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사회 - 사회적 주체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
김상봉 지음 / 한길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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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기력을 바탕으로 한 20세 전후의 한 번의 시험으로 20세 이후 개인의 능력이 규정되어 버리는 사회. 이것이 바로 '학벌사회'의 한 단면이다. '학벌'이 독점적 지위와 구조로 자리잡고 대학서열체제의 기반으로 사회 전체를 규정함으로써 입시지옥과 사교육 광품의 근원을 형성하고 있다. 도대체 '학벌'이란 무엇이고 '학벌사회'란 무엇인가? 그 학문적, 철학적 기반은 무엇인가?
 
내가 지금껏 강준만, 김동훈, 김경근, 정진상 등이 출간한 학벌사회와 서울대 독점, 대학서열체제 등에 대한 책을 읽어보았지만 아직 학문적으로 그 근원을 헤집고 들어간 교수나 학자는 없었다. 김경근 교수가 <대학 서열 깨기>(개마고원, 1999)에서 '학벌'이 '재벌'과 비슷하게 한국 고유의 존재양식임을 주장했고, 김동훈 교수가 <대학이 망해야 나라가 산다>에서 '학벌'을 조선 후기 '문벌'에서 뿌리가 이어져 온 것이며 따라서 '학벌'이 한국사회를 '신분사회'로 기능토록 한다고 주장했지만 자신들의 주장을 학문적으로 접근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은 학벌과 학벌의식, 학벌사회에 대한 철학적 탐구 결과라 할 수 있다. '학벌'을 단순히 한국 고유의 사회적 특징이나 특수현상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 문제의 철학적, 학문적 뿌리까지 궁금한 사람들은 이 책에서 자신의 문제의식에 대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학벌'이 사회적 실체로서 존재함을 철학적으로 분석하여 개념을 규명한다. "학벌이 이렇게 공유된 학벌의식에 의해 결속된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어떤 지속성을 갖는 집단적 주체가 될 때, 이 주체는 사회 속에서 일정한 질량과 외연을 가지고 작용하는 사회적 실체가 된다." 그만큼 저자는 문제를 문제로서 인식하기 위해 '실체'로서 볼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학벌'이 통상 진보학계에서 근대 산업사회(자본주의사회)의 사회적 구조를 분석하는 틀인 '계급'이나 봉건적 사회구조인 '신분'과 일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한국사회의 구조적 실체라 주장한다.
 
"학벌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계급도 아니고 신분도 아니다. 학벌이 사회적 불평등의 기제인 한에서 우리는 그것을 계급이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한번 정해지면 다시 새로운 학벌을 얻지 않는 한, 변치 않는 것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계급과는 다르다. .... 이처럼 계급과 개인의 귀속관계는 본질적으로 우연적이며 유동적이다. 그러나 학벌은 다르다. 특정 학벌에 대한 귀속관계는 한번 정해지면 다른 학벌을 얻기 전까지는 결코 변하지 않는 영구적 관계이다. 학벌이 좋든 나쁘든 그것이 이처럼 개인의 변치않는 규정인 한에서 그것은 같은 사회적 차별의 기제라 하더라도 계급보다는 신분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학벌차별은 계급적 차별보다 훨씬 더 나쁘다. 계급과 달리 학벌은 한번 정해지면 변치 않는다. 한번 지배학벌에 속한 사람은 영원히 그 지배학벌에 속하며 한번 낙오한 사람은 영원히 피지배계급에 머무른다. 이처럼 학벌경쟁에는 이른바 패자부활전이 없다. 스무 살 전후 한 번의 경쟁에서 뒤처지면 영원한 노예의 낙인이 찍히는 사회가 한국이다. 이런 학벌의 고정성 때문에 학벌경쟁은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한 무한경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고, 이것이 온갖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다.
이처럼 학벌이 근대적 계급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봉건적 신분에 더 가까운 개인의 고정된 지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벌은 개인이 타고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자면 신분이라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굳이 학벌을 신분이라 말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후천적 신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학벌이 계급과 똑같지도 않고 신분과도 똑같이 않다는 것은 학벌문제가 한국사회 고유한 불평등 기제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학벌차별은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도 유사한 것을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사회 특유의 차별기제인 것이다."(p.123)
 
철학적 분석으로 들어가면 자못 심각해진다. 주체와 주체성, 홀로주체성과 서로주체성, 서로주체성과 사회적 주체성, 시민적 주체성, 공동주체성 등... 이런 철학적 개념으로 들어가면 조금 머리 아프긴 하다.ㅋ "이처럼 보편적 사유가 아니라 자기중심적 욕망을 매개로 형성된 '우리'의 집단의식 속에 진정한 주체성이 설 자리가 없다. 욕망이 그 자체로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유하지 않는 욕망은 굴레이다. 그때 욕망은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인간을 구속한다. 그런데 학벌은 처음부터 자기이익의 극대화 이외에는 아무런 보편적 이상도 담지할 수 엇는 왜곡된 공동주체이므로 참된 의미의 사유와 양립할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학벌과 자기를 긴밀하게 동일시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탐욕스러워지고 더 멍청해지며, 마지막에는 더 노예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노예적 정신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주는 학벌의식은 더 이상 깨어있는 사유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야수적 욕망과 모호한 감정일 뿐이다."(p.205)
 
저자는 '학벌'의 철학적 개념규정에 근거하여 '학벌의식'과 '학벌사회'를 설명하고, 학벌이기주의의 구체적인 실태와 학벌사회 및 학벌독점 문제가 결국 서울대의 문제라는 것을 밝힌다. 한국의 경우 '학벌'이 권력과 자본의 '공속'으로 진화하고 있고, 학벌이데올로기와 학벌독점의 사회문화가 어떻게 학벌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을 유지, 강화하는지 그 연관성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구체적으로 학벌사회가 공교육을 어떻게 파탄시키는지도 과목별로 예를 들어 설명한다. 전인교육도, 전문교육도 아닌 입시교육의 폐해는 학생들에게 '생각의 힘'을 말살시키고 '도덕'을 파탄시키며 공동체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한다. 문학, 음악, 미술 등 예술교육의 존재가치를 없애버려 아이들이 예술을 멀리하도록 만들고 인간성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움'에 대해 무능한 존재로 양육한다.
 
