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여정 - 녹색성자 사티시 쿠마르의
사티쉬 쿠마르 지음, 서계인 옮김 / 해토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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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작년 7월 법정스님의 저서 < 내가 사랑하는 책들 >에 소개된 책 50권 중 <소로우의 무소유 월든>, <농부철학자 피에르 라비>, <오래된 미래>, <무탄트 메시지>, <성장을 멈춰라>, <꾸뻬씨의 행복여행>, <나무를 심은 사람>에 이어 여덟 번째로 읽은 책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과거부터 현재까지 인도에서 왜 그렇게 많은 출중한 위인들이 계속해서 배출되는지 일부 이해가 된다.
물질적 정신적 허기에 힘들어하는 삶, 21세기에 들어서도 존재하는 비인간적인 카스트 제도, 깊은 시골과 밑바닥 인생들에게 뿌리박혀 있는 여러 종교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배출되는 간디, 크리슈나무르티, 비노나 베베, ...
 
저자 역시 지금은 세계적으로 녹색성자로, 비폭력 평화주의자로, 생태적 영성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걸어온 삶은 우리 일반인들에게는 감히 상상하기도 힘든 고난의 연속이기도 했다.
인도의 농가에서 태어나(그가 태어났을 때, 마을의 한 점성가는 그의 인생은 끝없는 여행이 될 것이며,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아홉 살 때 친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이나교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모든 친지들과 접촉을 끊고, 세속적인 관심을 멀리한 채 9년간 자이나교 승려로서 인도를 걸어서 횡단했다. 

비폭력적 방법으로 사회적 영성을 추구하는 간디의 가르침을 듣고 열 여덟 살 나이에 자이나교 승려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교단을 나와 간디주의자가 된다.(그는 자이나교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세상과의 단절이 그의 영성을 더욱 깊게 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질식시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비노바가 주도하는 토지헌납운동에 참여하여 ‘걷기’를 통한 명상과 사회개혁의 위력을 두 눈으로 확인한 그는 친구와 함께 ‘반핵 평화’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알릴 목적으로 무려 2년의 기간동안 인도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워싱턴까지 걷는 평화 순례에 나선다.
그 후 영국에 정착한 그는 생태적 사고와 전통문화, 그리고 자연의 지혜를 탐색하는 격월간 잡지 [리서전스]를 편집하고 발행하면서, 명상하고 산책하는 삶을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간디식 평화와 공존의 이념을 전파해왔다.
또한 어린이를 위한 ‘작은학교’와 성인을 위한 ‘슈마허 대학’을 설립하여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대안학교로 만들어 놓았다. 
  
이 책에는 저자가 비폭력과 생태적 영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된 수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비노바 바베를 비롯하여 인도 현지에서 만난 여러 구루들, 크리슈나무르티, 버트런드 러셀, 마르틴 루터 킹, E. F. 슈마허, 반다나 시바 등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세기의 지성들이다.
그는 이 걸출한 지성들과의 만남을 자양분 삼아 자신만의 독특한 생태철학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는 삶의 과정에서 숱하게 이별의 아픔을 겪기도 했고 회의를 느끼기도 했다.
9살 어린 나이에 대지의 품과 같은 어머니와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으며,
도망치다시피 자이나교에서 벗어났고
지구를 한 바퀴 도는 평화순례를 마친 후에는 첫 번째 아내와 두 아이들와 이별했다.
영국에서도 함께 생태운동을 진행하던 동지들과 다투고 결별하는 아픔도 겪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의 삶을 끝없이 현실에, 대지에, 평화에 던지고 살았다.
그는 생각과 사물과 사람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서 참다운 본래의 자아를 찾아 굳굳하게 걸어간 것이다.
 
굴하지 않는 의지와 자아를 찾고자 하는 열정...
사티시 쿠마르에게 배울 점이다. 
 
