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듣는 말 중에 "법대로 해!" 또는 "법대로 하자."는 말이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거의 들어보지 못한 말이다.
갈등이 있는 상대방에게 일종의 엄포성으로 하는 이 발언을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자주 듣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법을 집행하는 경찰이나 검찰에 신고하거나 법원에 호소하면 될 일을 우리는 왜 이 말을 내뱉어서 갈등의 상대방에게 겁을 주는 수준에서 끝내려 하는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법과 현실의 괴리와 법정까지는 끌고 가고 싶지 않은 우리네 정서가 한몫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럼에도 법은 자신을 지켜줄 마지막 보루라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한 정서를 전혀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해방 이후 과거 군사정권 시대에 이르기까지 법의 준업한 잣대는 오직 서민의 몫이었지 위정자나 재력가에게는 그저 유명무실한 문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법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는 ’너 참 세상 살기 힘들겠구나 .’하는 비아냥이 쏟아진다.
오늘자 서울신문에는 이런 글이 실렸다.
과거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 때에는 위장전입 문제로 장관이나 총리 내정자가 줄줄이 낙마를 했는데,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무거운 죄’(?)의 불법성 여부가 모호해졌다는 내용의 글이다.  위장전입은 주민등록법상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고 한다.  주민등록법 위반으로 처벌받는 국민만도 한 해 5000여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현 정부의 고위직에 임명되었거나 현재의 내정자에게는 오히려 위장전입을 하지 않은 사람이 이상하게 보인다.  물론 그 누구 하나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다.  그들에게는 위장전입이 하나의 훈장을 단 것과 같은 영예로운 일이기에...
영국의 유명한 추리 작가 코넌 도일의 일화 중에 이와 비슷한 것이 있다.
하루는 그가 고위직에 올랐던 그의 친구들이 얼마나 양심에 따라 살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 한장의 쪽지를 그들 각자에게 보냈었단다.  쪽지에는 ’탄로났으니 도망가시오’라고 적혀 있었는데, 그 쪽지를 받았던 그의 친구들은 다음날 단 한명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작금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코넌 도일의 친구들은 범법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양심이 살아있는 선량한 사람이었다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지켜지지 않는, 또는 사람에 따라 가려서 적용되는 법률을 그대로 존치하는 이유가 궁금해질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최소한 사법(死法)으로라도 남아 있어야 그들의 권위가 서는 것일까?
다른 이야기지만 세계 각국의 음주운전에 대한 처벌은 아주 다양하다.
엘살바도르에서는 음주운전자가 적발되는 즉시 총살형.  엔진이 꺼져 있는 주차 상태에서 운전석에 앉아만 있어도 총살형이고 불가리아에서는 초범은 순방, 재범자는 교수형에 처해진다고 한다.  음주운전으로 인한 폐해가 큰 탓에 극형이라는 초강수를 둔 것이겠지만 법정서상 과하다 싶은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이런 법률이 남아있는 까닭은 명확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지금 적용되는 위장전입의 건은 나조차도 존치의 이유를 발견하기 어렵다.
법이 지켜지지 않고 사회가 혼란한 국가일수록 준법을 강조하게 마련인데 우리나라가 그 꼴이다.  대통령은 연일 준법과 공정한 사회를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 말이 내게는 왜 공허한 메아리로 들리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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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선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아파트 콘크리트 외벽을 뚫고
하루에 지친 사람들이 모인다

소젖을 먹기 시작했던
그 순간부터
소처럼 일만 했노라
생떼를 쓰는 사람들

골목길 가로등이 밝다.

