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세계에서 이 눈물이 사라진다 해도
이치조 미사키 지음, 김윤경 옮김 / 모모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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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심이 가득한 하늘이다. 한낮의 햇살은 여전히 뜨겁기만 한데 가을을 닮은 하늘에 사람들은 반색하고 있다. 우리네 삶의 시간을 영원히 앞서 가기만 할 뿐 그 시간의 뒷전으로는 영원히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던 여름도 못 이기는 척 순순히 제 자리를 내어주고는 저만치 멀어진 과거로 흩어질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부드러운 뭉게구름의 자태가 이쪽 하늘에 가득하다. 여름내 집 안에만 갇혀 살던 사람들을 집밖으로 끌어내려는 심산, 그 유혹의 자태가 뭉게구름에 배어 있는 것이다. 쪽빛 하늘에 꽃처럼 피어나는 구름.


"그 말에 나는 아이처럼 안심했다. 안심 또한, 내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던 감정이었다. 어렸을 때 잃어버리고, 도루의 죽음으로 손에서 빠져나가 두 번 다시 손에 넣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세상은 빼앗아 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주기도 한다. 만남도, 좋아하는 마음도, 소중한 사람도. 전부 빼앗기만 하는 게 아니라 주기도 한다."  (p.291)


세태가 세태이니 만큼 아름다운 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름다운 하늘도, 아름다운 꽃도, 아름다운 시도, 아름다운 사람도 그 어떤 대상에도 도통 눈길이 가지 않는다. 마음이 온통 메마르고 팍팍해진 까닭이다. 말랑말랑한 소설 한 편을 읽어도 별 감흥이 없다. 산다는 게 그저 그런 것이려니, 생각될 뿐이다. 이치조 미사키의 소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눈물이 사라진다 해도>를 읽었던 게 벌써 여러 날 전이다. 그럼에도 리뷰를 쓸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하나의 문장에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자신의 감정을 슬몃 얹어 놓을 수 있는 기술이 마치 외계의 언어처럼 혹은 어느 먼 과거의 원시 언어처럼 내가 닿을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쯤으로 여겨졌다.


"나는 내 방식으로 앞으로도 도루를 기억할 것이다. 과거에도 망각에도 넘겨주지 않겠다. 넘겨줄 리가 없지. 단 한 번의 첫사랑이다. 단 한 번의 실연이다. 나의 상처다. 아픔이다. 눈물이다. 전부 나의 보물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것이다."  (p.316)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의 후속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전작의 여주인공인 히노 마오리의 친구인 와타야 이즈미의 입장에서 쓰였다. 라이트 소설이 늘 그렇듯 책의 분량에 비해 등장인물이나 구성은 매우 단출하다. 전작에서 선행성 기억상실증이 있는 마오리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가미야 도루의 다정함과 성실함에 반해 자신도 모르게 도루를 사랑하게 되었던 와타야는 갑작스러운 도루의 죽음 이후 커다란 슬픔과 상실감에 빠진 채 대학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1년 후배인 나루세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이야기는 빠르게 전개된다. 죽은 도루를 잊지 못하고 있던 와타야에게 나루세의 세심한 배려는 오히려 더 큰 슬픔을 불러오게 되고 결국 와타야는 일방적인 이별을 선언한다.


"목표란 건 인생을 심플하게 해 주거든. 만약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자신을 잊을 정도로 그 일에 몰입해 보는 것도 좋을 거야.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가니까.  그러면 서서히 여러 가지 일이 과거가 되어가지. 잊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도 잊을 수 있을지  몰라."  (p.212)


와타야와 헤어진 후 나루세는 학교를 1년 휴학하고 자신이 좋아했던 사진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모전 준비에 매진한다. 와타야 또한 가미야 도루의 누나이자 유명 소설가인 기시카와 게이코의 적극적인 권유로 소설을 쓰게 된다. 와타야 역시 자신이 쓴 소설을 공모전 소설 부분에 응모한다. 나루세가 같은 공모전의 사진 부분에 응모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공모전 결과를 발표하는 수상자 명단에서 와타야는 낯익은 이름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사진 부분 수상자인 가미야 도루. 수상 작품명은 '마지막 결빙'. 소설 부문 수상자가 되지 못했던 와타야는 기시카와 게이코의 도움으로 행사에 참석하게 되는데...


