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과 좌절 - 노무현 대통령 못다 쓴 회고록
노무현 지음 / 학고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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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오연호 기자가 발간한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에 이어 노무현 전대통령이 자신의 생애와 대통령의 역정에 대해 직접 초고를 쓴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노무현 전대통령이 마지막까지 쓴 글을 토대로 하여 만들어졌다. 준 회고록 성격의 글로써 노 전대통령은 목차를 포함, 대강의 구성까지만 완성하고 서거했다. 최종 수정은 2009년 5월 20일 오후 5시 5분이었다.  그는 왜 2009년에 회고록을 쓰려 했을까? 직접 그의 말을 빌려본다.

"회고록은 한참 후에 쓰려고 했다. 아직 인생을 정리하개에는 너무 이르고,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봉하마을 바꾸기, 시민광장, 정책연구... 그래서 '우공이산'을 표구하여 붙여놓고 이런저런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여러가지 장애가 생겼다.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 마침내 피의자가 되었다. 이제는 일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지난 이야기를 쓰는 일뿐인 것 같다. 왜 써야 할까?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뿐이다. 일은 삶 그 자체이다."

그는 2009년 봄 이후 이명박 정권과 검찰의 비열한 정치적이고 비도덕적인 수사방식과 조,중,동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언론의 포퓰리즘적 보도행태로 인하여 자신이 평생 스스로 지켜오던 원칙과 기준, 도덕성과 명예가 무너짐을 느꼈던 것이다. 

책은 제목 그대로 그의 성공과 좌절, 굴곡진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회고록 집필을 결심하고 목차를 포함하여 대강의 구성을 직접 작성한 '성공과 좌절'을 비롯하여, 회고록 집필을 결정한 뒤 줄거리를 밝힌 구술 기록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와 '스스로 입지를 해체하는 참담함으로' 등 살아 생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글을 모두 이 책에 담았다. 


제1부. [이제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01장. [미완의 회고]에는 노 전대통령이 직접 쓴 글과 구술한 내용들을 정리한 것이다. 왜 갑자기 예정에 없던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는지, 회고록의 주된 내용이 '실패한 이야기'를 쓸 것이라는 것, 자신의 실패가 자신을 지지하고 응원한 시민들의 실패는 아니라는 것, 자신의 실패를 거울삼아 달라는 것에 대한 소회를 담고 있다.

또한, 자신이 생각해왔던 질문들에 대한 짧은 글이 담겨 있다. 대통령의 과제는 무엇일까? 역사적 과제는 무엇일까? 후보 시절의 약속은 무엇이었을까? 참여정부의 비전과 전략은 무엇이었는가? 무엇을 했는가?

그리고 퇴임 이후 자신이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연구했던 주제들도 거론된다. 토니 블레어 영국 수상을 필두로 하여 유럽에서 제시된 '제3의 길', 참여정부 임기 말에 준비했던 '비전 2030' 등이다.

자신을 실패한 대통령으로 규정하면서 그 원인을 고민한 흔적도 보인다. 자신의 정치적 소망과 좌절을 언급하면서 "정치하지 마라"와 "이제는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는 이야기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말한다.

02장. [봉하 단상]은 인터넷 공간 [사람사는 세상]의 '봉하 글마당'과 '좋은 자료 모으기 동호회', 그리고 '진보주의 연구모임'에 노 전대통령이 직접 올린 글이 담겨 있다. '봉하 글마당'에서 옮긴 글은 2009년 3월에 작성한 '권용목과 뉴라이트의 민주노총 보고서', '민주주의와 시민의 주권 행사', 그 해 4월 작성한 '춤추는 미사일, 누구를 위한 것일까?', '정치인들은 껍떼기에요.', '언론은 흉기다', ' 제 집 안뜰을 돌려주시기 바랍니다.'이다.

'좋은 자료 모으기 동호회'에서 옮긴 글에는 2009년 3월에 작성한 '수직적 권위주의 권력문화와 전시행정에 관한 사례를 모아봅시다', '민주주의 역량의 부족에 관한 이야기 자료가 있을까요?', 4월 '정책 결정은 누가 하나?', 5월 '작은 정부와 구조조정의 결과에 대하여', '오바마의 진보주의 개혁은 성공할 것인가?' 등이 담겨 있다.

'진보주의 연구모임'에서 옮긴 글에는 2009년 2월에 작성한 '오늘의 좋은 소식 - 이명박 대통령의 교육정책', 3월 '대북정책의 전략적 판단과 보통 사람들의 상식', '재판에 대한 압력, 언론에 대한 압력', '남북간 군사력 비교에 대하여' 등이 담겨 있다.

제2부. [나의 정치역정과 참여정부 5년]에는 노 전대통령의 육성 기록이 들어 있다. 네 차례의 인터뷰가 들어 있는데, 퇴임 1년을 앞둔 지난 2007년 9월 5일 청와대 상춘재, 9월 16일 상춘재, 10월 20일 청와대 관저 회의실, 2008년 1월 18일 청와대 관저 대식당 등에서 진행되었다. 내용 중 일부가 편집되어 2007년 11월 한국정책방송(KTV)에서 방영했고 2008월에는 '다큐멘터리 5부작, 참여정부 5년의 기록'이라는 제목의 DVD로 제작됐다. 2차 인터뷰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겸해 진행되기도 했다.

