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없는 사회 - 타율적 관리를 넘어 자율적 공생으로
이반 일리히 지음, 박홍규 옮김 / 생각의나무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엇그제만 해도 옹알거리며 말을 배우기 시작한 것 같던 딸 아이가 벌써 5학년이다. 
아이는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받고 있고 요즘에는 종종 방과후 프로그램도 학교에서 받고 있다. 학교 담임선생이 정기적으로 지시하는 숙제가 있다. 그리고 초등학생이지만 일주일에 2번 영어학원(작년에는 일주일에 3번이나 영어학원에 가야 했다.), 음악학원 1번을 간다. 이외에 아이 엄마는 별도로 아이에게 한자 공부를 시키고 있고 가끔 수학이나 과학숙제도 시킨다. 걸스카우트까지 가입하여 한 달에 한 두번 관련행사에 참여한다.
아이가 아빠와 놀러 왔을 때에도 늘 숙제를 안고 왔고 컴퓨터 게임을 하던, 퍼즐놀이를 하던, 애니메이션을 보던 아이는 하루종일 숙제 노트를 끼고 있다.
아이가 낑낑대고 있는 숙제를 가끔 들여다 보면, 초등학교 4,5학년 수학과 영어, 기타 과목의 수준은 우리 세대가 중학교에서 배우던 정도에 해당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전반적인 초중고의 수업 난이도가 30년 전보다 높아졌다. 아이들의 성숙도나 지식, 지혜의 수준이 더 높아진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아이 엄마가 우리의 부모처럼 ’아이를 통해 자신의 한을 풀려고’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녀 역시 ’모두가 사교육을 받고 있는 현실’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의 현실은 꽉 짜여진 구조 속에 놓여있다. 
30년 전에 아이들이 무언가를 배우고 익힐 때 그들은 거의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부모들이나 형제들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에서 배웠고 아이들끼리 동네에서 각종 놀이와 게임을 통하여 사람들과 어울리고 대화하고 협의하고 규칙을 배우고 만들고 실행했다. 4계절 내내 계절과 조건에 맞는 놀이가 존재했다. 동네 골목과 인근 놀이터와 공터, 논과 밭, 들과 야산, 농수로와 하천은 언제든지 아이들의 놀이공간과 배움의 공간으로 제공되었다.
하지만, 이제 도시의 아이들에게 제공된 놀이공간과 배움의 공간은 거의 없다.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는 유치원 이전의 유아들이 어울려 놀 수 있는 정도이고 유치원 정도의 아이들부터는 어울리고 놀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그런 공간은 유치원에서 별도 학습비를 받아 단체로 다녀야 하거나 부모들이 주말에 이동수단을 통해 아이들을 데리고 멀리 움직여야 했다. 유치원이나 학교가 끝난 후에 아이들이 갈 곳은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공간을 사교육이 장악했다. 1990년대에는 강남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 학부모들이 사립중학교와 사립고등학교, 또는 특목고나 8학군을 목적으로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고 단기 유학을 보내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그러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어느정도 경제력이 되는 학부모들이 강남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사교육은 삽시간에 수도권으로 전파되었다. 
이제는 아이들이 오후 시간과 저녁 시간에 어울릴 수 있는 친구들이 없기 때문에 학원에 보내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학부모의 경제력 수준이 아이의 학원 수준과 학원의 갯수를 결정한다. 방학 동안의 단기 해외체류나 장기 유학 역시 부모의 경제력이 결정한다. 부모의 경제력이 부족한 학생들은 스스로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여 돈을 모은후 유학을 가거나 워킹 할리데이를 떠난다. 그렇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학생들의 평균 학습수준은 평준화를 향해 달린다. 오로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이자 목적이다. 학부모들에게도 학생에게도 다른 교육은 중요하지 않다.
비슷한 교육을 받고 비슷한 학원을 다니고 비슷하게 해외에 갔다 오면 전체적인 학생들의 수준은 비슷해진다. 모두가 특목고나 일류 대학이 목표다. 어차피 대학의 입학정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상대평가로 학생들은 걸러진다. 일류대학와 이류대학의 차이는 없다. 한국의 대학은 어차피 멕시코의 주요 대학, 중국의 주요 대학의 경쟁상대가 아니다. 대학의 질이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상대평가로 들어온 학생들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것도 특별한 차이도 아니다. 수 십만명의 대학 입시생들 중 1만명 정도까지 끊어서 서울대와 연고대를 가게 되는 것이고 그 뒤에도 그렇게 입학정원에 따라 학생들이 서열이 매겨진 대학에 들어간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취업을 위한 무한 경쟁이 또 다시 시작된다. 한국의 경제 시스템은 저고용 구조다. 고용 역시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추세다. 정부와 기업은 아직 그런 구조를 바꿀 생각이 없다. 이 한정된 취업을 위해서 도 다시 대학생들은 1학년부터 경쟁을 시작한다. 안정된 직장으로 분류되는 공무원과 공기업 채용에 수백, 수천대 일의 경쟁이 일어난다. 그렇게 공무원이 될 바에야 무엇하러 4년 동안 수 천만원을 들여 대학에 입학하는가? 대학에는 학문도 진리도 없다. 비싼 등록금만이 있을 뿐... 

