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셸리 리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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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초반부를 읽는 데 꽤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책을 덮었다 다시 펴는 일을 여러 번 반복하는 동안 내 유년 시절의 힘들었던 삶이 트라우마로 내재되었다는 걸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그 트라우마가 소설 속 주인공의 힘겨운 삶조차 가슴으로부터 완강히 밀어내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소설 속 주인공인 빅토리아가 사고로 엄마와 이모, 다정했던 사촌 오빠를 잃고 무뚝뚝한 아빠와 말썽꾸러기 남동생,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이모부를 돌보며 복숭아 과수원의 수확기에는 농사일까지 도맡아야 했던 현실은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었지만, 열일곱 살의 빅토리아가 이방인이었던 인디언 소년 윌슨 문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그로 인해 마을을 떠나지 못하게 된 윌슨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 살다가 결국 동생 세스와 그 패거리에 의해 살해되고, 빅토리아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마을을 떠나 숲 속의 산막으로 숨어들게 되는 장면과 어렵사리 아들을 낳아 결국 굶주림에 지친 몸으로 야유회를 나온 젊은 부부의 차에 아들을 버리는 장면까지 읽어내는 데 진이 빠졌던 것이다.


"나는 윌이 저 깊은 산속 산막에서 포근한 누비이불을 덮고 자고 있다고 상상했다. 산막에 하나 있는 자그마한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의 완벽한 살갗에 보드랍게 내려앉는 모습을 상상했다. 도무지 견딜 수 없는 현실을 어떻게든 견뎌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진실을 외면할 순 없었다. 무고한 소년을 포용하지 못할 만큼 이 세상이 잔인하다는 진실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르지 못할 만큼 이 세상이 잔인하다는 진실을. 블랙 캐니언이 윌의 깊고 끔찍한 무덤이 되어버린 것은 그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이 마을에 머물렀기 때문이라는 진실을."  (p.151)


소설의 초반부를 너무 힘들게 읽었던 탓인지 출산을 한 빅토리아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다시 마을로 돌아온 장면부터는 힘들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빅토리아가 다시 돌아오겠다는 편지 한 장을 써 놓고 집을 나간 이후 대충의 사정을 파악한 아버지는 빅토리아를 찾아 사방을 찾아 헤맸고, 혹시나 세스 패거리에게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윌슨 문을 살해한 것이 세스와 그 일당이라는 사실을 보안관에게 알렸다. 결국 세스 패거리들은 마을을 떠났고, 휠체어를 타던 이모부마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남겨진 가족은 오직 아버지 한 사람이었다. 산속에서 이러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빅토리아는 출산을 한 후 어렵게 돌아왔지만 아버지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로 변해 있었다. 마을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마저 잃은 후 빅토리아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괴짜 노인이라며 늘 무시되고 천대를 받던 루비앨리스와 그녀의 반려 동물들을 돌보며 지낸다. 그러던 중 마을은 댐 건설 계획으로 인해 수몰지구로 변할 위기에 처하게 되고 인근 마을에까지 달콤한 육즙의 내시 복숭아로 이름이 났던 아버지의 과수원을 살릴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빅토리아는 결국 과수원을 팔고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살릴 수 있는 복숭아나무를 새로운 땅에 옮겨 심는다. 내시 복숭아의 명성은 그렇게 이어지는데...


"강인함은 작은 승리와 무한한 실수로 만들어진 숲과 같고, 모든 걸 쓰러뜨린 폭풍이 지나가고 햇빛이 내리쬐는 숲과 같다. 우리는 넘어지고, 밀려나고,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최선을 희망하며 예측할 수 없는 조각들을 모아가며 성장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방식으로 성장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우리 모두는 함께였다."  (p.416)