01장. [시대는 한 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는 노 전대통령의 인생역정과 정치역정에 대해 구술한 내용이다. 가난과 큰 형님, 초등학교 시절 글짓기 반항 사건, 419와 516에 대한 기억, 개발시대 막노동, 사범시험 이야기, 결혼과 판사 생활, 변호사 시절 이야기와 부림사건 변호를 통해 인권변호사로 활약하기 시작한 이야기, 정치에 뛰어든 계기와 3당 합당의 추억, 부산에 대한 기억, 바보 노무현과 노사모에 대한 이야기, 대선 출마 동기와 퇴임 이야기 등이다.

02장. [참여정부 5년을 말하다]는 노 전대통령 재임기간 중의 참여정부 5년에 대해 구술한 내용이다. 여기에는 참여정부에 대한 자신의 평가, 경제부분에서 성장과 복지에 대한 평가, 남북정상회담과 북핵문제, 남북관계, 동북아 평화에 대한 평가, 한미관계와 한미 FTA에 대한 평가, 정치개혁을 위한 노력과 그 좌절 등이 담겨 있다.

03장. [한국 정치에 대한 단상]는 노 전대통령 자신이 생각하는 한국 정치에 대해 구술한 내용이다. 일개 국회의원이면 국민의 눈높이에 자신의 정치 수준을 맞춰도 되지만 국가적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국민의 눈높이를 넘어 역사의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성숙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투명성과 공정성, 원칙적인 법치주의만으로는 어렵고 한 발 더 나아가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그러면서 대화하고 타협과 협상을 통해서 결론을 하나로 모아 나가는 통합의 과정이 부드럽게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노 전대통령은 '시민주권시대'와 '시민권력'을 말한다. "만일 정치권력으로 무엇을 하려고 한다면 한 사람의 대통령을 만들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중심이 되는 정치세력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치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흐름을 만들어내야 합니다."라고...


시골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란 후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포부로 정치에 입문, 대통령에 당선된 그의 삶은 '성공'이라고 불려질 것이다. 번듯한 기반 하나 없이 대통령까지 당선되었으니 누가 봐도 '성공'이겠지만, 그는 서거 직전 남긴 회고록을 통해 '실패와 좌절'의 기억만이 남아 있다고 고백한다. 대통령 임기 내내 '경제 파탄, 민생 파탄, 총체적 파탄, 잃어버린 10년'을 외치는 사람들과 싸웠고, 임기 후에 측근의 비리로 인해 흠집난 자신의 도덕성에 대해 부끄러운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 글을 통해 서거 직전 고통스럽게 고뇌하며 자신의 삶 전체를 성찰한 그의 모습을 아련히 그려볼 수 있다.

이 책 속의 2부의 많은 글은 오현호 기자의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글과 많이 겹친다. 그래서 1부에 들어있는 노 전대통령이 직접 쓴 글이 새롭다. 일반적으로 한국인의 정서에서 가장 '성공'했다고 평가받을 수 있는 자리에 올랐음에도 퇴임 후 그는 스스로 자족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조국과 국민들에게 부족한 내용과 환경을 찾고 그것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노력했던 사람.. 그가 무엇을 이루었거나 완성했는지가 아니라 퇴임 후의 그 자세와 노력이 현재와 미래의 후손들에게 모범일 것이다.

노 전대통령이 재임 시절의 여러 정치적, 정책적 결정에 대해 스스로 평가내린 것에 대해 모두를 동의하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도 사람인 이상 감정을 가질 수 있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내가 그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의 '평가내용'이 아니라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내놓고 겸허하게 평가하고 평가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모습이다. 그런 모습은 정치인 노무현, 대통령 후보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 퇴임 후 아저씨 노무현을 왜 그토록 수 많은 국민들이 사랑했는지를 보여준다. 권위주의가 권위로 살아온 사람. 허위와 가식이 아니라 진실과 감성으로 국민들에게 다가간 사람. 열정과 아픔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사람. 노무현은 정치인과 지도자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자질과 태도를 우리에게 제시한 것이다. 

이제는 그가 태어나 자란 봉하마을의 한 곳에 조용히 묻혀 있지만, 그가 남긴 말과 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아직도 이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의 실패와 좌절의 이야기는 남은 자들에게 더 나은 세상, 사람 사는 세상,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 그의 열망을 고스란히 전해줄 것이다. 

그가 세웠던 꿈 '사람 사는 세상'을 국민들은 버릴 수 없다.


* 노 전대통령의 유언 :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 2011년 6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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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로마사이야기 동서문화사 월드북 11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고산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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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5권을 모두 읽은 후, 다른 사람의 관점을 읽어보기도 싶었고 그 유명한 마키아벨리가 썼다는 것에 호기심이 동하여 이 책을 선택하였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와 <군주론>를 읽지 않았다면 마키아벨리의 <로마사이야기(로마사론)>을 읽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시오노 나나미와 마키아벨리의 로마사에 대한 저술은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이야기>는 그렇게 요약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상당한 역사서와 관련 자료, 현장 탐방 등을 토대로 나름 객관적인 로마사를 위주로 책을 썼다면,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중 자신이 선호하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만 발췌하여 이용했다.
그만큼 로마시대에 대한 실질적인 연구가 부족해 보이고 책을 발간한 의도와 목적에 너무 치우쳐서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찌보면 마키아벨리의 <로마사이야기>라는 제목 자체가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마키아벨리가 발간한 책은 대부분 이탈리아 지역의 군주나 교황에게 바치기 위하여 준비했기 때문에 이 책의 제목도 <로마사이야기>이기는 하나, 실제 마키아벨리가 다루고 있는 것은 로마와 더불어 중세 이탈리아, 그리고 투르크 제국까지를 포함할만큼 방대하다.
그리고 마키아벨리의 <로마사이야기>는 3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번역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제1권(역사의 가치)에 60장, 제2권(국가의 조건)에 33장, 제3권(전쟁론과 민중의 힘?)에 49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은 두 세쪽에 불과하다.
 
