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새 책을 고른다는 것, 읽어보지 못한 책들의 제목에 관심을 두는 것, 항상 나의 촉수를 그 쪽에 두는 것은 생각처럼 쉽고 편한 일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종이 냄새 폴폴 날 듯한 신간을 훑어보는 일은 인적이 닿지 않은 눈밭을 걷는 것처럼 마음을 설레게 한다.

 

  폴라 다시의 글은 책을 읽기도 전에 마음이 젖어든다.  그녀의 불행에, 그녀의 정 많음에, 그리고 세상을 향한 그녀의 사랑에...

이성적이기보다 오히려 감성적으로 비춰지는 상담 치료사라니...

어쩌면 그녀의 상실과 고통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녀의 글에 감동과 위로를 받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를 닮은 또 다른 너이기에.

 

 

 

 

 

 

 

 

간혹 그런 생각이 든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죽는다면 감추고 싶었던 모든 것들이 무방비 상태로 모두에게 공개되겠지.'하는 그런 두려움.  하기야 죽은 사람이 뭘 알까마는 이런 유의 책들, 가령 작가 혼자 간직하고 싶었던 첫사랑의 추억이나 편지들, 작품화 되지 않은 단상들, 그 외의 끄적거림들이 작가의 사후 유족들에 의해 낱낱이 공개되는 이런 책들을 읽을 때마다 관음증 환자의 도덕적 양심처럼 선뜻 책장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수도자의 생각은 수도자의 생각으로, 중생의 생각은 중생의 생각으로 결국 그 간격을 좁히지 못한 채 세월은 흘러가지만 새해가 되면 문득 어떤 의무감처럼 수도자의 생각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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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은 지 일주일이나 지났건만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언제나 새해 인사와 함께 덕담을 듣게 된다.  그럴 때면 자주 보던 사람들도 만난 지 한참이나 지난 듯한 서먹함과 반가움, 그리고 그 평범한 말 한마디에서 전해지는 삶의 무늬가 짠하게 다가온다.

 

요즘은 흔한 인사 한마디에도 예전처럼 시큰둥하게 지나치지 못한다.  '잘 지내고 있어?', '안녕하시지요?' 등 매일매일의 그 평범한 인사말이 왜 그토록 가슴 한켠을 부여잡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젊어서는 나 또한 수없이 되내이고 또 일상처럼 답하고 흘려보냈을 그 말이.  나이가 들면 남자에게도 여성 호르몬의 분비가 많아진다는 생물학적 변화 때문이라고 답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수도 없이 듣는 그 인사말에 '아, 그동안 못본 사이에 저들도 나와 같이 힘겨운 삶을 살았겠구나.'하는, 같은 인간으로서 겪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고된 일상이 가슴 뭉클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작금의 경제 현실 때문도 아니요,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힘들다 느껴서도 아니다.  젊은 시절에는 느끼지 못했던 같은 인간으로서의 동질감.  '그들도 나와 다르지 않았구나.'하는 안도감.  '조금은 쉬어도 될텐데...'하는 측은함.  이런저런 감정들이 섞여 시도 때도 없이 망연자실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이런 감정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도 나이를 먹나 보다.  그런 감정이 들 때마다 나는 한 인간으로서 같은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자각한다.  잘난 것도, 다를 것도 없는 원시의 인간 개체로 되돌아 간 느낌.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사람은 그와 다르지 않은 다른 인간 군상을 보듬고 사랑하여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 앞에 나는 무릎을 꿇는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공감할 때, 알 수 없는 슬픔과 나 스스로도 그 인간군(人間群)에 속한 일원임을 분명하게 느끼곤 한다.  그 평범한 인사말로 인해.  "안녕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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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시작하면서부터 지금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내가 아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편지 형식으로 남겨왔었다.  어떤 주제를 분류해서 쓴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먼저 산 인생의 선배로서 내가 겪고 깨달은 것들이 아들에게 조금의 보탬이 될까 싶어 기록한 것인데 저자의 바람도 나와 같았나 보다.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여행의 기술>이었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 부연할 필요도 없지만 나는 작가의 기발한 생각과 표현에 감탄을 금치 못하며, 그만의 매력에 흠뻑 취했었다.  더불어 저자로 인해 철학자에 대한 이해를 달리 하게 되었다.  그의 글을 반복해서 읽다 보면 일상에서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유리알처럼 쏟아진다.  

 

 

 

 

 

 

 

 

 

 

 

 

 

"서양 문명의 몰락은 죽은 사람을 장식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시작했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따지고 보면 이 말은 비단 문명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살아있는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알지만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살지는 않는다.  죽음이 우리 곁에서 멀어질수록 우리 자신이 느끼는 삶의 가치는 그에 비례하여 축소된다.  죽음을 생생하게 느끼며 사는 사람들은 작가와 같은 시한부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일 것이다. 잊혀질 정도로 죽음이 우리 곁에서 멀어질 즈음이면 작가와 같이 시한부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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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새해가 밝았다.