태어난 고장이었던 아이올라에서 파이오나로 이사를 온 빅토리아는 오직 복숭아나무만 돌보며 과수원을 살리는 데 온 정성을 쏟는다. 이처럼 젊은 여자가 일만 하는 모습을 이웃인 젤다는 늘 안타깝게 생각하였고, 괜찮은 남자를 소개하여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빅토리아는 과수원을 돌보는 일에만 몰두하였고, 다른 어떤 일에도 관심을 쏟지 않았다. 자녀가 없는 젤다 부부는 시간만 나면 여행을 떠났고, 늘 새로운 소식을 갖고 빅토리아의 집을 찾았다. 빅토리아는 아들과 헤어졌던 산속 공터의 바위 위, 젊은 부인이 자신에게 남겨주고 떠났던 커다란 복숭아가 있던 자리에 매년 돌멩이를 하나씩 올려놓았는데 어느 해 전에는 보지 못했던 낯선 메모지를 발견하게 되고...


"윌은 고개만 가로저을 뿐 조용히 있다가 한참 뒤 입술을 뗐다. "세스 같은 사람들은 밤하늘의 별보다 더 많아."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의사와 날 안심시키려는 의도가 담긴 대답이었다. 그러나 안심은커녕 불안만 커지고 말았다. 그건 윌의 말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윌이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간다 한들 세스 같은 사람이 없겠는가? 어디로 간들 세스처럼 분노로 가득한 사람, 피부색이 어둡다는 이유만으로 괴롭히려는 사람이 없겠는가? 윌은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살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늘 그러셨거든. 방법은 그뿐이라고.""  (p.143)


1940년대부터 1970년대를 배경으로 극심했던 인종차별과 베트남 전쟁의 시대 상황을 소재로 다룬 이 소설은 온갖 역경을 딛고 자수성가의 고지에 오르는 전형적인 미국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인류 보편의 정의와 인류애, 가족의 정서와 사랑 등을 주제로 감동적인 서사를 이끌어간다. 12년간 집필해 셸리 리드의 데뷔작으로 선보였다는 이 소설은 34개국에서 출간되어 세계인의 호평을 받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이따금 한 권의 소설을 통해 생각지도 못했던 자신의 내면을 마치 우연처럼 발견하기도 한다. 너무 힘들어서 잊고 싶었던 기억들, 다른 누군가에게 내보이는 일조차 힘겨워서 속으로 속으로만 감추었던 지난 일들이 돌덩이처럼 굳은 트라우마가 되어 나도 모르게 어떤 것을 배척하거나 멀리하게 되는 경험. 소설은 때로 깊이 감추어두었던 나를 불러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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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하지 못한 말
임경선 지음 / 토스트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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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적'이라는 말의 느낌은 왠지 모르게 서글프다. 그래서인지 '일정한 기간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라는 뜻을 지닌 이 말을 나는 가급적 잘 쓰지 않는다. '일정한 기간'을 조금 더 확장하면 태곳적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세상만물이 여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사람도, 자연도, 우주도 다만 한시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얘기다. 그렇게 생각하면 꽤나 허망해진다. 약간의 시차만 존재할 뿐 우리는 사라지는 존재로서의 내가 또 다른 사라지는 존재인 어떤 이와 관계를 맺고, 아등바등 다투기도 하고, 사랑하거나 미워하기도 하며, 이미 사라진 존재를 그리워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관계가 지속되었던 그 일시적인 기간을 우리는 어떻게 규정하고 추억해야 할까. 관계의 상대방이 사라진 반쪽짜리 추억도 우리는 온전한 것인 양 쉽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까. 습관처럼 우리는 자신에게 속한 허술한 기억을 곱씹으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곤 한다. 나와 관계를 맺었던 상대방으로부터 내 기억의 전후 사정을 하나도 점검받지 못한 채. 우리의 기억은 그렇게 나와 당신(혹은 당신들)의 것이었다가 나만의 것이었다가 결국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우리의 생명이 유한하듯 우리의 기억 역시 '한시적'인 것으로 소멸한다.