마키아벨리가 작성한 책의 서문은 "차노비 부온델몬티와 코시모 루첼라이에게 올리는 글"로 되어있다.
마키아벨리는 스스로 자신하는 능력에 비해 그의 고국 피렌체나 교황 등의 신하로 중용되지 못하였고 심지어 군주정에 대한 반란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 고문당한 후 추방되기도 했다.
그런 그의 전체적인 생애의 흐름이 그로 하여금 심혈을 기울여 이 책 <로마사이야기>를 비롯하여 <군주론>, <정략론>, <피렌체사> 등을 준비하여 당시 군주와 권력자들에게 헌정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역으로 그가 자신의 기대와 뜻대로 여러 군주와 권력자들에게 중용되었다면 후세의 전제정치의 교본이 될 그의 다수 저작들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고...)
 
<군주론>에서도 조금 느낀 바 있는데, 마키아벨리는 이 책에서도 ’공화정’에 대해 상당히 선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책 속에서 마키아벨리는 로마 공화정의 시스템과 집정관, 장군들, 로마시민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에 대해 무한한 신뢰와 찬사를 보낸다.
중세 이탈리아 시대의 사회체계도 ’공화정으로 했으면’하는 마키아벨리의 바람이 느껴질 정도다.
그럼에도 이 책 <로마사 이야기>과 더불어 <군주론>은 중세 이후 서구사회에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제정치의 교본이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이야기>와 <군주론>에서 공화정을 동경하고 있음에도 현실적인 정치를 이야기한다. 그에 따라 ’통치론’, ’능력과 운명’, ’책략과 음모’, ’전쟁과 외교’, ’형벌과 자비’, ’자유와 폭압’, ’군주와 민중’ 등에 대한 고대 로마, 그리스, 중세 이탈리아, 프랑스와 독일, 투르크 제국의 다양한 사례를 인용하여 ’군주 정치’의 방식을 제시한다.

 - 체사레 보르자 -
 
마키아벨리의 장점은 ’도덕’이나 ’양심’에 구속받지 않고 체제를 유지하고 전쟁에서 이기고 정치에서 승리하고 원활한 ’공화제’와 ’군주제’를 위한 수단과 방법을 있는 그대로 제시한 것이다.
단점은, 마키아벨리가 상당한 분량을 저술했음에도 번역본을 읽어본 나로서는 책의 구성이나 짜임새가 별로라고 밖에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142개에 달하는 각 챕터는 각 시대별 몇 가지 사례를 인용한 후, 그 사례를 통해 마키아벨리 자신이 의도했던 개념과 주장을 펼치고 있다.
겉으로는 각각의 개념과 주장이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무궁무진해 보이지만 실제 각 챕터가 책 전반에 대해 치밀한 분석이나 평가도 없고 일관된 흐름이나 주장도 보이지 않는다.
어찌보면 ’자의적인 해석’의 연속이라고 할 수도 있어 보인다.
 
약간 의외였던 것이 있는데,
그 하나는 군주의 통치론을 논하면서도 로마시대에 이탈리아의 통일을 이룩했고 강력한 군대와 로마제정의 시스템을 구축한, 그리하여 진정한 군주통치를 가져왔다고 후세에 평가받는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에 대해서는 별로 사례를 인용하지도 않았고 그냥 ’공화정을 무너뜨린 독재자’라고 단정짓고 있다는 것이고
(실제 마키아벨리는 중세의 프랑스, 독일, 스위스, 투르크제국의 전제정치에 대해 찬사를 보낸다.)
두 번째는 마키아벨리 자신이 ’시민’과 ’민중’, ’대중’이라는 개념에 혼란을 일으켜 그 대상이 원로원인지, 시민권자인지, 평민인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과 저서가 후대의 결정과 결과에 책임이 있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마키아벨리로부터 비롯된 ’마키아벨리즘’을 중세 이후 권력자와 정치가, 독재자들이 이용했다고 하여 마키아벨리를 비난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
(앤터리 패럴, " 만일 마키아벨리즘에 비판과 의문이 제기된다면, 인간과 근대성 자체에 대한 의심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한가지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를 공격한다 해도 근대성의 문제로부터 이 세계를 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책과 <군주론>이 불편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 -

* 마키아벨리 어록

- 군주의 지배에 길들여진 민중은 자유를 얻어도 이를 유지하기 어렵다.(p.136)
- 부패한 민중은 자유를 얻더라도 자유를 지켜내기 어렵다. (p.141)
- 군대를 가지지 못한 군주 또는 공화국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p.154)
- 새로운 군주는 모든 것을 새롭게 조직해야 한다. (p.165)
- 로마의 장군은 과오를 범해도 과도하게 처벌받지 않았다. (p.179)
- 공화국이나 군주는 민중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을 지체해서는 안된다. (p.182)
- 인품의 격렬한 변화는 경솔하고 무익한 행동이 되기 쉽다. (p.216)