전체주의 체제로 급속히 회귀하는 대한민국의 정치 상황 탓에 가슴 한 구석이 빠르게 화석화되는 느낌이다.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소설을 읽은 후에도 그에 합당한 리뷰를 쓰기도 어렵고, 소설을 읽는 동안 소설 속 등장인물의 감정에 빠져들기도 힘들다. 무미건조한 독서가 이어질 뿐이다. 가을을 닮은 하늘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비가 온다는데 여전히 푸르기만 한 가을 하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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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의 여름이 닿을 때
봄비눈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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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 만화 스타일의 청춘 로맨스 소설은 마치 일본 작가의 전유물인 양 생각될 때가 많다. 달달한 첫사랑의 기억에 슬쩍 판타지가 가미된 일본 소설 특유의 스토린 전개는 독자들의 허를 찌르는 반전 결말이 더해져 독자들의 눈물 콧물을 모두 쏟아내게 하는 마력을 선보이곤 한다. 스미노 요루가 쓴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나 세이카 료겐의 <어느 날, 내 죽음에 네가 들어왔다>, 이치조 미사키의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혹은 <오늘 밤, 세계에서 이 눈물이 사라진다 해도> 등은 일본 로맨스 소설의 전형이 아닐까 싶다.


"그녀가 하는 모든 말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승에서는 BCD를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선택Choice이라고 해석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해석입니다. C는 'Choice'가 아니라 'Chance'입니다. 우리에겐 삶이 끝나고 죽음으로 가는 사이, 단 한 번의 기회가 있습니다." "잠시만요. 그럼 제가 죽지 않는단 말인가요?" "죽음을 돌이킬 순 없습니다. 다만, 과거의 삶을 1년간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p.19)


봄비눈 작가가 쓴 <너와 나의 여름이 닿을 때>는 일본 로맨스 소설의 포맷을 너무나 흡사하게 따르고 있는 탓에 나는 제일 먼저 작가의 국적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내가 기대했던 '일본인'이라는 표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고, '해가 뜨면 철학을 가르치고 달이 뜨면 사랑 이야기를 씁니다.'와 같은 뜬금없는 문장이 나를 맞았다. 국적이 나오지 않은 걸로 보아 한국인임이 분명한데... 그럼에도 내가 작가의 국적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인 여름이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완전한 죽음으로 건너가기 전에 들르게 된 BCD카페가 그 하나이다. 말하자면 일본의 로맨스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판타지가 이 소설의 처음부터 등장한다는 점이다. 또 다른 이유는 순정 만화 스타일의 표지와 대화체 위주의 문체, 죽었던 여름이가 자신의 삶에서 가장 후회스러웠던 첫사랑 상대 유현이와의 첫 만남 순간으로 되돌아가 망가져버린 첫사랑의 경험을 되살리려 한다는 점 등이다.


사랑도 없는 결혼을 약속했던 여름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는다. 여름이 눈을 뜬 곳은 저승이 아닌, BCD카페라고 불리는 낯선 공간이었다. BCD카페의 직원이라고 밝힌 한 사람이 여름에게 죽기 전 과거의 삶으로 되돌아가 1년간 살아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말한다. 자신의 삶을 조용히 회상하던 여름은 첫사랑 상대였던 안유현을 떠올린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도 못했고, 만나던 선배와의 관계를 단호하게 정리할 수 없어서 의도치 않게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유현. 자신이 좀 더 용기를 내었더라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여름은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제2의 삶을 살게 된 여름은 잠시 동안 유현과의 행복한 만남을 이어가지만 또 다른 엇갈림으로 괴로워한다. 그러나 두 번째 삶에서조차 진한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던 여름은 최선을 다해 유현을 사랑한다. 그리고 여름의 두 번째 생애 마지막 날, 그들은 비로소 서로에게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알게 되는데...


"무대는 벌써 막바지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신, 대사를 읊고 제인의 '그때 우리는' 연주를 하기 위해 피아노 앞 진갈색 나무 의자에 앉았다. 오디션 때 친 노래이자, 지금부터 몇 개월 뒤에 발매되는 곡. 이 곡을 마지막으로 연극도, 내 인생도 막이 내릴 것이다."  (P.355)


이 책은 봄비눈 작가의 첫 소설로, 브런치에서 꾸준히 연재되던 작품이 출판사와 계약이 되어 정식으로 출간된 작품이라고 한다. 소설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작가 역시 첫사랑의 순간처럼 설렜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영원하지도, 매 순간이 모두 행복한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언제나 자신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삶의 종착지에서 일말의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작가 역시 그런 바람으로 이 소설을 완성했으리라.