"지금 이 상태 그대로의 마음을 남기고 싶었어. 다 하지 못한 말을 하고 싶었어. 정말 좋았던 것, 너무 가슴 쓰라렸던 것, 당신을 속였던 것, 등등. 당신을 본 순간 이제야 찾았다 싶어서, 오래갈 거라고 혹은 영원할 거라고 마음대로 생각해서 순간순간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 담아둘 수도, 버릴 수도 없었던 말들. 이 말들이 갈 곳은 단 한 곳, 오직 한 사람, 당신, 당신."  (p.207)


임경선의 소설 <다 하지 못한 말>은 여자 주인공인 '나'의 일기가 모여 한 권의 소설이 된,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격정적인 사랑 이야기로 읽힌다. 나는 소설의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나누는 어떤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문득 '아니 에르노'를 떠올렸으니까 말이다. 성실하고 독립적인 성향의 직장인이었던 '나'는 남성 피아니스트인 '당신'을 우연히 만나 사랑의 회오리에 빠져든다. 공연예술가로서 좌절을 마주한 '당신'의 스튜디오는 '나'의 사무실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 방음처리가 완벽한 스튜디오는 '당신'의 숙소인 동시에 연습실이며 생활공간이 되기도 한다. '당신'을 만나기 전의 '나'는 여느 직장인과 다름없이 점심을 빠르게 해결한 후, 마음에 드는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즐기는 등 평범한 직장인의 일상과 하등 다를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당신'이라는 세상을 알게 된 '나'는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처럼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만다.


"우리는 낮에 만나면 실내에서 너무 '그짓'만 한다며, 낮 시간을 건전하게 바깥에서 보내자는 말을 가끔 나누었지. 하지만 그 말을 하면서도 어느새 상대의 셔츠와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고 있었으니, 그런 반성은 전희의 한 부분일 뿐이었어.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은 스튜디오 문을 열어주자마자 내 손을 덥석 잡고 오늘은 덕수궁에 산책을 나가자고 했어."  (p.77)


임경선 작가에 대해 밝히고 넘어갈 게 있다. 과거 언제였는지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애독자였던 임경선 작가는 하루키 작품에 대한 오프라인 강의를 주기적으로 하고 있었고, 강의의 주요 내용이 온라인에 게시되기도 했었다. 나 역시 하루키의 애독자였던지라 임경선 작가의 강의 요지를 관심 있게 읽은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임경선 작가가 전문 작가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고 하루키를 좋아하는 열혈 독자 중 한 명이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가수 겸 작가인 요조와 함께 쓴 교환 일기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를 읽게 되었고, 그마저도 전문 작가의 작품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로서는 어쩌면 <다 하지 못한 말>이라는 소설이 임경선 작가를 전문 작가로 인정하게 된 첫 번째 작품이 아닐까 싶다.