요즘 ’반값 등록금’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끌벅쩍하다. 오늘 처음으로 청계광장 집회에 참석하면서 마음 한 구석에서 착잡한 느낌이 들 수 밖에 없었다. ’반값 등록금’ 문제는 등록금 액수의 문제만은 아니기 때문이고 한국에 민주화를 이룩해 냈다는 486세대의 자부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절차적 민주화 이외에 더 국민들에게 중요한 경제적, 제도적 민주화는 아직 요원하다. 오히려 양극화와 교육문제의 경우는 486세대가 음으로 양으로 확대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등록금 문제는 오로지 대통령 당선과 국회 장악을 위해 정치적으로, 포퓰리즘으로 선언한 정책이 부메랑이 되어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에게 날아왔다. 당장 수 백만원의 등록금을 납부해야 하는 대학생들과 학부모들이야 ’반값 등록금’이 실현되면 가계 형편이 나아질 것이다.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신용불량자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반값’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왜 등록금이 그렇게 높아야 할까 근본적으로, 구조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취업을 목적으로 학생들을 받아들인 대학과 사학재단에게 물어야 한다. 취업이 되지 않았으니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고? 무차별하게 대학설립을 허용한 정부에게 따져야 한다. 실업과 가난을 책임지라고!! 

무엇이 문제일까? 무엇을 놓친 것일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1971년에 처음 발간된 이 책은 ’교육’을 둘러싼 전반적인 구조와 역사, 세계관과 문화를 이야기한다. 학교와 대학, 교육과 배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반 일리히는 학교를 단순히 교육이나 배움이라는 문제를 넘어서 국가와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제도와 시스템의 시각으로 이해해야 함을 주장한다.
 
나는 작년 11월에 저자가 1973년에 처음 발간한 <성장을 멈춰라>를 읽었다. 저자는 그 책에서 근대 서구사회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무한한 진보’와 ’무한한 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현대 사회를 구조적으로 파탄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무한한 성장은 결국 "권력을 양극화하고 좌절을 보편화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양식 또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떠나 근대 산업사회 경제방식이 결국 인류와 생태계를 자멸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학교 없는 사회> 역시 근대적인 경제방식이 가져온 또 하나의 시스템이자 제도이자 문화이다. 
 
