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다음 타깃은...


여름 장마가 한창입니다. 장마라고 해서 딱히 리더 멧돼지인 내가 나서서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안타깝다거나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등의 언급은 그때그때마다 시의적절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게 아랫것들의 조언입니다. 사실 그와 같이 마음에도 없는 낯간지러운 말을 한다는 게 나의 정서상 썩 어울리는 건 아니지만 리더 멧돼지로 재임하는 동안은 어쩔 수 없는 일인 듯도 합니다. 장마가 길어지고 피해 지역이 늘어난다고 해도 설마 나의 나와바리인 남산 지역까지 물에 잠길 리도 없고 농어촌에 사는 천것들의 피해야 내가 일일이 신경 쓸 일도 아니기에 나에게 장마철은 전과 다름없는 평범한 날들의 연속일 뿐입니다. 물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자면 약간의 연기 공부가 필요할 테지만 말입니다.


나는 얼마 전 나를 지지하는 단체의 창립 기념일에 참석하여 연설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북한 멧돼지들과 전쟁을 끝내고 평화롭게 잘 지내보자는 무리들을 '반국가 세력'으로 칭하며 맹비난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나는 내전 상태에 돌입한 마음으로 선전포고를 한 셈이지요. 그런데 나의 말은 논리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걸 나로서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나를 비롯하여 나의 최측근에서 근무하는 멧돼지들 대부분이 군대를 가지 않았거나 짧게 다녀왔을 뿐 온전하게 군생활을 한 멧돼지들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반국가 세력 멧돼지들에게 안보를 맡김으로써 나의 생명과 재산 역시 그들에게 의존해 왔던 셈이지요. 전혀 말이 안 되는 논리이지요. 나의 논리가 합리성을 득하려면 입영대상 멧돼지들 전체에 대해 입대 전에 먼저 사상검증을 하고 나와 사상을 같이하는 멧돼지들만 군대에 보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그렇게 한다면 군대에 갈 멧돼지들도 극소수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나의 최측근이자 최상위 그룹 멧돼지인 그들의 부모 멧돼지들 역시 쌍수를 들고 반대할 게 뻔하지만 말입니다. 결국 나는 헛소리를 한 셈입니다. 그래서인지 국내외적으로 나를 '또라이' 혹은 '룬(loon)'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날리면 멧돼지는 공식 석상에서 걸핏하면 나를 '룬'이라고 칭하는데 여간 기분이 나쁜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대놓고 뭐라 할 처지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아, 덧붙이자면 날리면 언어 'loon'의 의미는 '미치광이'란 뜻입니다.


우리나라 멧돼지들의 교육열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뜨겁다는 건 이미 정평이 난 사실입니다. 하여 자녀 멧돼지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 멧돼지들은 자신의 노후를 포기하더라도 사교육에 모든 걸 투자하는 실정입니다. 자식이 없는 나는 이러한 사실이 영 못마땅하였고, 어떻게든 뜯어고쳐야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태어난 신분대로 살다 가면 되지 능력도 되지 않는 것들이 굳이 더 높은 자리를 탐한다는 건 국가 전체로 볼 때 쓸데없는 낭비일 뿐이라는 게 나의 신념이었습니다. 부자의 자식은 부자로, 권력자의 자식은 권력자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랫것들이 자신의 처지도 생각하지 않고 높은 자리를 탐하는 모습은 천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참에 나는 그런 생각을 부추기는 멧돼지들을 모두 때려잡을 생각입니다. 노조를 결성하여 기업가에게 대드는 천한 멧돼지들을 때려잡으려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우울합니다. 오늘은 아랫것들과 모처럼 진흙 목욕이라도 함께 할까 생각 중입니다. 술도 한 잔 나누면서 말입니다. 그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다음 타깃도 정해지겠지요. 그것이 내전 상태에 돌입한 나의 계획입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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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유유상종에 대하여