제목이 말해주듯 저자는 오랫동안 고착화되어온, 최고의 학벌을 얻기 위해 인류대학 진학만을 목표로 삼는 만연된 사회풍조를 가리켜 '학벌사회'라 규정한다. 그리고 심각한 교육문제의 근본 해결점을 철옹성 같기만 한 '학벌서열'의 타파에서 찾고 있다. 나아가 문제의 거점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학벌이자 명문 서울대에 문제의 방점을 찍는다. 이 책은 학벌문제에 대한 그 동안의 선행연구를 정리함은 물론, 구체적 통계자료들을 들어가며 사회 각 분야에서 일부 학벌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고 지배되는 현상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학벌문제로 상징되는 우리 교육문제의 실상을 폭넓게 연구한 본격적인 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교육의 이념을 새롭게 되새겨볼 뿐만 아니라 '대학과 전문대학의 혼성모방', '반수와 편입시험 몰두', '학문의 식민성' 등 학벌이 야기하는 대학교육의 위기를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서울대 학부폐지', '대학평준화 정책', '지역별 공직할당제' 등으로 대변되는 학벌타파의 구체적 대안들을 꼼꼼히 제시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 교육경쟁력의 강화는 무엇보다 국가의 부강과 직결되는 문제다. 우수한 인재를 선발해 최선을 다해 그들을 교육하고 사회 적재적소에 진출시킴으로써 우리 사회는 당당히 앞선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재력과 권력을 얻기 위한 맹목적 인류대 선호 심리와 서열 위주의 치열한 입시경쟁은 사회를 황폐하게 만들 뿐 국가경쟁력과는 역행한다. 사회로서는 개인 능력의 지표가 학벌 밖에 없는 현 상황을 타개해야 하고, 개인으로서는 다양한 삶의 선택을 볼 줄 아는 자기의식과 안목을 키워야 할 것이다. 대학은 자율화와 특성화 교육으로 고유의 경쟁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교육은 10년의 큰 계획이라 했던가. 정부는 하루아침에 피고지는 꽃처럼 단기성 정책을 남발하지 말고, 나무 한 그루를 심고 키우듯 앞을 내다보는 정책으로 정성을 들여야 할 것이다. 이 모든 일, 특히 학벌타파를 위한 대안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우리 각자가 교육문제에 관심을 갖고 작은 실천이라도 즉시 행할 때 가능한 일이다.
 
 
"애교심과 동문애가 진리에 대한 열정을 지양해버린 이런 나라에서 제대로 된 학문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런 나라에서 발전하는 것은 학벌이요, 죽어가는 것은 학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정이 어디 대학사회뿐이겠는가? 일과 뜻에 따라 모이지 못하고 학벌에 따라 뭉치고 헤어지는 씨족사회에서는 건강한 시민사회도 건강한 나라도 모두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 가족적 유대를 갈구한다. 그러나 확장된 현대사회에서 그것을 채워주는 것은 학벌 밖에 없다. 그리하여 학벌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 동문, 선후배를 찾아 결속하고 이를 통해 자기 이익을 도모한다. 그 결과 그들은 어떤 공동체에 들어가든 그것을 공동의 목표와 이념을 추구하는 통일된 공동체가 아니라 이기적인 학벌문중들의 각축장으로 해체해버린다. 그리하여 학교도, 회사도, 정당도, 정부도, 아니 각종 시민단체조차도 경쟁하는 학벌문중들의 불안정한 연립체로 전락한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학벌이란 우리나라 봉건적 가족주의가 현대적 옷을 입고 다시 불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흔히 학벌문제를 근대화의 불가피한 산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반만 맞고 반은 틀린 애기다. 문벌이 학벌로 탈바꿈한 것은 분명히 근대화의 산물이다. 그러나 문벌이든 학벌이든 그 형태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가족적 공동체라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전근대적인 공동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학벌체제를 타파하는 것은 차별과 불평등을 철폐하기 위한 일종의 계급투쟁일 뿐 아니라 동시에 우리의 전근대성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문화혁명이다."(p.217)
  
[ 2012년 7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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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학벌, 또 하나의 카스트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7
김동훈 지음 / 책세상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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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며칠 전 민주통합당이 우리사회의 가장 큰 현안 중 하나인 교육개혁을 위해 '국공립대 연합체제 개편'을 검토한다는 언론 기사에 대해 각계각층에서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은 지난 달 21일 국회에서 ‘대학서열화·학벌 타파를 위한 국립대학 체제 개편 토론회’를 개최해 학계와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을 수렴했다. 국립대학 체제 개편의 요지는 “기존의 서울대, 경북대, 전남대 등 국립대학을 하나의 연합체제로 묶어 강의와 학점, 교수의 교류를 자유롭게 허용하고, 졸업장도 공동으로 주자는 것”이다. 민주당은 국공립대 연합체제가 대학 서열화 완화와 입시 문제 해소, 고교 교육 정상화, 지역균형 발전, 대학경쟁력 강화 등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재 민주당 대선주자 가운데 손학규 상임고문이 ‘서울대와 거점 지방국립대의 공동학위제 실시’를, 조경태 의원이 ‘서울대 학부과정 폐지 및 대학원 중심대학화’를 공약으로 내놓은 바 있다.
요며칠 인터넷이나 SNS에는 찬반 양론이 거세다. 대부분 찬반 의견의 경우를 보면 대학서열화나 학벌 타파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에 근거하여 말하는 듯이 보인다. 또 다른 일부는 정파적인 의견을 보이기도 한다. 서울대 김 모 교수의 경우 국공립대 연합체제(안)은 '좌익 포퓰리즘'이라고 폄하하면서 자신의 더 실현불가능한 대안을 '원칙적'이라는 이유로 제시하기도 한다.
 
