이란 생각만 드네요.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앉는 인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더니 그 머저리로 인하여 대통령의 자리가 참 우스워졌어요.

꼼쥐 2023-01-20 15:03   좋아요 0 | URL
대통령 본인도 대통령이란 자리를 우습게 생각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죠.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겟죠. 해외 동포들이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는 말을 여러 번 하더군요.

기억의집 2023-01-18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러니 지금 미국이 상대도 안 하죠. 우리 나라 북한문제를 우리 나라만 빼고 미일만 회담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지금 기업들이 대량 구조조정해서 지금 난리라던데.. 노인분들은 자기 자식들 짤려서 좋겠어요!!!

꼼쥐 2023-01-20 15:02   좋아요 0 | URL
미국이 자국의 경제만 우선시하니까 잘나가는 기업들 대부분이 미국으로 미국으로 떠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미국 말이라면 뭐 하나 반박도 하지 못한 채 끌려다니는 꼴이란 정말 가관도 아닙니다. 게다가 일본에게 우리가 빚진 게 없는데 일본이 하자는 대로 모든 걸 양보하는 걸 보면 정말 화가 납니다.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3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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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단어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단어를 남발하는 사람도 물론 가까이하지 않는다. 예컨대 공정, 정의, 자유, 객관적, 상식, 용서 등 우리가 사는 인간 사회에서는 결코 구현할 수 없는 이상적인 낱말들은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철저한 자기반성 대신에 구체성도 없는 과대망상의 세상 속으로 빠져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어떤 이에 대하여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분별한 믿음을 표출하도록 유도한다. 그(또는 그녀)가 자신이 살아온 궤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거나 증명할 수 있는 어떤 특정한 증거를 제시한 것도 아닌데, 그(또는 그녀)가 마치 정의의 화신인 양 인간 양심의 정수인 양 대우하는 것이다. 이런 몰상식한 처사가 선거판이나 특정인의 강연과 같은 특수한 경우에만 한정하여 일어나는 건 결코 아니다. 우리의 일상 다반사에서 늘 있는 일이다.


"첫 구절을 이렇게 시작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이 글은 '감정적'이고 사적인 글이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줄거리가 없는 서평일 것이다. 이 글이 일반적인 형식의 해제인지 추천사인지 독후감인지 모르겠다. 다만 나는 '고통에 대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말을 걸고 싶다. 고통에 대한 고통이란, 침묵과 망각 외에는 고통에 대처할 다른 방법이 없는 경우를 말한다. '용서'는 이 문제가 해결된 다음이어야 한다."  (p.50)


정희진 작가의 저서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는 지극히 사적이며 주관적인 글의 모음이다. 그래서 더 깊이 읽게 되는 책이다. 인간은 누구나 개별적이며 완벽한 객관에 이른다는 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제되는 건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게 개별적인 타인을 알기 위해서 노력하며 그것에 대해 지루해하거나 죽을 때까지 그와 같은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의 세 번째 책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는 정희진 개인의 생각들을 쏟아낸 책이며 그래서 더 값지고 귀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책에 실린 27편의 글은 모두 정희진의 생각일 뿐 다른 누군가의 생각이나 창작을 적당히 모방하거나 답습한 글은 단 한 편도 없다. 정희진의 덕후가 탄생하는 것도 바로 그 지점임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이 글은 <대지의 딸>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이 책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담고 있다. 좋은 서평은 결국 좋은 독후감이다. 독서 감상문은 쓰는 이 자신에게로 회귀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성찰적이어야 한다. 독후감은 개인의 맥락에서 읽혀야 한다. 다시 말해 서평을 쓴 사람은 한 사람의 독자일 뿐 독자를 대변하는 길잡이가 아니다."  (p.220)


작가는 자신이 '페미니즘'이라는 특정한 사고방식에 집중하는 필자이자, 고통과 몸, 권력과 지식, 젠더와 관계 등 논쟁적인 주제에 관심 있는 독자라고 털어놓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고백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리영희의 저서 <대화>에 대한 서평에서는 리영희에 대한 인간적 감정과 남자라는 사회적 우월성을 배제한 채 행복한 근대인으로서의 리영희, 권력의 주조 방식을 넘어서는 지성과 인식의 소유자, 한 개인이 특정한 시대에 어느 정도까지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그 최대치를 보여준 인물로서 존경의 마음을 내비친다.


"결국 나는 이 분열에 대해 쓴다. 모든 의미는 차이의 산물이며, 앎은 경계를 인식하는 데서 가능하다는 '진리'가 내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만용을 주었다. 텍스트와의 대화는 독자와 저자 간 갈등의 의미를 정치화함으로써 텍스트를 소통 가능한 역사 속에 위치시키는 것(mapping)이다."  (p.176)


나는 자신이 하는 모든 연설에서 자유를 강조하고 입만 벌리면 공정과 상식을 강조하는 어느 정치인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어느 당은 당원 전체가 그의 성공을 기원하고 있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종종 전해 듣곤 한다. 그러나 이상적인 낱말들을 나열하는 그의 연설 자체가 사기인 것처럼 당원들 모두가 그의 성공을 기원한다는 것도 사기에 가깝다. 로봇이 아닌 이상, 각기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하는 인간이 어떻게 로봇처럼 일괄적인 대오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와 같이 선전하는 정당은 필연적으로 망할 수밖에 없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히틀러의 나치당이 괴멸한 것처럼 말이다. 정희진의 글이 이 시대에 귀하게 읽히는 까닭은 작금의 대한민국의 정치와 언론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과거로의 퇴행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은 너와 다르고 너의 생각이 나와 어떻게 다른지 탐구하는 것, 사회적 결합과 연대는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작가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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