거듭 말하지만 시간은 결코 우리 편이 아닙니다. 굳이 어려운 열역학 제2법칙을 꺼내들 것도 없이 시간은 우리들로부터 많은 것을 앗아갑니다. 나는 누구이며, 너는 누구인가?라는 개인의 자의식이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나는 내 경험과 기억의 총체(總體)"라고 말했다면 시간에 대한 대가로 자신을 정립하는 중이라고 퉁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지난 과거에 대해 조금의 후회도 갖지 않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기 어려운 것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시간을 허비한 것에 비해 스스로가 얻은 대가는 아주 미약하거나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대다수인 듯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시간은 결코 우호적이거나 친밀한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치우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위에 언급한 내용은 내가 존경하는 어느 인간의 철학을 내 일기에 간추려 옮긴 것입니다. 나의 스승인 천공(千空) 멧돼지의 철학이라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밝히는 바이지만 우리 멧돼지는 근본적으로 철학과 같은 이성적인 추론은 하지 않습니다. 일본의 기시감 멧돼지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라든가, 날리면 멧돼지의 말이라면 무조건 알아서 기라는 둥 현실적인 조언만 할 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20년 남짓의 짧은 멧돼지 생애에서 천 개의 구멍(空)을 파는 걸 목표로 열정을 쏟아붓는 스승의 모습에 반하여 다른 멧돼지들이 천공 스승이라 부르며 우러러보는 게 아니겠습니까. 언제였던가 천공 스승이 나와 '동운' 멧돼지를 불러 놓고 한마디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천공 스승 왈, "인간의 언어 중에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단다.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귄다는 뜻이라더구나. 너와 동운 멧돼지는 어쩌면 그리 똑같은지 '유유상종'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너희 둘이 떠올랐단다. 다른 멧돼지들에게 조금의 양보나 배려도 용납하지 않는 점도 그렇고, 다른 멧돼지들로부터 요만큼의 해라도 입을라치면 이만큼의 크기로 되갚아주는 점도 판박이처럼 닮았지. 게다가 다른 멧돼지의 뒤통수를 치는 것도, 갚아야 할 복수는 마음속에 반드시 기억하는 것도 서로 흡사하지 않니?"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역시 스승은 스승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내가 리더 멧돼지가 된 지도 벌써 1년이 훌쩍 지났습니다만 나에 대한 지지율은 좀체 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하여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하는 '똥광' 멧돼지를 중용하기로 했습니다. 기시감 멧돼지의 핵 오염수 방류 및 국내 경제의 부진 및 막대한 세수 결손 등 앞으로 나에 대한 지지율을 약화시킬 악재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와 나의 측근들을 비난하는 멧돼지들은 모두 잡아들여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리는 쥐 죽은 듯 조용하고 평화로울 것입니다. 오늘은 6월 10일, 6.10 민주항쟁 기념일이라는데 이것을 기념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나 또한 그 시절의 리더 멧돼지처럼 거리에 나오는 멧돼지들을 잡아 죽일 생각이니까 말입니다. 내가 비상 도시락으로 키우는 강아지들을 대동하고 '동물 광장'에 나갔다고 전 난리를 치는 멧돼지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게 그렇게 욕을 먹을 일인지 지금 생각해도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런 멧돼지들은 모두 잡아 바다에 처넣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오늘은 비가 온다는데 가까운 멧돼지들과 술이라도 한 잔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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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꽃길만 걷게 해줄게.


이맘때의 등산로는 하얀 꽃길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짙은 향기를 내뿜으며 오가는 등산객들의 마음을 한껏 들뜨게 했던 아카시아꽃의 흰 꽃잎들도 가는 봄을 아쉬워하며 분분히 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봄의 등산로는 딱 두 번 꽃길이 된다. 봄의 상징처럼 화려하게 피었던 벚꽃이 단 한 번의 봄비에 처연히 지고 마는 4월의 어느 시기와 요즘과 같이 아카시아꽃이 지는 시기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흰 카펫처럼 점점이 흩뿌려진 꽃길을 어슬렁거리며 걸을 때마다 괜스레 미안해지곤 한다. 리더 멧돼지로 취임한 지 만 1년이 지났건만 이렇다 할 성과는커녕 다수의 서민 멧돼지들로부터 욕만 무수히 듣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를 열렬히 지지하는 늙다리 멧돼지들로부터 "속이 다 후련하다."는 격려의 말을 듣고 있으니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라고 하겠다. 죄인과 다름없는 내가 이런 꽃길을 걸을 자격이나 있을까마는 언젠가 감옥에 갈 미래라면 지금의 호사를 맘껏 누리는 것도 삶을 즐기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게 지금의 생각이다. 뉘라서 이런 호사를 구분 없이 베풀어준다는 말인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나는 결혼 전 아내 멧돼지에게 꽃길만 걷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돈과 권력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아내 멧돼지의 욕심과 강한 집착이 매력적으로 보였던 까닭에 나는 이런저런 수컷 멧돼지와 사귀었던 아내 멧돼지의 허물을 못 본 척 덮어둘 수 있었다. 물론 뒷골목 시절 나의 행실도 건전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말이다. 술에 취한 채 시중을 들던 여러 암컷 멧돼지들을 맘껏 유린하곤 했으니 아내 멧돼지나 나나 도긴개긴, 그 밥에 그 나물이긴 하다. 아무튼 아내 멧돼지에게 눈이 멀었던 나는 어떤 순간에도 제발 나를 버리지 마라 달라며 매달렸었다. 나를 버리지 않는 대신 나는 아내 멧돼지로 하여금 꽃길만 걷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결혼 후 아내 멧돼지는 나의 권력을 이용하여 이런저런 이권에 개입했고, 나는 그때마다 나의 뒷골목 똘마니들을 압박해 수사를 막아주곤 하였다. 그럼에도 리더 멧돼지로 취임한 지금도 아내 멧돼지의 범죄 사실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나는 얼마 전 날리면 멧돼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도 아내 멧돼지에게 다짐하였다. 내가 있는 한 무슨 일이 있어도 감옥에 가는 일은 없을 거라며 앞으로도 영원히 꽃길만 걷게 해 주겠노라고.