만약 민주당이 자세한 내부 연구와 검토 없이 섣부르게 '국공립대 연합체제 개편' 공약을 추진한다고 해서 이를 폄하하거나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의 그 공약을 추진하는 취지가 '대학서열화와 학벌의 타파'라면 그것을 반대할 이유는 없다. '국공립대 연합체제 개편(안)'이 본래 취지에서 부족하거나 위험한 부분이 있으면 광범위한 논의를 통해서 보완하고 더 적절한 방안으로 진화시키면 될 일이다. 강준만 교수가 제안한 '서울대 학부의 단계적 축소'도 검토하고 김경근 교수가 제시한 서울대와 국공립대의 역할별, 기능별 분화도 검토해야 한다.
12월 대선을 맞이하여 아주 오랜 만에 학벌 타파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시작되었다. 박근혜나 새누리당의 정책이나 공약을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들이야 워낙 겉으로는 어떤 사탕발림을 하더라도 결국 기존 불평등과 착취 구조를 강화시키는데 혈안이 된 작자들이라...ㅋ 하지만 민주당이나 소위 '진보진영' 내부에서 제시되는 다양한 정책대안과 제안들을 전국민적, 전사회적 논의로 확대하고 그 과정에서 학벌주의사회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얻으면서 현재 수준에서 서로 가능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낼 생각을 해야 한다. 상대방의 주장과 의견을 폄하하고 깔아 뭉개려는 자세나 태도는 다양한 논의를 가로막고 감정적인 논쟁으로 치닫을 우려가 있다.
 
내 생각에 대학서열화와 학벌 타파는 단순히 '교육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학벌주의사회'는 교육부분 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차별을 일으키고 불평등을 심화시키는데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학서열화와 학벌 타파는 단순히 교육부분과 관련한 정책을 고민해서는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정부부처와 공공기관에서는 제도적인 뒷받침을 통해 인사정책에서 학벌 차별 완화를 추진해야 하고 대기업 등에서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와 비슷한 인사정책을 추진해야 한다.(일본 전경련은 이미 그와 비슷한 정책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사법부와 입법부도 행정부의 정책 취지에 발맞추어야 하며 언론과 대학 등도 이에 발맞춰야 한다. 대학의 경우에는 모대학 출신의 교수 임용을 의식적으로 줄여야하며 특히 서울대와 국공립대는 제도적으로 이를 추진해야 한다. 교육부분에서도 자체적으로 대학서열화와 학벌 타파를 위해 점수로 서열을 매기는 수능이 아니라 자격고사 같은 대학입시제도를 도입해야 하고 '우수한 성적의 학생'을 선발하여 '우수한 대학(명문대)'이 되려는 쉽고 편안한 길이 아니라 대학 내부의 교수와 연구 경쟁력을 키우고 신입생 선발능력을 제고하여 대학간 선의의 경쟁으로 '명문대'가 되어야 한다.
 
이 책의 저자는 1999년 <대학이 망해야 나라가 산다>를 발간하면서 대학서열화와 학벌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주장을 펼친 소수의 지식인 중 한 명이다. 그 자신이 한국 사회에서 지식 권력의 핵심인 대학교수로서, 사회가 제공하는 이익을 묵묵히 향유하며 침묵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두 발을 담고 있는 교육 현실, 나아가 한국 사회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 학자. 2000년 10월 이 책의 저자 김동훈과 몇몇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학벌없는 사회를 위한 모임]을 발족시키고 인터넷 홈페이지(www.antihakbul.org)를 개설, 학벌사회의 질곡과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 사회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생산적인 토론을 진행했다.  

저자는 우리의 학벌이 우리 사회의 교육뿐만이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전방위에서 위용을 떨치고 있는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한다. 즉 우리 사회를 '학벌사회'라고 명명할 때, 그것은 사회학적으로는 변형된 신분제적 가치와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임을, 정치학적으로는 사회적 권력의 배분이 학벌이라는 네트워크에 의해 파당적으로 분배되는 붕당적 사회임을, 경제학적으로는 한 사회가 생산해내는 부와 권력을 소수의 학벌집단이 독점으로 차지하는 독과점사회임을, 문화적으로는 학벌이라는 집단적 편견이 개인의 인간관계의 형성, 결혼, 취업, 자긍심 등 일상의 모든 영역에 파고들어 문화적 심리적 갈등을 빚어내는 갈등사회임을 뜻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가장 급박하고 시급한 핵심적 의제가 '학벌'이라고 판단한 저자의 이 책은 학벌체제하에서 자유롭지 못한, 조금씩이라도 그 질곡의 고통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한국 사회 구성원 모두의 피부에 와닿는 매우 구체적인 현안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우선 학벌사회를 옹호하는 견해들을 크게 경쟁동기론, 기회균등론, 능력지표론 등으로 분류하여 그 주장의 부당함을 논박한다. 흔히 학벌사회 옹호론자들이 내세우는 근거로 경쟁에 의한 사회 활력, 공개시험을 통해 공정하고도 균일하게 제공되는 기회(예를 들면 현 입시제도), 근대사회에서 학벌은 가장 신뢰할 만한 능력 판단 기준이라는 것 등이 있는데, 저자는 다음과 같은 입장으로 이 세 가지 논리들을 비판한다. 첫째, 경쟁을 유발하는 현행 대학 입시제도는 입시 후의 전 생애에 걸쳐 '출신대학'이라는 종신형 간판에 의해 경쟁의 모티프를 앗아감으로써 우리 사회를 정체시킨다는 것(결국 진정한 경쟁체제가 아니라는 것). 둘째, 사실상 공평한 기회가 제공되고 있지 않다는 것. 오히려 계층 이동을 고착화시키고 사회 경제적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대물림시킴으로써 실제로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경우를 협소화시킨다는 것. 셋째, 현행의 입시제도가 개인의 능력 계발이나 판별과는 거의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 꼭 수능성적 고득점자가 우수한 인재이거나 창조적 소수자는 아니라는 것. 명문대생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이 지닌 능력의 우월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쟁 기회의 선점에서 온다는 것. 따라서 입시경쟁과 학벌에 기초한 현재의 학벌독점 현상은 어떠한 자기 정당화 근거도 갖고 있지 않은 기득권 세력의 수탈구조라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학벌사회 옹호론에 대한 비판을 근거로 하여 학벌사회의 수혜자와 방조자, 피해자가 누구인지 그 이해갈등 상황에 대한 차분한 분석이 이루어진다. 뒤이어 언론의 행태, 사교육업자의 이권, 명문대생의 탐욕, 중고등학교와 교육 관청의 방조 등도 면밀히 파헤친다. 
서울대나 연고대를 졸업하지 않았다고 하여 '학벌주의자'와 '학벌주의 옹호론자'들의 편협하고 악의적인 주장에 주눅늘거나 눈치볼 필요는 없다. 악덕재벌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꼬우면 너도 돈 벌지 그랬냐?"고 말할 수 없듯이 부당하게 기득권에 편입된 '학벌독점자'들에게 구체적인 근거와 주장을 합리적으로 펼치게 되면 그들이 그렇게 날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부당하고 불합리한 방식으로 극소수가 절대 다수를 차별하고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것은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우리사회가 시급히 해결해야만 할 '숙제'일 뿐이다.

