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직장에서의 대화 주제는 하루 종일 서울시장 선거였었다.
같이 근무하는 직장 동료들 대부분은 서울 시민도 아니요, 누가 시장으로 당선된들 그들의 삶에 큰 변화가 올 것도 아닌데 다들 한목소리로 박원순 서울시장의 당선을 화제로 올렸고, 마치 자신의 예측이 당선에 크게 한 몫이라도 한 것처럼 마냥 들뜬 표정이었다.  물론, 반대의 의견을 가진 사람도 없지 않았다.  격앙된 목소리로 떠드는 찬성측 다수파에 밀려 한쪽에서 조용히 듣고 있었지만 말이다.

언론에서는 어제 오늘 연이어 서울시장 선거 결과에 대한 분석을 내놓았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세대간의 갈등이 표심을 갈랐다는 분석이었다.  그동안 우리 정치권은 지역 및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통한 국민들의 분열을 교묘히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곤 해왔다.  한동안 아무 탈 없이 그런 분열과 갈등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손쉽게 유지할 수 있었는데 무소속의 비정치권 인물이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고 보니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 입장에서는 또 다른 분열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선거 결과만 놓고 본다면 세대간 갈등이 주요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소통의 부재와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이 그 주된 원인이 아닐까 싶다.  근 1년여 동안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쳐 보니 그들의 미래를 가로막는 장벽은 다름 아닌 가정 내에서 대화의 단절과 수직적 위계질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가난할수록 가족간의 대화는 줄어들게 마련이고, 아이들의 부모는 자신이 겪은 지난한 세월을 생각할 때 지금의 상황은 그에 비하면 훨씬 좋아졌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아이들에게도 자신이 겪었던 힘든 삶을 강요하는 듯한 말을 자주 하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가령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하는 식이다.

어느 책에선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은 아이들에게 크나 큰 언어 폭력이라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단 한번도 부모 세대의 삶을 살아보지 않은 아이에게 자신만큼 참고 인내하라는 무언의 압력, 자신들이 힘들게 키웠으니 꼭 보답하라는 식의 강압적 의사표시는 아이들을 얼마나 좌절하게 만들까?  시쳇말로 '본전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본전 생각'이라는 말이 가장 흔하게 쓰여지는 곳은 군대에서다.
이등병 때 고참들로부터 심하게 괴롭힘을 당한 병사는 그가 왕고참이 되자마자 후임병들에게 똑 같이 되갚아 주는 경향이 있는데,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한결같이 자신은 그보다 훨씬 어렵게 군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억울하다는 듯 한마디 던지는 말이 "본전 생각이 난다."는 표현이다.  군에서 구타와 가혹행위가 끊이지 않고 자행되는 것은 이런 '본전 생각'에 기인하는 복수심이다.

기존의 정치권이나 연세 지긋한 노인분들이 혹시 이런 '본전 생각'으로 젊은 세대를 괴롭힘으로써 권위를 살리려는 발상이라면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아무리 어렵게 살아왔고, 힘든 세월 속에서 지금의 젊은이들을 키워왔다고 할지라도 '본전 생각'에 그들로부터 존경을 강요하거나 섬김을 받으려는 태도는 지극히 치졸하다.  그럴수록 오히려 자신들의 모습만 초라해질 뿐이다.  존경과 권위는 진심에서 우러러 나오는 것이지 강요하거나 쥐어 짠다고 억지로 생기는 것은 분명 아닐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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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에세이 분야의 신간 평가단으로 참여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책을 선택하고, 혹시 내가 읽고 싶었던 책이 선정되지나 않았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 결과를 기다리고, 또는 언제쯤 책이 오려나 하는 기다림을 생각할 때, 이런 소소한 일상들이 설레임으로 다가온다.  마치 처음으로 사랑에 눈 뜬 소년의 마음처럼. 