* 책 속의 문장
- 우리의 여행은 최종 목적지가 없는 여행이었습니다.
여행과 목적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생각과 행동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흐르는 강물처럼 움직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강과 강물의 흐름이 하나이듯이 나 자신과 나의 모든 움직임 또한 하나임을 나는 깨달았습니다.
나는 곧 여행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여행은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세계로 떠나는 여행이었습니다.
 즉 초탈의 세계를 향한 여행이었습니다. 동(動)과 정(靜)의 대립은 끝나고 나는 정적인 가운데 움직여 나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방랑자,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인생의 방랑자였던 것입니다.

-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하나가 됨을 느꼈습니다.
내 몸이 우주의 일부분이며, 땅 위를 걸으며 대지와 하나가 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방랑이야말로 내 삶의 본질이며, 나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라는 사실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마치 거울 앞에 서 있는 듯 모든 사람과 자연 속에서 나를 볼 수 있었습니다.
내 어머니는 방랑을 하는 꿈을 꾸면서 나를 가졌고, 나의 방랑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승려로서, 비노바와 함께 그리고 지금의 평화 순례까지, 나는 방랑을 통해 모든 지혜를 얻어왔습니다. (/ 평화의 순례)
 
[ 2011년 2월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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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지음 / 푸른숲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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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읽은 류시화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자 그가 세상에 처음으로 내놓았던 시집이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을 읽어본 후 류시인의 시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이 시집은 그가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을 중단한 후 8년 만에 외부에 드러낸 자신의 생각이며, 지난 13년 동안 썼던 시들이 망라된 것이라 한다. 그는 그 사이 전세계 주요 명상서적을 번역하면서 명상가로 거듭나고자 했다.
 
1989년 처음 이 시집이 문단에 발표되고 출간되었을 때, 독자들에게는 적지않은 호응을 받은 반면 문단에서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민중적이고 저항적 작품을 지향했던 당대의 문단과는 달리 신비주의적 세계관의 작품세계로 인해 문단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외계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국사회에서 419 혁명 후 다시 뜨거운 자유와 평등의 물결이 몰아쳤을 때, 그는 세상을 등지고 자신의 내부로 향했던 것이다.
 
[벌레의 별]
사람들이 방안에 모여 별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문 밖으로 나와서 풀줄기를 흔들며 지나가는
벌레 한 마리를 구경했다.
까만 벌레의 눈에 별들이 비치고 있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는
벌레를 방안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어느새 별들은 사라지고
벌레의 눈에 방안의 전등불만 비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벌레를 풀섶으로 데려다 주었다.
별들이 일제히 벌레의 몸 안에서 반짝이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생각으로는 지식과 관념, 도그마와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사람들은 자연과 우주에 대한 감성이 퇴화되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인간들도 죽은 사람들이며 노예들이었다. 그는 80년대의 또 다른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소통이 불가능하고 커뮤니케이션이 왜곡되고 차단된 상실의 시대...
 
시인 이문재는 그의 작품과 당시 문단이 바라보는 시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의 시들은 거의 변하지 않고 초기의 시세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얼핏 중요하지 않아 보이지만, 그가 세상과 격절된 상태로 20대 중후반을 지내왔기 때문이라는 근거를 댈 수도 있지만, 저 들끓던 80년대에서 자기를 지키며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은 큰 변화 못지 않은 견딤으로 본다... 일상언어들의 직조를 통해, 어렵지 않은 보통의 구문으로 신비한 세계를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그의 시의 주요한 미덕이다.
낯익음 속에 감춰져 있는 낯설음의 세계를 발견해내는 것이 시의 가장 큰 역할은 아닐까."
 
문단의 혹평 속에서도 이 시집은 1989년~1998년 동안 21번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그는 [시로 여는 세상] 2002년 여름호에서 대학생 53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인에 윤동주, 김소월, 한용운과 함께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무려 20여년전에 발간된 시집이다. 시인은 그 사이에 여러 시집을 또 발표했다. 이 시집 이후 시인은 또 많이 변화되고 성숙되었을 것이다. 내 눈으로, 내 손으로 음미해보고 느껴볼 일이다.
 