그렇다면 학벌사회의 여러 문제점들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현재 한국 사회의 모든 권력의 요직을 서울대학 출신의 '학벌의식에 찌든' 동문들이 독점하고 있다고 보았을 때, 학벌사회 극복을 위한 가장 이상적 방안으로 서울대 폐교론이 제시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의 실현불가능성을 염두에 둔 저자는 먼저 대학서열을 완화, 철폐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시급한 제도적 과제라고 말한다. 학벌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으로 현재 고착된 대학서열 체제의 몫이 크기 때문이다. 약간 유보적이기는 하지만 대학평준화론, 국립대의 민영화를 통한 사립대와의 차별해소, 인제지역할당제 시행을 통한 비수도권 지역의 대학들에 대한 획기적 배려 등이 그 대안으로 모색되고 있다. 또한 학벌체제의 하나의 기둥인 대학입시제도를 전면적으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현재의 전국 단위 국가관리 입시제도를 즉각 철폐할 것, 대학 스스로가 다양하고 총체적인 접근에 의한 교육적 선발을 해나갈 것, 입학절차를 비공개로 하여 대학과 학생 간의 관계를 사적인 계약관계로 머물게 할 것 등이 그 제안들이다. 아울러 대학의 다원화, 개방화를 통해 학벌의식의 심리적 기반이 되는 폐쇄성을 깨뜨릴 것, 대학평가체제를 정착할 것도 덧붙인다. 물론 이러한 제도적 개혁과 더불어 학벌차별과 편견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다양한 형태로 구체적인 의식개혁 운동을 펼쳐나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언급한다. 

 

저자가 검토하고 제시하는 대안은 분명하지 않다. 대학평준화도 개론적 성격이고 국립대 민영화 역시 원론적인 수준이다. 인재지역할당제 정도가 분명해 보인다. 특히 저자가 제시하는 '국립대 민영화 또는 독립법인화'는 본말이 전도되고 자신의 문제의식을 꺼꾸로 풀어가는 모양새 같다. 현재 국립대학이 사립대학보다 국가재정이 많이 투입되는 문제는 사립대학의 공공성을 강화하면서 국가재정을 국립대 수준으로 투입해야 하는 방향성을 추구해야 하는 문제이지 꺼꾸로 국립대학을 사립대학 수준으로 보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자 스스로 책의 앞 부분에서 분석했듯이 서울대는 이미 대학서열체제와 학벌독점의 정점에 군림하기 때문에 민영화나 독립법인화처럼 운영의 주체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저자가 헷갈리고 있다. 가장 핵심적인 정책대안이 '공기업 민영화'처럼 신자유주의 방식으로 처리해 버리는 꼴이다. 그건 아니다.

 

다수 피해자들의 한 목소리가 소수 수혜자들로 하여금 각성을 불러올 것이라는 점. 그런 의미에서 책의 말미에 실린 '의식개혁을 위한 일곱 가지 요구사항'은 우리 개개인도 스스로 실천할 만하다.
하나, 학벌을 묻지 않고 밝히지도 않는 관행을 정착시키자.
둘, 학벌 관념을 조장하는 언론과의 싸움을 치열하게 전개해나가자.
셋, 학벌을 차별하는 기업들을 고발하자.
넷, 대학 특히 명문대의 학벌조장 행위를 집중 고발하자.
다섯, 고등학교의 반교육적 입시지도를 지속적으로 고발하자.
여섯, 고등학교 학생들의 목소리를 끌어내자.
일곱, 사교육 시장의 학벌 관념 조장행위에 제동을 걸자.
 