"<다 하지 못한 말>의 여자 주인공 '나'도 두려움 때문에 말을 아끼고, 어쩔 줄 모르는 고통 때문에 편지인지, 일기인지, 혹은 단순히 혼잣말인지 모를 글을 쓴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대는 그 글을 받아 볼 필요는 없다. 이는 사랑에 빠지고 상처를 입은 이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몸부림일 뿐이니까."  (p.212 '작가의 말' 중에서)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한시적'이라는 사실이다. 사랑도, 미움도, 그리움도, 심지어 영원할 것만 같았던 우리의 기억마저도. 그러나 사랑에 빠진 남녀는 사랑하는 그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이별이나 상실의 아픔을 겪은 후에 우리는 결국 사랑도 미움도 '한시적'이었음을 깨닫게 되지만 그래서인지 '한시적'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가슴 절절한 의미로 다가오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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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나는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란 수많은 사람들이 깁고 덧대고 이어 붙여서 오늘에 이른 까닭에 비록 그것이 유구한 역사를 거쳐 오늘날 우리가 믿는 통일된 기준을 마련했다고는 하지만 그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사람들의 일반 상식도 이럴진대 멧돼지 세계에서의 일반 상식이란 얼마나 허황되고 보잘것없는 것일까요. 그래서인지 아내 멧돼지가 받은 뇌물에 대해 멧돼지의 권익을 보호하는 권익위원회의 수장인 철완 멧돼지가 배우자에 대한 제재 규정이 없다며 깔끔하게 종결 처리했습니다. 그렇다고 공직에 있는 모든 멧돼지의 배우자가 마음 놓고 뇌물을 받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 부부에게나 해당하는 상식이지 다른 멧돼지에게도 널리 통용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부부는 지금 멀리 타국에 나와 있습니다. 아내 멧돼지와 함께 마음 편히 해외여행을 나온 것도 근 6개월 만이고 보니 참으로 만감이 교차합니다. 게다가 북한의 정은 멧돼지가 남한을 향해 수많은 똥풍선을 날려 보내는 바람에 리더 멧돼지로서의 체면도 말이 아니었지만 더러워서 남한에선 잠시도 더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정은 멧돼지가 똥풍선을 보내게 된 계기도 따지고 보면 남한에 있는 탈부기 멧돼지들이 먼저 그들을 향해 오물 풍선을 보냄으로써 그들의 화를 돋군 측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나 역시 그들의 행위를 제지하거나 말리지 않았습니다. 접경지의 멧돼지들이야 죽든 말든 자유를 위해서라면 남한의 모든 멧돼지들이 죽어나자빠진들 포기할 수 없는 가치라고 나는 예전부터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식이 없는 우리 부부는 이미 살아볼 만큼 살았기 때문에 지금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는 까닭입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똥풍선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딱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좌시만 할 뿐입니다. 이전의 어떤 연설에서 나는 좌시하지 않겠다고 뻥을 쳤지만 나의 뻥이야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닌 까닭에 지금은 다들 그러려니 이해하는 편입니다. 며칠 전에는 포항 앞바다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고 뻥을 쳤더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리더 멧돼지가 그렇게 간 큰 뻥을 치기야 하겠어?' 하는 생각이었는지 대략 이틀 정도는 반신반의 믿어주는 분위기였습니다. 물론 삼일 이후부터는 '에이,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믿지 않는 분위기로 되돌아가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어떤 멧돼지는 우리 사회에서 뻥과 편법이 사라지고 상식과 공정이 되살아나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정권을 잡고 있는 한 공정과 상식은 그저 헛된 구호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아내 멧돼지 역시 받을 수 있는 모든 뇌물을 거절하지 않고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은 멧돼지가 이를 비웃으며 남한을 향해 지금보다 더 많은 똥풍선을 보낸다 할지라도 아내 멧돼지의 뜻을 꺾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때마다 철완 멧돼지는 배우자에 대한 제재 규정이 없다며 종결 처리할 것입니다. 고맙게도 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란 오랜 세월 많은 이들이 깁고 덧대고 이어 붙여서 오늘에 이른 것이지만 리더 멧돼지인 나는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한 마리의 미친 멧돼지일 뿐입니다.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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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프레드 포드햄 그림, 문형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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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서 벗어난 조금 다른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나는 사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를 여러 번 읽었던 까닭에 그때마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진부한 리뷰를 써왔던 게 사실이다. 물론 숫자를 세어보면 리뷰를 쓰지 않고 그냥 지나쳤던 게 훨씬 더 많겠지만 말이다. <멋진 신세계>의 주요 내용이나 주제는 아니지만 나는 책을 읽을 때마다 언제나 신과 종교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곤 했었다. 그러나 책에서도 그와 같은 주제에 대해서 잠시 언급되기는 하지만 주요 테마나 주제에서는 살짝 벗어난 느낌이 없지 않았기에 이전의 리뷰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종교는 언제나 민감한 문제이기에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나 않을까 은근히 겁이 나기도 했고, 종교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맹목적인 광신자의 격분한 비판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까닭에 일부러 외면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나는 사실 천주교 세례를 받은 가톨릭 신자이다. 물론 바쁘다는 핑계로 주일 미사마저 거르기 일쑤인, 일종의 패션 신자에 가깝지만 말이다. 내가 여타 종교에 대해 깊이 연구한 바는 없지만 종교가 존속하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 조건은 불행한 사람들이 자신이 믿는(혹은 믿으려고 하는) 신과 교리를 통하여 자신의 처지를 얼마나 잘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즉 종교란 행복한 사람보다는 불행한 사람을 위한 시스템이며, 종교를 통하여 그들이 처한 작금의 다급한 처지를 개선해 주겠다는 헛된 약속으로 그들의 환심을 사려한다기보다는 지금은 마음의 위로 외에는 달리 해줄 게 없지만 내세에는 반드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현재의 어려움을 참고 견디라는 메시지로 그들을 설득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경구는 어찌 보면 교회 입장에서의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영업 멘트가 아닐까 싶다. 사는 게 곧 고통임을 설파하는 불교의 교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내세에서의 삶은 어쩔 수 없는 경쟁과 불평등이 상존하는 까닭에 신이 아니라 신의 할아비가 온다 하더라도 현실에서 이를 해결할 방법은 딱히 없는 것이다.