- 인간이란 얼마나 쉽게 타락할 수 있는 존재인가. (p.217)
- 리더가 없는 대중은 힘이 없다. (p.219)
- 인간의 야심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데에서 원수를 굴복시키는 데로 움직인다. (p.224)
- 인간이란 일반적인 경우는 잘 속지만 구체적인 경우는 잘 속지 않는다. (p.226)
- 어떤 관직이라도 국가의 통치업무를 정지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져서는 안된다.(p.234)

- 민중은 커다란 희망과 과감한 약속에 쉽게 움직인다. (p.241)
- 민중은 뭉치면 대담무쌍하지만 흩어지면 약하다. (p.255)
- 로마인은 외국인을 받아들이고 명예를 주었기 때문에 강한 도시가 되었다. (p.293)
- 돈은 전쟁의 원동력이 아니다.(p.316)
- 경멸과 모욕을 일삼는 자는 오로지 증오를 초래할 뿐이다. (p.394)
- 군주가 손해에 대해 복수하지 않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p.401)
- 다수의 적과 싸우는 자는 처음의 일격을 견디기만 하면 아무리 열세라도 능히 승리한다. (p.485)

- 군대는 단 한 명의 장군을 따라야 한다. 많은 사람의 지시는 위험하다. (p.501)
- 한 번 위해를 가한 사람에게 직책을 주거나 중요한 정무를 맡겨서는 안된다. (p.508)
- 민중의 잘못은 군주에 의해 초래된다. (p.546)
- 한 시민이 공화국에서 자신의 권위로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하고 싶으면, 먼저 질투를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p.548)
- 전투에서 이기게 하려면 군대와 장군에 대해 확신을 갖도록 해야 한다. (p.560)
- 전쟁에서 속임수를 쓰는 것은 명성을 얻을 가치가 있다. (p.583)
- 치욕스럽게든 명예롭게든 조국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p.585)

- 강요된 약속을 지켜서는 안된다. (p.587)
- 같은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은 비슷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 (p.589)
- 자기가 태어난 도시를 사랑하는 자는 조국애로 사사로운 원한을 잊어야 한다. (p.598)
- 적이 빤히 보이는 엉뚱한 짓을 저지르면 반드시 무슨 계략이 있는 것이라고 의심을 하라. (p.598)
- 공화국이 자유를 유지하고 싶으면, 언제나 매일 무엇인가 새로운 방책을 세워야 한다. (p.600) 

번역 자체의 실력이나, 책 소개, 편집 등 출판사가 너무 형편없어 보인다. 책을 발간한 지 오랜 역사가 있음에도 시대에 너무 뛰떨어진다는 느낌이다.  

[ 2010년 11월 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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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선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1
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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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리 버먼(Sheri Berman)의 <정치가 우선한다 Primacy of Politics>를 읽으면서 <공산당 선언>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마르크스 사후에 엥겔스와 카우츠키가 완성하여 각종 조직과 정당에 전파한 ’마르크스주의’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어떻게 다르고 마르크스가 수립한 철학과 방법론은 진정 무엇이었을까... 내 스스로 읽고 생각하고 비교하고 싶었다.
 
지난 2월 21일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노동자 등 민중들을 빈곤과 인간소외로 몰아갔던 자본주의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지 163년이 되던 날이었다. 20세기 초 서구유럽과 전세계에 유령처럼 떠돌다가 20세기 후반 사라져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공산당 선언]으로 시작된 셈이다. 마르크스의 예언과 달리 자본주의체제는 아직도 살아남았고 오히려 ’신자유주의’를 탈을 쓰고 암세포처럼 전세계 구석구석을 잠식하고 있다. 하지만, [공산당 선언]이 발표된 그 당시나 21세기인 지금도 ’민중의 빈곤과 인간소외’는 여전히 지구 대부분의 지역에서 존재하고 있다.
 
오늘날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만큼 자본주의의 은폐된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엄밀하게 비판한 사상도 드물다는 것에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다. 19세기 중반 마르크스는 어떤 사상가보다도 예리한 현실 감각으로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자본의 논리로 야기되는 인간 소외의 문제를 철저하게 분석했다.
 
이 책에는 이데올로기를 현실에 단순히 대립시키는 교저적인 태도를 경계하고, 현실을 개혁할 수 있는 원리를 현실 자체에서 도출해내려는 마르크스의 과학적 태도가 드러난다. 나아가 마르크스는 혁명에 대한 열정과 냉철한 현실 분석으로 인간 해방을 꿈꾼다. 어쩌면 마르크스 사후에 탄생한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의 진정한 문제의식과 인간해방의 꿈, 과학적 방법론과 혁명에 대한 열정 대신에 ’경전’과 ’교조’로서 변질되었는지도 모른다.
 
--------------------- [공산당 선언]이란 무엇인가? -----------------------
공산주의 사상가인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하여 집필된 공산주의자들의 최초의 강령적 문헌으로, 1848년 2월 21일 첫 출판되었다. 19세기 중엽 독자적인 정치 세력으로 무대에 등장한 프롤레타리아에게 그의 역사적 사명과 해방의 앞길을 밝혀 주고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지도적 지침을 확립한다는 목적의식 하에 1847년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하여 초안이 작성되었다. 1847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가입한 의인동맹(義人同盟, Bund der Gerechten)은 공산당선언을 동맹의 정책문서로 채택하였다. 그 해 여름 조직은 재정비되었고 1848년 공산주의자동맹으로 다시 태어났다. ------------------------------
 
이 책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83년에 작성한 <공산주의의 원칙>과 1884년 발표한 [공산당 선언], 그리고 각국 언어의 번역본에 대한 서문, 마지막으로 이진우씨의 ’철학자 마르크스에 대한 해설’이 들어있다.
 