"내 우주가 무너졌다. 메마른 눈이 따가워서 벤치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감아도 발갛게 아리는 잔상들이 마음속을 헤집었다. 시린 눈을 뜨니 구름 한 점이 보였다. 문득 그를 처음 만난 벽화 마을이 떠올랐다. 그곳에 가면 모든 것이 원래 자리로 돌아올 것만 같았다. 그곳에서 그가 이어폰을 낀 채 노래를 흥얼거릴 것만 같았다. 마음을 추스르고 신발을 신은 뒤, 벽화 마을로 향했다."  (p.341)


태풍 카눈이 지나간 하늘에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늦더위의 잔해가 흐르고 있다. 휴가를 다녀온 사람들은 이제 아직 도달하지 않은 초가을의 선선한 바람을 기다릴 테고, 무더위 속에서도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뻔한 연애소설이 아닌 반전이 있는 연애소설 한 편쯤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는 봄비눈 작가의 소설 <너와 나의 여름이 닿을 때>를 읽으며 남들에게 들킬세라 급히 뒤돌아 서서 눈물 몇 방울 몰래 찍어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후회는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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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곁에서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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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느낌이 오래 지속되면 지루하다. 지루하고 따분하여 딴짓을 하게 된다. 그 느낌이 '슬픔'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인간의 감정이란 때로 천방지축으로 나대는 원숭이를 닮아서 몇 날 며칠이고 진득하니 같은 감정에 머무르는 걸 참아내지 못한다. 한 권의 소설을 읽을 시에도 다르지 않다. 거기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뒤섞이고 오욕칠정이 난무하는 인간 본성의 적나라한 실체를 스토리 저변에 깔아 두어야만 한다. 독자들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어르고 달래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그 순간까지 책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게 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인 셈이다. 소비자의 구매욕을 부추기는 미끼상품처럼 말이다.


신경숙의 연작소설 <작별 곁에서>는 슬픔을 밑바탕에 깐 세 편의 소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슬픔을 위주로 하는 까닭에 대화나 묘사 위주의 스토리 전개가 아닌, 편지 형식으로 소설을 이끌어 가는 서간체 형식의 소설을 선택한 듯하다. 그러나 신경숙 특유의 감각적인 묘사는 이와 같은 형식에서는 완전히 배제되는 느낌이다. 말하자면 신경숙이라는 독자적인 소설 형식이 완전히 사라진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선입견 때문일지도 모른다. '표절 작가'라는 주홍글씨는 나도 모르게 '신.경.숙'이라는 이름 석 자에 투영되어 표절 의혹이 불거졌던 2015년 이후 2019년에 이르기까지의 과거가 소설과 함께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숨죽이며 서울에서 내가 전하는 말에 귀 기울이던 그이는 지금 웨스트체스터 공원묘지에 누워 있네. 나무가 많은 숲속이야. 나무보다 산새가 더 많아서 새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니 지금은 새소리를 듣고 있겠지. 걱정이 되는군. 그 공원묘지의 나무들은 저 바람에 무사할는지. 그 옆에 내 자리도 마련해 놓았네. 가끔 묘지를 찾아가서 비석에 떨어진 나뭇잎을 손으로 쓸어내며 남편과 함께했던 결혼생활을 생각해 보곤 해."  (p.67 '봉인된 시간' 중에서)


책의 처음에 등장하는 <봉인된 시간>은 지금은 무슨 일인지 연락이 되지 않는 화가 '선생'에게 쓰는 편지이다. 1979년 외교관으로 파견된 군인 남편을 따라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사 온 지 반년 만에 박 전 대통령 암살사건과 12·12 쿠데타가 일어나고, 남편이 암살자의 최측근이었다는 이유로 가족은 한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간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화자를 붙들어주었던 건 모국어로 쓰는 시와 가족이었다. 평소 흠모하던 고국의 화가가 뉴욕으로 와 체류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화자는 그가 머물 집을 알아보는 등 일 년간 그와 가깝게 지낸다. 그가 고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꾸준히 연락을 시도하지만 연락이 닿지 않고, 태풍 샌디로 뉴욕 전체가 물바다가 된 상황에서 화자는 답장을 기대하지 않는 긴 편지를 써 내려간다. 그것은 마치 화자 자신의 회고록인 양, 때로는 가까운 지인에게 하는 넋두리인 양 읽힌다.