----------------- * 이반 일리히는 누구인가? ---------------------------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했다. 열한 개의 언어를 익히고 신학과 역사학과 화학분야의 학위를 갖고 있으면서도 항상 떠돌이 학자를 고집한 그의 장기는 기존학자들과 ’전문가’들의 주장에 ’구멍을 숭숭’ 뚫어놓는 것이었다. 학교에, 의료체제에, 국가의 원조체제에, 종교계와 정치계에 관해 그가 던진 학설은 발표될 때마다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의 격한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형식적인 모든 의례를 거부하는 사람이다. 그는 1951년 정치 망명객이자 신부의 신분으로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교회고위직의 승진코스를 추구하기보다는 푸에르토리코지역에서 보좌신부로 일하며 빈민과 함께 사는 삶을 택한다. 이후 1956년부터 1960년까지 푸에르토리코의 가톨릭대학교 부총장을 지내지만 점점 정치적이 되어가는 교회의 정책에 반대하며 교황청과 마찰을 빚다가 1969년 사제직을 떠나게 된다.
본격적으로 세상에 그를 알리게 된 계기는 아마 CIDOC이라고 알려진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를 설립하고 나서일 것이다. 이곳은 한편으로는 어학기관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의 여러 현실과 그 문제점을 생각하는 지식인들과 평신도 종교활동가들이 모여 토론을 나누고 수많은 책과 소책자들을 출간해내는 싱크탱크이자 전진기지였다. 이곳에서 그는 소위 선진국들의 개발원조에 반대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한편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교회가 신성하게 여기는 모든 것과 충돌하였다. 이 활동은 말 그대로 성공적이었고 그로부터 몇 년 후 일리치는 바티칸으로 소환되어 사제직을 떠나게 된다.
그 후 일리치는 "학교 없는 사회", "성장을 멈춰라", "병원이 병을 만든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그림자 노동" 등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글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카셀 대학과 괴팅겐 대학에서 유럽중세사를 강의하며 저술과 강의활동에 전념했다. 이 후 그의 관심은 12세기를 중심으로 한 과거를 기준삼아 현대사회를 되돌아보는 일에 기울었으며 그 결과로 나타낸 책이 "텍스트의 포도밭에서"이다. 현실의 문제를 보기 위해서는 그 이면을 직시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와 전통으로 돌아가 성찰해야 한다는 그의사유방식은 이후 아나키스트와 녹색운동가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 사상가, 환경운동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교육학, 역사학, 정치학, 언어학, 의학, 여성학, 종교학, 문학을 넘나들며 시대를 여행하는 그의 강의방식 역시 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나 정작 일리치 자신은 행동을 촉구하는 소책자운동만을 펼쳤을 뿐 그의 사상을 집대성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소규모 청중을 위한 강연이 아닌 방송을 통한 인터뷰를 공식적으로 거부한다. 그 후 15년이 넘도록 어떠한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던 이반 일리치를 대담으로 끌어 낸 사람은 캐나다 CBC 방송의 데이비드 케일리이다. 집요한 설득 끝에 이뤄진 이 대담은 1988년에 시작됐고 이후 1992년까지 여러 차례 이어졌다.  ------------------------------ 

 1978년 처음 이 책 <학교 없는 사회>에 대한 한국판 번역이 <탈학교의 사회>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리고 그 뒤 1984년까지 3번이나 더 출간되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한국에 출간된 것은 2004년이었다. 우연하게도 제3세계 여러나라에서 이 책은 1980년대 중반까지 번역되어 출간되었다가 그 이후 사라졌다. 역자인 박홍규 교수는 1980년대 중반까지 보수적인 어용학문에 대항하는 유효한 무기로 사용되었다가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 관심이 사라진 것이 배경이라고 추측한다.
박홍규교수가 2009년 새롭게 이 책을 번역하여 출간한 이유는 여러가지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박교수가 이반 일리히의 사상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고 한국의 사회문제와 교육문제에 대한 이반 일리히의 근본적인 문제제기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히는 학교의 존재가치 자체를 부정했고 나아가 사회 자체가 학교화된 것까지 부정했다. 

-------------- * 박홍규 교수는 누구인가? --------------------
오사카 시립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하버드 로 스쿨 객원교수를 역임한 바 있다.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로서 영남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전공뿐만 아니라 인문,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한다. 여러 예술가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의 평전과 역서들을 출간하고 있는 저자는 영국의 진보적 사상가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를 조명한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와 사상], 베토벤의 삶과 음악 세계를 새롭게 해석한 [베토벤평전: 갈등의 삶, 초원의 예술], 오페라를 그 시대 정치와 사회의 관점에서 살펴본 [비바 오페라], 빈센트 반 고흐의 예술 세계를 그린 [내 친구 빈센트], 루쉰의 사상과 문학 전체를 넓은 시야에서 조망한 [자유인 루쉰], 자유 학교를 위한 순교자로 알려진 페레의 생애를 쓴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마라] 등의 책들을 집필하였으며,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대상 저작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등을 국내에 처음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간디자서전], [문화와 제국주의] 등의 책을 번역했다. --------------------