이 시집의 대표작이기도 한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물 속에는 물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물체와 미생물체가 함께 들어있다. 하늘에도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름도 있고 달과 별도 있고 바람도 있고 새도 있다. 하늘만 있는 하늘은 우리에게 삭막함으로 다가올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내부에는 나 뿐 만 아니라 내가 관계한 수 많은 인연과 사건과 관념과 생각이, 꿈과 추억이 함께 들어 있다. 그 인연이 무엇이냐에 따라, 어떻게 받아들이고 체화시키느냐에 따라 사람의 삶을 어둡게 하기도 하고 화나게 하기도 하고 기쁘게 하기도 하고 슬프게 하기도 한다. 

사람의 안에서 사람을 흔드는 것은 무엇이며,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것은 누구일까? 그것은 사람에 따라 신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스승, 신념, 애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내 안에서 나를 흔들고 내 꿈과 만나는 이는 누구일까...
 
[ 2011년 2월 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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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의 속삭임 - 내가 자연을 사랑하는 이유 자연과 인간 12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김욱동 엮음 / 사이언스북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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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미국 사회의 이단아 헨리 데이비드 소로...
최근 몇 권의 그의 저서와 글을 읽고 나서 나는 그가 간디나 크리슈나무르티, 공자나 버트런드 러셀 정도로 위인으로 칭송받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가 살았던 짧은 삶과 그의 사상과 행동은 여전히 우리에게 적지않은 감동과 깨달음을 전해줄 수 있다고 인정한다. 
 
저자 역시,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소로를 접한 다음 그의 사상을 좀 더 쉽게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심한 사람 중의 하나다.
저자는 결국 소로의 작품 가운데서 주옥같은 글을 뽑아 그것에 대하여 짧은 해설을 덧붙이는 식으로 진행했다.
저자의 소개와 설명이 소로를 생태주의자와 저항인 정도로 '격하'시키는 감도 없지 않지만, 소로를 한국에 소개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어느모로 보나 긍정적인 현상이라 생각한다.
 
많은 소로의 작품 중에서 주옥같은 글들을 모아 해설을 더하는 저자의 방식도 소로를 이해하고 나를 돌아보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 잡초에 대한 소로의 글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을 무시한 채 얼마나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말해 준다.
북아메리카 인디언 추장 '구르는 천둥'의 말처럼 "문명인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식물을 잡초라고 부르는데, 이 세상에 잡초라는 것은 없다. 모든 풀은 존중받아야 할 이유를 지니고 있고 쓸모없는 풀이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똑 같은 말을 윤구병선생도 하셨고 법정스님도 하셨다.
어디 잡초에 대한 생각 뿐이랴...
서구에서 시작된 인간 중심주의, 인간 이기주의는 인간 이외의 대상 뿐 아니라 이제는 인간들 사이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되어버렸다.
 
- 나무와 낙엽에 대한 소로의 예찬은 '삶과 죽음'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도록 만든다.
낙엽은 소로에게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는 그 화려한 빛깔로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나무에게 영양분을 공급하여 열매가 맺도록 하고 그 열매로 사람과 동물들이 먹고 살도록 해준다.
또 땅에 떨어져서는 그 위에 자라는 온갖 식물에 자양분을 공급한다.
낙엽과 비교하면 인간은 어떠한가?
살아 있을 때도 온갖 방법으로 자연과 동식물을 괴롭히고 파괴하더니 죽어서도 '우아'하게 육신의 옷을 벗지 못한다.
장례가 사회적 신분이나 재산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사회...
 