아무튼 내가 최근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있는 분야가 교육부분이었는데 마침 사회적으로 논의가 활성화되어 의미도 있고 반갑기도 하다...^^ 
 
[ 2012년 7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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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병
김종주 / 하나의학사 / 199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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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포탈 '다음'에서 '입시병'이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상당히 많은 카페글, 웹문서, 블로그, 뉴스, 지식 등이 펼쳐진다. '입시병'도 병이기 때문에 몇몇 신경정신과 명의로 관련 정보를 인터넷 카페에 직간접적으로 올려져 있다. 뉴스나 신문에서는 교육문제나 대학입시 등과 관련하여 기사 내용 중에서 '입시병이 한국의 학생들에게 존재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다루기만 할 뿐, '입시병'을 제목으로 하는 심층적인 기사를 거의 제작, 보도하지 않은 것 같다.
인터넷에 올러와 있는 몇 개의 신경정신과 의사들의 경우 입시병의 원인을 당사자와 가족에게서 찾는다. "가장 큰 원인은 아이의 성격에서 기인한다(양창순)"라거나 "가족의 과잉기대나 본인이 일류집착증에 빠진 경우, 사전 준비 없이 고3에 진입한 경우, 입시 실패 경험이 있는 재수생, 내향적 소심형에 많다(소예정신과의원)"라고 진단한다. 기독교상담실의 경우 우리가 과거에 교과서에서 읽었던 "이유 없는 반항기"라는 상투적인 설명을 기본으로 하면서 "과거 성적이 부진하고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끼는 경우, 내향적이거나 소심하고 강박적인 성격을 가진 경우, 진로 선택에 갈등이 많은 경우, 부모나 자신의 보상심리로 인하여 일류 집착증에 빠진 경우, 부모-자식간의 대화가 단절되고 불화가 있는 경우, 각성제나 수면제를 남용하는 경우, 기존에 정신적 질환이나 만성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를 들 수 있겠다."라고 분석한다.
이런 식으로 신경정신과 의사들이 신문이나 방송, 교육관계자들에게 '입시병'의 원인을 분석, 진단하고 있으니 대책이라고 해봐야 학생 개인이 호연지기를 키우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식이거나 가족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부모들이 아이들을 압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밖에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정신과 전문의인 저자 김종주 역시 기본적인 진단 역시 앞에서 이야기하는 다른 의사들과 비슷하다. 차이가 있는 것은 저자의 경우에는 학생 뿐만 아니라 학부모들에게서 상당수 발견되는 입시병을 지적하고 대신 학생들에게서 병의 원인을 찾지 않고 있다. 저자는 아동들의 발달 과정에서 아동들이 가정이나 부모에게 어떻게 영향을 받는 지를 주로 분석하면서 학부모들의 과잉 기대와 시험과 성적에 대한 무언의 압박, 그리고 사회 전체적으로 대학입시를 전쟁처럼 생각하고 덤벼드는 사회문화적 현상이 학생들과 학부모 스스로의 '입시병'을 초래하는 것을 원인으로 지목한다.
 
저자가 직접 병원에서 상담하고 진찰한 학부모나 학생들의 '입시병' 증상과 사례는 매우 심각한 편이다. 신체에는 아무런 의학적 이상이 없음에도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의사에게 찾아와 불면증, 두통, 속쓰림, 울렁증을 호소한다. 다행스럽게도 입시병의 기간이 짧은 보통의 경우에는 대학입시가 끝나고 학생이 대학에 입학하게 되면 입시병 증상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고 한다. 하지만 증상이 오래 전에 나타났거나 증상으로 인해 가정에서 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한 경우, 또는 학생이 입시에 실패하여 재수, 삼수를 하는 경우에는 학생 뿐 아니라 학부모들까지 입시병이 만성질환으로 전개되는 양상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그렇게 되면 입시병의 증상은 당사자의 신체적인 질병으로까지 발전하여 오랜 시간 고통스럽게 지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통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자에 따르면 "입시병은 치유되는 확률이 겨우 25%에 불과하다. 해마다 75%는 죽든가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죽음에 가까운 심한 후유증을 남기기 때문에 입시병이 무서운 병이다"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학부모들, 즉 부모 세대가 스스로 입시병을 앓게 되고 학생들의 입시병을 발병시키는 이유를 한국사회의 역사적, 사회문화적 요인에서 찾는다. 학부모의 부모세대에게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자란 성장배경과 더불어 압축성장에 따르는 가장들의 산업전선 몰입으로 가정에서 부부간에 애정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 현실을 기본적인 사회적 배경으로 지적한다. 이 경우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내 인생의 전부'라는 목표로 설정하고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또는 만족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심리'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가문의 대표 선수'가 되기도 하고 부모들의 '악세사리'가 되기도 한다.
아이들이 자신의 적성이나 재능을 찾고 발휘하는 데서도 교사들 뿐 아니라 학부모들 역시 방해세력으로 등장한다.
 
한창 자유롭고 자율적으로 성장하고 스스로를 알아 나가면서 인격을 형성하고 재능과 적성을 찾아서 열중해야 할 아이들을 12년간 학교와 학원, 시험과 숙제와 공부로 묶어 두고서 어찌 아이들에게서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을 바라는 것일까...
 
정치권과 정부, 사회 각계각층이 난마처럼 얽혀있는 법적, 제도적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것도 당면한 주요 과제이지만, 학부모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아이들을 위해 스스로 각성하고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것도 동시에 절실하다는 것이 저자의 요점이다. 법과 제도와 문화를 바꾸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지만, 우리의 아이들은 오늘도 내일도 압박과 스트레스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상처받고 좌절하기 때문이다.

[ 2012년 7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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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를 권리 : 폴 라파르그 글모음 - 필맥 휴대책
폴 라파르그 지음, 차영준 옮김 / 필맥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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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의 <피로사회>,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리>와 함께 읽은 책이다. 물론 이 책의 표제작인 단편 [게으를 권리]가 읽을 거리였다. <피로사회>는 세계의 사회경제 시스템을 장악한지 수 백년이 지난 오늘날 자본주의의 사회문화가 "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만능주의"를 불러왔음을 비판했고, <필경사 바틀리>는 20세기 초 미국 뉴욕의 월가를 배경으로 자본주의가 가져온 근대문명의 상식과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 책 <게으를 권리>의 표제작은 19세기 말 자본주의의 꽃을 피운 유럽에서 겉으로는 '노동의 신성한 권리'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일삼고 있는 자본가들과 부르조아지 지식인들을 비판했다.