"지금 내 마음의 모든 시간은 이렇게 너와 닿아 있어. 낯선 도시의 낯선 거리의 낯선 시장에서 크루아상을 사거나 포도며 망고를 고르거나 오후의 더위 속에서 땀에 젖은 낮잠 속을 허우적거리는 모든 시간 속에 네가 있다. 끈질기게 너를 생각하는 이 시간들이 너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를 바라."  (p.145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 중에서)


20대 초반부터 우정을 나눠오던 친구가 공부를 하기 위해 독일로 떠나 그곳에 정착한 이후로 외국의 어느 도시에서 잠깐잠깐 얼굴만 보며 지내던 두 사람. 그들 두 사람 앞에 놓인 시간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마치 무한대인 것처럼 생각했던 지난날을 뒤로하고 이제 독일에 있는 친구는 암투병을 하며 인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있다. 한국에 있는 '나'는 친구를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유럽으로 향하지만 친구는 한사코 '나'를 만나주지 않는데... 두 번째 작품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는 무심한 시간 속에 놓인 인간 군상의 서글픈 숙명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 작품은 이 책의 표제작인 <작별 곁에서>이다. <봉인된 시간>의 화자에게 보내는 답장 형식이지만 편지의 서두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 작품에서의 '나'는 두 번째 작품의 친구이기도 하다. 그렇게 <작별 곁에서>는 앞의 두 작품을 아우르면서 우리가 상실의 아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존재임을 제주 4·3의 아픈 흔적을 통해 전한다.


"선생님 남편은 웨스트체스터의 숲속에, 친구는 뮌스터의 굴참나무 숲속에, 내 딸은 여기 강화도의 소나무 숲속에 있군요. 언젠가 딸은 나를 알아보기는 할까요? 이렇게 형편없이 일그러진 제 얼굴을요. 다랑쉬굴 앞에 함께 앉아 있어주던 모르는 남자가 이제 이 벌판을 떠날 모양인지 세워둔 자전거 곁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시디신 눈 속으로 차오릅니다. 이젠 여기 없는 존재들을 사랑하고 기억하다가 곧 저도 광활한 우주 저편으로 사라지겠지요. 바람과 먼지와 들꽃들이 일렁이는 이 황량한 벌판에 버려진 텅 빈 항아리에 선생님께 전해드리고 싶은 이야기들이 모여드는 게 느껴져 제 얼굴이 붉어집니다."  (p.260 '작별 곁에서' 중에서)


서간체 형식의 소설을 딱히 싫어하는 것도 아닌데, 더구나 나는 신경숙 작가의 애독자로 자처하며 출간되는 거의 모든 작품들을 읽어왔는데 그닥 두껍지도 않은 한 권의 소설집을 이렇게 힘들게 읽어낸다는 건 나로서도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오히려 나는 다니엘 글라타우어가 쓴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헬렌 한프의 <채링크로스 84번지> 등 서간체 형식의 소설을 즐겨 읽어 왔다. 그럼에도 이렇게 지루함을 느껴 번번이 멈춰 설 수밖에 없었고, 딴짓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는 건 이제 나도 신경숙 작가와의 작별을 준비할 때가 아닌가 싶다. 신경숙 작가의 감각이 떨어졌든가 아니면 소설에 대한 나의 기호가 바뀌었든가 그 원인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회자정리'라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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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통제구역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정세윤 옮김 / 오픈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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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스토리는 단순하다. 우연히 눈에 띈 악당의 무리를 법과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개인의 타고난 능력 하나로 시원하게 제압하여 처단한다는 것. 책의 저자인 리 차일드는 자신이 만든 주인공 잭 리처를 앞세워 비슷한 구조의 잭 리처 시리즈를 27편이나 썼으니 독자를 우롱하는 것도 유분수지 우려먹어도 너무 우려먹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뭐 재미있는 책이 없을까?' 궁리를 할라치면 나도 모르게 잭 리처 시리즈에 손이 가는 걸 보면 잭 리처 중독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여전히 잭 리처 컬렉션의 스물네 번째 이야기 <출입통제구역>을 읽고 말았으니 말이다. 책에서는 역시 우리의 주인공 잭 리처가 195센티미터, 110킬로그램의 압도적인 피지컬을 자랑하며 미국 전역을 도는 여행 중에 있다.