- 육체적 노예와 정신적 노예...
소로는 육체적 노예 못지않게 심각한 것이 정신의 노예라고 주장한다.
21세기 현대사회에서도 '경제적 노예'보다 더 심각한 것이 정신의 노예일 것이다.
아니, 경제적 노예가 '정신의 노예'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돈이든, 권력이든 많이 가진 사람은 더 가지기 위해서, 어느정도 가진 사람은 '많이 가진 사람'의 대열에 끼기 위해서, 부족한 사람은 부족한 사람대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을 가질 것인가, '무엇'이 인생의 목표가 되고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가라고 소로도 이야기하고 법정스님도 이야기한다.
 
그 이외에도 이 책 속에는 자유에 대해, 부정한 정부에 대한 시민의 저항에 대해, 육식에 대해, 철학과 철학교수에 대해, 교육에 대해, 종교에 대해 많은 글을 써냈다.
 
소로는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에 이미 미래를 내다보고 '올바른 삶과 정신'을 앞서 주장하고 실천한 사람이니 당연 '위인'으로 인정받아 마땅할 것이다.
 
물론, 마지막 결론은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로 귀착되지만...^^
 
[ 2011년 2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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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는 꽃이 피네
법정 지음 / 동쪽나라(=한민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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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여러 해 동안 법정스님을 따르면서 스님이 법문하시고 말씀하시는 내용 중에서 가려뽑아 발간한 것이다. 스님의 뜻으로 만든  모임인 ’맑고 향기롭게’ 회원들이나 길상회 모임을 대상으로 법문하신 것, 명동성당 기념식에서 강연하신 내용, 도올 서원에서 말씀하신 내용, 그리고 사석에서 하신 말씀들을 모았다. 따라서 대략 1990년 중후반의 기록일 것이다. 저자는 스님의 말씀을 모두 녹화한 후, 녹음내용을 기록했다고 한다.
 
여기에 각 장의 서두에는 글을 엮은 저자의 경험과 감상이 때로는 일화로, 때로는 인상으로, 때로는 경구들로 담담하고 아름답게 펼쳐진다. 엮은이의 서정적인 필치에 덧붙여진 소박하고 정갈한 한 장 한 장의 사진들은 어렴풋이나마 스님의 맑고 투명한 세계를 접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사람은 어떤 묵은 데 갇혀 있으면 안된다. 꽃처럼 늘 새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그런데 우리가 일단 어딘가에 집착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안주하면 그 웅덩이에 갇히고 만다. 그러면 마치 고여 있는 물처럼 썩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 어디에 갇혀있는 것일까?’라고 자문하게 된다. 직장이라는 둘레에 또는 관계라는 둘레에 갇혀있는 것은 아닌지... 하루하루 편안한 잠자리와 남이 해준 밥을 먹고 매일 다람쥐처럼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건 아닌지...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한다. 꼭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고 따뜻한 말을 나눈다든가 눈매를 나눈다든가 일을 나눈다든가, 아니면 시간을 함께 나눈다든가, 함께 살고 있는 공동체와의 유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누는 기쁨이 없다면 사는 기쁨이 없다"
나는 누구와 어떤 것을 나눌 수 있을까... 매달 시민단체에 몇 만원, 봉사단체에 몇 만원과 같이 물질을 일부 나누면서 자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족과 직장, 가끔 만나는 가까운 선후배와 동료 이외에 나에게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관계가 있기나 한 걸까...
 
"온갖 욕망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사람은 비로소 온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다. .... 소유물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스스로를 우주적인 생명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맑은 가난, 곧 청빈이다. 청빈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기본적인 조건이다."
내안이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가...  소유물을 줄이는 것이 그 출발이라면 내가 그동안 소중하게 모아서 읽고 소감을 쓰고 있는 이 책들, 내가 가장 집착을 보이는 이 책들부터 줄여야할텐데,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필요에 따라 살되 욕망에 따라 살지는 말아야 한다. 욕망과 필요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욕망은 분수 밖의 바람이고, 필요는 생활의 기본 조건이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당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가슴 뜨끔한 말씀이다. 펜도 하나면 되고 가방도 하나면 되고 안경도 하나면 되고 신발도 하나면 될 것이다. 몇 개씩 가지고 있어봐야 결국 필요한 상황에서는 하나 밖에 사용할 수 없다. 많이 줄이고 버리고 주었지만 더 줄여야 하겠지...
 
