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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여왕 5월은 끝내 오고야 말았다.

온 국민의 설움과 분노를 뒤로 한 채 말이다.  5월의 신간 에세이를 휘작휘적 뒤적이다 몇 번인가 아득해졌다.  '이게 무슨 소용이람.'하는 마음이 나를 아득한 절벽으로 밀어부쳤다.  세월호 희생자들이 우리에게 남긴 의미를 천천히 곱씹는 한 달이 될 듯하다.

 

 

 

나는 전문적인 에세이스트보다는 오히려, 또는 산문을 위주로 쓰는 작가보다는 오히려 시인이 쓴 산문을 좋아한다.  음감이나 박자 관념이 없는 내가 왜 이런 버릇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시인이 쓴 산문을 읽을 때 나는 글 속에서 리듬감을 느끼곤 한다.  마치 시를 읽는 것처럼 말이다.  천양희 시인의 산문도 그랬으면 좋겠다.

 

 

 

 

 

 

 

 

명상이나 삶의 가르침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틱낫한 스님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딱히 깊은 사색을 즐기지 않는 나도 스님의 책을 두어 권 소장하고 있다.  물론 한참 전에 산 책이다.  요즘 들어서는 이상하게도 주제가 조금 무겁다 싶으면 고개가 외로 꼬아진다.  그러던 내가 이 책에 눈길이 간 걸 보면 세월호 참사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나는 어차피 죽는 날까지 누군가에게 영원한 타인이니까.

 

 

 

 

 

 

얼마 전에 읽었던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는 남자인 내가 읽기에는 거북한 책이었다.  까놓고 말하면 '당신이 뭘 안다고?'하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던 책이다.  그 저변에는 아마도 작가의 이분법적 사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남자와 여자라는, 혹은 여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남자와 같은.  같은 인간의 입장에서 차이에 대해 말하는, 좀 더 관대하거나 따뜻한 시각을 기대한다.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일종의 도전이다.

 

 

 

 

 

 

 

<7년의 밤>하면 정유정! 하고 굴비두릅처럼 떠오르는 까닭은 그녀의 소설이 워낙 유명하기도 했거니와 이제 그녀도 어느덧 중견작가의 반열에 올라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요즘에는 여행기를 통 읽지 않았다.  마음이 어두워서였다.  이 책은 부디 가볍고 밝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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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더 리턴드 The Returned
제이슨 모트 지음, 안종설 옮김 / 맥스미디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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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중지


누군가 나에게 인생을 다시 한 번 더 살고 싶으냐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가능한 일도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나의 지난 인생이 남들보다 더 혹독했다거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시간을 건너뛴 다른 시공간에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달라진 모습을 확인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나는 지금 이대로의 나, 같이 나이를 먹고 같이 늙어가는 지금의 사람들이 좋을 뿐이다.

 

제이슨 모트의 소설 <더 리턴드(The returned)>는 죽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되살아나는 상황을 가정하여 쓴 책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은 벗어나기 힘든 감정이지만 흐르는 세월 속에서 점차 흐릿해지게 마련이고, 우리가 사는 동안 그러한 체험을 통해 우리는 사랑의 소중함을, 삶의 의미를, 그리고 인간의 본질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상실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게 된다.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아카디아는 미국에 있는 작고 조용한 시골마을이다.  그곳에는 일흔이 넘은 노부부 루실과 해럴드가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제이콥이라는 아들이 한 명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이콥은 1966년 여덟 살 생일에 강에서 익사하고 만다. 오랜 세월 동안 부부는 제이콥이 없는 삶에 익숙해져 갔고 그들의 상처는 그렇게 치유되고 있었다.  이렇듯 평온했던 부부의 삶을 뒤바꾼 것은 아들 제이콥이 여덟 살의 나이로 그들 앞에 나타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악마 - 그들의 특정한 악마 - 가 눈물이 글썽이는 갈색 눈동자에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부모와 헤어져 낯선 사람들과 함께 지내온 아이 특유의 안도감을 가득 담은 채 여전히 작고 불가사의한 모습으로 그들의 현관 앞에 나타났을 때,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살아난 루실의 단단히 닫혔던 마음은 사무국에서 나온 잘 차려입은 남자 앞에서 봄눈처럼 녹아내렸다."    (p.21)

