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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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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는 누군가 끊임없이 걸었던 마음 발자국들로 가득합니다. 길이 없어 더 길다웠던 어느 길 모퉁이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기약도 없이 기다렸던 적이 있나요? 그 많은 그리움들이 소리도 없이 소복소복 쌓여갑니다. 하여, 하늘은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라봄으로써 허공의 어느 곳에 내 자신의 마음길을 내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유도 없이 심란했던 어느 날, 실체가 없는 허공에 무심한 눈길이 닿았던 것도 따지고 보면 분주히 다녀갔던 누군가의 마음길을 묵묵히 걸어본 것일 테지요.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을 읽으며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히말라야였을까? 전문 산악인도 어렵다는 안나푸르나 환상종주(Annapurna Circuit)를 여행 초짜였던 그녀는 무슨 배짱으로 시작한 것일까? 나는 궁금했습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그 까닭을 누군가에게 논리적으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어도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한동안 마음을 잃고 헤매일 때 육신의 고통을 잊고 오롯이 마음 하나에 의지하여 나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곳은 히말라야가 유일하겠지요. 하늘과 땅이 맞닿은 그곳에서 육체의 고통은 다만 고양된 영혼의 승화로 이어져 선명한 마음길을 미끄러지듯 내달릴 것입니다.

 

"어린 시절, 사남매의 맏이였던 내겐 몇 가지 금기어가 있었다. 힘들어요, 무서워요, 못해요. 어머니는 내게 '강인함'을 요구했다. 상처를 받아도, 슬픈 일이 생겨도, 힘든 일이 있어도 내색 없이 이겨내기를 바랐다. 죽는시늉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것이 자존심이라고 했다. 이 가르침은 내 인생을 통제하는 정언명령이 됐다. 히말라야 산속이라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p.48 ~ p.49)

 

정유정 작가의 첫 에세이인 이 책은 김혜나 작가와 함께 떠난 안나푸르나 환상종주 17일간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작가는 자신의 지난 시절을 소설 속의 한 장면처럼 회상하고 있습니다. 전문 이야기꾼답게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일정에 적절한 위트와 유머를 가미함으로써 어느 여행기에서나 등장하는 여행지에서의 감상이나 애수, 기족이나 연인에 대한 그리움 등 끈적끈적하고 구태의연한 이야기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현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했던 이야기, 일정 내내 변비에 시달렸던 이야기, 일정에 쫓겨 혹은 현지 사정에 의해 세수도 거른 채 일정을 소화했던 경험, 고산병으로 착각하여 먹었던 약의 부작용으로 겪었던 일화 등 여행에 서툰 작가의 일상이 세세하게 드러납니다.

 

최대 난관이었던 해발 5416미터의 쏘롱라패스(Thorung La Pass)를 오르는 과정은 마치 소설 속의 이야기처럼 긴장감을 갖게 합니다. 나는 '작가는 과연 오를 수 있었을까?'하는 궁금증과 조바심으로 손에서 책을 놓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작가의 입담과 재치있는 유머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죠. 그러나 이따금 등장하는 그녀의 가족사와 지난했던 어린 시절에서는 울컥하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갖은 난관을 무릅쓰고 쏘롱라패스에 올랐던 작가의 기분은 어떠했을까요?

 

"혜나가 먼저 일어섰다. 나도 따라 일어났다. 몸을 돌리고 발아래 설산들을 바라보았다. 귓속에서 맥박이 쿵쿵쿵 울고 있었다. 기적 같았다. 이 고갯마루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사실이. 새벽녘에 찾아든 사자의 손을 생각하면 더 더욱.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승민이만큼 자유로웠다는 것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오롯이 나 자신일 수 있었다는 게. 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었다는 사실도. 그러므로 행복했다. 양팔에 설산들을 끌어안고 트위스트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p.186)

 

