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유감
이기주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국가의 민주화를 가늠하는 척도는 각 언론사의 논조에 달려 있다. 예컨대 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이나 그의 측근에 대한 찬양이나 우호적인 기사를 쓰는 신문사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국가라면 그 나라는 분명 독재 국가이거나 독재화가 진행되는 국가임이 분명하다. 반면에 권력자를 자유롭게 비판하거나 권력자를 희화화하여 유쾌한 조롱 거리로 삼는 언론이 다수라면 그 나라는 분명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한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각국의 자유민주주의지수(LDI)를 기반으로 민주주의 순위를 발표하는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의 자료를 비교할 것도 없이 말이다. 참고로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현재 독재화가 진행되는 국가 중 한 곳으로 발표되었다. 


올해는 1974년 박정희 군부독재에 맞서 외쳤던 10‧24 자유 언론 실천 선언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게다가 1975년 3월 17일은 동아일보가 자유 언론 실천 운동을 하던 기자‧PD‧아나운서 등 130여 명을 무더기로 해고한 날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은 아니지만 나는 작금의 대한민국 언론 환경이 정상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물론 내가 언론계에 근무하는 것도 아니요, 가족이나 친척 중 누군가가 언론과 관련 있는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한 국가의 발전에 있어 언론의 역할이 지대하다는 걸 알기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미국 뉴욕에서 'ㅏ이든 날리면' 발언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 주변 기자들에게 다 함께 들어보자고 한 것이 '바이든 날리면' 사태로 번졌다. 이후 윤석열 대통령이 발언을 부인하면서 최초 발견자인 나는 고난의 행군을 시작해야 했다. 그런데 권력의 외압보다 나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전‧현직 기자들의 태도였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기자들은 중립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차갑게 거리두기를 하고, 자신들에게 불이익이 생기지 않을까를 먼저 걱정했다. 나에게 가짜뉴스를 퍼뜨렸다고 비난을 퍼붓던 기자들이 오히려 가짜뉴스를 만들어 나를 공격했다. 언론 자유를 입버릇처럼 외치던 기자 출신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진실을 흐리며 언론을 탄압했다."  (p.9 '프롤로그' 중에서)


MBC 기자 이기주를 전 국민이 아는 스타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비난하는 정권이었다. 나 역시 대통령실이나 보수 언론의 적대적인 비난이 없었더라면 이기주라는 이름 석자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대통령의 마지막 도어스테핑 현장에서 비서관과의 공개 설전으로 인해 이기주 기자를 알게 되었고, 그가 쓴 기사를 찾아보게 되었다. 나토 정상회의 순방길에 민간인 신분의 여성 신모 씨를 동행했던 사실을 특종 보도하기도 했고, 미국 뉴욕 순방 동행 취재 중 비속어 논란 발언을 최초로 발견하여 세상에 알린 퍼스트 펭귄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나에게 왜 그토록 윤석열 대통령을 비판하느냐고 묻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는 윤석열 대통령이 살아 있는 권력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윤석열의 사전에 내로남불은 없을 것이라고 했던 정치인 윤석열의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p.54)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대기업에 다니던 자신이 갑작스럽게 기자의 길로 전향하게 된 사연과 기자가 된 이후의 여러 사건들, 그리고 기자로서의 소명의식이나 각오 등이 담겨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드는 생각이겠지만 요즘처럼 소위 '기레기'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꿋꿋하게 나아갈 수 있는 용기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의문일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용기'나 '정의'와 같은 추상적인 단어로는 설명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저자 역시 한 가정의 가장이자 직업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먹고사는 문제는 저자 역시 피하기 어려운 과제였을 터, 이 모든 사태에 두려움이 없었다는 건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나는 어느 날 길을 걷다 곤봉과 방패를 목격한 우연한 계기로 기자가 됐다. 그동안 실망과 좌절도 많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자의 힘을 의심하지 않는다. 언론 탄압과 줄 세우기가 극심해지는 상황에서도 묵묵히 권력 감시의 현장을 지키는 기자들, 그리고 힘든 여건에도 발주 기사가 아닌 발굴 기사로 거대 기득권과 싸우는 용기 있는 기자들이 있다.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 싸움 끝에 무엇보다 큰 기득권인 기자 권력의 벽도 함께 해체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p.215 '에필로그' 중에서)


