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것은 싸우는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고재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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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는 문제에 급급하면 할수록 개인은 그가 속한 국가나 기업에 순종적일 수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개인의 자유는 억압되고, 지배자는 온갖 대의명분을 내세워 국민들을 마치 그들의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노예화의 작업을 가속화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영웅처럼 떠받들도록 하는 우상화 작업 역시 병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비단 산업화를 추구하는 개발도상국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하고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선 국가에서도 개인 간의 경쟁을 부추기고 상대적 박탈감을 주입함으로써 사회 구성원으로 하여금 이제 막 출발선에 선 경주마처럼 인식하게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국가는 하나의 악이다. 그것도 거대한 악이다. 이에 비하면 조직폭력배의 악함은 실로 보잘것없다. 국가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재다. 그야말로 우리는 한 줌의 무리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라는 환상에 결코 속지 마라."  (p.95)


일본의 노작가 마루야마 겐지의 산문집 <사는 것은 싸우는 것이다>는 마치 한 권의 잠언집처럼 읽힌다.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깨달은 평생의 지식을 시나 경구처럼 하나의 문장에 압축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기에 독자는 하나하나의 문장을 허투루 읽을 수 없다. 짧은 문장을 읽고 곰곰 되새기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할 수밖에 없다. 읽고 생각하고, 다시 읽고 생각하는 단순 작업이 마치 한 걸음 한 걸음 앞을 향해 내딛는 우리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싸움의 연속이다.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도망친다면 악랄한 현실이 그 틈을 예리하게 찔러 곧바로 추락하는 고통을 맛보게 된다. 사는 동안 느긋한 생활을 맛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꿈은 이 세상을 뜨고 나서 꾸는 수밖에 없다."  (p.167)


힐링만 구하지 말고 혹독한 현실과 대결할 것을 주장하는 1장 '개인과 가족의 싸움', 국가를 손아귀에 넣고 흔드는 지배층과 싸우는 것이 국가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라고 말하는 2장 '가족이나 국가를 과신해서는 안 된다', 반골 정신과 강한 의지를 기르고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그것에 매진하여 충만한 삶을 살라고 강조하는 3장 '정신과 마음을 기른다는 것', 이 세상에 기댈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절대적인 진리를 직시하라고 하는 4장 '고독을 잊어서는 안 된다'로 이루어진 이 책은 각각의 문장이 모두 명령이나 확언에 가까운 격정적인 문체로 쓰인 까닭에 짐짓 국가의 전복을 기도하는 어느 반체제 인사의 선동 글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가난과 비참을 핑계 삼아 악으로 빠지지 않고 이겨 낸 사람은 마음속 깊이 사무친 풍부한 감성을 갖고 있다. 그것이 지성이나 이성에 의해 다듬어지면 자애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타애적인 마음으로 해방되고 그 길을 밟는 사이에 삶의 깨우침을 얻는다."  (p.83)


국가와 국민을 위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아 왔던 작가이지만 이 책에서 작가는 국가를 '거대한 악'으로, 그 뒤에는 국가를 사유하고 좌지우지하려는 소수의 지배층이 있음을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정치인과 기업인은 가용한 돈이 모두 자기 것인 양 착각하여 마구 쓰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그들이 아니라 그런 집단을 내버려 둔 국민이라고 말한다. 그들 소수의 무리에게 영혼을 뺏겨 부조리에도 분노하지 않고, 분노할 줄도 모르는 '들개'로 전락했음을 작가는 개탄한다. 일본인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이 '소극주의', '사대주의', '예속주의'이지만 이에 더하여 지배층의 폭정을 보고도 못 본 척하는 '무력함'이라고 작가는 단언한다.


