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 선언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김예슬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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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카이스트 대학의 학생이 2011년 들어 세 번째 자살하면서 카이스트 학교 운여정책 뿐 아니라 대학 운영방식과 대학의 존재양식, 신자유주의식 무한경쟁 등에 대해 많은 논란과 비판이 진행된 바 있다. 하지만 이미 1년 전에 우리는 한국의 대학의 존재와 시스템에 대해 심각한 문제제기를 들었다.
 
작년(2010년) 3월 초순경 인터넷에서 김예슬(당시 고려대 경영대 3학년)의 대자보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고 대자본 전문을 읽고 그 내용에 크게 공감하여 가까운 지인들에게 대자보 내용을 전달하기도 했다. 당시 '대학 거부 선언'은 한국사회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대자보가 붙은 다음 날부터 MBC 9시 뉴스와 경향신문 1면, 여러 방송 및 칼럼을 통해 보도 되었고 각조 인터넷 포털의 메인에 떠올랐다. 블로그와 트위터를 통해 빠르게 번져나갔고 전국에서 그 사건에 대해 때론 떠들석하게, 때론 조용하게 논의가 이루어지고 이야기들이 퍼져나갔다. 나 역시 겉으로만 느끼고 생각했던 21세기 한국의 대학 현실이 절망의 벼랑 끝에 처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김예슬씨의 대학 거부 선언은 많은 이들에게 삶과 대학, 공부와 꿈, 젊음과 행복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물론, 그녀의 이야기처럼 그렇다고 하여 국가, 사회, 대학에 큰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탑은 끄덕 없을 것이다.") 대신 자그마한 소규모 움직은 많이 일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대자보 게시 며칠 후 개설된 다음 커뮤니티 ‘김예슬 선언’은 한 달여간 3,000여명의 회원을 모았고, ‘고대 자퇴녀’ 김예슬에 대한 다양한 지지선언과 의견이 오갔다. 이 카페의 주요 게시글이 이전까지 ‘고등학생, 주부, 대학생, 직장인’들의 ‘김예슬 지지와 공감 선언’에 그쳤던 데 반하여, 몇 개월 후부터는 다양한 오프라인 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대자보의 내용은 한국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처절하게 말하고 있었다.
끝도 없는 무한 경쟁의 수렁, 그 속에 무력하게 놓여진 학생과 청년들, 학생과 학부모를 쥐어짜는 대학 장사꾼들과 그 하수인들, 재벌과 보수언론의 노예가 되어버린 국가, 교육과 지혜를 잃어버린 교수... 한 때 나 역시 80년대의 인식과 경험으로 파편화되고 흩어져버려 어떻게 해야할 지, 무엇을 해야할 지 생각마저 굳어져가는 대학생 개개인의 모습을 비난하고 비판하고만 말았다. 아직까지 그런 경향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현재 대학과 대학생의 절망이 개인들의 문제 이전에 구조와 제도의 문제, 선배들과 기성세대의 문제, 정부당국자와 재벌과 사학재단과 교수들의 문제라는 것은 명확하게 각인된 상태다.
 
당시 무기력하고도 게을렀던 내가 한 일은 고작 지인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고 다음 미디어 오늘과 여러 언론 사이트를 찾아 다니며 김예슬씨의 대학거부에 대해 지지와 공감을 표시하는 정도였다. 그렇게 김예슬이라는 이름과 대학에 대한 고민은 또 다른 많은 문제들과 섞여 기억의 창고 속에 들어갔다. 그러던 작년 12월, 박노해시인의 신작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통해 알게된 [나눔문화]를 통해 김예슬과 마주치게 되었다. [나눔문화] 홈페이지(www.nanum.com)를 살펴보다가 김예슬씨가 나눔문화 내 조직인 '대학생나눔문화' 소속이었고 작년 3월 이후 자신의 대학 거부선언에 대한 자세한 심경과 보충설명이 담겨있는 이 책을 발간했음을 알았다.
 
올해 1월에 나눔문화에 회원으로 가입하고 나눔문화에서 발간한 다른 책들, <여기에는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아요>, <아체는 너무 오래 울고 있다>, <나는 반대한다>과 함께 이 책을 구입했고 내 나름대로 순서에 의해 다른 책들을 먼저 읽었다.
 
이 책은 저자가 대자보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신이 끝내 놓을 수 없었던, 스스로에게 던져 왔던 삶의 수 많은 물음들에 대한 자신의 대답을 꺼내놓은 것이다. 자신의 '대학 거부 선언'이 끝이 아니라 기나긴 싸움의 시작일 뿐임을...
 
1부. [나의 이야기]에서 저자는 자신이 그동안 '세계 최장의 학습노동'을 성실하게 수행하여 '25년 동안 우수한 경주마'로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자신의 삶과 꿈에 대해 항상 고민해오던 저자는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이후 세 번 울고나서 서서히 결심을 굳혔다. 그 세 가지는 2005년 삼성 이건희 회장이 고려대 100주년 기념관 건설에 400억원을 기부하고 명예박사학위를 받으러 왔을 때 학생들이 반대시위를 하여 출교당한 사건, 2006년 미국과 이스라엘이 중동 패권과 석유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 강대국의 불의한 전쟁에 침묵한 '글로벌 코리아'를 느꼈을 때, 그리고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뉴욕에서 "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CEO다"라고 말한 것을 신문에서 읽었을 때이다. 한 마디로 자신이 "'진리'는 학점에 팔아 넘겼고 '자유'는 두려움에 팔아 넘겼으며, '정의'는 이익에 팔아 넘겼다"음을 느낀 것이다.
 