제1부. [공산당 선언] 
- 서문 :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문구로 유명하다.
- 1장.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에서는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발생 과정, 자본주의적 착취의 본질, 자본주의의 기본 모순과 그 멸망의 불가피성을 설명한다. 경제적 이해관계의 대립에 기초한 피착취계급과 착취계급의 계급 투쟁이 인류 역사의 기본 내용이며 사회발전의 추동력이라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가 이룬 막대한 업적을 역설적으로 찬양하였으나, 선언이 쓰여진 시점에서 부르주아는 "명계에서 불러낸 마물을 통제하지 못하게 된 마법사"와 같이 자본의 노예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지배계급도 부르주아지가 아닌 새롭게 떠오른 노동자,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주역이 된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 2장.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당면 과업이 프롤레타리아의 목적과 일치한다고 주장하며 프롤레타리아 주도의 공산사회를 만드는 것이 모든 공산주의자들의 최고목적이라고 밝힌다.
- 3장. [사회주의 문헌과 공산주의 문헌]에서는 기독교 사회주의, 봉건적 사회주의, 유토피아 사회주의, 사변적 사회주의 등의 기존 사이비 사회주의 조류들을 비판한다.
- 4장. [각종 반정부당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태도]에서는 각국 공산당들의 기본적인 혁명 전략을 다룬다. 선언은 국제적 단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공산주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잃을것은 족쇄뿐이고 그들이 얻을 것은 전 세계이다. 전 세계 노동자들이여,단결하라!"라는 구호로 끝을 맺는다.
 
제2부. [공산주의의 원칙]은 1847년 공산주의자 동맹을 위한 강령의 초안을 나타낸다. 엥겔스는 당시 공산주의자 동맹의 런던 소재 중앙본부에서 작성한 공산주의 강령 초안을 매우 상세하게 비판하여 수정안을 교리문답식의 형식으로 작성하였다.
 
제3부. [해제 - 철학자 마르크스, 공산주의에서 공생주의]에서 역자(이진우)는 마르크스가 예언했던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예언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이 반드시 예언의 지식이 잘못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역자는 자신의 삶의 실존 근거가 자신에게 있지 않고 남에게 있거나, 돈과 같은 무형의 것에 있는 것은 ’노예적 삶’이라고 할 때, 현대인들은 과거의 노예들 만큼이나 노예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역자는 마르크스의 생애와 사상적 궤적을 자세하게 다루면서 ’마르크스주의’가 마르크스 사상의 이중성 - 이데올로기와 철학 - 을 왜곡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가 혁명의 열정에 이론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되거나 아니면 현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단순한 방법론으로 경직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마르크스가 이데올로기 이론가, 단순한 사회과학자가 아니라 혁명적 사상가라고 말한다. 마르크스의 예언이 빗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그가 무엇보다 ’인간해방의 문제를 철저하게 사유한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역자는 마르크스의 철학적 방향을 ’현실 속에서 이념을 찾는 것’이라 규정한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그것을 그의 전 생애와 저서에서 관철시켰다고 말한다.
 
역자는 [공산당 선언]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몇 가지 명제, 즉 사적유물론과 계급투쟁, 사적 소유의 폐지에 대해 마르크스를 변호한다.
또한, 역자는 마르크스의 철학과 사회과학 방법론,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등장을 모더니즘으로 이해한다. 
 
 
 
---------- 칼 마르크스는 누구인가? -----------------
독일 트리어에서 태어나 본 대학, 베를린 대학에서 법률·역사·철학을 공부한 뒤 예나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에 기초하여 근본적인 인간 해방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는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파리와 벨기에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결국 추방되어 사망할 때까지 영국에서 살았는데, 경제학 연구에 몰두했다. 주요 저서로는 엥겔스와 함께 쓴 『공산당 선언』을 비롯하여, <자본론>, <임금 노동과 자본> 등이 있다. ---------------------------------
 
-----------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누구인가? -------------------------
독일 라인 주 바르멘에서 방직 공장주의 아들로 태어난 엥겔스는 아버지의 뜻에 의하여 브레멘 상사에서 일하면서도 ’독일통신’에 지배계급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듣기도 했던 그는 영국의 맨체스터로 건너가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를 깊이 연구하였고 차티스트 운동 관련자들과 연계를 맺었으며 영국의 출판물들에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1844년 독일로 가던 중 파리에서 칼 마르크스를 만났으며, 이때부터 마르크스와 함께 혁명적 활동을 하게 된다. 마르크스 개인의 생활을 적극적으로 돕는 한편 1846년에는 마르크스와 함께 제1인터내셔널을 창건에 가담하였으며, 마르크스가 죽은 후(1883년)에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이끌며 1889년에는 제2인터내셔널을 창건하였다. ------------------------------

 
25년 만에 <공산당 선언>을 다시 읽었다. 25년 전 선언문을 읽었을 때 이해와 느낌이 당연히 지금과는 많이 다르다. 당시에도 마르크스 저작을 충분히 많고, 심도있게 공부하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내가 섣불리 그의 사상과 학문에 대해 평가를 하거나 판단하는데 있어서는 조심스럽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를 이해하는 것과 마르크스를 이해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는데 동의한다. 특히, 지금까지 한국에서 사상적, 이념적 편향이 없이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마르크스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21세기에는 진정으로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성역 없이 보장되어야 하듯이, 사상과 학문의 자유 역시 예외 없이 보장되어야 한다.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해는 소크라테스, 라이프니치, 니체, 칸트, 헤겔 등 서양의 철학과 철학자에 대한 이해의 연장선에 존재한다. 정치적인 이유나, 이데올로기적인 이유로 역사와 학문을 배격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뿐더러 국가적, 국민적인 권리와 이익에도 불리하게 작용하게 된다. 이는 반일 감정을 이유로 서울대학교에서 일본어와 일본학이 정규 학과로 개설되지 않은 역사와도 동일한 맥락이라 생각한다.
 