"세상이 달리지기를 바란다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이 달라져야 한다. 내 자신부터 달라져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모습이 달라져야 한다. 그래야만 세상이 달라진다. 내 자신이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들으면, 헨리 데이비드 소로도 생각나고 사티시 쿠마르도 생각나고 ’나무를 심은 사람’도 생각나고 박노해시인도 생각나다. 그들 모두 동일한 이야기를 했고 모두가 말에 앞서 실천을 한 사람들이다.
나는 세상이 달라지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나부터 달라지고자 노력할 것이다. 먼저 소유물들을 하나씩 버리고 과도한 음식과 수면을 줄여나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횟수도 점점 늘릴 것이다. 미워하기 보다 용서하고 나무라기 보다 이해하고 찾아오기 바라기보다 찾아갈 것이다. 말하기 보다 듣고 뛰기보다 걷고 분노하기 보다 공감할 것이다...
 
"나는 이 절이 부유해지거나 화려해지거나 번잡한 행사들을 벌여 나간다면 아무 미련없이 이 절을 떠날 것이다. 나는 이 절이 소박하고 가난한 절이 되기를 바란다."
성북동 길상사의 창건주이자 회주이면서도 길상사 창건 후 첫 법회에서 법정스님은 평소와 같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설 연휴 기간에 처음 길상사를 갔었다. 스님의 말씀과 달리 건물들이 제법 있어 보였지만, 그래도 조용하고 수도하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지난 달 구례 화엄사를 갔을 때 느꼈던 번잡함과 화려함과 욕심이 떠오르면서 길상사와 비교되었다.
 
"무한경쟁이라니... 사람이 어떻게 무한히, 끝없이 경쟁만 할 수 있는가. 그런 구호에 속아서는 안 된다. 어떻게 경쟁만 하고 살 수 있는가. 물론 삶의 요소에 경쟁도 있지만 경쟁하지 않고 사는 그런 경우도 있다. 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니, 우리는 일류가 아니다. 나 자신도 일류가 아니다. 삼류 사류도 있고 아류로도 살고 있다. 다들 살아남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기억한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우리는 성적의 차이를 떠나서, 빈부의 차이를 떠나서 사이좋고 우정으로 지내왔다. 지금도 그 친구들과는 성적이나 실력, 빈부나 직급과 상관없이 지낼 수 있다. 다만, 정부와 기업이, 언론과 무식한 식자층들이 우리들을 선동하는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끌려다니고 내몰리는 대기업의 선후배와 친구들, 공무원들과 교육자들, 사업하는 사람들...  

<아름다운 마무리>와 <산방한담>,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오두막 편지>에 이어 법정스님의 저서를 다섯 번째로 읽었다.
 
* 책 속의 문장
- 텅 비워야 그 안에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텅 비어야 거기 새로운 것이 들어찬다. 우리는 비울 줄을 모르고 가진 것에 집착한다. 텅 비어야 새것이 들어찬다. 모든 것을 포기할 때, 한 생각을 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진정으로 거기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다 텅 비었을 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이다. 텅 비어 있을 때,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텅 비었을 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극락이다. (p.42)

-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욕망을 충족시키는 삶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한때일 뿐이다. 욕망은 새로운 자극으로 더 큰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욕망을 채워 가는 삶은 결코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없다. 가치 있는 삶이란 의미를 채우는 삶이다. 그리고 내게 허락된 인생이, 내 삶의 잔고가 어디쯤에 왔는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스스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거듭거듭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처럼 그렇게 살 수 있어야 한다. (p.102)