이반 일리히는 1958년 미국 교육학자인 에버릿 라이머(Everett Reimer)를 통해 처음 학교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뒤 일리히는 학교를 통해 보편적인 교육을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새로운 교육내용을 ’주입’하는 방법을 추구하는 추세를, 그 정반대의 제도 추구, 즉 개개인의 삶의 모든 순간을 공부하고 나누고 돕는 순간으로 바꾸도록 고양시키는 교육’망’ 형성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 [왜 학교를 비국가화해야 하는가]에서 일리히는 학교가 과정과 실체를 혼동하도록 ’학교화’한다고 주장한다. 과정과 실체가 혼동되면 새로운 논리, 즉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 좋은 결과가 생긴다든지, 단계적으로 올라가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식의 논리가 생겨난다. 그런 논리로 인하여 ’학교화된’ 학생들은 수업을 공부하고 학년 상승을 교육이라고 졸업장을 능력의 증거라고 능변을 새로운 것을 말하는 능력이라고 혼동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학생의 상상력까지도 학교화되어 ’가치 대신 서비스’를 받아들이게 된다. 즉 병원의 치료를 건강으로, 사회복지를 사회생활의 개선으로, 경찰보호를 사회안전으로, 무력균형을 국가안보로, 과당경쟁을 생산적 노동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 결과 건강, 공부, 존엄, 독립, 창조 자체는, 그런 목표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강변되는 제도의 수행보다 열등한 것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병원, 학교, 기타 시설을 운영하는 데에 더 많은 자원을 퍼부어야 건강, 공부, 존엄, 독립, 창조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p.24) 가치는 사라지고 제도가 가치를 대신해버리게 된다는 말이다. 
일리히는 그러한 ’가치의 제도화’가 반드시 물질적 오염, 사회적 양극화, 심리적 무능화를 초래한다고 보여준다. 이 세가지는 지구의 붕괴와 현대적 비참함을 초래하는 과정이다. 일리히가 ’가치의 제도화’를 주장한 지 정확하게 40년이 지났고 우리는 한국사회 곳곳에서 ’가치가 제도화되어버린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 

우리 역시 ’학교에 다녀야만 공부가 가능한가?’라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일리히의 지적처럼 실제로 우리는 그다지 학교에서 배운 것이 없음을 기억하고 있다. 말과 글, 도덕과 규칙, 계산과 논리, 자연과 기술, 의사소통과 협조 등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은 학교가 아니라 학교 밖에서, 즉 가족과 동네에서, 교사가 아니라 친구와 선배, 어른들로부터 배웠다. 요즘은 가정과 가족보다 TV와 인터넷이 더 큰 역할을 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일리히가 문제제기한 1960년대의 미국과 멕시코의 ’학교화’와 학교의 무능한 모습은 2011년 한국의 ’학교화’가 학교의 무능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학교화’는 학교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 역시 21세기의 진실이다. 

2. [학교의 현상학]에서 일리히는 ’학교’를 특정 연령층에게 의무적 교육과정의 전일제 출석을 요구하는 교사와 관련된 과정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학교는 겨우 20세기 들어서 유럽에서 시작된 것이고 동양에는 20세기 중반에서야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3. [진보의 의례화]에서 일리히는 ’학교’가 ’끝없는 소비라는 신화’를 전수한다고 주장한다. 학교는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수업이 공부를 생산한다고 가르친다. 가치있는 공부는 수업 참가의 결과이고 공부의 가치는 투입량에 따라 증가하며 마지막으로 이 가치는 성적과 졸업장에 의해 측정되며 문서화된다고 배우고 확신한다. 우리가 학교가 필요하다고 배우고 동의하게 되면, 우리의 모든 활동은 각각 전문화된 여러 제도에 소비자가 의존하는 모습을 갖게된다. 그 과정을 통해 근대적인 생산양식, 소비사회에 필요한 수요자를 양성시키고 꿈과 미래를 정형화시킨다.(p.91)
사람들이 학교화돼 가치가 생산될 수 있고 측정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들은 모든 종류의 등급화를 수긍하게 된다. 즉 국가의 발전을 측정하는 척도, 아기의 지능을 재는 척도, 심지어 평화를 향한 과정을 전사자의 수로 계산하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유학을 가거나 석사, 박사 학위를 받으면 학사 졸업자보다 더 유능하고 뛰어난가? 아이들을 더 잘 가르치는가? 더 올바르고 도덕적으로 행동하는가?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4. [제도 스펙트럼]에서 일리히는 사회의 모든 제도가 제조와 파괴, 생산가 소비만을 반복하는 생활방식인 조작적 제도와 자발적이고 독립적이면서도 상호 관련된 생활방식인 공생적 제도라는 두 가지 극단이 존재한다고 정의한다. 산업적 관료사회 이후를 향해 가는 현재로부터, 산업화 이후의 자율 공생사회라는 미래 즉 행동의 강도가 생산을 능가하는 미래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서비스 제도 양식의 개혁, 그중에서도 무엇보다도 교육 개혁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p.114)

5. [부조리한 일관성]에서 일리히는 학교에서의 수업과 졸업장이 ’공부’를 정의하는 ’제도의 가치화’를 근본적으로 제고하지 않는 어떠한 교육개혁이나 새로운 수업방식은 모두 ’학교화’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한다.