세상과 맞설 힘을 얻기 위해 안나푸르나를 택했다는 작가의 심정은 백번 이해가 가면서도 나는 그녀의 용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파에 시달리다 보면 자꾸 희미해져만 가는 자신의 마음길을 선명하게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은 극한의 고통을 체험함으로써 육신의 욕망을 잠시만이라도 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육신의 욕망을 뚫고 내 온전한 마음이 하늘에 닿게 하는 것, 그 망망한 허공에 나만의 마음길을 내는 것이야말로 흔들리지 않고 세상을 살게 하는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필요에 의해 선택한 성격과 달리, 나는 태생적인 겁쟁이다. 낯선 일을 싫어하고, 노상 허둥대고, 곧잘 상처받고, 넌더리나게 망설인다. 혼자 욱하고, 혼자 부끄러워한다. 사소한 일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졸렬하게 군다. 그걸 들키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한다. 이토록 후진 자질로, 극단적인 두 성질의 충돌을 끊임없이 겪으면서 그 기나긴 어둠을 어찌 통과했는지 스스로 신통할 지경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때가 있어 인간으로서 성숙해지고 삶이 단단해지지 않았겠느냐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 어둠은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과 싸우는 법보다는 인생을 즐기는 법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전의를 불태울 대상이 필요하지도 않았을 테다. 나는 노는 일마저 훈련해서 노는 인간이 되었다. 그것이 몸과 마음을 정전 상태에 빠뜨린 원인이었다. 내 판단에는 그랬다." (p.132 ~ p.133)

 

나는 위에 인용한 대목에서 작가의 생각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마다의 그릇을 갖고 태어나는 우리네 삶에서 인생은 때로 용량초과의 과도한 것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극복하라고 모진 회초리를 들기도 하지요. '안나푸르나의 대답은 결국 내 본성의 대답이었다'고 고백하는 작가의 후기(에필로그)를 읽는 것으로 작가와 함께 떠났던 '안나푸르나 환상 독서'가 끝난 셈입니다. 나는 여전히 나만의 마음길을 닦지 못한 채 누군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끝없이 방황하면서 말이죠.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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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6-09 00:39   좋아요 0 | URL
안나푸르나... 정말 멋진 곳이지요... 저는 작년에 처음으로 히말라야를 가봤는데(랑탕계곡), 아쉽게도 안나푸르나는 포카라의 사랑곳 전망대에서 먼발치로 '마차푸차레(6,993m)'만 구경하고 내려왔답니다. 언제 또다시 히말라야를 가게 될 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다시 히말라야를 찾게 되면 그땐 꼭 안나푸르나로 갈 생각입니다.(작년에 함께 히말라야에 갔던 몇몇 친구들과는 내후년에 '킬리만자로'를 함께 오르기로 약속했는데, 그중 한 친구가 내년에 세 번째로 또 히말라야에 가기로 한 약속이 있다는 애기를 듣고 얼마나 부럽던지요. 그 친구가 처음으로 히말라야를 올랐던 코스가 바로 이 책의 작가가 다녀온 코스와 똑같네요. 그 친구는 그 길을 홀로 21일 동안 걸었다고 하더군요.)

꼼쥐 2014-06-10 18:01   좋아요 0 | URL
아~~그러셨군요.
제 주변에도 네팔 트레킹을 다녀온 사람이 몇몇 있는데 다들 좋았다고 하더군요. 저도 부러운 마음에 다녀오고는 싶지만 현실을 핑계로 포기하곤 했었죠. 이 책을 읽고나니 한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드는데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2014-06-24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07 1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예행연습을 하듯 이른 더위가 극성이었던 5월.  세월호의 아픔과 끈적거리는 슬픔을 안고 긴 터널을 빠져나온 듯한 느낌이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듯 슬픔과 더위가 용융된 대기의 불쾌함에 책을 읽는 일마저 기쁨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밝아졌으면 좋겠다.  어룽어룽한 그 느낌이 사라지고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투명해졌으면 좋겠다.  6월에는 그런 책을 만났으면 좋겠다.