 

그러나 죽었던 사람이 이 세상으로 귀환하는 것은 비단 제이콥에게만 있었던 일은 아니었다. 전 세계 여러 곳에서 귀환자의 수는 계속 증가하였고, 이 전대미문의 현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또한 그 누구도 왜, 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이것이 기적인지, 또는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는지 말이다.  급기야 국제 귀환자 사무국이 결성되었고, 정부 차원에서 귀환자들을 관리하게 되었다.  아카디아의 초등학교에 귀환자들을 모아 놓고 감시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귀환자 수용소가 세워진 셈이다.  해럴드는 어린 제이콥을 수용소에 혼자 둘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자청하여 수용소에 남는다.  그 순간에도 귀환자는 계속 늘어나고, 새로운 귀환자들은 사무국 요원들과 군인들의 눈을 피해 달아난다.  사람들은 더욱 혼란에 빠지게 되고, 귀환자의 가족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의 마찰과 갈등도 심해진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내 마음은 제이콥이 1966년 8월의 그 여름날 물에 빠져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녀석이 말을 하면, 내 귀는 그가 내 아들이라고 말해.  내 눈도 마찬가지고.  그 오래전, 까마득한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해럴드는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리쳤다." (p.222)

 

귀환자 사태는 세상이 의도하고 원했던 일이 아니었다.  해럴드와 제이콥이 떠난 빈집에 홀로 남은 루실은 그들을 위해 매일 음식을 준비하여 날랐다.  그러던 중 1963년에 죽었던 윌슨 일가족이 귀환하여 루실의 집에 함께 머물게 된다.  윌슨 일가는 루실과는 먼 친척뻘이었다.  귀환자 사태가 지속됨에 따라 귀환자의 수가 증가하고 수용되지 않은 귀환자도 증가하면서 산 사람들과의 마찰은 점차 심해졌다.  이 사태가 얼마나 지속될지, 귀환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렇다면 이런 사태가 발생한 까닭은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도 답을 하지 못했다.  정부도, 성직자도, 과학자도, 그 누구도. 

 

소설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들은 이렇다.  귀환자의 가족이면서 귀환자에게 우호적인 해럴드 가족,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무국 요원 벨러미와 윌리스 대령, 성직자의 입장에서 사태를 바라보는 피터즈 목사, 정상인들을 지지하며 귀환자를 적대시 하는 프레드 그린 등.  나는 소설의 뒷부분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소설일 뿐이다.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한 이야기.  단지 그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철석같이 믿는 어떤 것들이 한순간에 뒤바뀌었을 때의 혼란과 갈등, 그 속에서도 여전히 계속되는 탐욕과 비열함은 인간으로서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국민을 위한 정부의 역할도.

 

"정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국민들에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정부가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는가?  정부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최소한의 체면을 유지해야 한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든 기적의 치료법을 제시해야 하고, 필요하면 단호한 군사조치라도 취해야 한다."    (p.80)      

 

우리는 죽음 저편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다만 모름으로써 죽음을 그저 수용할 뿐이다.  예컨대 죽음 저편의 세계를 알게 된다면, 그것이 만약 우리가 상상하는 지상천국이라면  현실의 삶을 서둘러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속출할 테고, 만일 그것이 불구덩이 속의 지옥이라면 사는 내내 공포에 시달릴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죽음에 대해 모름으로써 기대와 공포의 중간자적 입장에 놓일 수 있는지도 모른다.  절묘한 신의 한 수이다.  그렇다면 죽었던 자의 생환은 과연 축복인가 아니면 또 다른 고통인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작가 제이슨 모트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함으로써 우리에게 또 하나의 철학적 난제를 던져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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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향소에서

 

세상에 아깝지 않은 목숨이 어디 있으랴

생때같은 내 새끼 가슴에 묻고

물 한 모금인들 가벼이 넘겼으랴

 

바다에서 비롯된 푸른 슬픔이

끝내 온 산천을 휘감아 돌고

바다도 하늘도 짙푸른 오늘

 

노란 희망을 가슴에 달고

가신 님들 빼곡한 제단에 나설 제

가슴 속 분노 한자락 뽑아

향불에 사른다

 

다하지 못한 생명이 끝내 서러워

눈물자욱 어룽진 하늘 끝자락 

산 자의 죄의식이 발끝에 걸려

휘청이다 무릎을 꺾고 재배하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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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분향소를 다녀온 뒤 들었던 복잡한 심경입니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노트에 끄적였던 글을 블로그에 옮겨 적는데

슬픔보다는 치미는 분노가 더한 것은 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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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4-30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곳 청주에도 분향소가 설치되었다고 하는데......생각만으로도 눈물나서 어떻게 가야할지요....
어른들의 무질서가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책임 전가되었네요.