2부. [나의 적들의 이야기]에서 저자는 헛된 희망의 말들로 오염된 꿈을 조장하는 적의 실체로 ‘인간을 잡아먹는 시장’, ‘자격증 장사 브로커 대학’, ‘배움을 독점한 국가’를 지목한다. 그리고 그 동안의 수많은 진보 담론과 20대 담론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래디컬한가?’라고 묻는다.
 
3부. [거짓 희망에 맞서다]에서 저자는 “G세대 모두가 김연아처럼 빛날 수는 없다.”라고 선언한다. 저자가 책에서 가장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런 부분이 아닐까. “꿈을 물어보면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들 직업을 대답한 것을 보며 맥이 빠지고 슬펐다”며 ‘꿈의 살해’를 집중적으로 논했다. “단 하나를 위해 경쟁하는 꿈, 실용적인 꿈, 주어진 꿈, 오염된 꿈은 너무 금세 폐기처분되어 버린다”며 ‘내가 뭘 잘하는지, 하고 싶은 일이 뭔지를 먼저 찾으려고 애쓰기보다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사는 게 인간다운 삶인지, 어떻게 살면 진정한 내가 될 수 있는지를 먼저 찾아가자“고 주문하기도 한다.

저자는 수많은 아이들과 부모들이 온 삶을 바쳐서 이뤄낸 ‘대학 가는 꿈’의 결과는 ‘무직, 무지, 무능’의 3무(無)이고, 시장·대학·국가라는 ‘억압의 삼각 동맹’이 만들어낸 최종의 인간상은 ‘소비자’일 뿐이라며, 청년들에게 꿈도 열정도 도전의지도 없다는 말은 이런 현실구조를 은폐한 떠넘기기에 다름 아니라고 통렬히 비판한다. 나아가 저자는 경쟁과 소비의 악순환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대졸자 주류 사회, 의무교육과 자격증 유일 잣대 시스템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이 시대의 모든 부모님들을 향해 ‘사랑의 이름’으로 아이를 길들이며 자율성의 날개를 꺾지 말아 달라고. ‘좋은 부모’가 되려 하지 말고 당신의 ‘좋은 삶’을 살아 달라고, 간절한 편지를 남긴다.
 
4부. [저항하지 않으면 젊음이 아니다]에서 저자는 박노해 시인의 시를 인용하면서 친구들에게 자신을 되찾고 직업이 아닌 진정한 꿈을 새롭게 꿀 것을 제안한다. "억압 받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다. 상처 받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저항하지 않으면 젊음이 아니다"

실제 '김예슬 대자보'에 대한 여러 반대 의견("명문대 중퇴가 보통대 졸업보다 훨씬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도 존재한다. 특히 '대학 서열화'가 굳어져가고 있음에 따라 SKY 이외의 대학생들은 대자보이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현실적인 대안이 없음에 또 다시 슬퍼하고 분노한다.
 
대학의 문제는 그 자체로도 심각하지만, 한국사회의 모순이 모두 얽혀있는 곳이기도 하다. 상업화된 한국의 대학 시스템은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지식과 인력도 배출하지 못할 뿐더러 젊은이들의 창조성과 자발성마저 말살하고 있다. 대학의 운영과 시스템은 그대로 초-중-고등학교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현재와 같은 대학입시제도는 초-중-고 학생들이 세계 최장 학습 시간을 강요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사교육비를 부모들에게 강제한다. 20년 전에만 해도 소득 불균등과 사회적 지위의 불균등을 해소해주던 교육시스템은 점점 빈부격차와 사회적 지위 격차를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더니 21세기 들어서 학부모와 학생들을 지옥으로 몰아넣고 있다.
 
한국의 대학 숫자는 OECD에서 최고 수준이지만, 한국의 대학은 이명박 정권이나 보수언론, 사립대학들이 모두 좋아하는 '경쟁력'이 OECD에서 최하위 수준이다. 대학교육에 대한 공공성, 학생 당 교수 수, 사학재단의 전입금은 역시 OECD 최하위 수준이고 등록금 수준, 학교 운영의 부실화, 대학비리는 당연히 최고 수준이다.
 
대학을 거부하고 자퇴하는 것이 모든 대학생들이 취해야 할 선택은 아니겠지만 김예슬씨가 대학을 거부하면서 던진 질문과 문제제기는 우리 모두가 안아야 할 숙제가 되었다. 우리의 아이들이 지금과 같은 교육 시스템과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 김예슬 사회적 저항으로의 자퇴 대자보 전체 원문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아니, 거부한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
그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과
좌절감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그 20대의 한 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남은 믿음으로.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지만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는 25년 동안 경주마처럼 길고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우수한 경주마로, 함께 트랙을 질주하는
무수한 친구들을 제치고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달려가는 친구들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소위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나를 채찍질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 서서 이 경주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우월하고
또 다른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무력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 질주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이제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앞서 간다 해도 영원히 초원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트랙임을.

이제 나의 적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 또한 나의 적이지만 나만의 적은 아닐 것이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임을 마주하고 있다.
대학은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가 되어 내 이마에 바코드를 새긴다.

국가는 다시 대학의 하청업체가 되어,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12년간 규격화된 인간제품을 만들어 올려 보낸다.
기업은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피라미드 위쪽에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
이 변화 빠른 시대에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전문과정에 돌입한다.
고비용 저수익의 악순환은 영영 끝나지 않는다.
'세계를 무대로 너의 능력만큼 자유하리라'는
세계화, 민주화, 개인화의 넘치는 자유의 시대는 곧 자격증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졸업장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격증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학습된 두려움과 불안은 다시 우리를 그 앞에 무릎 꿇린다.