아침부터 간간이 내리는 눈.  새해 첫날의 서설이다.

작년 이맘 때쯤, '한 해를 살아내기 보다는 살아가게 하소서'하고 바랬다.

지나고 나면 성긴 추억이 한 줌 서릿발처럼 밟힌다.  실제로 지나온 시간 같지가 않다.

 

새벽부터 이어지던 휴대폰 문자음에 잠을 설쳤다.

어제와 오늘이 그닥 달라진 것도 없는데 이런 날이면 왠지 습관처럼 의미를 부여한다.

아이처럼 유치해지지 않으면 삶은 그저 밋밋할 뿐이다.

무뎌진 마음결에 새로이 무늬를 되새기는 날.  오늘은 그런 날이어야 한다.

닭살이 돋고 손발이 오글거려도.

 

아들과 함께 도서관을 찾았다.

평소의 주말이라면 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시끌벅적할 시간.  한산하다.

빈 자리가 오히려 자연스러운, '정숙'이라는 시간이 얼어붙은, 휑한 공간에 책장 넘기는 소리만 가끔 메아리처럼 들린다.

 

새로 장만한 2012년 다이어리에 없는 스케쥴도 몇 가지 적어 놓아야 할 듯한 압박감.

대체로 차분할 것.  서두르지 말 것.

그리고...

 

눈발이 굵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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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 작고한 프랑스의 유명한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를 '하이퍼리얼(과도현실 또는 파생현실)의 시대'로 규정하였다.  우리에게는 그닥 친숙하지 않은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하이퍼 리얼 쇼크>와 <피고인 한명숙과 대한민국 검찰>을 읽고 있다.  얼핏 생각하면 이 두 권의 책 사이에는 하등의 공통점도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면 '그렇구나'하고 느낄 수 있다.

 

플라톤은 그의 후기저작인 '소피스테스'에서  이 세계를 원형(이데아), 복제물(현실), 복제의 복제물(시뮬라크르)로 정의하였다.  우리의 삶 자체가 이데아의 복제물인데, 복제는 언제나 원형을 그대로 담을 수는 없는 것이므로 복제하면 할 수록 원형과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시뮬라크르를 실재하지 않는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겼다. 반면에, 포스트 구조주의의 핵심 이론 중 하나인 시뮬라크르는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가 확립한 개념으로서 플라톤의 개념과는 다르게, 단순한 복제의 복제물이 아닌 독립성을 가진 개체로 보았다. 즉, 원형을 단순히 흉내낸 가짜가 아니라 원형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역동적인 존재로 여긴 것이다. 이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쟝 보드리야르의 책 <시뮬라르크와 시뮬라시옹(Simulacres et Simulation)>에서도 나온 바 있다. 여기서는 주로 대중과 미디어, 소비사회에 대한 개념으로 쓰였는데, 현대 사회에서는 모사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한다는 것이다.

 

머리가 딱딱 아프다.  철학을 기피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고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개념만 익히면 그 다음은 비교적 쉽다.  모든 일이 그렇지 않던가.  처음이 어려울 뿐 알고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정치를 예로 들면 이렇다.  정치가는 사회를 바르게 이끌어갈 올바른 철학과 탁월한 국정관리 능력을 갖추어야 하고, 국민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투표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이와 달라도 한참이나 다르다.  가령 후보자의 약력에서 '하버드 대학 졸업'이라는 문구만 보아도 그 사람이 뽑히면 마치 대한민국의 학생들 모두가 하버드에 입학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또는 모 방송국의 아나운서가 출마하면 우리나라 전체 국민이 그 사람의 이미지처럼 점잖고 바른 행동만 하는 덕치가 금방이라도 실현될 듯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평생 개그만 한 사람을 뽑아주면 웃을 일 없는 현실에서 매일매일이 즐겁고 행복한 날만 이어질 것같은 생각도 든다.

 

교환가치나 사용가치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이미지화 되고 기호화 된 세상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실존하는 사물을 소비하지 않고, 미디어에 의해 조작된 이미지, 또는 기호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배우 신세경이 광고하는 청바지만 입어도 그렇게 날씬하고 폼나는 자태를 갖게될 것만 같은 환상.  정치에 있어 하이퍼 리얼의 대표적인 희생자는 고 노무현 대통령과 한명숙 전 총리가 아니었을까?  검찰은 피의 사실을 언론에 흘리고, 언론은 다시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편집하여 사건을 보도하고,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국민들은 앞다투어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하거나 부풀리고...  그렇게 몇 단계만 걸쳐도 없던 현실이 실재 존재하는 가상의 현실, 현실을 지배하는 가상, 즉 시뮬라르크가 되는 것이다.

 

모처럼 편한 휴일을 맞았는데 이 두 권의 책이 나를 붙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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