 

너무나 유명한 작가 알랭 드 보통.  그러나 유명세에는 항상 숨겨진 가시가 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오래된 속담처럼 혹시 실망스럽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함.  그럼에도 이 책을 선택하는 것은 평소 좋아하던 에릭 호퍼의 저서 <맹신자들>이 번역되어 출간된 것과도 무관치 않다.  종교를 인식하는 그들의 시각이 자못 궁금하다. 

 

 

 

 

일전에 현각스님의 저서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를 읽었었다.  어쩌면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것도 현각스님의 추천사를 읽게 된 것과 그분과의 미약한 인연이 나의 마음을 동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국을 다녀간 많은 외국인들이 가장 안타까워 하는 것이 우리의 문화와 전통이 점차 사라져간다는 점이다.  그들의 공통된 지적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사는 우리만 모르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현실이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사람들이라면 서정윤 시인의 시 <홀로서기>에 대한 추억과 아련한 향수가 있을 것이다.  암울했던 시대상황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던 시인의 감성은 그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의 가슴을 적셨다.  이제는 시인도 많이 늙었겠지만 그때의 추억은 어제의 일처럼 또렷하다.  시인의 산문집은 아련한 향수를 자극하는 이 가을과 닮아있지 않을까? 

 

 

  

잡지 보그의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다는 저자의 이력과 책의 제목은 일견 불협화음처럼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그러나 시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삶이 바쁘고 고단할수록 시의 행간에 펼쳐진 무한의 여백에서 한껏 자유를 누려보고 싶다는 소망은 깊어만 간다.  내게 허락된 이 짧은 사색의 계절은 저자의 가난한 사치에 어서 빨리 동참하라고 부추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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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운동을 다녀온 후 아침을 먹기 전에 분리수거를 했다.
쇼핑을 자주 하는 것도 아닌데 쓰레기는 끊임없이 나온다.  마치 우리집에는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고 온통 쓰레기만 안고 사는 것처럼.  운동을 나갔을 때는 몰랐는데 땀이 식으면서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잔뜩 찌푸린 하늘과 나른한 휴일의 느낌이 비대칭적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분리수거를 할 때면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날씨 탓인지 오늘은 그 느낌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내가 지나온 삶을 분리수거 한다면 재활용이 가능한 사건들은 몇이나 될까? 하고 말이다.
말없이 내 곁을 지키는 시간은 온갖 허섭스레기 같은 사건들을 일일이 분리수거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무렇게나 내팽겨친 사건들을 다시 기억할 때를 위해 가지런히 정리하고, 어떤 것은 잘 다려 구김을 펴고 빳빳하게 풀까지 먹여 새것처럼 두는가 하면, 때로는 길바닥에 내던져도 아무도 집어 갈 사람이 없을 만한 잡동사니를 누군가의 눈에 띌새라 서둘러 폐기처분하기도 하고...  이 모든 일들은 고스란히 나와 동행하는 시간의 몫이다.

그 불쌍한 시간에게 하루쯤 휴가를 주고 싶다.
나는 아무 일도 계획하거나 저지르지 않고 나무처럼 고요히 지낼 수 있노라고 말하며 안심시키고 싶다.  설령 시간이 눈감은 그 사이에 내 삶에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사건이 벌어진다 해도 네 책임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왠지 나이가 들면 그렇게 살아야 할 것만 같다.  오늘처럼 흐린 휴일에는 숨도 쉬지 말고, 시간도 멈춘 영원 같은 하루를 맞고 싶은 것이다.

연휴를 즐기려는 행락 차량들이 하나둘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빡빡한 시간과 빈틈없는 약속 위를 질주하기 위해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의 시간은 지금쯤 안녕한 것일까?  내가 누구인지 나를 찾고 싶어서 일단정지 표시판도 무섭게 외면하는 차량들이 아파트를 벗어나고 있다.  그들의 여행 목적지 어딘가에 멈추어 서면 자신의 참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그 시간쯤이면 피곤에 지친 그들의 시간도 그들과 함께 쉴 수 있는 것일까?  벽에 걸린 괘종시계가 어느 날 문득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바닥으로 툭하고 떨어져 그대로 멈춰버리는 것은 아닐까?