생각할 틈도, 돌아볼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또 다른 거짓 희망이 날아든다.
교육이 문제다, 대학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생각 있는 이들조차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공해서 세상을 바꾸는 '룰러'가 되어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너희의 권리를 주장해. 짱돌이라도 들고 나서!”
그리고 칼날처럼 덧붙여지는 한 줄,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없는 대학에서,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었다.
우정도 낭만도 사제간의 믿음도 찾을 수 없었다.
가장 순수한 시절 불의에 대한 저항도 꿈꿀 수 없었다.
아니, 이런 건 잊은 지 오래여도 좋다.
그런데 이 모두를 포기하고 바쳐 돌아온 결과는 정말 무엇이었는가.
우리들 20대는 끝없는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는
'적자세대'가 되어 부모 앞에 죄송하다.

젊은 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 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고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이대로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우리 젊음이 서글프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리고 대학에서 답을 찾으라는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깊은 분노로.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유지자가 되었던 내 작은 탓을 묻는다.
깊은 슬픔으로.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을 용서받고,
경쟁에서 이기는 능력만을 키우며 나를 값비싼 상품으로 가공해온
내가 체제를 떠받치고 있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이 시대에 가장 위악한 것 중에 하나가 졸업장 인생인 나, 나 자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한번 다 꽃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 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자유의 대가로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삶의 목적인 삶 그 자체를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학비 마련을 위해 고된 노동을 하고 계신 부모님이 눈 앞을 가린다.
'죄송합니다, 이 때를 잃어버리면 평생 나를 찾지 못하고 살 것만 같습니다.'
많은 말들을 눈물로 삼키며 봄이 오는 하늘을 향해 깊고 크게 숨을 쉰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덕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2010년 3월 10일 김예슬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자퇴하며..."
 
[ 2011년 5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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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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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 리영희선생과 처음 대면한 것은 그분의 책을 통해서였다.
대학 2학년 때인 1986년, 어느 선배가 <전환시대의 논리>를 빌려주어 읽게 되었다.
나는 이미 대학 1학년 시절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태백산맥 1,2,3>과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통해서 내가 20년간 듣고 배우던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기존 지식과 고정관념이 깨지기 시작했다.
<전환시대의 논리>는 중국혁명과 베트남 공산화,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모습, 일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한마디로 ’발상의 대전환’이었고 ’대오각성’ 그 자체였다.
그 뒤 <우상과 이성>을 또 읽게 되었고 그 당시 지독하게도 경멸해 마지 않던 기성세대, 교수, 지식인들을 대신하여 리영희선생은 나에게 ’본받고 싶은 어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대학 3학년, 4학년이 되면서 공부나 토론보다 집회와 시위가 잦아지고 서점을 비롯하여 나의 주변에는 수 많은 사상과 책들로 넘쳐나기 시작했고 나의 머리는 한 쪽으로 너무 빨리 굳어져 갔다.
그러면서 내 머리 속에서 그 분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으로서 책임져야 하는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선생의 이 말씀은 나에게도 뼈아프게 들린다.
나 뿐 만이 아닐 것이다.
스스로 참다운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유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분의 삶의 역정을 되돌아보면서 적어도 한 번쯤은 자신을 되돌아 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머리 속에서는 알고 있다.
남보다 많이 알고 많이 생각하는 만큼 실천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것 또한 안다.
 
리영희 선생은 고희를 맞이한 2000년 말 뇌출혈로 쓰러졌다.
뇌중추신경에 큰 손상을 입어 오른쪽 손과 다리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글을 쓰는 것이 곧 사회적 참여요 실천인 지식인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리영희 선생 본인도 ’지적 활동과 글쓰는 일’을 완전히 포기했다고 고백한다.
오른손의 마비로 저술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구술을 녹취해 원고지 2,700매 분량의 자서전을 만드는 일은 그의 초인적인 인내와 끈기로만 가능한 일이었다.
리영희 선생의 기억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되살려내는 일은 민족문제연구소장 임헌영 선생이 맡았다.
기획과 원고 구성에 대한 협의가 끝나고, 대담을 완성한 후 녹취한 구술을 풀어내 다듬고 보완해 초벌 원고를 만드는 데에만 2년이 걸렸다.
리영희의 전작을 비롯해 한국 근현대사의 모든 자료들을 연구해 대담을 준비한 임헌영 선생의 혼고의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질문 하나하나에 대해 수십 번씩 자료와 육필 원고, 사진 등을 찾아내 확인하고, 수십 년 전의 붕우들에게 때마다 연락을 취해 인명 하나까지 거짓 없이 전달하려 한 노학자의 모습은 존경을 넘어 벅찬 감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힘겹게 준비된 초벌원고에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꼭 부여잡고 한자 한자 교정을 보아 완성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은 그 자체로 한 편의 휴먼 드라마이다.
 
리영희선생이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참다운 지식인’이라고 말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이다.
그는 오직 한국 현대사의 온갖 질곡 앞에서 진실을 있는 그대로 글로 옮겼다.
그는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을 거치면서 모든 글쓰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할 이것, 온전한 진실을 써내려간다는 이 기본적이고도 충실한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다.
 