군에서 익힌 특출한 상황 감지 능력, 이를테면 주인공의 예리한 촉은 버스에서도 예외 없이 작동하였다. 같은 버스의 승객이었던 일흔 살 노인의 주머니 속 두툼한 돈봉투를 노리는 한 애송이의 비열한 눈빛이 그에게 감지되었으니 말이다. 잭 리처는 그들을 따라 인구 50만의 소도시에 내리게 된다. 애송이는 노인을 뒤따라가 공격했지만 뒤쫓아온 리처에 의해 묵사발이 된 채 도망친다. 다리를 다친 노인을 부축하여 그의 행선지까지 동행하게 된 리처는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는 노인의 딱한 사정을 듣고 갈등한다.


"너무 늦게 왔다. 염소수염이 돈을 가진 남자를 거칠게 떠밀었다. 노인은 귀에 거슬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손, 무릎, 머리를 앞으로 한 채 쓰러졌다. 염소수염은 그 위를 덮치더니 아직 움직이는 주머니 속으로 미끄러지듯 능숙하게 손을 집어넣어 봉투를 꺼냈다. 그때 리처가 도착했다. 195센티미터에 110킬로그램의 움직이는 덩어리가, 쭈그린 자세에서 막 몸을 일으키던 호리호리한 염소수염에게 돌진했다. 리처가 어깨를 비틀어 내리치며 염소수염에게 부딪히자 그는 자동차 충돌 테스트에 쓰는 더미처럼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곤두박질쳐 절반은 인도에, 절반은 배수로에 몸이 걸친 상태로 낙하했다. 그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p.20~p.21)


정의감에 불타는 우리의 주인공은 노인의 딱한 사정과 이를 등쳐먹는 사채업자들의 만행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사실 이 지역은 도시를 관통하는 중앙로를 경계로 우크라니아인과 알바니아인 갱단이 동서로 구역을 나눠 지배하면서 사채업을 비롯하여 여러 불법적인 사업을 운영함으로써 선량한 시민들의 돈을 갈취하는 법의 사각지대였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 지역의 경찰이나 소방, 유력 정치인들을 매수하여 자신들의 범죄 사실이나 불법 행위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막아 오면서 포르노 영상 유포와 같은 불법 행위를 공공연하게 저질렀다.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딸의 치료비를 대기 위해 사채를 비롯한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는 노인 부부의 딱한 처지를 돕기 위해 시작된 리처의 작은 응징이 두 갱단을 자극하여 마침내 그들과의 전면전으로 치닫게 되는데...


"“이봐, 일어나.” 그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놈들은 곧 일어났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눈을 껌뻑이며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리처가 말했다. “거래를 제안하지. 인센티브도 붙어 있다. 나를 태우고 동쪽으로 차를 모는 거다. 가는 동안 너희에게 질문을 하겠다. 거짓말하면 도착해서 알바니아인들에게 넘기겠다. 진실을 말한다면 나는 목적지에서 내려 걸어가고 너희는 차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겠다. 그게 인센티브다.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해. 알겠나?”"
  (p.174)


물론 범죄 스릴러물이라고 해서 주구장창 총격전과 몸싸움만 이어지는 건 아니다. 리처와 애비의 달달한 로맨스도 등장한다. 그리고 리처와 의기투합한 전직 해군과 해병대 출신 사나이들이 펼치는 대활약도 눈에 띈다. 물론 애비는 정의감에 불타는 리처의 남자다움에 매력을 느끼지만 리처가 자신과 동행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에는 거절을 표한다. 역마살이 낀 리처가 자신의 배우자가 되어 한 곳에 정착한다는 건 애비 스스로도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리 차일드의 잭 리처 컬렉션은 사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전지전능의 한 인물과 그를 상대하는 다양한 부류의 악당들을 등장시켜 마냥 느려터진 법적 구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능력자 잭 리처에 의한 시원한 자력구제를 선보임으로써 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일종의 대리만족 소설이다. 코로나가 창궐하던 지난 시기에는 잘 읽지 않았던 잭 리처 컬렉션을 현 정부 들어 자주 읽게 되는 건 아마도 집권자 스스로 입으로만 나불대는 '공정과 상식'이 현실에서는 완전히 무너져 있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그를 응징할 잭 리처의 출현을 간절히 바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폭염경보가 발령된 오늘도 하늘에는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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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알고 먹는 거니? - 그림으로 보는 우리 집 약국
최서연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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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다. 어디가 크게 아프거나 병치레가 잦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장모님도, 아내도 약사 면허를 갖고 있었던 탓에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거나 필요한 약을 약국에서 구매를 하게 될 때, 나는 언제나 아내의 컨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병원에서 발행하는 처방전 역시 약국 제출용과 환자 보관용 처방전을 함께 발급받아 환자 보관용 처방전은 언제나 아내에게 가져다주곤 했다. 학교에서 받은 성적표는 언제나 부모님께 척척 가져다주는 착한 학생처럼 말이다. 약국에서 쉽게 구매가 가능한 일반 의약품 역시 아내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살 수 없었던 건 물론이다. 