'그래픽 노블'로 출간된 <멋진 신세계>의 장점은 가독력과 이해력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물론 시각적인 효과보다는 묘사에 의한 상상력을 중시하는 독자라면 '그래픽 노블'의 출간에 대해 환영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문자 텍스트보다는 시각적 이미지나 동영상에 익숙한 현대인의 기호에 맞춰 우리가 한 번쯤 읽어보아야 할 고전 소설을 그래픽 노블로 재출간하는 건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싶다.


워낙 유명한 소설인지라 줄거리는 대충 알겠지만 반역자였던 왓슨과 총독의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총독의 주장을 옮겨 본다.


"사람은 젊음과 번영을 누릴 때에만 신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으나, 그 독립이 인생의 최후까지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글쎄, 우린 지금 인생의 최후까지 젊음과 번영을 보장받고 있다네. "종교적 신앙심이 우리가 겪는 모든 상실을 보상해 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보상을 받을 만한 그 어떤 상실도 없는 걸. 그리고, 젊음에 대한 갈망이 완전히 충족되었는데 왜 그 대체제를 찾아 헤매야 할까?  (p.202)


<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 역시 동의하는 바이지만 불행한 사람보다 행복한 사람의 비율이 조금이라도 높다면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불행한 사람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까닭에 종교는 존재하며 신에 대한 갈망과 기도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결국 지구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불행을 밑천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인간의 풍요와 만족, 온갖 유희와 쾌락 등이 과학이 발달한 먼 미래에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제공될 리 없지만 그와 같은 불평등한 구조 역시 종교를 영구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하나의 틀임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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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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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보다 더 큰 그릇을 알지 못한다. 매 순간 지구에 사는 수십억 명의 기억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을 지구가 아닌 우주의 차원으로 넓힌다면 '시간'은 가늠할 수 없는 용량으로 늘어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시간'에 담긴 인류의 과거 기억들을 찾아 여행을 떠나다 보면 장소와 시간은 다르지만 현재의 상황과 흡사한 어떤 사건들과 더러 마주치게 된다. 역사는 끝없이 반복되는 까닭에 실체적인 사실은 기록을 통해 확인한다고 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개개인의 감정이나 느낌은 또 어찌하랴. 우리는 역사 속 실체가 업는 누군가의 감정이 그리울 때 그 시절에 쓰인 시를 읊거나 소설을 읽는다. 그렇게 우리가 시대를 오가며 감정을 공유하는 까닭은 변하지 않는 인간의 도리를 '시간' 속에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역시 그런 소설 중 한 권이 아닐까. 인간이라면 마땅히 읽어야 할, 스페인 내전에서 죽어간 어떤 순수한 영혼을 통해 밝혀진 불멸의 정의를 깨우치는 기회를 갖기 위해.