6. [공부망]에서 일리히는 ’학교화’를 거부하고 진정한 ’공부’의 가치를 이룩하기 위한 대안으로 ’공부망’을 제시한다. ’공부망’을 위해서는 교육적 목적을 위한 참고서비스, 기능 교환, 동료 연결, 넓은 의미의 교육자를 위한 참고 서비스가 접근법으로 필요하다. 

7. [에피메데우스적 인간의 부활]에서 일리히는 프로메테우스를 욕망과 가치의 제도화에 대한 신화속의 인물로 묘사하면서 그의 동생인 에피메테우스를 통해 균형, 조화, 가치 중심의 인간형의 부활을 이야기 한다. 

박홍규교수가 선택한 ’학교 없는 사회’라는 제목도 이반 일리히의 본 뜻을 100% 담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일리히가 이야기하는 ’Schooling’은 ’학교화’라는 의미로 일리히가 만든 단어라 할 수 있다. ’학교화’라 함은 ’학교’를 제도화함으로서 ’공부’와 ’배움’을 독점하고 그에 따라 학교를 다니는 것이 마치 공부를 잘하게 되고 배움이 커지는 것 처럼 인식된다는 의미다.
즉 ’가치의 제도화’를 의미한다.
일리히에게는 ’학교화’는 배움-학교 뿐 아니라 건강-병원, 안전-경찰, 안보-군대, 부자-GDP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Deschooling’이라 함은 ’학교화’의 반대이고 ’학교화’를 거부하고 저항하고 거기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따라서 ’Deschooling Society’는 ’비학교화된 사회를 의미하는 것이고 사회를 ’비학교화’하여 ’제도가 가치를 독점’하는 현상을 극복하여 가치 그 자체를 스스로, 공생적으로 확보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학교 없는 사회(2009)>의 1/3은 박홍규 교수의 해설에 할애하고 있다. 사실 일리히의 번역본 원문은 꽤 난해하다. 박교수의 해설 부분이 없었다면 책의 내용 중 상당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주요 핵심을 얻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었다. 박홍규 교수는 친절하고 알기 쉽게 이반 일리히의 주장과 생각을 정리해 주었다.
일리히의 주장의 요점은 일률적인 기계식 의무교육 및 고급교육이 결국 계급을 정당화하고 부와 권력의 불평등성을 심화시키는 것이므로 부당하다는 것이다. 부만이 아니라 권력도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학교교육에 대한 물신적 존경심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학교교육을 믿고 있는 한, 학교교육이란 돈과 같은 기초적인 인간상품의일종으로서 인간이란 지식자본가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학교 없는 사회’는 단순한 학교 해체가 아니라, 제도화되지 않은, 따라서 계급화되지 않고 자율적인 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산업사회 경제방식에 철저하게 지배되어온 한국에서 일리히의 사상이 퍼지고 대안이 관철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일리히가 주장하는 ’제도화된 가치의 불합리성’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가 ’제도화된 가치’를 인정하고 동의하고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에게, 우리 아이들과 후손들에게 남는 것은 양극화의 심화, 좌절의 보편화, 공동체의 해체, 물질과 의식의 오염이 만연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이들과 후손들에게 지옥을 물려줄 수는 없지 않은가!!
일리히의 사상과 이론의 핵심과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받아들이게 되면 현재의 구조와 시스템, 의식과 문화를 기초로 하여 현실을 재해석하고 실정에 맞는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교사들은 교사들 나름대로, 학생들은 학생들 나름대로, 학부모들은 학부모 나름대로 고민하고 논의해야 하고 서로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기로 한국에서도 일리히가 제시한 대안적인 방법들은 지금 여러 단체와 집단에서 모색하고 있고 먼저 시도하고 있다.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지녀야 하고 그에 따른 근본적인 대안을 찾아서 실행해야 한다. 
 
일리히가 가르쳐 준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근본에서 다시 생각하라’는 메시지였다.
 