격정에 찬 마루야마 겐지의 글이 비단 일본인에게만 필요하지는 않을 터, 국가 권력을 이용하여 언론을 장악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개개인을 검찰 권력을 통하여 입막음을 시도하는 등 과거 독재 정치로의 회귀를 꾀하는 현 정부의 모습은 마루야마 겐지가 지적하는 국가와 개인의 실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보인다. 게다가 경제를 더욱 어렵게 하여 젊은이들로 하여금 '먹고사는 문제'에 더욱 집중하도록 하고, 이를 통하여 젊은이들이 한편으로는 정치에서 멀어지고 이념적으로는 우경화의 늪에 빠지도록 하는 모습은 작금의 일본과 비슷하다. 작가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는다.


"인간답게 존재하기를 바란다면 평생 간직해야 할 것은 저항이다. 오로지 그 숭고한 싸움을 계속하는 일이야말로 참된 인생을 참되게 산 증거가 된다. 거기에야말로 사는 의미와 목적이 감추어져 있다."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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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완연한 봄, 나는 왜 짜증만 느는가?


내 기억에 봄은 언제나 바람과 함께 오고 더위와 함께 흩어지곤 했습니다. 오늘처럼 하늘이 맑고 창밖으로는 바람이 윙윙 소리를 내며 스쳐가는 날이면 '아, 벌써 봄이 왔구나!' 내심 놀라며 감탄하게 됩니다. 어쩌다 바람이 없는 날이면 탁한 미세먼지가 며칠씩 이어지고, 그러다 오늘처럼 바람이 불어 공기질이 반짝 좋아지는 날이 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바람과 미세먼지의 끝없는 반복을 몇 차례 겪고 나면 미처 대비하지 못한 더위가 화염방사기의 불꽃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고, 황량하기만 하던 숲이 연녹색 생명의 색깔로 물들기 시작하는, 꿈처럼 아름다운 풍경은 이제 어느 오래된 시인의 시집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듯합니다. 그것은 마치 공룡이 출몰하던 중생대 백악기의 기록처럼 사람들 기억의 지층 속에서 단단한 화석으로 굳어가고 있는 듯 느껴집니다.


대한민국의 리더 멧돼지가 된 지도 벌써 만 1년이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1년에 한 번, 11월에서 1월 사이에 짝짓기를 하는 멧돼지의 생태상, 시기적으로 보면 우리 멧돼지에게 겨울은 가장 원기가 왕성한 계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다른 어느 때보다 기운이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이를 보다 못한 아내 멧돼지는 내가 취임한 후 9개월간의 주요 성과 10가지를 정리한 20초짜리 영상을 2월 한 달간 전국 146개 옥외 전광판에 송출하도록 지시를 내렸겠습니까. 순전히 나의 축 처진 어깨에 힘을 불어넣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말입니다. 부동산 규제 지역 해제나 사상 최대 수출액 달성으로 세계 수출 순위 6위를 달성했다는 등의 내용은 사실 성과라기보다 감춰야 할 오점에 불과하지만 아내 멧돼지는 이를 포장하여 사기에 가까운 말로 뭉뚱그렸던 것입니다. 사실 부동산 침체와 사상 최대의 무역 적자를 성과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게 다 나의 지지율 감소로 인한 급격한 원기 하락이 원인이었습니다. 그 외의 성과도 나의 치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전임 리더 멧돼지의 성과라고 하는 게 옳겠습니다.


상대편 무리의 대장을 내 뒷골목 똘마니들을 시켜 잡아들이라고 했던 게 아무래도 조금 무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주말의 거리에는 온통 나에 대한 욕설과 조롱으로 넘쳐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걸 보면 나의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하는 멧돼지보다 그르다고 생각하는 멧돼지들이 훨씬 많은 게 아닐까 싶은 것입니다. 게다가 결혼 전에 있었던 아내 멧돼지의 주가 조작 증거들이 속속 드러남으로써 나는 요즘 밤잠을 설칠 지경입니다. 차라리 아내 멧돼지를 감옥에 보내고 새장가를 드는 게 어떨까 하는 못된 생각도 하고 말입니다.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나를 도와준 아내 멧돼지의 노력이나 희생은 내가 모르는 바 아니지만 아내 멧돼지와 장모 멧돼지 역시 나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열을 올렸던 것 또한 사실인 까닭에 나는 그들에게 조금의 미안함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를 많은 일반 멧돼지들이 사정도 모르는 채 욕을 할 게 너무도 뻔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자식도 없는 내가 다른 젊은 암컷 멧돼지와 살아보고픈 마음을 굳이 숨겨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드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어차피 한 번뿐인 돈생인데 말입니다.