"나는 신문 기사를 쓸까 하는 생각으로 스페인에 갔다. 하지만 가자마자 의용군에 입대했다. 그 시기, 그 분위기에서는 그것이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도 카탈로니아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혁명은 여전히 활발하게 진행중이었다."  (p.11)


일반 독자들이 하는 조지 오웰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그가 단지 <1984>나 <동물농장>과 같은 소설을 통해 문단에 진출했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이다. 그러나 이튼을 졸업한 후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던 그는 인도 제국경찰에 들어가 버마(미얀마)에 부임하였고, 그곳에서 제국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절감하였던 그는 제국주의의 허상을 비판하는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서게 되는데 그것이 그가 문필 활동을 하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파리에서 노숙자 생활을 경험했던 그가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쓴 르포르타주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의 가난한 삶을 그린 <위건 부두로 가는 길>, 1937년 1월 스페인 통일노동자당 민병대 소속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바르셀로나 전선에서 목에 총상을 입고 스페인을 탈출하여 프랑스로 건너간 후 그때 느꼈던 이데올로기에 대한 환멸을 기록한 <카탈로니아 찬가> 등은 기자 혹은 에세이스트로서의 그의 역량을 여실히 드러낸 작품으로서 많은 비평가들도 인정하는 바 나 역시 산문가로서 조지 오웰의 천재성을 실감하게 된다.


"아침 5시, 한쪽 구석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침 5시는 늘 위험한 시간이었다. 동이 트면서 해를 등지게 되기 때문이다. 흉벽 위로 머리를 내밀면 하늘을 배경으로 머리 윤곽이 뚜렷이 드러났다. 나는 보초들에게 교대 준비를 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 도중이었는데 갑자기 어떤 느낌이 왔다.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기는 하지만,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는 무척 어렵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폭발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었다. 크게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빛이 번쩍거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엄청난 충격을 느꼈다." 통증은 없었다. 아주 격렬한 충격만 느꼈을 뿐이다. 전극에 몸이 닿았을 때의 느낌과 동시에 완전한 무력감을 느꼈다. 짓눌리고 움츠러들어 무(無)로 변해버리는 느낌이었다."  (p.238)


자신의 의용군 체험담과 아울러 스페인 공산당에 대한 고발을 담은 <카탈로니아 찬가>는 조지 오웰의 이력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소련이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관계로 소련에 대한 비판을 쉬쉬하는 분위기였지만 오웰은 "서양의 사회주의 운동에 소련의 신화가 끼친 부정적 영향"에 맞서 싸우려 노력했다는 점이다. 조지 오웰은 자신이 왜 의용군에 입대해 싸웠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무엇을 위해 싸우느냐고 묻는다면 '공동의 품위를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라고. 어쩌면 우리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공동의 품위'를 너무 등한시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고 만 명에게만 평등하다.'고 비꼬았던 고 노회찬 의원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경험 전체를 통해 인간의 품위에 대한 나의 믿음은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강해졌다. 내가 한 이야기가 사람들을 오도하지 않기 바란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완벽하게 진실하지도 않고 또 진실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신하기 힘들며, 모두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당파적인 입장에서 글을 쓰게 된다."  (p.294)


조지 오웰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언제나 김훈 작가를 생각하곤 한다. 두 사람 모두 저널리스트로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글의 논리성이나 문장의 적확성을 따지는 면에서 무척이나 닮아 있다. 다만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맹점이나 허점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고자 했던 조지 오웰에 비해 김훈 작가는 너무나 나약한 측면이 있는 건 사실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 윤석열 정권의 민주주의 파괴 등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가장 먼저 감지하여야 하는 이가 모든 예술가라면 이에 가장 선봉에 서서 저항해야 할 사람들 역시 바로 그들일 것이다. 문학이, 그림이, 음악이 지구인의 아픔을 보듬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만 헛된 노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의 작품은 감정이 없는 인공지능에 맡겨도 충분할 테니까 말이다. 우리가 예술을 감상하는 까닭은 서로의 가슴으로 흐르는 감정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일 터 그것이 없다면 예술은 무슨 소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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