 

 

얼마 전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소설의 일반적이고도 정형화된 구성에서 벗어나 작가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여실히 드러낸 작품이었다.  지적인 문체도 간과할 수 없는 매력이지만 말이다.  그때의 좋은 느낌으로 이 책을 고른다.  설레고 기대된다.

 

 

 

 

 

 

 

 

 

 

 

국내에 번역된 후지와라 신야의 책은 거의 다 읽었었다.  <인도 방랑>을 비롯하여 <동양기행>, 인생의 낮잠>, <황천의 개> 등 그의 저작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지만 작품 내면을 일관되게 흐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바라보는 정직한 시선이었다.  그는 사진작가이자 여행가이기 이전에 올바르게 사유하는 참인간이었다.  나는 그 점이 좋다.

 

 

 

 

 

 

 

 

정혜윤 PD의 글에서는 성격만큼이나 꼼꼼함이 배어나온다.  하나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 그녀의 세심함이 때로는 답답할 때도 있지만 작가의 작품을 여러 권 읽어 그 권수가 더해질수록 답답함은 미더움으로 변한다.  그리고 작가의 해박한 지식에 탄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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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vs. 알렉스 우즈
개빈 익스텐스 지음, 진영인 옮김 / 책세상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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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예측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일이 발생하지만 않는다면 하루를 보내는 것은 마치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떨어뜨리는 것만큼이나 손쉬운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내 기억의 빈 공간(만약 있다면)에 동전이 쌓이는 것처럼 부피를 늘리지 않은 채 하루하루의 일상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다.  예외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따금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평소에는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조금쯤 과도한(그렇다고 생각되는) 통행세를 요구할 때가 있다.  밋밋하고 심심해 할까 봐 그러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개빈 익스텐스가 쓴《우주 vs. 알렉스 우즈》는 돼지저금통에 만 원짜리 지폐를 넣을 때의 뿌듯하고 든든한 느깜처럼 뭔가가 꽉 채워지는 기분이 들게 하는 소설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뭐랄까?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배제한 채 독자가 꼭 알아두어야 할 내용만을 옮긴 듯한, 다소 시니컬하고 간결한 문체로 465페이지의 긴 얘기가 끝날 때까지 독자의 마음을 흔들림 없이 사로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개빈 익스텐스는 비록 30대 중반의 젊지 않은 나이이지만 이 책은 그의 데뷔작이라니 놀랍지 않은가.

 

소설은 알렉스(이 소설의 주인공)가 열 살이었을 때 벌어진 일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그의 집 천장을 뚫고 들어온 2킬로그램짜리 운석에 머리를 맞은 알렉스는 수술을 받고 2주만에 가까스로 깨어난다.  그 후 알렉스는 간헐적 간질을 앓게 되고 걱정이 된 어머니는 알렉스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싱글맘인 그의 어머니는 타로 점을 보거나 그것과 관련된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몇 년 뒤 다시 학교에 나가게 된 알렉스는 동네의 불량배들로부터 심한 괴롭힘을 당한다.

 

"엄마가 따르는 규칙과 내가 따라야 할 규칙은 달랐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 이게 엄마의 규칙이었다.  그 비현실적인 믿음이 어떤 결과를 낳건, 앞뒤가 맞건 안 맞건 상관없었다.  시험 성적을 잘 받아서 장차 내가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 이게 내가 따라야 할 규칙이었다.  내가 간질을 앓기 때문에 특히 중요했다.  엄마는 내가 뒤쳐져서는 안된다고 굳게 믿었고, 우리 주의 어떤 학교도 내 입학을 거절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p.101)

 