- 종교는 한마디로 사랑의 실천이다.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일이다. 보살행, 자비행은 깨달은 후에 오는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 하루하루 익혀 가는 정진이다. 하루하루 한 달 한 달 쌓은 행의 축적이 마침내는 깨달음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몰랐던 것을 아는 것, 이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본래 자기 마음 가운데 있는 꽃씨를 일상적인 행을 통해서 가꾸어 나가면 그것이 시절인연을 만나 꽃피고 열매 맺는 것, 이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다. (p.110)
 
[ 2011년 2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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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덫
장하준 지음 / 부키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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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장하준교수의 인연(물론 개인적인 친분이 아니라 책과의 인연..)은 2008년 8월 삼청동의 어느 북카페에서 시작되었다. 누군가와 약속이 있었고 잠깐 짬이 나는 사이 우연히 책꽂이에서 뽑아든 <나쁜 사마리아인들> 몇 쪽을 읽게 되었다. 북카페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기에 제목만 적어놓고 돌아와 저녁에 인터넷을 책과 저자를 검색하였다. 그렇게 시작되어 2009년까지 장하준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부터 <사다리 걷어차기>, <쾌도난마 한국경제>를 읽었고, 작년에 <국가의 역할>을, 그리고 2011년에 들어 이 책 <개혁의 덫>과 신작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읽었다. 이 책은 대학 동기가 선물해준 것이다.(작년까지만 해도 저자의 책 한두 권 정도는 읽지 않고 넘어가도 괜찮지 않겠냐 - 더군다나 이 책은 2004년 작이다 - 고 생각하였는데, 저자의 신작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새로 읽으려고 마음 먹으니 아무래도 꺼림칙하여 먼저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은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격변 과정을 지켜보면서 저자가 신문, 잡지, 그리고 인터넷 매체에 실었던 글과 인터뷰를 모은 것이다.
 
책을 펼쳐들고 나서 ’읽기를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이 책을 처음 발간한 것이 2004년 8월이다. 당시 상황은 고노무현 전대통령이 집권 2년차에 접어들었고 탄핵정국으로 안정적인 국회의석을 확보한 상태에서 한-미 FTA 등 산적한 경제현안에 대해 사회적인 논의가 무성했던 시기였다. FTA는 전임 고김대중 대통령 임기 때부터 추진했던 정책이고 노무현정부 역시 시민사회단체와 여러 교수,전문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미 FTA를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저자는 그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와 ’개혁’의 허울, 신흥경제국의 적합한 경제정책 등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던 것이다.
 