역사는 종종 몇 사람의 용기와 말도 되지 않는 우연이 만나 크게 뒤틀리곤 한다. 사람의 인생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어떤 우연과 결부된 갑작스러운 결단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뒤바꾸곤 한다. 저자가 광우병 시위 현장에서 목격한 곤봉과 방패로 인해 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처럼 말이다. 1975년의 오늘은 동아일보가 자사의 언론인 130여 명을 무더기로 해고했던 날, 이기주 기자가 쓴 <기자유감>을 읽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 아닌가. 게다가 '기레기'들이 판을 치는 요즘의 언론 환경에서 이기주 기자와 같은 참 언론인이 존재한다는 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올봄 첫 황사가 유입되었다는 오늘, 어제까지 포근하기만 하던 날씨는 봄바람과 함께 급변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 박연준 산문집
박연준 지음 / 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 레, 미, 파,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피아노 건반을 처음 눌러보았던 때를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동글동글한 소리가 출구도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솟아올라 빈 공간을 가득 메우고 종국에는 피아노를 쳤던 나의 작은 손가락을 매개로 미세하게 전해지던 여린 울림과 떨림. 세상을 향해 어설프게 만들어 낸 나의 소리로 인해 뿌듯함으로 터질 듯 가슴이 부풀었던 기억. 그러나 처음으로 글씨를 읽었던 기억은 이처럼 직접적이거나 즉각적인 것은 아니어서 모르던 글자를 한 자 한 자 읽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 나와 세상 사이를 가로막았던 문이 차츰 환하게 열렸던 것이다. 내가 비로소 인간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었다는 자부심은 '배우고 때로 익히는'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뭐든 어릴 때 배워야 한다. 어린아이들은 '그냥' 하다가 잘하게 되고, 어른들은 '잘' 하려다 그냥 하게 된다. 아이처럼,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그냥' 해야겠다. 생각 없이 그냥 하다가 잘 되는 순간을 맞이하는 기쁨은 클 테니까. 계속할 것이다. 일주일에 세 번, 발레교습소에 나가는 할머니가 되어야지. 오전에는 발레를 배우고, 오후에는 공책을 펼쳐 시를 쓰는 할머니. 공책을 새것으로 바꿀 때마다 맨 앞에 적어놓는 문구를, 할머니가 되어서도 적어놓을 것이다. "춤추지 않으면 무용수들이 길을 잃는다." - 피나 바우쉬"  (p.176)


시인의 산문집을 자주 읽게 된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었다. 박연준 시인의 산문집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 따라 책의 제목처럼 이상하게 읽힐지도 모른다. 언제까지나 내편으로 남았던 아버지, 지금은 관계가 소원해진 옛 친구, 서른 넘은 나이에 처음 떠나 본 여행지에서의 사색, 발레교습 등 시인의 눈에 비친 평범한 일상들이 시인의 글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뭔가 마법을 부린 듯 이상하게 펼쳐진다. 사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특별하지 않은 일들이 시인의 눈과 손을 거치면 전혀 다른 일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세상의 그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낯선 일상을 시인은 조곤조곤 들려주는 것이다.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데, 내 머릿속에 오래 남아 있는 단상이 있다. 세상의 모든 동물 중에서 나체가 누드가 되는 동물은 사람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옷을 벗는 순간 육체의 '표면'이 '내부'의 연약함, 혹은 부끄러움과 연결되는 동물은 사람이 유일하다는 것! 비단 육체의 문제만이 아닐 것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표리부동한 행동을 일삼고, 화장한 생각을 진실인 양 표현하며 살았던가? 생각을 벗기면 생각의 누드가 드러날까?"  (p.78)


같은 풍경을 그려도 그리는 이에 따라 그림은 천차만별 달라지는 것처럼 비슷한 일상 역시 쓰는 이에 따라 독자가 받는 감흥은 열이면 열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시인이 쓴 에세이는 또 특별한 것이어서 시인의 품성이 낱낱의 글자에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이다. 총 5부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시인은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책의 5부'믿지 않으면, 좀처럼 읽을 수 없는 책'에 주목하며 읽었는데 그것은 어쩌면 내가 다른 이보다 유독 책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어떤 책을 좋아하고, 어떤 책을 즐겨 읽는가 하는 문제에 다른 이보다 관심이 더 많아서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나는 독서 관음증 환자에 속하는지도 모른다.