어느 날 하굣길에서 동네 불량배들을 피해 달아나던 알렉스는 피터슨 씨의 집으로 뛰어든다.  알렉스를 찾지 못한 불량배들은 피터슨 씨 집의 온실 유리를 부수고 알렉스는 속죄의 대가로 피터슨 씨의 편지 쓰는 일을 대신하게 된다.  피터슨 씨는 베트남전의 참전 용사로서 아내를 잃고 은둔자적 삶을 사는 평화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였다.  작가는 우연과도 같았던 알렉스와 피터슨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지금 나는 카오스로 가득한 한 세계의 정점인 동시에 또 다른 하나의 세계가 시작하던 바로 그 순간을 묘사하려 한다.  이 순간 덕분에 생각하게 됐다.  보기에 따라 인생은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또 보기에 따라 얼마나 혼란스러운가.  다음의 이야기는 끝이자 새로운 시작이다."    (p.112)

 

알렉스는 피터슨 씨의 집에서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을 빌려 읽게 된다.  그러던 중 버스 안에서 동네 불량배들을 다시 만났고, 알렉스가 읽고 있던 커트 보네거트의 희귀 초판본이 그들 중 한 명에 의해 버스 밖으로 내던져진다.  알렉스는 그 아이와 주먹다짐을 하고 그 일로 인해 알렉스는 외출 금지 명령을 받는다.  감금 상태에서 풀려난 알렉스는 피터슨 씨에게 사과하고 한동안 공부에만 몰입한다.  어느 날 피터슨 씨의 애완견 커트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알렉스는 처음으로 실제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애완견 커트가 죽은 후 피터슨 씨의 정신건강이 염려되었던 알렉스는 <커트 보네거트 세속 교회>라는 이름의 독서 모임을 만든다.  커트 보네거트의 책을 읽고 마음에 드는 문장이나 단락을 적어와 피터슨 씨의 집에 모여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모임이었다.  알렉스는 자신이 보관하던 운석을 런던의 자연사박물관에 기증하고 돌아오는 길에 자신을 마중나온 피터슨 씨를 만나 함께 귀가하던 중 가벼운 교통사고가 발생한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피터슨 씨는 놀랍게도 진행성핵상마비. 신경이 점차적으로 마비되는 희귀한 퇴행성 질환으로, 아저씨는 이제 3년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다.

열네 달 동안의 독서 모임이 끝나는 마지막 날 알렉스는 피터슨 씨에게 할 말이 있어 다시 들렀다가 자살을 시도한 피터슨 씨를 만난다.  알렉스의 신고로 되살아난 피터슨 씨는 병원에 입원하고 알렉스는 피터슨 씨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돌보기로 결심한다.  줄곧 대마를 직접 재배하여 마리화나를 피워왔던 피터슨 씨를 대신하여 알렉스는 대마 재배하는 법을 배우고 피터슨 아저씨를 지극 정성으로 돌본다.  피터슨 아저씨의 몸은 점점 쇠락하여 가고 알렉스가 약속했던 스위스로 향하는 여정을 결행할 즈음 아저씨는 바닥에 넘어져 다시 입원한다.

 

병원으로부터 피터슨 아저씨의 퇴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알렉스는 피터슨 아저씨를 휠체어에 태워 병원을 빠져 나온다.  피터슨 아저씨를 차에 태워 스위스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이 시작되고 알렉스는 피터슨 아저씨가 죽기 전 스위스 세른에서 마지막 관광을 한다.  '과학 혁신 전시관'에서 알렉스는 우주와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그런데 '별난' 입자의 수명을 생각하고, 우주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생각하고, 우주가 마지막 열적 종말(모든 별이 사라지고 블랙홀이 증발하고 모든 핵자가 붕괴하고, 기본 입자만이 우주의 무한한 어둠 속을 떠다니는 순간)을 겪기 전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하다가, 나는 깨달았다.  인생의 문제란 '별난'입자와 닮았다는 것을.  우주의 크기와 규모에 비하면 다른 모든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작고 금방 지나가는 사건일 뿐이다.  우주의 규모로 보면 눈을 깜박이는 시간보다도 훨씬 더 빨리 사라진다."    (p.429)

 

병원의 신고로 알렉스는 영국 방송사의 뉴스 메이커가 되고 피터슨 아저씨의 유골을 차에 싣고 귀국하던 중 경찰에 의헤 체포된다.  그러나 알렉스는 무사히 석방되어 열여덟 살 생일에 피터슨 씨가 남긴 유언장에 의해 5만 파운드의 상속금을 받는다.