6년이 지난 후 결과로만 보면, 저자의 지적과 비판, 예상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 현재의 경제 위기(이명박정권과 보수언론은 위기라고 인정하지 않지만...)는 우리가 자초한 측면이 강하다. 그리고 저자가 제시하는 경제정책 방향이 수 년간 정부와 정치권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위기는 더 심각해질 것이다. ’개혁’에 대해 진보세력도, 시민단체도, 일반인들도 여전히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대안과 정책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에 이 책은 아직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2004년에 한국사회와 경제에 대해 총체적으로 접근하면서 의견을 피력한다. 2004년의 한국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경제라는 변수 외에 정치라는 변수에,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변수까지 한꺼번에 해결해야만 했다. 당시 한국 경제가 ‘개혁’이라는 ‘덫’에 걸린 상태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게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정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97년 개혁론자들(김대중정부와 민주당, 진보세력)은 ‘개혁’을 내걸고 집권했다. 따라서 그들은 과거의 부정적 유산, 특히 권위적,폭압적 정권의 제도 및 정책과 절연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에 따른 적절한 대안을 세우지 못하였고 상당히 무의식적으로, 맹목적으로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물론, IMF 구제금융에 따라 IMF와 IBRD, 그리고 그들의 배후인 미국의 요구와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음을 인정하더라도 김대중정부, 그리고 진보세력이 주체적인 장단기 정책과 계획이 없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겉으로 신자유주의는 과거와는 정반대의 방식이였다. 시장 중심적 접근 방식은 개발연대의 정부 개입적 접근 방식과는 판이하게 다르며, 그 골치 아픈 재벌 문제에 대해서도 신자유주의는 나름대로 해법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였다. 투명 경영, 주주 자본주의를 통해 가공 자본의 창출에 의한 1인 소유 및 문어발식 확장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개혁론자들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김대중정부의 개혁의 결과가 무엇인가?
우선 ’투자가 붕괴’하였다. 그리고 그에 따라 ’실업난’이 이어졌다. ’청년 실업’이 국가적 고민으로 떠오르고, 구조 조정 과정에서 물러난 중년층 실업자들은 노동 시장에서 일찌감치 퇴출되거나 소자본 자영업을 하다가 파산하는 처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 속에서 소비 위축을 극복하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짜낸 소비 진작 정책은 ’신용 불량자’만 양산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경기 침체를 가중시킨 것은 물론 가정 파괴 등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 또 노동 시장을 유연화한다고 ’비정규직’을 늘린 탓에 노동자 간 임금 격차는 커졌다. 반면 주식 시장의 힘이 커지면서 주주들의 영향력이 강해진 결과 기업들의 ’배당률’은 2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그 결과 기업들의 이익이 과거와 같이 재투자를 통해 일자리를 늘리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 대체로 상류층에 속하는 - 주주들 몫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와 같은 한국의 경제 상황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절대 ’빈곤층’의 급증이다. 외환 위기 이후 절대 빈곤층은 국민의 5.9%에서 11.5%로 두 배 이상 늘어났다. 과거 국제적 기준에서 볼 때 평등한 수준에 속하던 우리나라의 소득 분배가 이제는 OECD 국가 중 멕시코, 미국 다음으로 불평등하게 되었고, 자칫 잘못하면 미국을 제치고 멕시코 등 남미 국가의 대열에 끼게 되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이다. 저자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개혁이냐’고 묻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개혁론자들은 진보를 표방했다. 진보는 약자에 대한 배려를 상징한다. 그런데 현재의 개혁은 약자를 보호하기는커녕 약육강식의 시장으로 몰아내고 있다. ‘개혁’이라는 단어에 사로잡혀 과거와의 절연만을 서두른 결과 당초 의도와는 정반대되는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2004년 전후의 한국이 현재의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했다. 과거 경제 성장기에 채택했던 경제 정책을 다시 채택하면 된다. 문제점만 수정한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말이다. 그에 대해 쏟아지는 무수한 반론의 요지는 한 가지, 그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쓴 것은 바로 그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책은 그게 말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대단히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경제학적으로, 경제사적으로 제시한다.

그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지은이가 던지는 도발적인 질문 하나에 답해야 한다. ’과거의 우리 경제가 과연 무엇이 그렇게 잘못되었느냐’는 질문이다.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선진국들의 소득이 2배가 되는데 70년 정도의 세월이 필요했다. 반면 1960년대부터 1997년 외환 위기 때까지 우리나라의 평균 경제 성장률은 6% 가량으로, 40여 년이 지나면 소득이 8배가 되는 엄청난 성장을 구가했다. 물론 이런 성장률 하나만으로 우리의 개발연대를 무조건 미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1960년대 초반만 해도 1인당 소득이 가나의 반이 채 안 되고, 아르헨티나의 5분의 1밖에 안 되던 나라, 텅스텐·생선·해조류 등 1차 산품이 주요 수출 품목이었던 나라가 이제 가나의 30배, 아르헨티나의 2배 가량 되는 소득에, 반도체·자동차·철강·조선 등의 분야에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수출국임을 자랑하게 되었다. 그런 속에서도 소득 분배가 어느 정도 평등한 수준을 유지하면서 국민 전반의 생활이 향상되었다. 저자는 그와 같은 성과는 제대로 평가해 줘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재벌 문제에 있어, 재벌들의 체질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저자 역시 아무런 이의가 없다. 다만 ‘재벌 = 공공의 적’이라는 무모한 일반화에 대해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반박할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재벌 비판의 요지는 몇 가지로 요약된다. 과다한 차입 경영, 무분별한 다각화, 피라미드식 출자 등의 ‘부당한’ 수단을 통한 ‘가공 자본’의 창출 등에 기초한 기형적인 기업 구조라는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이런 인식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비율로 따져 볼 때 우리 기업들은 선진국 기업들보다 더 많은 자금을 주식 시장을 통해 동원했다고 한다.(이 반론은 문제의 본질을 흐린 것. 저자는 차입경영이 문제가 아니라는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또 350~400%라는 우리 기업들의 부채 비율이 병적으로 높은 것이라 생각하지만, 고도 성장기 일본이나 1980년대 유럽과 비교하면 그렇지도 않다고 한다.
 