"뒤라스는 내가 가장 영향을 받은 작가다. 나는 뒤라스에게 언어의 리듬, 이야기를 끌고 나아가는 방식을 배웠다. 사랑을 그리는 법과 시 쓰는 법을 배웠다. 나는 뒤라스가 대사를 처리하는 방식을 보며 시를 썼고, 뒤라스의 작품을 탐독하며 글에는 음악이 흘러야 함을 배웠다. 한동안 시를 오선지 노트에 썼다. 뒤라스는 이야기를 우아하게 이끌며, 책에 시적 에너지가 깃들게 하는 법을 아는 작가다. 감각적이고 지적이며, 풍부한 동시에 간결한 쓰기!"  (p.277)


기온이 오르자 초록초록한 새순이 다투어 고개를 내고 있다. 기온이 높아지는 소리를 봄의 발자국 소리인 양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는 듯하다. 계절의 변화에 조금이라도 뒤처지기 싫어하는 저마다의 경쟁의식이 꽃과 새순을 통해 표출되는 것이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도 그에 질세라 "날씨 좋다!"를 연발하고 있다. 책에 머물던 시선이 자꾸 밖으로 밖으로만 향한다. 봄에 우리의 시선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이 사랑한 예술가
조성준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분야든 천재로 기억되는 인물은 늘 있게 마련이다. 과학은 물론 문학이든, 건축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심지어 행정이나 관리에 있어서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늘 있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지구의 미래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위기의 순간이면 언제나 우리 앞에 짠 하고 나타나는 슈퍼맨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던 천재들이 당면한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절망 속에 있는 우리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었던 천재 예술가들의 찬란한 명성 이면에는 언제나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이의 삶에는 언제나 빛과 어둠이 상존하는 것처럼.


조성준 작가의 저서 <당신이 사랑한 예술가>는 화가, 건축가, 만화가, 가수, 배우, 작곡가, 지휘자, 영화감독 등 대중이 사랑하고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 예술가 25인의 작품 세계와 삶의 이면을 조망한다. 권력에 맞섰던 건축가 김중업에서부터 전면점화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김환기 화백,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 우수의 아이콘이었던 재즈 보컬리스트 빌리 홀리데이, 희극 배우의 대명사 로빈 윌리엄스, 패션계의 판도를 바꾼 코코 샤넬,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 등 우리의 귀에도 익숙한 이름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1부 '차별과 편견을 넘다', 2부 '케이지와 굴다처럼', 3부 '누가 스타를 죽였는가', 4부 '캡틴, 마이 캡틴', 5부 '시네마 천국으로 떠난 거장' 등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천재 예술가들의 삶의 이면과 예술을 다룬다.


"추상화 앞에서 관객이 주로 느끼는 감정은 혼란이다. 구체적인 피사체가 없는 추상화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많은 관객은 김환기 추상화 앞에서만큼은 어떤 설명을 듣지 않고도 스르르 무장해제된다. 서글픈 푸른색 점들은 관객을 저마다의 추억열차에 태운다. 누군가는 이 푸른 점을 통해 지금 내 나이보다 어렸던 부모의 얼굴을 보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사람을 생각한다. 점을 찍었던 화가가 그랬던 것처럼."  (p.132)


<노인과 바다>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좋은 작가의 조건으로 불우한 유년 시절, 재능, 그리고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그의 의견에 100% 공감한다. 한 예술가에게 있어 그의 불우한 삶은 예술을 향유하는 일반 대중에게 있어 축복과 같은 것이다. 영혼의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가장 높은 곳에 이르기까지 그가 갖는 영혼의 진폭은 모든 이의 그것을 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예술을 사랑하는 그 누구라도 그의 영혼에 젖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실제로 겪어본 것을 예술로 표현하는 것과 단지 학습과 상상력만으로 표현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참한 삶을 견디다가 떠난 예술가의 이야기는 흔하다. 피아프 역시 그런 예술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삶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다. 이 드라마의 장르는 비극이다. 하지만 피아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1960년. 몸과 마음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이때 피아프가 부른 곡이 <아니요,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다. 마지막 남은 영혼 한 방울까지 다 끌어모아 노래를 불렀다. 눈물이 가득한 삶이었지만, 자신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p.196)


무언가 작정하고 덤벼들었을 때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성취는 누구나 예측 가능한 뻔한 결과로 마감되곤 한다. 그러나 삶의 밑바닥을 경험한 이의 성과는 이따금 세상을 놀라게 한다. 우리는 그들을 일러 '천재'라고 부르곤 한다. 물론 삶의 밑바닥을 경험했던 이들은 모두 천재가 되는 건 아니다. 천재라고 불릴 만한 성취를 이루는 이는 손으로 꼽을 정도로 그 수가 적다. 그 반대의 경우도 우리는 흔히 목격한다. 자신도 예측하지 못했던 과한 결과로 인해 자신의 나머지 삶을 자신의 성취에 대한 대가로 지불하는 경우 말이다. 혜성처럼 등장하여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사람이 서둘러 생을 마감했던 그와 같은 사례는 책에서도 다루고 있다. 히스 레저와 에이미 와인하우스 그리고 친숙했던 배우 로빈 윌리엄스...