꼼쥐 2014-05-02 14:13   좋아요 0 | URL
많은 분들이 분향을 다녀오셨더군요.
저는 오히려 이제 그 슬픔을 거두려고 다녀왔습니다. 언제까지 허우적댈 수는 없는 일이기에...
 

어제 세월호 희생자 합동 분향소를 다녀왔습니다.

간간이 비가 내렸고, 짙어가는 어둠 저편으로 바람이 불었습니다.  뚝 떨어진 기온만큼이나 스산한 날씨였습니다.  분향소 안을 떠돌던 무기력과 슬픔이 돌아서는 내 어깨에 천 근의 무게로 내려앉았습니다.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무력감이 짙어가는 어둠 속에서 바닷물처럼 차올랐습니다.

 

차창 밖으로 이팝나무 가로수가 비를 맞으며 크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찬물에 만 밥알갱이들처럼 푸스스 흩어지는 이팝나무꽃이 어찌나 쓸쓸해 보이던지요.  예년 같으면 나는 그 꽃을 보며 찬란한 5월을 준비하고 있었겠지요.  그러나 올해는 달라도 너무 다르군요.  처음인 듯 생경한 느낌.  흐르는 세월이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을 잊게 하고, 권력과 탐욕에 찌든 사람들도 언젠가는 백기를 들겠지만, 그 과정을 겪는 우리에게 세월은 참으로 더디게 흘러가는 것만 같습니다.

 

어찌어찌 마음을 다잡아보려 했던 최근 며칠의 노력이 무위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제단에 피어오르던 향냄새와 수북이 쌓여만 가던 국화꽃이 머릿속에서 파도처럼 일렁입니다.  살다 보면 별의별일을 다 겪게 마련이지만 생과사의 갈림길에 서면 모든 게 다 헛된 것처럼 허허로운 느낌만 가득합니다.  지나친 감상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허방을 짚은 듯 나를 꼿꼿이 세울 수가 없군요.

 

한 일도 없이 오전이 다 흘렀습니다.

어제부터 시작된 두통이 머릿속을 콕콕 찌르는 듯 헤집고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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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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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국의 소설가 줄리언 반스를 만난다는 것은 '소설을 통한 인문학적 채험'을 하는 색다른 경험입니다.  말은 많이 들었지만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던, '인문학'이라는 거대한 무게에 짓눌리기보다는 오히려 궁금증과 호기심을 증폭시켜 대담하게 '비밀의 화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도록 만드는,  설렘과 기대로 '인문학'에 한발 다가서게 하는 그런 소설을 만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일입니다.

 

저로 하여금 줄리언 반스를 처음 알게 해준 책은 <내말 좀 들어봐>였습니다.  출간된 지 벌써 10여 년이 흘렀군요.  사랑에 대한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는 소설임에도 결코 지루하거나 진부하지 않은, 작가만의 독특한 시각과 재치가 넘치는 표현들, 무엇보다도 철학과 상식을 넘나드는 작가의 지성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저는 오늘 줄리언 반스의 신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제 예상대로 호평이 쏟아지더군요.  예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줄리언 반스의 작품은 소설 속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예사로 넘기기 힘든, 말하자면 소설을 통째로 옮겨 적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 어렵게 하는 소설이지만 리뷰라는 한정된 틀 속에서는 그런 짓거리는 통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저는 지금 쓰는 리뷰에 제가 특히 마음에 두었던 작품 속의 구절을 최대한 많이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다음의 인용문부터 보시죠.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p.165)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와 같은 구절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후에 바라보는 과거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 시절로 되돌아가 자신의 과오나 실수를 바로잡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예컨대 그 시절의 나는 경험이 부족해서, 보통의 젊은이가 갖는 치기 어린 과대한 감정 표출로 인하여, 혹은 으스대며 뻐기고 싶은 영웅심의 발로였다는 말로 우리의 과오나 실수를 합리화한다는 것은 조금쯤 비겁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과거의 사실을 가감하고, 기름을 치며, 때로는 망각이라는 그늘 뒤로 숨기도 합니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말입니다.  우리의 기억이 얼마나 미약하고 터무니 없는 것인지요.  게다가 그 기억을 바로잡아 줄 친구들도 하나둘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결국엔 그 기억들이라는 게 나 스스로에게 했던 독백에 불과한 것이겠지요.  