특히 이 책에는 해방 후 미군정기 남한사회의 혼탁상에서 625전쟁의 비극과 한국군의 실상, 419 혁명과 516 쿠테타, 1212 쿠테타와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최근 국내외 정세에까지 개인사의 기록을 넘어 한국 현대사의 소중한 증언으로 기억될 내용들이 가득하다.
푸에블로호 사건에서 1999년 서해교전까지 그의 엄정하고 예리한 분석은 여전히 무딘 우리의 역사인식을 벼린다.
625전쟁 당시 미군의 장교복을 끝까지 입지 않고 작업복만으로 군복무를 마친 일화를 두고 한국군의 정체성을 논하는 부분(173쪽), 박정희의 검은 안경을 통해 분석한 박정희 인물론, 박정희와 노무현이 미국 대통령을 대하는 태도를 비교하는 대목(280쪽) 등에서 자신의 경험을 날것으로 쉽게 일반화하지 않고 철저한 반성 속에서 녹여낸다.
한국 현대사의 주요 국면을 따라 풀어 놓는 그의 체험과 이야기는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이다.
선생의 어린시절과 일제 하의 성장과정, 분단과 전쟁 당시의 상황과 고민을 들어보는 것도 새롭고...
 
1970~80년대가 지나고 우리 사회가 최소한의 민주화를 거둔 1990년대 이후 리영희선생은 “내가 할 역할은 다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책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세상을 바란다고도 했다.
하지만 지식인으로서의 역할과 고통 앞에서 그가 보여준 정신의 크기는 왜 우리가 여전히 리영희를 읽어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은 리영희선생과 임헌영씨의 대화이지만, 리영희 선생은 독자들에게 또 다른 대화를 제안한다.
“이제는 거의 지나가버린 그 시대를 인간적 고통과 분노, 상처투성이의 온몸으로 부딪쳐 살아온 기성세대나, 앞 세대들이 심고 가꾼 열매를 권리처럼 여기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맛보고 있는 지금의 행복한 세대의 독자에게 부탁하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함께 고민하고 자신이 그 상황에 직면했거나 처했다면 ‘지식인’으로서 어떻게 가치판단을 하고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생각해보기를.
그럼으로써 이 자서전의 당사자와 대담자가 책 속에서 진행한 것과 같은 자기비판적 대화의 기회로 삼기를.
그리고 기회가 있으면 나와의 비판적 대화도 가질 수 있기를....”
 
이 책을, 그리고 50년 넘게 그 분이 남긴 저서들을 차분히 다시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분이 온몸으로 부딪혀서 깨우치고자 한 진실과 생각은 아직 이 사회에서 널리 퍼져있지 못하다.
우상은 여전히 다른 얼굴과 모습으로 전국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고 폭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 땅에서 자행되고 있다.
 
* 이 책은 지난 1월 11일 새해 첫 번째 공부모임의 부교재였다.(주교재는 <리영희평전>)

책 속의 문장
- (해방 이후 남한에서는) 경찰총감과 총경 30명 중의 25명(75%), 경감 139명 중 104명(75%), 경위 969명 중 806명(83%)가 일제에 충성을 바쳤던 자들이었다. 심지어 해방 후 15년이 지난 1960년에도 일제 경찰 전력자 총경의 비율이 70%, 경감이 40%, 경위가 15%였다. (p.81)
 
- 전쟁을 한 번 겪고 나면 모든 것이 무효로 돌아가고, 뒤틀리고, 깨어지고, 그리고 무(無)가 되어버리게 마련이에요. 전쟁의 전투현장에서 전개된 인간 비극보다 오히려 전선 뒤 인민대중의 생활과 그 사회의 구조적,기능적 틀이 겪는 파괴가 더욱 혹독하지요. 전쟁은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짓이에요. 전쟁은 무슨 이유나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고 합리화될 수 없어요. 통일을 가져온다 해도 나는 전쟁은 절대반대야.(p.170)
 
- 남한의 국가지도자들이라는 자들은 권력 장악과 몰락은 물론이고 집권기간 중 거의 모든 결정이 미국이라는 ’빅 브라더’의 손바닥에서 놀아온 것이오. 남한의 역대 권력자가 아무리 자기 딴에는 손오공과 같은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면서 날뛰어봐도 그 모든 그리고 낱낱의 행동은 미국 권력집단의 손바닥에서 노는 거예요. 그런 인식이 있으면 뒤에 숨어 농간을 부리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집권자들의 실태가 보이기 시작하지요.(p.260)
 
- 요컨대 박정희는 일제시대에는 천황 숭배자이면서 민족의 배반자였고, 해방이 되자 그 당시 남한의 사상적 주류였던 남로당에 재빨리 편승했는가 하면, 여수/순천 사건으로 형세가 불리해지자 자신의 사상과 충성을 맹세했던 남로당은 물론 자신의 책임으로 관리하고 있던 비밀당원의 명단까지 미국 군정에 팔아넘긴 자로서 철저한 기회주의자이고 변절자였지.(p.287)
 
- 박정희의 516 구테타에 앞서 1960년 케네디 대통령이 경제학 교수 월트 로스토를 백악관의 국가안보전략회의 고문, 대통령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합니다. 로스토 교수의 소위 [독재개발이론]과 [경제성장의 5단계 : 반공산주의선언(1958)]이 케네디의 후진 동맹국가 운영정책의 기둥으로 채택된 거요. 이는 바로 후진/미개발 사회에서의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친미국적 군부의 강력한 독재체제로 우선 사회적 통합과 안정을 실현한 후, 그 바탕 위에서 후진 사회의 부정부패를 척결/개혁하면서 경제건설과 정치적 안정을 달성하는 개발이론이지.(p.293) 
  
[ 2011년 1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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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2011년 독서모임의 첫 번째 교재였다.
독서모임 때문이 아니라도 지난 12월에 작고하신 고 리영희선생의 생애를 알기 위하여 이 책 이외에도 임헌영씨의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을 먼저 읽은 바 있다.
 