며칠 전 기시감 멧돼지의 방문이 있었다.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고 싶어 하는 일본의 속셈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리더 멧돼지로서 나의 무능력과 아내 멧돼지의 범죄 전력 등을 무마할 수 없는 나로서는 기시감 멧돼지의 요청을 들어주는 대신 나보다 힘이 센 날리면, 기시감 멧돼지를 확실하게 나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물론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뿌리는 순간 수산업에 종사하는 우리나라의 많은 멧돼지들이 모두 직업을 잃게 되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삼중수소에 오염된 여러 수산물을 먹은 수많은 멧돼지들이 대를 이어 그 피해를 감당하게 될 테고... 그러나 나의 신념은 여전히 확고하다. 나라가 망하고 이 땅에 사는 많은 멧돼지들이 죽거나 병이 들어 고통을 받는다 해도 아내 멧돼지의 앞길이 꽃길이라면 그 무엇을 두려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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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인생은 아름다워


'혹시'라는 말을 툭 하고 내뱉고 나면 그동안 가슴을 짓누르던 일들이 무작정 술술 풀려나갈 듯하고 없던 행운도 갑자기 생겨날 듯해서 괜스레 기분이 좋아집니다. 나는 그렇게 들뜬 기분으로 4월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내가 기시감 멧돼지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돌아온 이후 전국의 멧돼지들이 들고일어났던 것입니다. 시국선언이니 뭐니 하면서 나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가 하면, 이런 뒤숭숭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나에 대한 지지율마저 최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세계 22개국 리더 멧돼지들에 대한 '아침 상담(morning consult)'의 조사에서 나는 19%로 압도적인 꼴찌를 했던 것입니다. 예전부터 나는 지지율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말을 수차례 반복함으로써 겉보기엔 혹은 대외적으론 대범한 척, 뒤끝이 없는 척 연기하고는 있지만 소심한 나의 성격상 그렇게 될 리가 없습니다. 병아리 오줌만도 못한 낮은 지지율이 나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닙니다. 마음에 상처도 크게 남고 말입니다.


나는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대구를 찾곤 합니다. 이제는 젊은 멧돼지들이 모두 서울로 떠나고 나이 든 멧돼지들만 남아 폐허처럼 무너져가는 도시를 겨우 지탱하고는 있지만 대구의 멧돼지들은 언제나 나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해 주곤 합니다. 배알도 없이 말입니다. 이번에도 나는 대구를 찾아 '들판의 공(野球)' 개막을 알리는 행사에서 기분 좋게 공을 던졌고, 그곳의 한 전통시장에서 열렬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나는 차라리 대구 경북의 리더가 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지역의 멧돼지들은 나를 싫어하는 감정이 얼굴에서 역력히 읽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리더인데 내 앞에서는 적어도 그런 표정은 짓지 말아야 하는 게 예의가 아닌가 싶을 때가 많습니다. 물론 그들도 오죽하면 그리 하겠습니까마는.


엊그제 나는 부산의 모 횟집에서 술과 음식을 배가 터지도록 먹고 마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나의 수족이라고 할 수 있는 '동운' 멧돼지를 포함하여 나를 리더로 당선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던 여러 똘마니들이 한 자리에 모였던 것입니다. 내가 밖으로 나오자 뒷골목 세계의 관례에 따라 양쪽으로 도열하여 나를 맞았고, 나는 그 가운데로 당당히 걸어 나왔던 것입니다. 나라의 곳간이 무너지든 말든, 나의 지지율이 바닥으로 떨어지든 말든 나는 모처럼 기분 좋게 취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 뒷골목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던 것입니다. 게다가 나의 지지율 하락에 일조했던 강원도와 충청북도의 짱 멧돼지도 나를 보기 위해 부산까지 달려왔던지라 기분은 최고조로 치솟았습니다. 산불이 나서 멧돼지들이 타 죽고 있는데 골프를 치고 술을 마셨던 강원도 짱 멧돼지, 나의 친일 행각을 지지하며 '나는 기꺼이 친일파가 되겠다'고 외쳤던 충청북도의 짱 멧돼지 역시 산불이 번지던 그 시기에 술판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모두 나를 닮고 싶었던 탓이겠지요. 나를 지지하는 똘마니들과 술을 마셨더니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졌습니다. 나는 이번 달 말에 세계 최강 날리면 멧돼지를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날 예정입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렙니다. 역시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봄꽃이 만발한 오늘의 풍경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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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목련꽃 그늘 아래 서면