마르크스의 진정한 업적은 인류의 역사를 경제적, 물질적 관점에서 조명한 점,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고 억눌렀던 인류의 역사를 드러낸 점,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의식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해 고찰한 점, 사적소유와 자본주의 경제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인간소외를 비롯한 인간에 대한 애정, 인류 역사에서 피지배층과 무산층의 정치적 의지를 북돋운 점 등을 들 수 있다.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의 실험이 실패했다고 해서 마르크스의 철학과 사회과학이 틀렸다고 할 수 없다. 중국과 인도의 사회주의가 실패했다고 할 수 있을까? 쿠바는? 북한식 사회주의와 남한식 자본주의를 옳고 그름으로, 맞고 틀림으로, 선과 악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이러한 마르크스의 업적은 그의 사후 100년 넘도록 동서양을 통틀어 세상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문제제기와 미래에 대한 비전은 정치, 경제 영역 뿐 아니라 환경, 생태, 공동체 등의 영역에서 다양하게 계승, 발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서구 지식세계와 철학에서 계속 보이는 이원론은 여전히 개운치가 않다.  
 
[ 2011년 5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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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나좀 도와줘 - 노무현 고백 에세이
노무현 지음 / 새터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5월 23일은 노무현 전대통령이 서거하신 지 만 2년이 되는 날이었다. 지금도 나 뿐 아니라 많은 한국 사람들이 당시의 충격에서 모두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일부 사람들의 경우 2009년의 충격과 기억이 일상생활에서는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이, 그것도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함으로써 자신의 뜻과 희망을 펼친 것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일종의 ’트라우마’로서 무의식 속에 남아있을 수 밖에 없다.
 

2009년 나 역시 그런 충격과 트라우마, 그리고 죄스러운 마음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작년 5월 초순 경에 김해 봉하마을에 직접 갔다 왔다. 노대통령의 생가도 둘러보고 부엉이 바위에도 올라가 한참을 봉하마을을 내려다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기도 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노사모’에 가입해 활동하거나 노무현 후보의 선거운동에 그다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물론, 노대통령이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을 때 마음 속으로 기뻐했고 국정을 잘 운영하여 민주주의와 진보의 가치를 구현하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국정운영 과정에서도 조금씩 느꼈지만 서거 이후에 뼈저리게 느낀 것은 대부분 지지자들의 ’수동적’이고 ’대리만족적’인 정치의식이 스스로를 방관자이자 구경꾼으로 만들었고 노전대통령의 국정 운영에도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채 방해만 했다는 점이다. 나 역시 노전대통령의 국정운영에 거리를 두고 혼자만의 먹고살기에 치중했고 이슈가 되는 사안에 대해 깊숙하게 고민하기 보다 즉흥적인 감각과 판단, 주변 사람과 여론의 동향에만 의존했을 뿐이었다.
 

이 책은 노전대통령 서거 2주기를 맞이하여 늦게나마 그 분의 인생역정과 생각, 철학, 정책을 알아보기 위함이고 참여정부에 대해 나 스스로 냉정하게 공과를 따져보기 위함이다. 그것은 다시는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싶다는 내 마음 속의 이성과 감성이 작동한 것이라 받아들인다. 앞으로 이 책을 비롯하여 노전대통령이 직접 관여한 책 몇 권과 그 분과 관련한 책 몇권을 연이어 읽어볼 계획이다.
 

<여보, 나 좀 도와줘>는 노전대통령이 정치계에 몸담은 지 7년 째, 1993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최연소 최고위원으로 선출된 이후 지지자들과 국민들에게 자신을 남김 없이 있는 그대로 알려주기 위함이었고 대화를 시도한 책이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 당시 고집스럽게 세 번째로 부산에서 출마해 낙선하였고 그 해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고 193년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정치인 생활 7년 동안 자신이 "무엇 하나 제대로 생산해낸 것이 없어 보이는 듯한" 정치활동을 해왔고 그 기간에 대한 회고는 "항상 체증과도 같은 무언가의 답답함을 내 가슴 속에 남기기 일쑤"였다. 결국 노전대통령은 그 이후 "이대로 편안하게 주저앉아 있을 수 만은 없다는 생각에 펜을 들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물론, 한국 정치상황에서 낙선 정치인으로 정치자금을 모으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자력’으로 자금을 벌어보겠다는 의지도 일부 작용했고...


정치인 노무현이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집권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이 책은 비록 대통령 당선 시점에서 8년이나 전에 발간된 것이지만, 그 힘의 ’맹아’를 보여주고 있다.