아침을 먹으라는 아내의 호통이 아파트 몇 층 위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나의 시간도 오늘 하루 편안히 쉬기는 글렀다.  나보다 먼저 아파트 계단을 오르는 시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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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하면 누구에게나 선뜻 떠오르는 단어들이 몇 개쯤은 있을 것이다.
가령 낙엽, 추억, 우수, 낭만, 상실, 이별, 독서 등 자신의 경험에 의해 굳어진 이미지들은 세월이 흘러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처럼 맑고 쾌청한 날엔 왠지 모를 불안을 느끼곤 한다.
며칠째 지속되는 행복.  여름 내 나를 휘휘 감고 떨어질 줄 몰랐던 습기를 마침내 걷어낸 듯한 가벼움.  한낮의 햇살 아래서도 허파꽈리의 사소한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시원한 바람.  이른 가을부터 목을 길게 늘이고 제 순서를 기다린던 추억 몇 놈들.  
그리고 하늘.  그래.  아아, 하늘.   긴 머리의 여인이 자신의 머리를 배배 꼬아 한 쪽 어깨로 넘겼을 때 드러나던 희고 가녀린 목선.  가을 하늘은 여인의 뒷목에 소년의 시선이 닿았던 그 짜릿한 순간처럼 아쉽다.  곧 낙엽이 지고 거리에는 한동안 알 수 없는 우수와 서글픔이 자신의 시선을 들킨 소년의 자책처럼 정처없이 헤매일 것이다.

이래도 되나?  이 좋은 날을 마냥 즐겨도 되나?
나는 몹시 불안하다.  그것은 아마 내 어린 시절의 성장기와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오 남매의 다섯째로 자란 나는 좋은 것이 내 손에 쥐어질 때면 기쁨보다 불안이 먼저 찾아왔고, 행복한 순간에는 언제 사라질지 몰라 두려워 했다.  작가 은희경의 표현을 빌자면 "집착없이 살아오긴 했지만 사실은 아무리 집착해도 얻지 못할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짐짓 한걸음 비껴서 걸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심리를 배우이자 영화 감독인 우디 앨런은 <뉴요커의 페이소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불안은 인간의 자연스런 상태에요. 그래서 저는 그게 아마도 합당한 상태가 아닐까 생각해요. 불안을 경험하는 게 중요한 건 아마도 그게 종족의 생존을 가능케 하기 때문일 거에요. 저는 행복한 시간을 누리지 못하는 걸 개의치 않는데, 그건 제가 뭔가를 제대로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행복한 시간을 맛보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그걸 얻기 위해 나름대로 많은 대가를 지불하죠.

이제 막 가을이 오는데, 엄마 잃은 세살박이 어린애처럼 나는 갈 곳을 몰라 불안하다.
내가 있는 이 곳이 너무 행복하고, 지금 이시간이 더없이 좋아 더더욱 불안하다.  이 가을에 문득 생각나는 싯구들을 옮겨본다.  나는 타들어가는 불안 속에 행복에 겨워 읊는다.  

그대/구월이 오면/구월의 강가에 나가/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안도현의 구월이 오면), 가을에는/기도하게 하소서/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김현승의 가을의 기도).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도종환의  가을 사랑),  가을엔 사랑하게 하소서/아픔이 아닌 웃음으로 /예쁜 사랑 하게 하소서(가을엔 사랑하게 하소서/장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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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7 0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08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캠퍼스 풍경은 봄보다 가을이 좋다.
생명이 움트는 시기에 타오를 듯한 생명력을 지닌 젊은이들이 넘실대는 교정은 감정이 격해지는 장소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지는 곳이다.  부산스럽다.  때론, '오!'하는 탄성을 남발하며 자신의 감정을 과하게 소비하기도 한다.  뜨거운 입김이 확확 뿜어져 나올 듯한 젊은 날의 열정에 계절이 기름을 부은 격이라고나 할까.  자신의 감정을 가누지 못해 처음 보는 남자의 한 마디 사랑 고백에도 자신의 입술을 내어주고 마는 장소가 바로 봄의 교정이 아니던가.