아파트 화단에는 벌써 산수유꽃이 노르스름한 배경처럼 피어나고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한 기운이 감돌고 있지만 계절이 가고 오는 자연의 순리를 결코 막을 수는 없을 듯합니다. 완연한 봄! 리더 멧돼지가 된 지 만 1년이 되는 이봄에 나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 왔습니다. '리더 멧돼지가 되면 상석에 앉아 술을 먹는 게 소원'이라고 공언해 왔던 나는 리더 멧돼지로 당선된 이후 상석에 앉아 세계 여러 나라의 술을 원 없이 마셔 보았습니다. 물론 남은 임기 동안의 술 약속은 다른 어느 것보다 중요하지만 말입니다. 더구나 우리 편 멧돼지 무리의 대표를 뽑는 선거에서 내가 밀었던 기연 멧돼지가 겨우 당선되었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니까 나는 그와 2주에 한 번씩 만나 술을 먹기로 약속을 잡았습니다. 사실 그는 나의 1년 선배이지만 내 앞에서는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겸손을 떨곤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의 비리를 폭로하고 지금의 대표 자리도 주지 않았겠지만 말입니다.


앞의 일기에서도 썼지만 우리 멧돼지들은 11월에서 1월이 발정기인 탓에 봄이 되면 오히려 원기가 떨어지곤 합니다. 이런 까닭에 수컷 멧돼지들은 주로 양지바른 곳에서 꾸벅꾸벅 졸거나 진드기를 떼어내기 위해 비빔목에 몸을 비벼대거나 습지를 찾아 진흙 목욕을 즐기곤 합니다. 암컷 멧돼지들의 눈에 비친 수컷 멧돼지들의 이런 모습이 영 탐탁지 않았던지 봄만 되면 암컷 멧돼지들의 잔소리가 늘어나곤 합니다. 암컷 멧돼지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봄나들이를 계획하는 것입니다. 생기가 돋는 암컷 멧돼지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 보면 잔소리를 할 새도 없이 제풀에 지쳐 쓰러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리더 멧돼지가 되기 전부터 일본을 좋아했습니다. 나의 아버지 멧돼지가 일본의 은혜를 받고 그곳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히토쓰바시 대학이 있던 자리가 눈에 선합니다. 대한해협을 헤엄쳐 건너 아버지 멧돼지를 만나러 갔을 때 일본은 선진국답게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일본 멧돼지들은 미개한 한국 멧돼지들과 달리 무슨 일이든 정확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일본의 기시감 멧돼지가 허락만 해준다면 대한민국을 통째로 일본에 바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내선일체, 아니 '내한일체'가 나의 바람입니다. 과거에 우리 선조 멧돼지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노동을 시켰다거나 군인 멧돼지들을 만족시키는 종군 위안부로 써먹었다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어차피 지나간 과거인데 말입니다. 게다가 나의 선조들은 피해는커녕 은혜를 받은 처지이니 그들에게 은혜를 갚는 게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기시감 멧돼지에게 나의 생각을 전달하였고 그는 나를 자신의 나라인 일본으로 초청했습니다. 기시감 멧돼지의 충복이 되겠다는 나의 생각과 리더 멧돼지의 자격으로 가는 일본 여행, 그리고 아내 멧돼지의 잔소리도 없앨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습니다. 띵호와(挺好啊)!


내가 일본에 있는 동안 우리나라의 멧돼지들은 나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던 모양입니다. 일본에서 돌아오지 말라는 시위도 있었다고 합니다. 나도 사실 일본에서 쭉 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그게 어디 마음처럼 되겠습니까. 아무튼 나는 1박 2일의 일본 여행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지만 모든 게 기시감 멧돼지의 뜻대로 되는 듯한 나의 행보는 국내의 많은 멧돼지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나는 조만간 뒷골목 똘마니들을 시켜  그들 모두를 잡아넣을 계획입니다. 그나저나 아내 멧돼지는 집을 잘 짓기로 유명한 일본의 다다미 멧돼지로부터 옷을 선물로 받았다며 좋아했습니다. 목련꽃그늘 아래 서니 술 생각이 절로 납니다. 오늘 저녁에는 아내 멧돼지와 술 한 잔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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