독서모임에서 한 사람의 생애에 대한 평전으로서의 이 책에 대한 평가는 별로였다.
고인에 대한 저자 자신의 평가 내용보다 고인의 기존 저서와 자서전 성격의 책과 글, 그리고 당사자의 이야기에 주로 의존한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저자가 평전을 쓰고 있는 와중에 갑작스럽게 고인이 위독하였고 고인이 살아계실 때 완성된 평전을 보여드리기 위하여 급하게 마무리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독서모임 논의 중에 고인에 대한 평전으로는 강준만교수가 펴낸 <리영희 -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가 추천되었다.)
 
내가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을 쓰기 보다는 어제 독서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를 정리하는 것이 나을 듯 하다.(생전에 고인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죄도 있고 해서...^^)
독서모임의 주된 이야기는 책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 독서모임 참가자들이 과거에 고인 및 고인의 저서와 맺게 된 사연을 회고하는 내용과 고인의 핵심적인 사상과 자세, 진실과 진리에 대한 탐구, 성장배경과 ’사상의 은사’로 불리게 된 과정 등이 중심이었다.
 
1. 평전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는 위에서 이야기한 바 있고
 
2. 고인의 태생적인 조건이 걸출한 저널리스트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고인은 이북, 그것도 이북의 변방 출신이었고 중등교육은 경성공업학교라는 조선인이 드문 학교를, 고등교육의 경우 해양대학이라는 마이너 대학이었으며 7년간이나 군대에 몸을 담았음에도 통역장교라는 군내 내 비주류 직책이었다.
그런 상황들이 한 편으로는 친일파와 주류에서, 해방 후 사상적 혼돈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구조와 배경이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해방 후 주류들이 득세한 언론계에서 자신이 언론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불굴의 노력과 치밀함을 잉태시켰다.
 
3. 그와 관련하여 시대적인 배경과 과정도 고인의 능력에 도움이 되었다.
고인은 1929년 생으로 일제에 의하여 본격적인 조선어 말살정책이 강행된 1940년대 초에 중등학교를 다니면서 일본어에 능통하게 되었고 이북 출신으로 경성에서 중등학교와 해양대학을 다니면서 학비가 부족하여 놀이와 사교보다 대부분의 개인시간을 학습과 영어공부에 투입한 것이 후에 한국전쟁 발발 후 통역장교로 복무하게 된 계기가 된다.
7년간의 통역장교 경험은 고인이 영어에 익숙하게 만들었고 언론사 국제부에 근무하게 되고 중국혁명에 관심을 가진 것들이 중국어와 불어까지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4개 외국어 실력은 고인이 친일파와 서울대 등 주류대학 출신들이 장악한 언론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함과 동시에 해외언론을 통해서 수많은 사실적인 정보를 취득할 수 있도록 하였고 외국인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 되었다.
 
4. 이과 전공, 주류와 권력에 대한 위기감, 진리추구의 열정이 한국현대사의 걸출한 언론인을 만들어내었다. 
고인은 중등교육(공업학교)과 고등교육(해양대학) 과정이 모두 이과였다.
일반적인 이과 교육과정이 그러하듯이 치밀하고 논리적인 교육내용이 어려서부터 부여된 천재적인 공부실력과 더해져 고인의 치밀한 논증과 이론의 기반이 되었고,
친일파와 주류들 속에서 비주류로서 자신의 지위와 역할을 높이기 위해, 이승만과 박정희라는 폭압전제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안위와 기사를 뒷받침하기 위해 고인은 더욱 더 근거와 사실에 입각한 기사를 작성할 수 밖에 없었다.
고인은 또 사교와 접대를 멀리하면서 남는 시간에, 자신의 시간을 전부 투입하여 수많은 고전과 이론서, 자료 등을 수집하고 공부하였다.
마지막으로 진실과 진리를 추구하기 위하여 성격적으로, 그리고 경쟁적으로 고인은 해외 언론의 보도내용과 해외에서 필요한 자료를 입수하여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으로 사건과 배경, 현황과 전망에 대해 당시 그 누구보다 정확하고 뛰어난 기사를 작성할 수 있었다.
이성과 진실, 진리에 대한 한결같은 열정이 전제권력으로부터 탄압을 받게 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고인은 자연스럽게 민주투사가 되었다.(9번의 체포, 5번의 재판, 4번의 징역)
 
5. 사상과 생활이 일치된 삶으로 일관하신 분이다.
7년간의 통역장교 시절부터 고인은 공과 사를 구분하고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잡기도 하나 없었음.)
언론계에 종사한 이후에도 끝까지 국제부 이외의 정치,사회부 등으로 옮기지 않아 향흥이나 접대, 금품을 수수하지 않아 언론계에 종사하면서도 가난하여 부친의 환갑잔치를 치르지 못한 것이 한이 될 정도였다.
고인은 50대에 넘어서서야 끓는 물이 자동으로 나오는 집에서 살게 되었다.
고인 스스로 지성인으로서의 책무를 삶의 최우선 가치로 삼아 살아오셨기 때문에 항상 가족의 가난과 고통에 마음 아파하셨다.
 
독서모임 참가자들은 모두 앞으로 오랜 기간 동안 고인과 같은 언론인, 그리고 지성인이 다시 이 땅에 나타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부디 고이 잠드소서...  

[ 2011년 1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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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박홍규 지음 / 필맥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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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시민의 불복종> 등과 함께 2011년 두 번째 공부모임 교재였다.
오늘 공부모임에서는 소로 및 소로의 저서와 관련되어 많은 의미있는 이야기와 논의가 있었다.
공부모임에서는 특히 개인과 개인의 자유에 대하여, 국가에 대하여, 불합리하고 부도덕한 권력에 대한 저항에 대하여, 저항의 근원적 이유와 방식에 대하여, 정치철학에 대하여, 소로의 영향에 대하여, 소로의 자유와 저항정신이 현대에 어떻게 이어지는지에 대하여, 21세기 한국의 현실에 비추어 비교에 대하여, 국가보안법과 국기에 대한 맹세에 대하여 모두가 공감하였다.
 