발정기가 지나서인지 아니면 환절기에 따른 일시적 현상인지 똘마니 멧돼지들에 대한 짜증이 늘었습니다. 자살 예방을 위한 대책이라며 내놓은 게 번개탄 생산 금지를 거론하지 않나, 매년 남아도는 쌀 생산량을 세금으로 수매하는 기존 제도의 불합리성을 제거하기 위해 저생산의 품종을 선택하도록 하겠다는 둥 한심하기 짝이 없는 대책만 나열하고 있는 것도 나의 짜증을 유발하는 한 원인이 되고 있지만 일본의 기시감 멧돼지 역시 얄밉게 굴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뭐 하나 내 뜻대로 풀려나가는 게 없는 듯합니다. 게다가 북한의 여정 멧돼지가 깐죽대는 것도 참아내기 힘듭니다.


완연한 봄인 듯합니다. 창밖으론 바람이 윙윙 소리를 내며 치달리고 괜스레 부아가 치밀어 짜증만 한가득입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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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3-02-20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만간 <대한뉘우스>의 부활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꼼쥐 2023-02-24 16:03   좋아요 0 | URL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언론들의 작태를 보면 말이죠.

라로 2023-02-2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1년도 안 되었군요! ㅠㅠ

꼼쥐 2023-02-24 16:05   좋아요 0 | URL
시간이 너무 천천히 가는 것 같아요. ㅠㅠ
총선에서 본때를 보여줘야 할 텐데 말이죠.

singri 2023-02-21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미가요도 틀어주고 조만간 이완용 나올지도요

꼼쥐 2023-02-24 16:06   좋아요 0 | URL
일왕 생일에 외교부 2차관이 참석한 자리에서 기미가요도 틀고 다케시마의 날에 맞춰 일본 자위대와 함께 독도에서 훈련도 하고...

2023-02-21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24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옷의 세계 - 조금 다른 시선, 조금 다른 생활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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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세계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짧은 생을 구축하고 마감한다. 생명이 있는 대개의 것들이 그런 것처럼. 그런데 시인의 눈에 비친 어떤 것들은 우리의 시선이 닿지 않던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하기도 한다. 우리가 알던 세상, 너무도 익숙하여 거부감이나 툭툭 걸리는 느낌이 전혀 없는 세상, 눈을 감고도 그 세세한 부분까지 오차 없이 모두 그려낼 수 있는 세상, 마구 흐트러진 상태에서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세상, 격식을 갖추지 않은 부스스한 차림으로도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오가는 세상, 우리는 대개 좁디좁은 그런 세계가 자신이 알고 있는 전 우주인 양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네가 알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어느 시인의 손길이 없었더라면.


"이번 선물은 시옷의 낱말들이다. 사람이, 무엇보다 사람의 사랑이, 사랑의 상처가, 실은 그 선물이, 그리하여 사람의 삶이, 삶의 서글픔이, 그 서글픔이 종내는 한 줄 시가 된다. 세상을 바꾸려는 손길이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려는 시선이 되는. 그런 시에다 옷을 입히듯 나의 이야기를 입혀보았다. 나의 이야기가 내가 좋아하는 시 구절과 사이좋게 사귀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P.8 '사귐 이 책을 건네며' 중에서)