어둠을 잊은 사람들은
죽음을 믿지 않으리니
미래도 함께 죽자

직선으로 수로을 내고
직선으로  길을 내고
자신의 미래도 
직선의 그 길로 향하리라
철석같이 믿었건만

곡선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던 끝을 보며 절망한다

어둠은 생명을 낳고
굽이 도는 그 길에서
하루를 마감하던
그 시절은 밝음과 함께 죽었다

하늘엔 별이 보이지 않는다
잠들지 못하는 시대
꿈꾸지 못하는 젊음이
어둠의 몰락과 함께
하루에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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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목을 부드럽게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것, 고개를 숙여 키 작은 풀과 작은 생명체를 관찰하는 것은 목이 유연하지 못하면 하기 어렵다.
하시라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릴 수 있도록 목의 유연성을 유지하려면 먼저 마음이 부드러워져야 한다.  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나이든, 지위든)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는 것, 나보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에게 시선을 맞추고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것은 모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마음이 목으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목이 뻣뻣하다거나, 이유없이 아프면 내가 얼마나 경직된 삶을 살고 있는지 내 마음을 찬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목이 부드러워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삶의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시의 은유와 같아서 우리에게 잘 보이지 않는 곳에 꽁꽁 숨어있다는 것을 드넓은 하늘을 보며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때로는 하늘과 땅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에게서 얻지 못하는 따뜻한 위로를 얻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가슴으로 전해지는 진심어린 위로는 아무런 대가 없이 거저 얻는 것이지만, 그런 위로와 격려를 통해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와 내가 가야 할 길을 제대로 찾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길을 잃고 헤매며 원망과 시름의 나날을 보냈던 때는 모두 내 시야가 좁아졌을 때였다.  내가 보는 것은 오직 내 눈높이의 사물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뿐이었다.
해나 달을 보기보다는 가로등을 보고, 키 작은 풀과 작은 생명체를 보기보다는 수없이 많은 자동차와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예술 작품을 제외하면 사람이 만든 모든 것은 삶의 위안도, 현명한 대답도 제공하지 못한다.  시선을 돌려 자주 보지 못했던 것을 바라보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위안과 용기가 되는 것이다. 
태풍 뎬무가 지나간 하늘.  그 구름 사이로 여전히 빛나는 별이 내가 가야 할 길을 비추어 주리라 나는 믿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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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인간에게 본능일까?  아니면 의무일까?
이 질문에 쉽게 답하기는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본능이라고 말할 수도, 의무라고 말할 수도, 어쩌면 이도 저도 아닌 본능이자 의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열에 일곱, 여덟은 의무라고 답할 것이라 생각한다.
막 말을 배우기 시작했거나 유치원에 입학하지 않은 어린 아이들에게 공부는 본능으로 보인다.  모든 게 신기하고, 궁금한 대상일 뿐이니 하루 종일 질문하고 배운다 한들 지겹다거나 재미없다고 느낄 겨를이 있을까?  어쩌면 하루가 너무 짧다고 한탄할지 모르겠다.
그랬던 공부가 제도권의 교육으로 옮겨오면 왜 갑자기 재미없고 따분한 것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일까?
어린 시절 교과서에 실렸던 황순원의 소나기는 아주 적절한 본보기라고 볼 수 있다.
맑고 순수한 소년과 소녀의 가슴 짠한 사랑 이야기는 그 나이의 학생들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전해져야 당연한데, 교과서에 실린 작품에서는 그런 감동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된다.
아이들은 ’먹장구름’이 복선이라는 둥, ’ 조약돌’이 소년과 소녀를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소재라는 둥 소설의 감동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만 기억하고 있었다.
간혹 나는 우스개소리로 조카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너희들이 가장 좋아하는 만화를 교과서에 싣는다 하더라도 일단 교과서에 실리면 그 순간 재미 없어질거야.  그건 장담할 수 있다."라고.