"윌리엄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진지한 영화를 찍으면 안 어울린다며 손가락질을 받았고, 코미디 영화를 찍으면 식상하다며 조롱받았다. 점차 그는 쇠약해졌고, 서서히 잊혔다. 윌리엄스는 2000년대 들어 크고 작은 불행을 연달아 맞았다. 이혼을 겪으며 위자료만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사용했다. 영화도 잘 안 풀렸다. 술에 의존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는 외톨이처럼 바깥에 나오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게임에 몰두했다. 우울증이라는 파도가 덮쳤다. 예순을 겨우 넘긴 나이에 치매라는 비극까지 닥쳤다. 2014년 세상은 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p.253)


얼마 전에 읽었던 쇼펜하우어 아포리즘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자의식이 결여되었다는 것은 나와 나의 관계가 온전히 성립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나와 나의 관계도 온전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온전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며, 허영이며, 교만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나로 평생을 살 수는 없다. 사람들의 눈높이에 나를 맞추려는 데서 모든 불행이 시작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나다. 내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사람들도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우리가 사랑했던 예술가들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성준 작가의 <당신이 사랑한 예술가>를 곁에 두고 이따금 들춰 본다면 나의 삶도 크게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닫지 않을까. 다시 시작되는 한 주, 텅텅 비었던 일상이 차곡차곡 메워지는 느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지의 무능한 탐정들 두 번째 원고
김혜빈 외 지음 / 사계절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침 공기는 여전히 쌀쌀하지만 연일 꽃소식이 들려오는 걸 보면 봄은 봄이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보니 아파트 화단에도 산수유꽃이 새초롬하니 피었다. 계절의 변화에 조금만 주의를 게을리하면 산수유꽃의 개화는 늘 놓치고 만다. 언제였는지도 모르게 슬쩍 피었다가 아무도 모르게 지워지기 때문이다. 대지가 꿈틀대는 이맘때면 나는 '아, 소설을 읽어야지!'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설레곤 한다. 봄이 우리에게 급격히 변하는 자연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소설은 우리 사회의 변화를 가장 먼저 드러내는 '문학계의 봄'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계절 출판사에서 발간한 <하지의 무능한 탐정들>은 이 봄에 맞춤처럼 찾아온 소설집이다. 신춘문예 등단작가 5인의 단편소설과 에세이가 각각 한 편씩 실린 이 책은 신예작가의 시선이라는 점도, 소설과 에세이가 동시에 실렸다는 점도 무척이나 신선하다. 마치 이제 막 피어나는 봄처럼 말이다. 먼저 책에 실린 단편소설을 살펴보면 평범한 인간들 속에 소수자로 살고 있는 늑대인간을 그린 '솔리터리 크리처', 사라진 가족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정원사', 한 사람의 죽음과 상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권능', 추리소설 작가 지망생인 기우와 이혼 소송 중인 탁구 강사 호정을 통해 우리가 맺고 있는 허망한 관계를 바라보게 되는 '하지의 무능한 탐정들', 가까운 사이로 존재하지만 두 사람의 속마음은 두려울 정도로 서로 다른 '이주'가 김혜빈, 김사사, 공형진, 하가람, 신보라 작가가 쓴 단편소설이고 뒤에는 이들 각자의 에세이가 한 편씩 실려 있다.


"호정은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담장 아래 떨어진 살구를 줍는 탐정의 얼굴을. 트렌치코트를 입은 채 열매를 조심스럽게 살피는 모습을. 전날 짓무른 과육에서 느껴지던 미끄덩한 식감과 신맛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을 먹으면 배탈이 날 것이라는 걸 안다. 그러니 그것을 놓아야 한다는 것, 바닥에 떨어뜨리고 짓밟아야 한다는 것까지도. 그러면서도 혀 아래로는 침이 고인다."  (p.129 '하지의 무능한 탐정들' 중에서)


"우리의 약속이 세 가지로 늘었다. 나는 하늘을 보며 이주와 함께 온 세상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주는 매일 하늘을 올려다보니까 우울한 거야, 내려다볼 줄도 알아야지, 하며 중얼거렸다."  (p.158 '이주' 중에서)