김소연 시인의 에세이 <시옷의 세계>는 다가가는 것에 서툰 시인의 성품을 반영하듯 그렇게 조용한 설명으로 시작된다. 머리말 「사귐」을 필두로 「사라짐」「사소한 신비」「산책」 등을 거쳐 「씩씩하게」까지, 35개의 낱말을 국어사전에 실린 순서대로 다루고 있는 이 책은 각각의 낱말에 대한 사전적 정의라기보다 해당 낱말을 화두로 저자가 자라온 이야기에서부터 아끼는 사람과 사물에 관한, 글귀에 관한, 그리고 시인에 관한 이야기들을 조곤조곤 들려주는 시인 자신의 세계에 대한 안내서인 셈이다. 대부분의 독자가 그렇겠지만 나 역시 『마음사전』을 통하여 시인에 대한 궁금증을 쌓아왔던 터라 이 책 <시옷의 세계>는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내가 만약, 시에 아프다는 말을 썼거나 불편하다는 말을 썼다면,  그건 아픔을 흔쾌히 허락한다는 뜻이고, 괴로움을 흔쾌히 수용한다는 뜻이고, 불편함을 흔쾌히 수락한다는 의지다. 그걸 즐기겠다는 것도 아니고, 넘어서겠다는 것도 아니고, 견뎌내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그걸 시인하겠다는 태도다. 불가능성에서 불구인 채로 시를 얻겠다는 것이다."  (P.128 '손짓들' 중에서)


시인의 이런저런 이야기들 속에는 다른 시인에 대한 이야기도 섞여 있다. 송경동, 쉼보르스카, 신해욱, 심보선 등 여전히 시옷으로 시작하는 시인의 세계. 그곳에서 김소연 시인은 자신이 거닐었던 그들 세상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한다. 시인의 일상이라는 게 어디 뭇사람의 일상과 크게 다를까마는 시인이 들려주는 또 다른 시인의 세계는 사뭇 새롭다. 곱게 빗질을 한 언어는 그렇게 한 폭 그림으로, 더없이 나긋한 한 장의 엽서처럼 다가온다.


"비밀 수집가 심보선은 그 비밀들을 시에 담는다. 비밀을 사랑하는 만큼 심보선은 비밀을 고백하는 걸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그의 시에는 비밀이 없다. 그에게 시는 비밀을 나누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그가 나누고자 하는 비밀이 깊고 큰 것일수록 그의 시는 친절해진다. 평이한 나탈 하나하나가 모여서 비밀을 관통해간다. 능청스러운 말투 하나하나가 모여서 고백을 점묘해간다. 그의 시는 그래서 난해하지 않은 채로 깊다. 우리는 그의 시를 읽으면서 언어의 무늬에 매혹당하기보다는, 비밀을 고백한 시인에 매혹당한다."  (P.240~P.241 '심보선 감염의 가능성을 생각함' 중에서)