어떻게 보면 소로의 정신과 주장은 작금의 한국 현실에서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국민이기 이전에 인간"이어야 한다는 소로의 선언이 한국사회에 널리 퍼져야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저자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처음 접한 것은 1983년이었고 내가 처음 그를 접한 것은 2010년 가을이었다.
저자는 당시 유학하던 일본의 대학 교수를 통해 그를 접했고(저자는 그 교수의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나는 법정스님을 통해 그를 접했다(나는 법정스님의 삶과 글이 인상적이어서).
소로는 만45년 동안의 삶에서 남긴 것은 <월든>, <산책>, <시민저항>, <해방자>, <존 브라운 대장을 위한 변호>, <원칙없는 생활>, <메인 숲>, <낙엽>, <야생의 열매>, <씨앗의 확산> 등 수 십권의 책과 일기였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라는 인물을 속속들이, 그리고 전체적으로 이해하게 해준다.
그동안 여러 관련 서적들이 소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듯한 선입견을 주었다면, 저자는 남산 위에서 4대문 안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저자는 소로가 여러가지 문헌과 자료를 통해 한국에 소개될 때, 자연주의자나 자연애호자, 환경보호자나 '숲 속의 성자', 그리고 동식물연구가, 박물학자, 시인, 금욕주의자, 비폭력주의자로 불리우는 것을 정정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저자에게 소로가 성자이기는 커녕 반역자이고 성인은 커녕 무법자다.
소로는 그가 살던 당시에 불법이었던 노예의 탈출을 도왔고 국가가 노예를 해방시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납세를 거부했다가 감옥살이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부정(不正)한 국가나 정부에 대해서는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부정(不定)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돈에 미쳐 싸우는 짐승들'이 가득한 세상을 경멸하고 또한 부정했다.
그는 매우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았고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독신주의나 금욕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몇 번 연애를 하기도 했고 육식보다 채식을 좋아했지만 그것은 인간이 입고 먹는 것의 노예가 되면 자유를 상실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로는 당시 19세기였음에도 기계 같은 나날을 보내는 노동자의 삶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개탄하고 그런 기계같은 생활로부터 탈출하고자 했다.
그가 월든 호숫가에서 2년 넘게 살았던 것은 자연주의자로서나 환경보호자로서가 아니라 "'자발적 빈곤'이라고 부를 만한 고지에 오르지 않고서는 누구도 인간생활을 공정하고 현명하게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고 그런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콩코드 주민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또한, 스물 여덟 살에 세상을 떠나 숲 속 호숫가에 오두막을 직접 짓고 그곳에서 살면서 2년 동안 지낸 그것은 소로에게 본질적으로 '자기 탐구 여행'이었다.
하지만, 내가 작년 가을에 <월든>을 읽었을 때, 나는 소로를 단순히 자연주의자 그리고 생태주의자 정도로 이해하였다.
 
저자는 소로가 '반지성주의자'라고 단언한다.
소로는 당시의 일반인들의 삶과 전혀 동떨어진 방식으로 '자기 멋대로' 산 사람이며 노동의 타락을 개탄하고 국가의 권력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라고...
소로는 대학교육에 의해 형성되는 지성에 의문을 던지고 '삶의 예술'을 존중했다.
"오늘날 철학교수는 있지만 철학자는 없다."라는 말로 대별되는 그의 주장은 단지 19세기 미국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대학에 넘쳐나는 교수들 중에 몇 명이나 진정한 학자이고 예술가이고 지성인일까?
 
저자는 소로가 소비사회가 추구하는 욕망의 논리를 철저히 부정하고 최소한의 노동으로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만 갖추고 살면서 남는 시간은 자연을 관찰하고 독서를 하는 데 쓰며 지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소로는 진정한 독서인, 자연인, 학자였고 무엇보다 먼저 순수한 인간이었다고...
게다가 소로는 권력과 권위를 거부하거나 대체로 무시하며 살았지만, 노예제와 같이 정의롭지 못한 제도나 법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즉, 저자가 보기에 소로는 우리가 우러러봐야 할 위인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보통사람이자 우리의 친구다.
소로가 우리의 친구라 함은, 물질문명을 모두 거부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물질문명의 지배를 받게 되지 않을 정도로는 그것을 거부해야 힌간 본연의 순수함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소로는 하버드대학 출신의 자발적인 비정규직 노동자였고 자본주의에 대한 반항자이며 자유인이자 자연인이었다.
"법률을 존중하는 마음을 키우는 것보다 인권을 존중하는 마음을 키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나의 권리로 자신에게 스스로 부과하는 유일한 책임은 언제 어떤 경우라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집단 자체에는 양심이 없다는 말은 정말 옳다."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에 살았던 소로의 삶은 그 이후 마틴 루터 킹과 간디, 이반 일리히, 톨스토이,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게리 스나이더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처음 내가 <월든>을 읽었을 때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많이 혼란스럽고 복잡했다.
소로가 자연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반자본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저항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지금 되돌아보면 <월든> 안에는 <시민저항>이나 <산책> 등 그의 저서와 글에서 꾸준하게 거론되어온 내용들도 들어있다.
다만, 내가 사전에 소로에 대해 알지 못한 채 내 식대로 <월든>을 이해하려 했고 특정한 무언가를 책 속에서 찾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내용을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을 겪은 것이었다.(그것은 법정스님이 소개한 책이기 때문에 무소유나 소박한 삶이라는 관점에서만 내용을 읽으려 했던 것...)
<월든>을 읽으면서 어렴풋하게 이해했던 소로의 삶과 생각을 이 책을 통해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그는 지금의 내 나이에도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그는 삶은 지금의 나에게도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내가 인정하는 가장 매력적인 삶은 '일관성'과 '철학'인데 그는 그 두 가지를 모두 겸비했다.
과연 나는 앞으로 소로와 같은 삶의 자세와 태도, 행동방식을 취할 수 있을까 자문해 본다.
 