 

저자 폴 라파르그는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으로 19세기 중순 이후 지금까지 인류의 사상과 행동에 큰 업적을 남기고 있는 칼 마르크스의 사위다. 그는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다. 이 책은 폴 라파르그의 대표적인 글 7편을 묶은 것이다. 이들 글은 1883~1904년에 집필된 것들이다.

 

표제작인 [게으를 권리]는 '일할 권리를 앞세우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라는 풍자적인 형식으로 노동자의 삶을 억압하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한 글이다. 그는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는 과거에 부르조아 철학자와 논객들이 전개했던 투쟁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서 "부르조아지는 17~18세기에 성직자들에 의해 지탱되는 봉건 귀족계급에 대항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성직자들의 규범인 '금욕'과 '복종' 대신 '자유사상'과 '무신론'을 기치로 내세웠다. 그러나 일단 승리를 거두자 그들은 어조와 태도를 싹 바꿔, 이제는 종교를 이용해 자신들의 경쩍, 정치적 패권을 정당화한다. 노동자들에게 금욕을 설교하기에 이른 것이다. 기독교 윤리를 천박하게 모방한 자본주의 윤리는 노동자의 육체에 파문을 설교했다. 생산자인 노동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최소한으로만 제공하고, 그들의 기쁨과 분노를 억압하고, 그들에게 기계의 일부가 되어 휴식도, 대가도 없이 일만 하라고 선고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본주의 문명이 지배하는 국가의 노동자들이 기묘한 환각에 사로잡혀 있다고 꼬집는다. 그것은 일에 대한 애착 또는 노동에 대한 처절한 열정인데, 그 열정이 개인과 그 후손의 생명력을 고갈시킬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가들이 상품생산을 고조시키고 노동자를 착취하여 잉여자본을 축적하고 과잉자본과 과잉상품을 해소하기 위해 상품시장과 원료를 찾아 식민지를 개척하도록 하는데 노동자들이 끌려다녔다는 것이다.

라파르그는 "프롤레타리아는 자신들의 자연적 본능으로 돌아가 부르조아 혁명의 형이상학적 법률가들이 지어낸 무기력한 '인간의 권리'보다 천 배는 더 고귀하고 성스러운 '게으를 권리'를 선언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는 하루에 3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여가와 오락을 즐기는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노동과 여가, 신성함과 게으름에 대한 그리스와 로마, 중세 철학자들의 글을 인용하기도 한다.

 

두 번째 작품 [추상적 개념의 기원]은 철학적, 언어학적, 인류학적 분석을 통해 인간의 두뇌에 형성돼있는 개념의 본질에 대해 논의한다.
세 번째 작품 [아테나신화]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유래와 아테나와 관련된 신화의 의미를 따져본다.
네 번째 작품 [마르크스에 대한 회상]는 자신의 장인이자 열정적인 학자였던 마르크스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을 서술한다.
다 섯번째 작품 [말의 권리와 인간의 권리]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동물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 노동자의 처지를 냉소적으로 묘사한다. 표제작인 <게으를 권리>와 연결되어 있다.
여섯 번째 작품 [사회주의와 지식인]는 지식인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 논의한다.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당대의 지배체제에 아부하면서 생존을 구걸하는 모습은 역사를 초월하는 것 같다.
마지막 작품 [여성문제]는 여성의 능력과 지위에 관한 허구적인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대안의 관점을 제시한다. 유럽 사회주의자들은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에 이미 이미 사회경제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여성을 착취하는 체제와 구조를 실랄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들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로의 '세기전환기'에 유럽의 혁명적 지식인들은 무엇을 고민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마치 그 시대 사상적 운율과 정신적 풍경의 한 단면을 보고 듣는 것 같다.

 

폴 라파르그는 1842년 쿠바의 산티아고에서 혼혈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이주하여 의학을 공부해 의사로 일하면서 아나키스트 성향의 프루동주의자로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제1인터내셔널의 프랑스지부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1865년에 영국으로 건너가 마르크스,엥겔스와 친분을 맺고 마르크스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는 1882년에 파리로 돌아가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새로 설립된 프랑스 노동자당을 지도했다. 그는 이때 의사로서의 일을 중단했고, 이후 죽는 날가지 프랑스 노동자당의 대표적인 이론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중받았으며, 정치활동을 하다가 여러 차례 투옥됐다.
1911년 69세가 된 라파르그는 노쇠함으로 인해 인생을 바쳐 운동에 더 이상 기여할 수가 없다고 판단하고 아내와 동반자살을 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 2012년 6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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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 - 1950년, 받지 못한 편지들
이흥환 엮음 / 삼인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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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2주년이다. 한국 근현대사를 왜곡시키고 사회와 민족, 사람들을 양극으로 갈라 끝없이 갈등과 반목을 하도록 만들어버린 동족 간의 전쟁... 전쟁 이후 남한은 남한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전쟁 중'이라는 빌미로 민중들의 자유로운 의사와 권리를 박탈하고 특정 계층이 부와 권력을 독점해왔다. 남북이 휴전선에서 군사적으로 대치한 현실은 남북 내부에서 자유로운 사상과 학문이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았고 이데올로기와 폭력의 과잉을 불러왔다. 종북과 좌빨의 냉전 이데올로기로 우울한 사회...