언젠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게 되는 구절은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어디에선가/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길 하겠지요./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선택했다고/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로 끝나는 마지막 연이 아닐까. 김소연 시인은 이 책의 '상상력'에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에 숨겨진 공간들, 그 경계의 영역들, 그 이상한 미지의 세계에 대해 느끼는 우리의 모호함을 시인은 상상력의 힘으로 정확하게 호명해낸다."고 썼다. 어쩌면 시인은 '시옷'이라는 다채로운 세상을, 뭇사람들이 느껴보지 못했던 생경한 세상을 애정을 담아 소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한 뼘 넓어졌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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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와 다르게 예정된 행사는 연기되거나 취소되는 일 없이 꼬박꼬박 열리는 듯합니다. 다만 확연히 악화된 경제상황을 반영하듯 행사의 씀씀이나 규모는 대폭 줄어든 게 사실입니다. 심지어 졸업식과 입학식 시즌임에도 불구하고 매년 길거리에서 북적이던 꽃 판매상을 찾아볼 수가 없는 것도 하나의 이색적인 풍경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장미꽃 한 송이에 만 원을 호가하는 상황이니 사용한 꽃다발이 인터넷 사이트에 중고판매로 올라온다는 게 일견 이해가 됩니다. 등유가격 상승으로 난방비가 치솟으면서 생화 가격도 덩달아 올랐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화훼 농사를 접은 농가가 늘어나면서 장미 공급이 급격히 줄었기 때문이라는 게 그들의 설명이지만 어디 꽃의 가격뿐이겠습니까. 주변을 둘러봐도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물품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렇듯 우리들 호주머니 사정은 갈수록 찬바람이 불고 좀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계절은 이미 겨울을 지나 봄으로 가고 있는 듯합니다. 바야흐로 생명의 계절입니다. 공원 한 귀퉁이에서 보았던 벌개미취의 마른 꽃대궁에도 물기를 머금은 생명의 기운이 풀풀 날리는 듯하고 까칠한 목련의 나무 기둥에 귀를 갖다 대면 아스라한 물소리가 신화 속 음성처럼 들려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하나 아쉬운 것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기 어려워졌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유행가의 노랫말처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데 말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우리나라의 출생률은 심각한 수준입니다. 어쩌면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할 가장 시급한 문제가 낮은 인구증가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대입 수험생이 70만 명대였던 것이 지금은 30만 명대 후반에 불과한 수준입니다. 이제는 재수, 삼수를 할수록 명문대에 합격할 확률이 월등히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지방대의 소멸은 현실로 다가왔다는 게 중론입니다. 명절에 만난 어린 조카들에게 농담처럼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너희들이 대학에 갈 즈음에는 모두 의대생이 될지도 모르겠다. 다들 의사가 되고 싶어 하니 말이야." 나는 사실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정말 그렇게 될 날이 코앞에 닥칠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제학을 전공한 어느 학자와 짧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나 저나 동의했던 바는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로부터 적극적으로 이민을 수용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국가가 소멸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말하자면 유럽의 선진국들과 비슷한 경로를 겪게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일할 사람이 없어 이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 이로 인해 인종간 갈등이 발생하고, 이것이 곧 사회적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우리는 지금 그와 같은 방향으로 치닫는 과도기의 어느 지점에 와 있는 듯합니다.


2023년 1월 한 달의 무역 적자액이 127억 달러라고 하더니 2월 들어 적자폭이 더욱 확대되는 모양새입니다. 열흘 만에 50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정부는 뾰족한 수를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굴욕적이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만 몰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 결과 얻게 될 이득은 우리나라 대통령의 G7 회의 초청 정도가 될까요? 그렇게 된들 말 한마디 못하고 올 게 뻔하지만 말입니다. 세계 민주주의 성숙도에서 우리나라는 16위에서 24위로 추락했고, 무역적자는 갈수록 그 폭이 확대되고 있고, 우리는 지금 과연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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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역사 -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신형철 지음 / 난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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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있는 누군가의 어깨가 축 처져 있거나 초점을 잃고 멍한 눈으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볼라치면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토닥여주거나 내 손의 온기를 조금이나마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합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타인의 아픔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기운 없는 모습을 보면 나조차 의욕을 잃게 되는 까닭입니다. 매 시간 내가 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는 까닭에 타인을 보면서 으라차차 기운을 내고자 하는, 어찌 보면 가장 이기적인 마음의 발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때로는 멀리 떨어져 쉽게 만날 수 없는 지인의 기운 없는 목소리를 전화로 들을 때가 있기도 합니다. 그럴 때 나는 상대방에게 시(詩)를 권하곤 합니다. 한 편의 시를 소리 내어 낭독하고 나면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지요. 시는 한 편의 이야기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에너지이며 삶의 리듬이자 진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의 리듬이 가슴으로 전해질 때까지 되뇌어 낭송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삶의 에너지를 흠뻑 들이마시고 나면 우리는 다시 또 기운을 내서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시의 효용이란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문학 평론가 신형철이 쓴 <인생의 역사> 역시 시의 힘을 이야기로 풀어낸 책이라 하겠습니다. 저자가 사랑한 시를 모아 함께 나눌 이야기를 덧붙임으로써 완성되는 하나의 시화(詩話)는 평론가로서의 신형철이 아니라 시를 사랑하고 시를 통해 자신의 삶의 방식을 재정립하는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게다가 이 책에는 저자가 직접 번역한 아홉 편의 시가 함께 실려 있습니다. 시를 번역한다는 것 역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를 살아내는 하나의 방편이기에 이 한 권의 책에는 오롯한 시적 체험이 다양하게 섞여 있다 하겠습니다.