[ 2011. 01.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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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사회이야기
문태훈 지음 / 법문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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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난 4월 21일 [평화나눔아카데미]의 다섯 번째 강연에서 강사로 나온 윤순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부교수는 "기후변화시대, 그러나 재앙은 평등하지 않다"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진행하였다. 윤교수는 10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열심히 강연을 진행하였으며 수강생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상당히 많은 분량의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여 100분이라는 시간도 한참 모자랐다.
 
이 책은 윤교수의 강연을 듣기 전에 윤교수가 이전에 발간한 책을 찾다가 택한 것이다. 21일 강연에서 윤교수는 기후변화, 핵발전소, 생태운동, 에너지 문제, 세계적 불평등,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기에 수강생들이 미처 그 강연의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미리 이 책(그 전에 기후변화와 관련하여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도 먼저 읽었다)을 읽고서 강연에 참석하여 강연에서 생략하거나 건너뛴 숨은 이야기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미 20세기 후반기부터 전 세계의 수 많은 과학자들과 환경운동가들이 기후변화로 요약되는 지구의 환경상태가 극히 심각하고 위험한 상황임을 지적하고 경고해왔다. 이제 기후변화 문제는 과학자와 환경운동가 뿐 아니라 유엔(UN)에서도 특별하게 다루어지는 문제가 되었고 2007년 유엔환경계획(UNEP)이 발간한 ’지구환경전망보고서’는 "인간의 무분별한 경제활동으로 인해 현재 여섯 번째 멸종이 진행 중이며, 이는 곧 인간 자신의 멸망을 의미한다"고 경고한 바 있다.
 
실제로 지난 100년간 지구의 평균 기온은 섭씨 0.74도가 올랐으며, 해마다 200만 명이 대기오염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 남극 오존층의 파괴도 역대 최고 규모이며, 양서류의 30%, 포유류의 23%, 조류의 12%가 각각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이처럼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환경변화와 생명체의 위험한 상황을 고려할 때, 저자들은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성장궤도를 유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으로 전망한다. 이에 따라 전 세계 국가들이 새로운 환경 패러다임의 전환, 즉 ’지속가능한 발전’의 패러다임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결의한 바 있다.
 
한국은 2008년 세계경제포험에서 발표한 환경보전 순위가 149개국 중 37위이고 생태계 지속성 분야는 109위로 매우 취약한 상황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불균형 상태를 극복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달성하기 위해서 특별한 정책적, 제도적 차원의 노력이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이 책은 그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시작되어 책으로 발간된 것이다. 저자들은 분야별로 지속가능한 발전전략에 대한 각자 논문을 작성하는 방식으로 각 장을 구성하여 한 데 묶었다.
 
제1장. [조화로운 발전, 지속가능한 전략]에서 문태훈, 제2장. [상장과 환경: 지속가능한 사회로의 진화]에서 박순애와 이영미는 좋은 환경 거버넌스와 발전 전략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국은 이산화황 등 대기오염물질 배출, 하수 및 폐수처리설비, 폐기물처리에서 재활용율 등의 부분에 있어서는 다른 OECD 국가들과 비교할 때 높은 수준의 환경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역으로 OECD로부터 환경정책의 통합과 조정, 자연과 생물다양성 보존, 수질과 수량관리, 에너지와 자원사용의 효율성, 에너지와 교통부문계획, 국제환경협력, 토지이용에 따른 환경문제 등에 대해서는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받았다. 문제는 환경정책이 국가의 주요 정책과 전략이 아닌 일개 정부부처의 정책으로 격하되어 있어 환경정책의 집행에 있어 부서간 통합과 조정이 원만하게 이루지고 있지 않다.
 
문태훈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3S 전략을 제시한다. 3S란 강한 한국(Strong Korea), 지속가능한 한국(Sustainable Korea), 스마트 한국(Smart Korea)다. 세부적으로는 과학기술 발전과 인재양성, 사회복지시스템을 통한 국제경쟁력 강화, 환경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경제, 사회, 환경이 균형있게 발전, 낭비없고 합리적이며 효율적인 정책을 말한다.
 
1장과 2장을 통해 ’지속가능한 개발’에 대한 한국식 이론과 근거를 알 수 있었다. ’지속가능’과 ’개발’이 서로 어울리는, 함께 사용이 가능한 단어나 개념인지는 애매하지만 환경정책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방식으로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문태훈의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3S 전략’은 배경이나 이론적 근거가 미약해 보인다.
 
박순애와 이영미는 지속가능한 사회로의 진화를 위해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과 시장 메커니즘의 활용 등 다각적인 방식에 의한 환경규제정책이 기본 조건임을 확인한 후, 환경오염을 단순히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경제학적 인식이 사회전반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하며 이를 통해 세대 간, 세대 내 자원의 공평한 할당과 분배가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제3장.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협약]에서 조용성은 지구 온난화 문제 해결이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 전제임을 인식하고 기후변화협약과 온실가스 저감 방안을 다루고 있다. 온실가스 저감방안으로는 신,재생에너지 이용의 확대, 에너지 절약 및 효율성 제고, 온실가스 저감기술의 개발 및 보급, 탄소 흡수원의 확대 등을 제시한다.
 