 

"나는 피터슨 씨가 이 편지를 쓰면서 아주 즐거워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엄마한테 편지를 건네주었다.  엄마는  편지를 읽고 울기 시작했다.  엄마는 엘리에게 편지를 넘겼다.  엘리는 울지 않았다.  편지를 노려보더니 고개를 까딱 흔들면서 내게 돌려주었다."    (p.464)

 

도서관에 들러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 <제5 도살장>을 빌렸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결코 인연이 되지 않았을 소설.  어쩌면 내 삶에서 결코 등장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커트 보네거트라는 낯선 이름이 우연처럼 내 삶을 파고들었다.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손쉽고 짧았던 하루가 이렇게 끝나가고 있다.  내가 던진 동전이 언젠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내 기억을 깨울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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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친구가 있다. 움직이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고, 발뒤축에 게으름을 한아름 달고 다니는 친구가 어떻게 야구 관람이라면 사족을 못 쓰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경기 스케줄은 물론이고 선수들의 몸 상태 및 주특기까지 줄줄 꿰는 걸 보고 있노라면 '이 친구가 혹시 천재?' 라는 턱도 없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나도 그 친구 덕분(?)에 사주에도 없었던 야구장 구경을 두어 번 갔었으니 말 다했다. 나는 사실 야구 관람을 그닥 즐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야구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는 것보다는 몸으로 직접 하는 것을 즐기는 나로서는 그 친구가 도통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언젠가 한번은 내가 곁에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경기가 끝날 때까지 그라운드만 뚫어지게 노려보았고 그날 나는 그 친구가 마치 관음증 환자처럼 보였었다. 그러다가도 응원하는 팀이 경기에 이길 가망이 없어 보일라치면 들입다 술만 먹는 것도 친구의 오래된 버릇이었다. 그렇게 얼큰히 취한 친구는 선수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곤 했다. 이건 뭐 숫제 개망나니가 아닐 수 없다. 오죽하면 내가 경기 도중에 친구만 홀로 남겨두고 도망을 갔을까.

 

그러던 친구가 요즘은 통 야구장을 찾지 않았다. 신기할 정도로 야구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이다. 혹시 벼락을 맞은 게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원정 경기도 마다않고 전국을 누비던 친구가 어느 날부터 '바른생활 아저씨'로 탈바꿈한 데는 분명 까닭이 있을 터인데 이렇다 저렇다 해명도 없이 야구 얘기를 입 안 깊숙이 묻어버렸으니 궁금하다 못해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죽을 날 받아 놓은 사람처럼 왜 그렇게 갑자기 변했느냐' 물었더니 그저 씩 웃고 돌아서는 본새가 더욱 수상하기만 했다. 몇 번인가 재차 다그쳐 물었더니 친구 왈, 재미없다는 거였다. 그걸 대답이라고... 나는 순간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래도 궁금하고 답답한 쪽은 나인지라 슬슬 구슬렀더니 술을 사란다. 어디 그게 술을 사주면서까지 들을 일인가.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됐다, 내 안 듣고 말지'하고는 한동안 잊고 지냈었다. 그러던 친구가 오늘은 자발적으로 해명을 하겠다는 거였다. 나는 무슨 수작이 있겠거니 생각하고는 궁금하지 않다며 돌아섰다. 그런데 이 친구 쫓아오면서까지 해명을 늘어 놓았다. 질 팀은 지고 이길 팀은 이겨서 이제 야구가 재미없어졌단다. 이런, 된장! 그걸 해명이라고. 내가 다시 돌아서자 장황하게 풀어놓은 해명인즉슨 이랬다. 야구라는 게 승부를 예측하기 힘들어야 보는 재미도 있고 응원할 맛도 나는 법인데 경기를 보지 않아도 승부를 뻔히 예측할 수 있으니 볼 재미가 없어졌단다. 게다가 자신이 응원하던 팀은 내쳐 지기만 해서 몇 날 며칠을 줄창 술만 마시다 집엘 들어갔더니 보다 못한 그의 아내가 어느 날 이혼서류를 내놓더란다. 친구는 그 자리에서 싹싹 빌고 각서까지 썼다고 했다. 그 후로 친구는 단 한번도 야구장을 찾지 않았단다.