제1부. [여의도 부시맨]에서는 1988년부터 노전대통령이 의정활동을 진행한 4년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변호사는 본래 그렇게 먹고삽니까?" 그가 변호사 시절 변호사의 특권과 관행을 이용하여 어느 아주머니에게 비난을 받고 나중까지 고통으로 남아있던 일화에서 들은 이야기다. 그는 과거 자신이 잘못했던 그 사건을 밝히고 용서를 구함으로써 글을 시작한다. 그 외에 1988년 청문회 전후의 상황과 자신의 생각, 1992년 낙선을 둘러싼 소회들, 1989년 의원직 사퇴 파동과 1990년 ’3당 합당’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제2부. [잃어버린 영웅]에서는 당시 한국 민간정치의 양대 산맥이었던 김영삼씨 및 김대중씨와 노전대통령 사이에 있었던 일화들과 노전대통령이 양 김씨를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는지를 이야기한다.
노전대통령은 김영삼씨를 ’탁월한 조직의 보스’, ’침묵으로 말하는 정치 9단’으로 평가를 내린다. 그리고 김영삼씨가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보여준 정치인으로서의 모습이 ’기회주의자’들에게 하나의 모델을 선사함으로써 정치 뿐 아니라 국가와 사회 전반에 심각한 폐해를 끼쳤음을 비판한다.
김대중씨에 대한 노전대통령의 평가는 ’아까운 존경스러운 지도자’이다. 하지만 1992년 대통령 선거 패배 후 정계은퇴를 선언한 김대중씨가 복귀할 경우 그런 지도자의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라고 우려한다.(결국 김대중씨는 1995년 7월 정계에 복귀했다.)
노전대통령 입장에서는 김영삼씨와 김대중씨 모두 한국 정치를 불신과 냉소, 기회주의와 결과주의를 낳은 원흉으로 평가될 수 밖에 없다.

제3부.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는 평범한 정치인으로서, 한 가정의 가장이자 남편, 아버지로서 자신이 느끼고 고민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제4부. [내 마음의 풍차]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정치에 입문하기까지 여러가지 일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노동자와 서민을 대변하기 위해 정치에 뛰어들었다는 노전대통령... 그는 ’어머니’ 노래 가사를 통해 자신이 이후에 핵심으로 삼은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를 염원하는 뜻을 내비친다.

이 책 안에 나타나는 1994년의 노전대통령은 순수하고 원칙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치인에 불과했다. 노동자와 서민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고 정직하고 솔직하게 자신을 내보이고 불의나 돈에 굴복하지 않는 그의 모습... 노전대통령의 이미지 그대로 소탈하고 소박한 얼굴이 책 장 속에서 느껴진다. 이런 그 의지와 생각을 1995년 이후에도 꾸준하게 유지해갔던 것이 국민들에게 지지와 성원을 받은 풍차,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떤 점이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과 참여정부의 부족했던 결과를 잉태하고 있었을까?....

[ 2011년 5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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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와 반역의 천년제국 - 비잔틴 제국 타임라이프 세계사 10
타임라이프 북스 지음, 권경희 옮김 / 가람기획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비잔틴제국’에 대해 다루고 있다.
로마사 이후 ’로마제국’과 ’그리스 문화’,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뒤섞여 천년이라는 세월의 풍파를 이겨낸 ’비잔틴 제국’을 알고 싶었다.
 
서기 476년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가 퇴위당하면서 서로마제국이 사라진 후, 살아남은 동로마 제국을 후세의 역사가들이 ’비잔틴 제국’이라 불렀다.
비잔틴 제국(the Byzantine Empire)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재위기간 서기 306~337년)가 비잔티움이라는 보스포로스 해엽의 소도시를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을 바꾼 후 제국의 수도로 정한 서기 330년부터 성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 비잔틴제국 당시의 지도 ]

[ 성모에게 콘스탄티노플을 바치는 콘스탄티누스와 하기아소피아 성당을 바치는 유스타니우스 황제 ]
 

이 책은 출판사가 [타임라이프 세계사]라는 이름으로 발간한 18권의 시리즈 중 10번째 책으로, 출판사는 "권위 있는 저자와 엄밀한 고증, 입체적인 구성, 풍부한 컬러 도판으로 당시 역사를 생생하게 되살려냈다."고 설명한다.  
미국의 ’타임라이프 북스’에서 펴낸 이 시리즈는 1997년부터 3년에 걸쳐 완간했으며, 인류 문명의 탄생에서 성장까지 인류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일종의 역사서라 설명한다.  
책 속에 칼라 도판이 여러 장 들어있어서 독서 완료 후 시각적인 이미지를 남길 수 있다.
 
이 책은 ’역사서’라는 출판사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역사 편집본’이 더 어울린다. 
’비잔틴 제국’에 대한 편년식 역사과정에 대한 서술도 없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반적인 제국의 모습을 담아내지도 못한다.
책의 제목처럼 출판사가 판단하기에 독자들이 ’비잔틴 제국’의 역사 중에서 호감이 갈 만한 사안(예를 들어 ’음모’와 ’배신’처럼...^^)을 모은 것처럼 보인다.
결국 칼라사진에 현혹된, 잘못된 선택이었고 제대로된 비잔틴 제국의 역사를 다룬 책을 고심 끝에 구입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1장에서는 바실리우스의 치세부터 황제 자리를 놓고 벌이는 권력 다툼, 화려한 궁정 생활, 외교의 대가라고 불렸던 비잔틴 인들의 뛰어난 외교술을 살펴볼 수 있다.
비잔틴 제국의 황금시대를 연 바실리우스는 미카일 3세를 암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비단 바실리우스뿐만이 아니라 천년 세월 동안 비잔틴에서는 황제의 관을 쓰기 위한 사람들의 치밀한 계략과 암투가 끊이지 않았다.
황제는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지상 최고의 권력자이자 신성한 신의 은총과 허가를 받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비잔틴 제국을 군사력, 정치력 그리고 상업적인 힘의 측면에서 최강으로 만들어놓았던 황제들의 업적을 살펴본다. 
[ 하기아 소피아 성당 내부 ]