한국전쟁에 대한 학문적 평가 역시 남북 모두에서 객관성을 상실할 수 밖에 없고 권력층의 '결론'와 다르면 어느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고 매장당해 왔다. 따라서 한국 내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객관적, 학술적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남북 모두 권력층에 의해 전쟁사와 현대사 연구가 통제되었음과 더불어 그 마저도 통사적 시각과 전쟁 전략전술적 측면, 가술적 측면, 인과측면만 다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실제 전쟁에 자원하거나 끌려가 전쟁터 현장에서 죽어간 수 백 만명의 일선 병사들의 이야기는 거의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그 병사들의 부모형제, 친척 지인들의 삶과 생활 역시 공식적으로 남아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 참상을 구체적으로 견뎌낸 이들의 이야기가 빠진 전쟁사, 현대사가 '역사'로서, '연구'로써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 의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우리가 거의 모르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 군인들의 생각과 생활, 그 가족들의 삶과 혼란이 생생하게 그리고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책을 엮은 이흥환은 KISON(Korea Information Service on Net) 프로젝트 선임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2008년 11월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열람실에서 한국전 당시 미군이 노획한 북한 문서의 목록을 작성하다가 이 편지들을 처음 만났다. 문서 상자 1,100여 개를 이미 들여다본 상태였다. 편지들은 문서 상자 1,138번과 1,139번 두 곳에 들어 있었다. 두 문서 상자에는 편지 728통과 엽서 344매가 들어 있었다. 노획 후 비밀로 분류해놓았던 것을 미 국립문서보관소가 1977년 비밀을 해제해 일반에 공개했으니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개 자료가 된 지 30년이 넘었다. 
 
편지는 대부분 1950년에 쓰인 것들이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또는 직후이다. 인민군대에 간 남편에게 곧 면회를 가겠다며 쓴 편지, 폭격이 쏟아지는 와중에 살아 있다는 소식만을 긴급하게 휘갈겨 쓴 편지, 자식 셋을 군에 보낸 어머니를 위로해달라고 동네 형에게 부탁하는 편지, 어떻게든 아이들 죽이지 말고 잘 키워달라고, 살아만 있어 달라고 아내에게 당부하는 편지, 폭격 맞아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놀라지 말라”면서 전한 편지, 속옷, 양말, 발싸개 등을 사가지고 빨리 면회와주십사 아버지에게 떼쓰는 인민군 특무장 아들의 편지, 결혼 날짜 받아놨으니 속히 집으로 오라고 아들을 호출한 아버지의 편지 등 갖가지 사연을 담은 이 편지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편지를 보낸 지 62년이 흐른 지금까지 수신인에게 전달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미군이 노획한 문서 가운데 꽤 많은 문서들이 국내에 소개되었으나 이 편지 뭉치들은 누군가 손댄 흔적 없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평양중앙우체국 소인이 찍힌 것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1950년 10월 미군이 평양을 점령했을 때 평양중앙우체국에서 미처 배달하지 못한 편지들을 대량 노획한 것으로 보인다. 편지는 북한 안에서만 오간 것들이 아니다. 남북을 넘나들었음은 물론, 흑룡강성, 산동성 등 중국과 모스크바, 블라디보스토크 등 소련과도 오간 사연들이다. 편지는 노획했을 때 상태 그대로 편지 봉투에 들어 있었다. 편지지와 편지 봉투는 신문지를 자르거나 찢어 만든 것부터 누런 마분지 등 겨우 종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이흥환은 1,068통의 편지를 샅샅이 살피면서 그 가운데 113통을 골랐다. 그중 68건은 편지글을 옮겨 쓰고 이해를 돕고자 편지에 대한 설명글도 적었고 45건은 설명 없이 화보로 구성해 이 책을 엮었다. 어느 것은 편지 원본을 다 싣기도 했고, 여러 장 가운데 한두 장만 골라 실은 것도 있다. 내용도 일부만 옮겨 적은 것도 있고 전체 내용을 다 옮긴 것도 있다. 

이 편지들은 한 개인이 개인에게 보낸 사신(私信)이다. 공문서도 아니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쓴 기록도 아니다. 그러나 엮은이는 이 편지들이 헝클어졌던 한국 현대사의 한 시기를 보여주는 1차 사료로 역할을 충분히 한다고 판단했다. 이 편지들이 남북한 체제 연구, 한국전 전후 시기의 사회상 연구에 꼭 필요한 사료가 아니라고 한다면 사학이란 것은 공허하고 맹목적인 학문일 것이다. 또한 이 편지들은 ‘전쟁 문학’이라는 불리기에도 손색이 없다. 딱딱한 역사서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생생한 육성 증언의 목소리가 담긴 한 시대의 증언인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남한에서도 이러한 기록과 증언들을 남겨두어야 할 것이다. 전쟁터 현장에 있었던 병사들과 그 가족들이 이승으로 떠나기 전에...

현재 편지의 원본은 모두 미 국립문서보관소의 서고 밖으로 가지고 나오지 못하는, 미 정부의 소유물이다.(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미국이 북한에 돌려보내지 않은 이유는 모른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가능할지...)  이 책에 실린 편지 사진들은 미 국립문서보관소의 편지 원본을 현지에서 디지털 복사한 것이다. 한국의 국립중앙도서관은 이 편지를 포함한 노획 북한 문서 전량과 다른 한국 관련 문서를 수집하는 사업을 2004년부터 해오고 있다. 엮은이가 이 편지들과 인연을 맺게 된 것도 국립중앙도서관의 이 문서 수집 작업에 참여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편지들은 개인의 쓴 글로, 글에 대한 권리(literary right)는 글쓴이, 즉 발신인이나 편지 수신인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엮은이는 이 편지의 존재를 알고부터 기회가 될 때마다 한국의 몇몇 주소지를 들고 수신인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이 책을 보고서 편지의 주인공이 직접 나타나준다면, 그래서 정부 차원에서든 민간 차원에서든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이 편지 묶음의 반환을 요청할 수 있다면, 이 책의 출간 의미는 한층 더 커질 것이다. 
전쟁은 남과 북을 가로막았으나 편지는 전선과 국경을 넘나들었다. 