 

모름지기 스포츠에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뚜렷해지는가 보았다. 그나저나 친구야, '너 참 불쌍타(레미제라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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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4-05-31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호랑이보다 무서운 것이 마누라다...그런 결론이로군요.요즘 남성들의 처지가 참으로 미제라블합니다.

꼼쥐 2014-06-05 19:31   좋아요 0 | URL
그래도 아내 입장에서 보면 그런 남편이 결코 달가운 건 아니겠지요. 물론 취미를 즐기는 것까지야 뭐라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정도껏 해야 봐주지 않을까요? 암튼 저도 남자의 입장이지만 조금 심하다 싶더라구요.

말리 2014-05-31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꼴쥐 팬이신지... 설마 한화실까요.. 저희 집에도 야구의 계절을 손꼽아 기다리고도 매일 홧병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 미저러블 ㅠ

꼼쥐 2014-06-05 19:32   좋아요 0 | URL
한화 팬 맞습니다. 요즘은 거들떠도 보지 않지만. 헤어진 연인처럼 아예 관심도 두지 않더군요. 그래도 가끔은 생각날 법도 한데.
 

떨어진 버찌열매는 인도의 보도블럭에 거뭇거뭇 흉한 무늬를 새겨놓았다. 새 생명이 생명으로 화(化)하지 못하는 모습은 처량하다못해 서글펐다. 까만 알갱이들이 이사람 저사람에게 밟히고 뭉그러져 도로를 어지럽히는 꼴이라니... 봄밤을 화사하게 빛내주던 벚꽃의 낭만은 어데가고 이제는 환경미화원 아저씨들의 푸념이나 듣는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어릴 적 달짝지근한 풋내가 나는 오디를 입술이 파래지도록 따먹던 생각이 난다. 허기진 배를 달래주던 오디의 고마움을 어찌 잊을까.

 

나는 흉물스럽게 굴러다니는 버찌 알갱이들을 보며 생각나는 게 있었다. 중학교때였나, 국어시간에 배웠던 '위그든 씨의 사탕가게'에 등장하는 버찌씨다. 그 책에는 아직 돈에 대한 개념이 없는 어린 소년과 사탕가게 주인인 위그든 씨가 등장한다. 사탕이 먹고 싶어 사탕가게에 들렀던 소년은 돈 대신에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하던 버찌씨 여섯 개를 내놓는다. 모자라냐, 묻는 소년에게 위그든 씨는 오히려 사탕과 함께 거스름돈 2센트를 쥐어준다. 어린 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아이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소중했을 버찌씨를 보며 그 값어치를 소중하게 셈할 줄 알았던 위그든 씨가 이 시대에도 존재한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생각했다. 나도 그 어른들 중 한 명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으쓱할까. 흔해빠진게 사탕인 풍요로운 시대인데 배고프던 그 시절보다 더 심한 허기가 밀려온다. 한여름의 더위가 턱밑까지 차오른 오늘, 그 더위 속에서 영악해진 내 영혼의 서늘함을 보는 듯했다.

 

소중한 것이 소중한 것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내 아이만 괜찮기를 바란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유난히 사망 사고가 많았던 요즘, 탐욕에 내어준 원칙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적당히 눈감아 주고, 적당히 쥐어주던 검은 뒷거래의 대가가 우리 앞에 크나 큰 재앙으로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곳에 예외가 있을 수 있을까. 버찌 알갱이들이 저토록 처참하게 밟혀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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