그것이 어찌 국어 한 과목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이겠는가.  아이들이 배우는 세계사와 국사에는 아주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있다는 것을 아이들은 알기나 하는 것일까?  우리가 볼 수 없는 원자와 전자의 이면에는 얼마나 많은 신비가 숨어 있는지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바로 시험과 성적에 대한 중압감 때문이다.  아무리 재미있는 내용도 일단 시험과 결부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고 따분한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내 아들녀석의 예를 들어 보자.  자랑질 하려고 옮겨 적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아내는 초등 1학년인 아들에게 "Tonight on the Titanic"이라는 책을 CD와 함께 사주었다.  영어학원이라고는 다녀 본 경험이 없는 아들녀석이 CD를 들으며 책을 보고 있길래 살며시 들여다 본 적이 있었다.  책의 두께가 그리 얇지 않아 보였는데 아들은 열심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나는 원어민이 읽는 것에 맞추어 책장을 넘기고 있는지 아니면 제멋대로 넘기는지 몰래 살펴 보았는데 아들녀석은 정확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웬만한 중학생도 하기 힘들어 보이는 것을 아들녀석은 너무도 손쉽게 해내고 있었다.  궁금해서 책의 내용을 아는지, 알아듣기는 하는 것인지 물어보았다.  아들녀석은 대충 안다며 재밌다고 했다.
그렇다고 내 아들이 천재라거나 다른 사람 몰래 특별 과외를 시킨 것은 아니다.
아내와 나는 아들녀석이 하기 싫어하는 것은 시키지 않는 편이다.  학교 공부 외에 하는 것이라고는 학교의 방과후 학습인 창의력 수학(1주일에 1시간)과 논술 학원(1주일 1회)에 나가는 것이 전부이니 극성 부모는 분명 아닐 것이다.  학원이나 공교육의 맹점은 바로 시험과 성적이라는 부담감을 아이들에게 심어주는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부모가 부추기는 측면이 강하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아이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실력 향상은 되고 있는지 궁금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이 아이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부모를 위한 것인지 곰곰히 되짚어 볼 일이다.  지금 당장의 성과에 집착하는 부모의 조급함은 교육당국도 예외는 아니다.
지나친 성과주의와 성적지상주의로 아이들의 미래는 병들고, 공부에 대한 재미를 그들로부터 빼앗은 것은 분명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스스로 터득하고 하나하나 익혀가는 재미, 그것이 공부가 아니겠는가.  學而時習之, 不易悅乎?(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공부는 분명 본능이며 그렇게 유지하는 한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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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그동안 읽었던 책을 선별하여 다시 읽고 있다. 
나의 선택을 기다리며 다소곳이 꽂혀있는 책들을 바라볼 때면 뭐랄까?  무소불휘의 권력을 지닌 어느 임금이 자신의 맘에 드는 후궁을 간택하는 기분이랄까?  그럴 때마다 나는 괜스레 달뜬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다.  
구입한 책을 처음 펼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일면식이 있는 지인을 만나는 듯한 편안한 기분.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새로운 느낌.  책의 중간중간에 꽂힌 익숙한 필체의 메모지와 가지런히 그어진 밑줄들.  잘 갈무리된 추억들이 내 품에 달려와 안긴다.
어쩌면 영영 잊혀진 채 세월따라 켜켜이 먼지만 쌓일뻔한 책들이 내 손길이 닿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체로 다시 태어나는 듯하다.  처음에 미쳐 몰랐던 새로운 의미를 새록새록 느끼는 재미도 쏠쏠하다.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고 했던가.
공자가 주역을 즐겨 읽어 책의 가죽 끈이 3번이나 끊어졌다는데, 나는 그동안 가죽 끈은 커녕 세 번을 반복하여 읽은 책도 손에 꼽을 정도이니 부끄러운 일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몇 년 더 나이를 먹어, 쉰 살까지 주역을 습득하게 된다면 가히 큰 허물은 없으리라. (子曰, 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고 했다하니 그 학구열에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나는 그동안 헛된 것에 눈이 멀어 그 의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 새책만 사려고 했지 감동을 주었던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책을 읽을 때는 눈으로 보고(眼到), 입으로 읽고(口到), 마음으로 깨우쳐야한다(心到)는데 나의 독서는 기껏 눈으로만 읽고 말았으니 헛되고 부질없는 짓으로 소일했음이다.

오늘은 말복.
귀뚜라미 우는 가을도 멀지 않았으니 올해가 다 가기 전에 공자가 주역을 두고 아꼈듯 내게도 곁에 두고 아낄 책 한 권을 고를 수 있다면 좋겠다.
경쟁하듯 책의 권수로만 허세를 부렸던 내 독서 습관을 반성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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