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사는 목적이 ’행복’의 추구라고 한다면, 
’행복’의 구성 요소에서 ’진실’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을까?
평소에 TV를 잘 보지 않던 나는 지난 주 한 예능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진한 감동을 느꼈었다.
’남자의 자격’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보았을 것이다.
성악을 전공하지 않은(소수의 전공자도 있었지만) 아마추어 음악인들이 모여 합창단을
결성하고, 합창대회를 준비하는 과정도 감동이었지만, 합창대회의 두 번째 참가팀이었던
실버합창단의 노래를 들으며 그들이 흘렸던 눈물은 감동 이상의 그 무엇을 시청자들에게 전해주었다.

내가 그들에게서 발견한 것은 꾸미지 않은 '진실'과 그것이 주는 진한 감동이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고 소망했던 윤동주의 시처럼
우리는 실생활에서 진실과 마주할 기회가 매우 드물다.
자신을 어떤 식으로든 꾸미고 치장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자신의 내면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알리는 것에는 다들 낯설기만 하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과 마주하는 순간 때로는 당황스럽고, 
때로는 진한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진실'을 드러내는 것은 본인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행복의 밑거름이 된다.

그러나 자신의 속내를 끄집어내어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의 피 속에는 자신의 약점을 보인다는 것이 곧 생명을 포기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원시사회로부터 전해지는 유전자가 흐르고 있기에 자신의 안전을 확신하지 못하면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우리는 숨기기에 급급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본능적 행태를 벗어던지는 데에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진실'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자신을 숨기려는 원시적 본능과 함께 '진실'하지 못하면 왠지
불편하고 거북하게 느끼는 '양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양심은 원시적 본능 앞에 번번이 무릎을 꿇지만, 우리는 결코 행복을 포기할 수 없기에
누구에게나 진실해야 하고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블로그 활동을 하는 내내 잘 쓰여진 글보다는 진실을 담은 짧은 글에서 더 큰 감동을 느껴왔던
내 자신을 생각할 때, 우리의 삶 전체에서 '진실'을 뺀 행복이 결코 존재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진실'을 말한다는 것.
그것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진실' 앞에서 나도 모르게 피어나는 행복한
 미소와 한줄기 눈물의 가치를 어찌 순간의 용기와 비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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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밤입니다.
대부분의 회사가 징검다리 휴일로 9일을 쉬나 봅니다.
휴일의 첫날.
긴 연휴를 맞은 사람들의 느긋한 마음처럼
차분하고 조용한 하루가 저물고 있습니다.
책을 읽다가 이 밤에 어울릴만한 글을 찾아 분위기를 내려고
했는데, 끝내 찾지 못하여 대학 때 썼던 유치한 글로 대신합니다.
 