각각의 소설은 우리가 알던 틀에서 조금씩 어긋나 삐걱거린다. 새로운 근육을 썼을 때의 어색함처럼 혀에 착착 감기는 익숙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소설의 소재도, 글을 완성해 가는 방식도 기분 좋은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파릇파릇 새순이 돋는,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는 이 순간처럼 책을 읽는 것이 즐겁고 설렌다. 이들도 언젠가 자신의 문체와 구성 방식에 익숙해져 한 발짝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글이 원숙해질지언정 늘 신인의 자세로 새로움을 추구했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과 싸우는 일인데. 나는 자주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다가 어쩌면, 아무것이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다가 내가 쓰고 있는 글 또한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과 아무것이든 상관없다의 반복. 그렇기에 아무것도 없음과 싸우는 일은 아무것이든 상관없음과 싸우는 일과 다를 바가 없지만, 확언할 수 있는 것은 글을 쓰는 일이란 어쨌든 싸우는 일. 승패는 나의 몫이 아니다. 결국에는 '도'와 '든'의 반복."  (p.188~p.189 '신보라의 ''도'와 '든'으로 살기' 중에서)


책에서 선보인 다섯 편의 소설에서 우리는 인간관계의 허상과 파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관계 맺기의 어려움을 실감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끝없이 시도하고, 상처를 입고, 회복기를 거쳐 다시 또 도전하기에 이른다. 삶이란 관계와 관계 맺기를 빼면 아무것도 아닌 까닭에. 끊임없이 언덕 위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우리는 끝없이 관계를 맺고, 상처를 입고 헤어지며, 다시 또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우리는 모두 '가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부러워하는 평범한 소시민인 까닭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기 전에 쓰는 글들 - 허수경 유고집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음을 앞둔 사람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나는 이따금 답도 알 수 없는 이 질문을 붙잡고 하염없는 상념에 빠져들곤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의 글을 줄기차게 읽어왔다.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를 썼던 위지안 교수,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썼던 신경외과 의사 폴 칼라니티,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주인공이었던 모리 교수 등 여러 책을 전전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답은 찾지 못했다. 아니,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이승과 저승의 법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승의 이 편에 있는 내가 저승으로 향하는 저 사람들의 메아리를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그 진의를 어찌 해석할 수 있을까.


"불안은 자꾸 잠을 잘라둔다.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어느날 긴 밧줄 같은 잠에 묶여 불안이 나오지 못할 만큼 자야겠다."  (p.275)


무위의 질문에 사로잡힌 나는 또 허수경 시인의 유고 산문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을 읽었다. 바람을 움키듯 나는 결국 헛힘만 쓰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내가 마주하는 질문은 언제나 진한 향기로 유혹한다.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엄연한 사실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생명 연장에 대한 유혹을 내려놓은 자만이 들을 수 있는 간절함의 시간일 테니까. 나는 삶의 이쪽 편에 서서 웅웅 바람결에 메아리로 들리는 그 소리를 듣기 위해 허사로 귀결되는 무용의 독서를 이어간다.


"나는 귤을 쪼갰다.

귤 향!

세계의 모든 향기를 이 작은 몸 안에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살아오면서 맡았던 모든 향기가 밀려왔다.

아름다운, 따뜻한, 비린, 차가운, 쓴, 찬, 그리고,

그리고, 그 모든 향기.

아,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가기 전에 나는

써야 하는 시들이 몇 편 있었던 것이다."  (p.307~p.308)


생의 마지막 항암치료를 앞두고 김민정 시인에게 썼다는 허 시인의 편지. 쓰고 있는 작은 시집이 있는데 내달라는 내용과 함께 원고는 메일로 보낼 테니 오지 말라는 당부. "너를 보면 겨우 참았던 미련들이 다시 무장무장 일어날 것 같아. 시인이니 시로 이 세계를 가름하는 걸 내 업으로 여기며 살아왔으니 마지막에도 그러려고 한다."는 허 시인의 편지. 책을 읽는 우리는 그저 먹먹한 슬픔만 한 줌 손에 쥘 뿐 정작 찾고자 하는 질문의 답은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하지 못한다. 삶과 죽음 사이의 넓은 행간은 내가 레테의 강을 건널 쪽배를 타는 순간에나 읽을 수 있으려나.


"글을 참 맛깔나게 쓰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옆에서 조곤조곤 말하듯 쓰는 사람들이다. 옆에서 누군가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부담스럽지 않고 누구나 알 수 있는 말로. 부럽다는 생각. 허세가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자신이 다치지도 타인을 다치게 하지도 않는 글. 그런데...... 글은 그것뿐인가?"  (p.230~p.231)


'글을 참 맛깔나게 쓰던' 허수경 시인. 다정함은 인간의 체온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더이상 우리는 시인이 보내는 다정한 인사를 기대할 수 없다. 나는 다만 내가 기억하는 시인을 향해 내 다정한 인사를 건넨다. 최선을 다한 다정함의 끝에는 울컥울컥 무른 슬픔이 묻어나겠지만 봄바람이 부는 소슬한 오후를 내 다정함의 온기로 덥혀 보려 한다. 주말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조금 더 다정해지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