한국이 ’선진국’이라는 명패를 위해 OECD에 가입하였고 경제규모로만 보아서는 10위권에 올라 있지만 국제무역 협상이나 환경규제와 관련한 국제협상에서는 항상 ’개발도상국’이라고 주장하는 아이러니가 다시 생각난다. 무모한 개발과 성장전략을 펼치면서 세계 전역에 상품을 수출하고 환경을 파괴하여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발돋움했으면서도 그에 걸맞는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 한국 정부의 모습은 ’저질러 놓은 결과만큼 책임지려 하지 않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본성을 보여준다.
 
제4장. [한국,중국,일본 간 환경 및 에너지 협력]에서 김정인은 환경, 에너지 분야에 있어 한국-중국-일본 간 상호협력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제도적 협력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정책 간 상호교류, 시범적인 에너지 협력 사업 시행, 기후변화협약에 대한 협력 추진을 제시하고 중장기 전략으로는 상호 에너지 저장 협력 제도 공동 도입, 수소 에너지에 대한 공동개발, 공동 지분 투자를 통한 KO-CH-JA 은행 설립 등을 제시한다.
 
저자와 기대와 달리 내 생각에는 환경과 에너지를 위한 한-중-일 협력관계가 싹트는 것은 상당히 오랜 기간 요원한 일이라 예상한다. 한국과 중국, 일본은 비슷한 동양문화권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사회,경제적으로 내용과 수준 면에서 격차가 크고 국민들 사이의 감정적인 대립이 상당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에 대한...
 
제5장.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지역에너지 자립]에서 윤순진과 이유진은 정부나 지역사회 혹은 주민 주도로 추진되고 있는 에너지 자립마을 사례연구를 통해 그 성과와 한계, 개선점 등을 제시하고 있다. 그동안 정부에서 진행한 ’살기좋은 지역만들기 국가지정 시범사업’이 취지와는 달리 관광사업이나 지역개발사업으로 전락하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검토, 분석한 후 살기좋은 마을에서 중요한 핵심요소 중 하나가 에너지를 자립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이어서 제주 동광빌리지, 광주 신효천마을, 홍성군 홍동면, 부안군 주산면 등 ’에너지 자립마을 만들기’ 사례를 통해 성과와 한계, 개선점을 제시했다.
 
5장을 통해서 한국에서 지역 단위의 에너지 자립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정부와 지자체가 미래사회에 대한 전략과 정책을 제대로 수립, 집행할 경우 국가적인 에너지 위기에 대한 대처 가능성도 높이고 환경과 생태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 중의 하나가 가동될 수 있을 것 같다.
 
제6장. [지속가능한 수자원 관리: 팔당 상수원 사례]에서 김성배는 팔당 상수원 사례를 통해 지역 규제의 타당성을 평가하고 지속가능한 수질관리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저자는 규제 개선방으로 지역별 규제정책의 차등화, 오염발생 행위별 규제의 차등화, 규제수단의 다양화, 다양한 방식의 매수제도 활성화 등을 제시한다.
 
제7장. [국토 난개발 방지를 위한 도시성장관리정책]에서 황희연은 개발과 보전을 동시에 고려한 통합적 국토개발에 주안점을 두고 그 세부 대책을 강구한다. 국토 난개발을 유발시키는 요인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분석한 후 도시성장관리제도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제8장. [보전과 개발이 함께 가는 국토환경계획]에서 김익수는 법, 정책, 인식 등 다양한 차원의 노력을 통해 환경 개선을 담보할 수 있는 국토환경계획이 수립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저자는 계획 수단과 프로그램으로 국토환경성평가제도의 강화, 생태 네트워크 도입, 도시 생태 네트워크의 구축을 제시한다.
 
7장과 8장은 개인적으로도 대학 전공과 연관된 분야라 관심있게 읽었다. 1960년대 이후 최근까지 정부와 관련하계의 주류에서 바라본 국토종합계획이 ’개발’ 중심인데다가 그 개발 마저 중장기 계획이 없는 ’마구잡이’ 개발이고 ’정치적’ 개발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저자들이 제시한 ’지속가능성’을 방향타로 하여 정부와 학계, 시민이 머리를 맛대어 국토환경계획의 지향점을 합의하고 중장기 계획을 수립, 집행하는 것은 미래 세대를 위한 중요한 일보가 될 것이다. 
 
1장에서 8장까지 대부분 저자들이 전개한 논의와 대안은 ’지속가능성’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학문적 공론화가 가능한 수준으로 보인다. 아직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하여 국내에 발간된 책을 찾아보지는 못했지만 저자들의 문제제기와 방향제시는 관련 주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에 충분한 수준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책의 발간이 ’지속가능성’에 대한 초보적인 논의를 촉발시키기 위한 것인지는 몰라도 각 장에서 저자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부분에 대한 사회적,역사적 배경이나 필요성, 현황과 제도에 대한 분석, 중요한 주장과 이론을 세우기 위한 근거, 이론의 도입과 전개 등이 부족함을 느낄 수 있다. 각 장에서 다루는 주제는 각각을 별권으로 확대하여 다루어야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지속가능성’에 대한 부문별 논의 전체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단락이 없는 관계로 각각의 장을 총괄적으로 바라볼 수 없도록 책이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쉽다. 경제와 환경, 기후변화와 에너지, 도시계획과 개발 등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서로 연결될 수 밖에 없고 각 부분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도입부에서든, 결론부에서든 전체적인 방향을 제시하든지, 문제제기를 종합시키는 시도가 필요하다.
 
[ 2011년 4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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