 

그림 그리는 약사 최서연의 저서 <약, 알고 먹는 거니?>를 읽으면서 나는 약과 관련된 많은 추억들이 떠올라 한동안 상념에 젖곤 했다.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았다. 1장 '감기에 걸렸어요', 2장 '상처가 났어요', 3장 '속이 불편해요', 4장 '피부에 뭐가 나요', 5장 '여성들만 아는', 6장 '이럴 땐, 어떤 약을 써야 하나요?'. 각 장의 소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저자는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직면하게 되는 약의 오남용과 약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기 위해 약사가 아닌 일반인도 쉽게 알 수 있도록 그림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약이라는 전문적인 지식을 만화 형식의 친근한 도구에 접목함으로써 접근성을 높인 것도 주목할 만하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약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어 하지만 일상에서 약 사용법을 제대로 알고 대응하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감기 몸살이 심하게 걸렸던 나는 가까운 병원에 들러 처방을 받았고, 약국에 들러 약을 구입하기 전에 늘 하던 대로 아내에게 처방전을 보여주었더니 대뜸 다른 병원에 가서 처방전을 다시 받으라는 거였다. 나는 아픈 몸으로 운전을 해서 집과 멀리 떨어진 다른 병원을 방문한다는 게 쉽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단순한 감기 몸살에 대한 처방전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아내의 태도는 의외로 완강했다. 나는 결국 다른 병원에 들러 처방전을 받았고 아내의 허락 하에 약국에서 처방전에 적힌 약을 구입할 수 있었다. 아내는 내가 처음에 받았던 처방전의 약은 스테로이드 성분이 과하게 포함된 약이라며 다음에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갈 일이 있어도 그 병원은 절대 가지 말라는 충고를 잊지 않았다.

 

지금은 성인이 된 아들에게도 아내의 관심은 각별했다. 어렸을 때 아토피 증상이 조금 있었던 아들은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었던 날이면 여지없이 밤에 제 몸을 박박 긁어대곤 했다. 어느 날 어린이집에서 짜장면을 먹고 왔던 아들은 다른 날부다 심하게 제 몸을 긁어댔고, 그날 마침 아들의 곁에서 잠이 들었던 나는 아내를 깨워 아들이 바르던 연고를 어디에 뒀는지 물었다. 아들의 침대보에는 아들의 것으로 보이는 핏방울 몇 점이 묻어 있었고, 이를 보고 놀란 나는 연고를 듬뿍 짜서 발라주려고 했다. 그러자 아내는 아들의 상처 부위에 아주 조금만 발라주고는 내 손에 있던 연고를 낚아채고는 안방으로 사라졌다. 스테로이드 성분이 포함된 연고라서 정말 필요한 경우에 아주 조금만 발라야 한다는 말과 함께, 그렇지 않으면 점점 내성이 생겨서 더욱 독한 연고를 바르게 될 거라는 경고와 함께 말이다. 아내의 특별한 관심 속에서 자란 아들은 이제 건강한 청년으로 성장했고, 자신의 삶을 즐기면서 활기찬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다.

 

아들과 나의 개인 약사였던 아내는 지금 세상에 없다. 나와 아들이 약에 대한 조언이 필요할 때면 이제 늙으신 장모님께 여쭙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내의 빈자리를 더욱 크게 느끼곤 한다. 약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내가 약과 관련된 이런저런 책을 읽거나 긁어모으는 이유도 아내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한 과한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사용하는 약에 대해서 언제든 제대로 알고 써야 한다고 강조 또 강조를 잊지 않았던 아내의 목소리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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