전사(戰史)보다 더 생생하고 소설보다 더 감동적인, 전쟁이 써낸 이 편지들은 반세기가 넘도록 미 국립문서보관소 창고 안에서 수취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역사학자가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고 말했다. 정치는 개개인의 삶과 행복을 위해 인류가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개개인을 보살피지 못하는 정치는 이미 정치가 아니다. 따라서 전쟁은 정치는 커녕 "특정한 세력의 이익을 위한 광기에 개인들이 희생되는 것"일 뿐이다.
 
* 기억에 남는 편지 :
"어머님 전 상서. 어머님 그동안 어린 자식들을 시중하시기에 얼마나 큰 고생을 하십니까. 그간 어머님 위태만안하시오며, 동생 전환, 순복, 순옥, 무남, 충남, 용남, 영실이도 또 우리 처도 몸이 다 무사하며 건강한지요. 저는 남포 집에서 염려하여 주시는 덕으로 오날것(오늘까지) 건강히 공부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중략) 제 부탁은 어머님 어린 자식들 잘 기르시기에 힘드시겠지만 공습에 몸들을 주의하시고 병에 걸리지 않게 하고 있다 평화가 오면 씩씩한 몸으로 돌아갈 때는 반가히 만나길 꼭 약속합니다. 림해 형님이나 수림한테 저는 만경대 문화군관학교로 갔다고 알리시요. 그리고 쌀 배급은 꼭 수속하세요. 리장한테도 부탁하였습니다. 증선 동무와 원섭 동무에게 소식을 전하시요."(‘자식을 서이나 전선에 보낸 우리 어머님’ 중에서)

"…… 이곳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마시우. 생각을 하여 봤자 도움이 없으니까. 춘길이 춘덕이를 잘 성장시켜 기르기를 바라우. 아모쪼록 춘길과 춘덕을 죽이지 말고 길러주시우. 만약 먹을 것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잘 길러주시우. 이 몸은 언제나 그리운 춘길과 춘덕이를 볼까. 금일 밤에도 춘길과 춘덕이를 보았는데 눈을 뜨니 꿈이었습니다. 생각은 더 말할 수 없고. …… 춘덕이는 수개월 전에는 병으로 고생한다고 하더니 죽지는 않았는데 금일은 별 생각 다 납니다. 그리운 춘길과 춘덕이를 언제나 보리우. 춘길과 춘덕이여, 절대로 앓지 말고 자라라. 끝으로 도시로 나가지 마시우, 절대로."(‘아이들 죽이지 말고 잘 길러주시우’ 중에서)

"사랑하는 오빠에게. 그동안 몸 건강하여 군대에 열중하고 있겠지? 우리 집안 인간들은 다 안녕히 있으니 그 걱정은 말고 오래비 네는 힘껏 마음껏 우리 조국에 바치어 완전 동립(독립)을 위하여 싸우라. …… 오래비 네 덕택으로 배급을 타 먹는다. 배급은 한 달에 3번씩 탄다. 오래비 네 편지를 받아보고 얼마나 깊어(기뻐)했는지 모르겠다. 오래비 네 여섯 동무가 다 함께 있다는 것을 보고 더 한층 깊어했다. 네 편지를 받아보니 노일이 형님한테도 편지를 하고 다 잘 있기를 써 있는 것을 보았다. 노일이, 일섭이는 인민군대를 안 나가구 집에서 논다."(‘오래비 네 덕택에 배급을 타 먹는다’ 중에서)

"사랑하는 귀란 동지 앞 …… 그동안 많이 섭섭하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자, 일 년이 넘도록 편지 한 장 하지도 않고 애인 말뿐이지 자, 동에가 있는지 서에가 있는지 주소라도 알면 편지라도 하겠는데, 또 그동안 저에게 편지 수차 했는지도 모르겠으나 회답도 오지 않지, 퍽 궁금도 하며 섭섭도 하였겠다 생각됩니다. 전번 주소는 내가 출장 갈 때 비슷하게 듣고 간 것이라 부대에 와서 본 즉 주소 번호가 틀렸습니다. 이번 치는 명확한 것입니다. 
…… 귀란 동무, 내가 조국 강토에 와서 있을망정 나의 어머니를 모르거나 귀란이를 모르거나 있던 곳을 모르거나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요. 동무가 수고를 얼마나 많이 한다는 것을 내가 다 파악하는 사람이요. 세상에서 하루를 천추 같이 여기실 어머님을 부디부디 동무가 나를 대신하여 마음 끝 봉양하여주옵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부탁은, 어머님의 기념사진 동무와 같이 찍어두기를 바랍니다. 부쳐달라는 말은 아닙니다. 동무 자서로서 이 편지 회답을 혁명자 입장에서 잘 써서 한 장 회답하시요. 나의 기념사진 한 장을 동무에게 보냅니다. 이것으로 철필을 놓습니다."(‘내가 떠나와 있을망정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오’ 중에서) 

"승요 좀 똑똑히 보아라. 금일이 양 10월 11일인데 편지는 10월 15일에(9월 15일의 잘못인 듯: 편집자 주) 보낸 것과 25일에 보낸 것이 오날이야(오늘에서야) 함께 와닷다(와 닿았다). 그런데 다름이 안이와(아니라) 네 말이 한마디도 깨다라 알 수가 없써서(깨달아 알 수가 없어서) 곤테(고쳐서) 똑똑히 외견한 말을 원문으로 써서 보내라. 

"…… 반드시 모(母) 내가 보래는 뜻은(꼭 어미인 내가 봐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무슨 삭건인지(사건인지) 알 수가 잇니. 니불을 지고 가볼내도 네 말 한마디 디더 보고 갈낸다(이불을 짊어지고 가보려 해도 우선 정확한 네 말 한마디를 먼저 들어보고 가겠다)."(‘도무지 한마디도 깨달아 알 수가 없으니’ 중에서)
 
[ 2012년 6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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