그런가 하면 가을은 오히려 젊음의 열기를 어느 정도 잠재우는 시기이다.
가을을 응시하는 젊은이의 눈에서 쇠락하는 계절의 탓인지 젊음의 철없음은 찾기 어렵다.  치기가 사라진 얼굴은 아름답다.  길지 않은 그들의 삶을 고요히 돌이킬 수 있는 이 귀중한 시간을 젊은날엔 알지 못한다.

얼마 전 한 대학병원으로 친구의 병문안을 갔었다.
대학 교정의 나무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잘게 부서지는 가을 햇살을 바라보았다.  링거줄을 매단 그의 깡마른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설멍한 다리 위에 걸쳐진 헐렁한 병원복이 바람에 힘없이 날리는 것도...
괜시리 찔끔거리는 내게 친구는 오히려 위로의 말을 건넨다.  먼 산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선연한 피빛 광채의 화살이 물기 어린 내 시선을 뚫고 가슴에 박힌다.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붉은빛의 그라디에이션.  친구의 가슴도 저 노을처럼 타들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 어느 순간 막막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지나 않을지...

싫다는 나를 잡아 끌고 친구는 가까운 대학건물로 향했다.
주인 없는 빈 건물에는 안으로 굳게 잠긴 강의실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어두운 복도에는 괴괴한 적막감이 흘렀다.  친구는 순간 비틀거렸다.  그만 가자며 그의 한쪽 팔을 부축했을 때, 알 수 없는 설움이 밀려왔다.  친구는 왜 빈 강의실에 들어가려 했을까?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추억 속에서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건재하다는 것을 그 과거의 시간 속에서 확인 받고 싶었던 것일까?  잠겨진 문을 확인하는 순간 과거와 현재의 분명한 구획이 그를 절망하게 했던 것일까?
           
마지막 햇살이 붉은색 듬뿍 찍어 푸른 하늘 멀리 길게 사선을 긋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힘겹게 걷는 친구의 모습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누군가 옆에서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 든든한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던가.  걸어가는 모습만으로도 아무런 사심없이 그저 고맙고 감사했던 적이 있던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도 이제 그럴 나이가 되었다.  누군가 살아 숨쉰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 고마운 나이.  이제 그 고개를 향해 묵묵히 걸어야 할 나이가 되었구나.

친구를 병실로 데려다 주고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친구야, 암이라는 무거운 병이 네 발목을 잡더라도 그때처럼 걷는 일은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박완서님의 "노을이 아름다운 이유"를 읽으면 너는 또 다시 기운을 얻어 보란 듯이 힘찬 발걸음을 내딛게 되지 않을까?
   
 "그냥 은은한 잔광만 남기고 꼴딱 질 적도 있지만 산정에 구름이라도 몇 점 머물러 있으면 기가 막힌 노을을 보여줄 적도 있다. 구름은 부드러운 솜털구름보다는 터치가 힘찬 약간 성난 구름이면 더욱 장관을 보여준다. 노을이 너무도 핏빛으로 선열하여 영웅호걸의 낭자한 출혈처럼 비장할 적이 있는가 하면, 가인의 추파처럼 요요할 적도 있다. 어느 쪽이든 우리를 숨막히게 한다. 온몸을 나사처럼 죄어오다가 순식간에 풀어 준다. 그러고 나면 속은 것처럼,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서럽고 막막해진다. 아침에도 노을이 지지만 그건 곧 눈부신 햇살을 거느리기 때문에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잊혀진다. 그러나 저녁노을은 언제 그랬더냐 싶게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 끝이 어둠이기에 순간의 영광이 더욱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박완서님의 "노을이 아름다운 이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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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7 1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9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