이 책은 끝까지 이런 식의 반박이 거듭되면서 거의 모든 경제 문제를 다룬다. 세계화나 금융 허브, FTA 협정, 서비스업 육성,  인플레이션 문제, 정치 논리의 개입의 필요성, 다국적 기업의 존재 여부 등에 대한 설명을 읽다 보면 과거 경제 성장 정책을 수정하여 재도입함으로써 경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개혁론자들이 자신이 주장하던 개혁과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흑백논리’라는 느낌이 든다. 물론, 과거의 성장정책(결국 몇 가지 박정희식 핵심 경제정책을 이야기함)이 자칫 잘못하면 진보세력의 존재 기반을 무너뜨릴 수도 있고(그래서 격렬한 반대도 있을 수 있다.) 한국경제를 회복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하는 것은 한국의 진보세력과 시민들의 정치사회 의식수준을 너무 얕본 것이다. 우리에게는 과거에 누가 했느냐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 어떤 것이 더 국민을 위한 최적의 정책이 될 것인가, 10년이나 50년 후를 바라볼 때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 책 속의 문장
- 1997년의 외환위기는 지나친 정부개인 때문이 아니라 금융규제의 미비 등 지나친 자유방임 정책 때문에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 미국 MIT대학의 폴 크루그먼 교수는... 아시아 경제위기는 국내적 제도의 결함보다는 세계 자본시장의 불안정성과 국내 금융규제의 미비에서 찾아야 한다고 받아들인다.(1999. 12 / 한국일보 / p.26)

- 우리가 흔히 선진경제라고 하면 연상하는 주주 지상주의, 자유방임주의 그리고 작은정부를 이상으로 삼는 미국식 자본주의는 전체 선진국을 기준으로 볼 때 오히려 예외적인 것이다.(1999. 4 / 한국일보 / p.128)

- 결론적으로 말해 주주 자본주의의 추구는 기업의 장기적 발전에 좋지 않다. 대부분의 주주들이 기업의 장기적 성공에 따른 이익보다 단기적 배당이나 주가 차액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주 이익의 추구가 과연 국민 경제 전체에 득이 되느냐는 점이다.(월간 ’말’ / 2003. 6 / p.161)

- 경제성장의 저하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정책의 필연적 결과이다. 자본 자유화는 투기 자본의 이동을 활발하게 하여 경젱환경을 불안하게 만들며 투자를 저하시킨다. 아울러 규제 완화로 말미암아 투기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면서 생산적인 투자가 줄어든다. 그 결과 야기되는 투자 축소는 고용감소와 수요위축을 불러오게 되고, 수요 위축은 다시 투자 축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일어나게 된다. (동아일보 / 2003. 7 / p.175)

- 진정으로 이공계에 우수 인력을 끌어들이려면 투자를 가로막는 제도와 정책을 고쳐 제조업에 다시 활력을 불어 넣고 노동 시장 유연화를 빙자한 고용의 불안정성을 시정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이공계 일자리가 장래성 있고, 안정적인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있다는 확신을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심어주지 않으면 이공계 기피현상은 지속될 것이다. (동아일보 / 2003. 11 / p.208)
 
[ 2011년 2월 1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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