어느 가을, 느리게 흐르는 밤

밤은
온통 어둠입니다
흔들림 없는 어둠입니다
고요 한점 내려앉아
당신이 그립습니다

어두운 하늘엔
구름처럼 두둥실
그리운 마음만이
떠다닙니다
가식이 없는
시간입니다

뽀오얀 속살처럼
가만가만
달이 뜨네요
창을 열면
은빛 비늘이
묻어날 듯합니다
나는 또
당신이 그립습니다

나릇한
졸음이 밀려옵니다
사랑한다 말하면
화들짝 놀란
이 어둠이 사라질 듯합니다

싸르르 싸르르
내 배를 쓸어주던
할머니 손길처럼
귀뚜라미가 웁니다

눈을 감으면
꿈결처럼 훨훨
날아올라
저 하늘에 닿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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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코밑으로 다가왔다.
언제나 그렇듯 연휴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껏 들뜨게 한다.
계절은 속일 수 없어서 며칠 전만 해도 그렇게 뜨겁던 열기는 온데간데 없고, 한낮의 햇살은 따갑지만 산들산들 부는 바람과 청명한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아, 가을이구나!'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다.
주변의 사람들은 일손을 놓고 저마다의  휴가 계획을 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차가 밀려 온 나라가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을텐데 여행은 자제하는 게 좋지 않나?"하고 한마디 거들자 다들,
"그래도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추억을 만들겠어요?"한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추억도 시간을 내어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좋은 추억을 만들겠다는 그들의 바람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슬쩍 의심부터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기억이란 매우 가냘픈 것이어서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던 것은 오히려 희미해지고, 기억되지 않을 듯한 소소한 일들이 오래도록 또렷이 남는 경우가 그 얼마나 많은가.
어릴 적 풀밭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기억, 억새밭을 스치며 지나는 바람의 서걱거림, 반딧불이의 가녀린 불빛을 좇아 밤길을 헤매던 기억 등은 내게는 어제의 일처럼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그저 일상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추억을 만들어야겠다는 조바심도 없이 이루어진 일인데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또렷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추억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어느 날 보석처럼 줍는 것이다.
성과주의에 찌든 현대인들은 추억도 시간을 내어 만드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산다.
그렇게 만들어진 추억이 지금의 바람처럼 끝까지 남아주기를 간절히 원한다. 
불가능한 꿈을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수긍하며 또 하루를 산다.
언젠가 우리는 지식도 아무런 노력 없이 시간을 내면 만들어지는 것이라 굳게 믿게 되지나 않을까?  그리고 추억은 돈만 지불하면 종류별로 살 수 있는 것이라 믿게 되지는 않을까?
불가능한 것도 만들어야 하는 현대인의 조급함과 강박증이 느린 발걸음을 재촉한다.
나는 그들의 틈에서 또 바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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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얻은 좋은 습관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내 딴에는 꽤 유용하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무엇인고 하니 순간순간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는 '어떤 목표로 이것을 하고 있는지' 나의 뇌에 끝없이 각인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신체에서 '뇌'라는 기관이 가장 능동적이고 부지런한 기관인듯 보이지만, 실상은 이와 달라서 조금만 방심하면 가수면 상태에 있는 것처럼 또는 기면증에 빠진 사람처럼 몽롱한 휴식을 즐기는 것이 '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한다.
그야말로 가장 수동적이고, 가장 게으른 기관이 '뇌'인데, 일단 목표가 정해진 일이 생기면 각 기관에 명령을 전달하고는 그저 시간이 흐르는 것을 허락할 뿐,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수정할 부분은 없는지 수시로 점검해야 하는 책임도 방기한 채 마냥 달콤한 휴식에 빠져버린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런 현상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어 게으른 뇌에 매 순간 자극을 주기로 결심한 것인데 그럭저럭 효과가 있었는지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모습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즉, 순간순간 자신이 하는 일을 인식하고, '살아있음'을 인식하지 않으면 결과는 처음에 의도했던 것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만일 '살아있음'을 '인식'과 같은 단어로 동일시한다면, '살아있지 않음'은 '인식하지 못함'과 같은 뜻이 되고만다.  내 자신이 나를 인식할 수 없는 상태, 즉 살아있되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은 내가 사라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 순간 '살아있음'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길이요,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는 첩경이 될 수 있음이다.
진정으로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방법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순간순간 인식하는 것이다.  게으른 뇌를 자극하여 매 순간 깨어있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잠시의 '죽음' 또는 '수면 상태'에서 귀중한 시간을 흘려보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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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건강진단을 받았고, 며칠 전 그 결과를 보았다.
결과는 그닥 나쁘지 않았다.  내 본 나이보다 신체 나이가 너댓 살 아래로 나왔으니 말이다.
담배를 끊는다면 0.8세가 더 줄어들 수 있단다.
그러나 그 결과만으로 기뻐할 수도 없는 것이 나도 이제는 가는 글씨를 읽을 때면 안경을 벗는 횟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신체 나이가 내 또래의 평균에 비해 조금 좋았다는 것일뿐 모든 신체기관의 노화가 멈춘 것은 아니라는 반증이렷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공자도 마흔을 넘기면서 시력이 나빠졌고, 예순에는 귀마저 어두워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확인할 길은 없지만 아마 그랬던 듯하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공자는 나이 마흔을 불혹(不惑), 예순을 이순(耳順)이라 했다.
시력이 좋다는 것은 장점도 되지만 그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다.
어차피 현미경처럼 세밀하게 보지 못할 바에야 더 작은 것을 남들보다 잘 본들 그 무엇이 달라질까.  오히려 우리는 잘 보게 됨으로써 내것과 네것,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고 편가름하며,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 자신의 욕심을 키울뿐이다.  공자가 눈이 어두워지면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리지 않게 된 것이 마흔을 넘기면서부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아 시력이 좋을 때는 스스로 좋다고 여기는 것을 좇아 많이도 욕심내었었다. 
듣는 것 또한 그렇다.
안 들어도 될 소리까지 자세히 듣는 것은 타인에 대한 미움과 분란만 일으킬뿐이다.
지금도 청력에는 문제가 없지만, 젊은 시절에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이제는 알게 모르게 많이 못듣게 되었으리라.
인생의 후반기에 들어 시력과 청력이 떨어지는 것은 남은 기간 동안 욕심과 미움없이 살다 가라는 신의 섭리가 아닐까?

전기가 없던 시절에는 그나마 밤에는 눈과 귀를 쉴 수 있었는데, 밤도 대낮같이 밝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많은 욕심을 키워왔으며, 또 얼마나 많은 미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지...
공자는 쉰에 이르러 지천명(知天命)이라 했다.
자신의 신체가 점점 쇠락하는 것을 인식하고, 하늘의 섭리를 깨닫는 것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이치인 듯하다.
내가 젊은 시절에 시력과 청력을 낭비하여 욕심을 키우고, 나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를 그 얼마나 보태었는지 반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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