[ 테오도라 여제 ]




2장에서는 콘스탄티누스에게 최상의 교육을 받게 해주려고 했던 어머니 테오도라의 눈물겨운 헌신과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가정을 중심으로 하여 그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꼼꼼히 살펴본다.
콘스탄티노플은 다양한 문화를 녹여내는 용광로이자 100만 인구가 거주하는 도시로, 언제라도 72개국 언어를 들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이렇듯 제국의 중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은 동과 서의 무역 교차로였으며, 500개가 넘는 교회들 중에서도 단연 아름다운 교회인 하기아 소피아가 이곳에 있었고, 여기에서 종교생활과 의식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 화려한 성찬식 소품 ]

[ 화려한 장신구 ]

[ 화려한 향로 ]

[ 화려한 비단 ]


3장에서는 무솔리우스라는 병사를 등장시켜 비잔틴 제국의 군사력과 병사들의 생활상, 전쟁터에서의 활약상을 보여준다.
또 거대했던 비잔틴 제국이 몰락해가는 과정과 콘스탄티노플을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지켜내려 했던 콘스탄티누스 11세의 힘겨운 싸움도 볼거리를 제공한다.
비잔틴 제국은 황제 바실리우스 2세가 죽기가 무섭게 투르크 전사들에 의해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점령당한다.
결국 비잔티움은 십자군이 침략하면서 치명적으로 약화되었고,
그후 마지막 적 오스만투르크 인 들이 포위했을 때 더 이상 콘스탄티노플을 지켜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비록 비잔틴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지만, 그들의 종교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 전 세계에 수억만 명의 동방정교회 신도들이 있으며, 제국의 옛 영토의 수도원에서 이들의 예배는 계속되고 있다.  
[ 바살리우스 황제 ]

[ 오스만튀르크에 공격당하는 콘스탄티노플 ]

[ 카타리나 수도원 ]

[ 시모 페트레나 수도원 ]



아직, 천년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었던 비잔틴 제국의 성격과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 비잔틴 제국의 특징과 역사(위키백과 사전에서 추려냄)
 

- 여러 역사지도에서는 기원후 395년에서 610년까지 제국을 서술할 때는동로마 제국이라고 쓰는데, 610년에 헤라클레이오스 황제가 제국의 공용어를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바꾸었기 때문이다.(당시 이미 인구 대다수가 그리스어를 썼다.)
그리고 기원 후 610이후의 지도에서는비잔티움 제국이라는 표현이 많이 쓰인다.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용어는 역사가들이 지어낸 말로, 제국이 있던 당시에는 전혀 쓰이지 않는 말이었다.
 
-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자신을 로마의 통치자, 즉 옛 로마 황제의 후계자이자 상속자로 여겼다.
그 주민들은 인종적으로는 그리스인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스스로 그리스인(그리스어: Ἕλληνες, 헬레네스)이라고 하지 않고 로마인(그리스어: Ρωμαίοι, 로마이오이)이라고 불렀다.
 "비잔티움"이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천도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옛 이름인 비잔티움에서 나온 말이다. 이때부터 제국 수도의 옛 명칭은 역사서나 시문 외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이 제국을 "비잔티움"이라고 칭하게 된 것은 1557년 서유럽에서 독일인 역사가 히에로니무스 볼프가 비잔티움 제국의 사료를 모은 비잔티움 역사집(Corpus Historiæ By­zantinæ)을 출간하면서 시작되었다.
 
- 비잔티움 제국은 스스로를 ‘로마 제국’이라고 칭하고 있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은 ‘문명 세계 모두를 지배하는 대제국’이며 ‘하느님에 의한 최후의 심판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 되는, 지상의 마지막 제국’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고대 로마제국의 수준 높은 이념과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거기에 종교적 권위와 오리엔트적인 전제정치를 더하여 매우 엄격한 전제 군주적 황제권과 관료정치를 시행하였다.
  
- 비잔티움의 황제는 원로원, 시민, 군대에 의해 추대되어 지상을 책임지는 하느님의 대리자이고 제국은 천국의 예표이며, 최후의 심판이 때까지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도록 하느님이 임명한 하나의 후견인으로서 사도들과 대등한 종교적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황제는 정치·군사·종교 등에 대해 무한적인 절대권력을 휘둘러 왔으며, 제국의 백성들은 스스로 황제의 노예임을 자청하며 오로지 그의 은혜만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였다.
 
- 비잔티움 제국은 중세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전제 군주제 국가였으며, 한때 활발한 정복사업을 통해 로마제국의 고토를 거의 되찾아 광활한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여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심지어는 중동지역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아시아와 유럽, 흑해, 그리고 에게해의 무역로에 자리잡고 있어 제국의 경제는 세기 동안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다.
더불어 비잔티움 제국은 사산 왕조페르시아와 아랍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서 유럽과 기독교 문명세계를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까지 하였다.
그러나 점차 영토를 잃었으며, 12세기에 콤네노스 황조가 영토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나 제국은 오랜 쇠퇴기에 접어 들어 결국 15세기에 오스만 튀르크의 침공으로 멸망한다.

[ 2010년 11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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