      

"즉, 바로 우리 코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가 가장 분명해야 함에도 그와 동시에 가장 가변적이라는 것.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그것은 우리를 제한하고 규정하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측량하게 돼 있다.  안 그런가?  그러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속도와 진전에 깃든 수수께끼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역사를 어찌 파악한단 말인가.  심지어 우리 자신의 소소하고 사적이고 기록되지 않은 것이 태반인 그 단편들을."    (p.106~p.107)

 

위에 인용한 글은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역사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토니 웹스터는 학창 시절 '역사가 무엇이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대해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노년에 이른 그는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가깝다’고 번복합니다.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는 또 다른 인물인 에이드리언은 같은 질문에 대해'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말합니다.  라그랑주의 말을 인용한 것이지요.  선생님은 덧붙입니다.  '역사는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라고.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p.141)

 

그렇다면 기록되지 않는 평번한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분명 시간과 역사 속에 존재했었지만 기록되지도, 또는 기억되지도 않는 개인의 삶은 무의미한 것으로 남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러한 삶은 역사에 어떤 방식으로 기여하는 것이며, 개인은 자신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수용해야 할까요?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확신하는 순간 삶을 거부해야 마땅할까요?  소설 속에서도 인용되고 있습니다만 카뮈는 자살이 단 하나의 진실한 철학적 문제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책에서 주인공 토니는 자신의 애인이었던 베로니카가 친구 에이드리언을 사랑하게 되면서 저주에 가득찬 편지를 보냅니다.  공교롭게도 토니가 편지에 썼던 예언은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되었고, 에이드리언은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노년에 이르러 까맣게 잊고 있었던 자신의 편지와 불행한 삶을 살았던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토니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는 살면서 좌충우돌하고, 대책없이 삶과 맞닥뜨리면서 서서히 기억의 창고를 지어간다.  축적의 문제가 있지만, 에이드리언이 의미한 것과는 무관하게 다만 인생의 토대에 더하고 또 더할 뿐이다.  그리고 한 시인이 지적했듯, 더하는 것과 늘어나는 것은 다른 것이다."    (p.153)

 

"나는 인생의 목적이 흔히 말하듯 인생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님을 얼마의 시간이 걸리건 상관없이 기어코 납득시킨 끝에, 고달파진 우리가 최후의 상실까지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데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할 때가 가끔 있다."    (p.183)

 

주인공 토니는 궁극적으로 자신을 자책하며 후회하고 있습니다.  일견 회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어찌 됐건 살아 있는 자에게는 또 다른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죠.  토니의 아내였던 마거릿은 말합니다.  "토니, 이제 당신은 혼자야."라고 말입니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자신이 저질렀던 젊은 시절의 과오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토니의 노년에 영향을 미칩니다.

 

"내 애기의 요지는, 장담컨대, 회한의 주된 특징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데 있다.  이미 까마득한 시간이 흐른 마당에 사과를 하거나 보상해봤자 부질없는 짓이다.  하지만 내가 틀린 거라면?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회한을 단순한 죄책감의 문제로 바꾸어, 사과를 하고 용서받을 방도가 있다면?  베로니카가 생각한 것처럼 내가 나쁜 놈이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녀가 기꺼이 그를 믿어준다면?"    (p.186) 

 

저는 이렇게 리뷰를 마칠까 합니다.  추리소설의 기법으로 씌이진 이 소설은 제 리뷰와는 다르게 읽는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추측컨대 이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반대일 수도 있겠군요.  제 바람입니다.  부디 예감이 틀리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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