"'시'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대단한 예술이다. 시는 행行과 연聯으로 이루어진다. 걸어갈 행, 이어질 연. 글자들이 옆으로 걸어가면서行 아래로 쌓여가는聯 일이 뭐 그리 대단할 게 있겠는가. 그런데 나는 인생의 육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곧 시라고 믿고 있다. 걸어가면서 쌓여가는 건 인생이기도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인생도 행과 연으로 이루어지니까."  (p.7 '책머리에' 중에서)


'책머리에'와 '프롤로그'를 지나면 5부로 이루어진 본문과 부록 그리고 '에필로그'와 '본문에서 인용한 글과 책'이 이어집니다. 1부 '고통의 각', 2부 '사랑의 면', 3부 '죽음의 점', 4부 '역사의 선', 5부 '인생의 원', 부록 '반복의 묘'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각 부의 소제목을 찬찬히 살펴보면 마치 우리 인생의 면면을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각자의 삶에서 뾰족뾰족한 고통의 '각(角)'과 사랑의 '면면'을 겪은 후 찾아오는 죽음과 그 개별적인 죽음의 '점'들이 모여 역사의 '선(線)'을 이루며, 인생은 둥근 '원'처럼 순환하고, 시대를 초월하여 반복되는 '묘'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서시란 서문을 대신하는 시이므로 시집 맨 앞에 있어야 할 텐데 어째서 한강의 「서시」는 시집의 끝에 있는가. 죽음에 대한 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사건은 인생의 끝에서야 쓰게 되는 서시 같은 것이므로. 그때야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다시 처음인 듯 살아가고 싶어지니까. 그러나 그건 너무 늦지 않은가. 그러니 나는 미리 써야 하고 매일 써야 한다. 나는 죽는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그 시를."  (p.157)


시를 평론하는 사람은 무릇 시인이 살아낸 삶의 격랑 속으로 들어가 시에 깃든 삶의 에너지를 가늠하고 내재된 삶의 리듬을 타고 시인과 함께 동행하는 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평론가는 시에 깃든 시인의 리듬을 독자들에게 찬찬히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시인의 리듬을 어느 평론가를 매개로 비로소 감응하게 되고, 나의 안테나를 세워 시인의 주파수에 동조할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은 순전히 평론가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작업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시는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며, 시인이 보내는 삶의 리듬에 저항하지 않고 일체가 되는 동조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타자의 실종과 사랑의 위기라니, 관념의 유희라고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시인의 우울한 투정이야 어느 때나 있는 것이라고 냉소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뉴노멀'이라고 말하면 이전의 모든 것이 '노멀'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 '코로나 시대의 사랑'이라고 말하면 이전에는 사랑이 자명하게 있었던 것처럼 돼버린다. 올해 들어 부모님의 가게는 월세를 못 내게 되었고 자신도 아르바이트에서 잘렸을지 모르지만, 취업이 불투명하고 연애 따위 안중에도 없었던 것은 그전부터다. 그들이 지금 쓰고 있는 것은 코로나 이전에도 이미 썼던 마스크라는 것. 모두가 마스크를 쓰자 '간단한 자살'들이 묻혀버렸을 뿐."  (p.260)


신형철이 쓴 <인생의 역사>는 저자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지만, 동시대의 우리가 다 함께 겪어야만 하는 일반적 경험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들 대부분은 시로부터 멀어지고, 시로부터 소외되고, 데면데면 어색한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시에서 얻는 에너지는 아무런 쓸모도 없이 허공으로 사라지고, 시인은 괜스레 헛심만 쓰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시를 읽는다는 게 괜한 시간 낭비라는 생각은 자신의 삶으로부터 멀어졌다는 부끄러운 자기 고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는 곧 삶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한 편의 시를 가만가만 읊어보노라면 어쩌면 나도 한 편의 시를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기운을 내서 다시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저 먼 발치로부터 스멀스멀 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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