* 책 속의 문장
- 이처럼 과정과 실체가 혼동되면 새로운 논리, 즉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욱더 좋은 결과가 생긴다든가, 단계적으로 올라가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식의 논리가 생겨난다. 그런 논리에 의해 ‘학교화된’ 학생들은 수업을 공부라고, 학년 상승을 교육이라고, 졸업장을 능력의 증거라고, 능변(能辯)을 새로운 것을 말하는 능력이라고 혼동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학생의 상상력까지도 학교화돼, 가치 대신 서비스를 받아들이게 된다. 즉 병원의 치료를 건강으로, 사회복지를 사회생활의 개선으로, 경찰보호를 사회안전으로, 무력균형을 국가안보로, 과당경쟁을 생산적 노동으로 오해하게 된다. … 이 책에서 나는 그러한 ‘가치의 제도화’가 반드시 물질적 오염, 사회적 양극화, 심리적 무능화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세 가지 차원은 지구의 붕괴와 현대적 비참을 초래하는 과정이다. 나는 빗물질적 요구가 물질적인 상품의 수요로 변화할 때, 즉 건강, 교육, 수송, 복지, 심리치료가 서비스나 ‘보호’의 결과로 정의될 때, 지구의 붕괴 과정이 어떻게 증폭되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 책 속의 책 : 플라톤 <국가>, 이반 일리히 <병원이 병을 만든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그림자 노동>

[ 2011년 6월 1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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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가장 정직한 정치 교과서 서해클래식 5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신재일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너무나도 유명한 마키아밸리의 ’군주론’이다.
너도 나도 많은 글과 말에서 ’군주론’을 들어온터라 여러번 읽어볼 생각을 했었고 실제 이 책을 구입한지도 1~2년 지났으나 쉽게 손에 잡히지 않았다.
 
’군주론’의 내용도 궁금했고 마키아밸리라는 사람의 인생역정도 궁금했다.
마키아밸리는 서기 1469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15세기 중엽이면 역사가들이 이탈리아를 중시으로 중세를 벗어나 르네상스가 꽃피기 시작한 해라고 한다.
그런 그는 불행하게도 벌률가였던 아버지가 파산하고 나서 자질구레한 소송만 처리하여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그는 주로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27세에는 어머니도 여의였다.
 
마키아밸리는 이름있는 가문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집안형편도 어려웠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으로 일어서야 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았기 때문에 공부와 처신에 집중했고 권력을 직접 잡기보다는 권력자의 충실한 신하가 되기를 마음먹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공부하였고 특히 과거와 당시 정치관계에 파고든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그는 <군주론> 뿐 아니라 <독일에 관한 보고서>, <만드라골라(희곡)>, <전술론>, <피렌체사>, <로마사 논고> 등을 출간했다.
이 책 <군주론>의 최종 서적을 출간하기 위해 마키아밸리는 로마사와 독일, 프랑스 등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사 논고>에는 로마 뿐 아니라 당시에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황제에 대해서도 상당부분 분석하고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다.
하지만, <군주론>에는 투르크 제국의 황제를 예시한 바 없어 왜 그런지 궁금증이 인다.

 
하지만, 그는 21세기까지 후세에 이름을 떨친 불후의 역작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살아 생전에는 권력자들에게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다.
1498년부터 14년간 외교관으로 공직생활을 하였으나, 1512년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 가문에 의하여 군주정이 실현되자 실각하여 체포,투옥되기도 했다.
1526년 교황 클레멘스 7세에 의해 잠시 정치에 복귀하였으나 그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 책 <군주론>은 공화정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던 그가 아이러니하게도 ’군주정’이 당시 시대에 더 적합하다는 논리를 세우기 위해 발간했다.
그런 그의 과거와 처세 때문인지 실제 마키아밸리는 그가 이 책을 바쳤던 로렌체 데 메디치는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이 책을 읽고나니 마키아밸리의 다급함과 간절함이 조금은 느껴졌고
<군주론>의 유명세 뒤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을 살짝 엿보았다는 생각도 든다. 
 
근대 정치학의 시초가 되었다는 <군주론>...
이 책은 지난 500년 동안 숱한 논란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 왔다고 한다.
교황청은 이 책을 금서로 공포하고 불태웠으며, 프랑스 인은 ’마키아벨리즘’이라는 오명을 붙이고 맹비난했다.
이 책이 왜 이토록 끊임없는 논란을 일으켰을까.
아마도 그것은 이 책이 정치와 군주에 대한 진실, 그 누구도 쉽게 말하지 못한 진실을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너무나 솔직하게, 또 너무나 현실적으로 군주와 국가의 모습을 보여 준 아주 ’정직’한 정치 교과서이다. 




이 책 <군주론>은 권모술수주의를 제창했다고 하여 오랫동안 위험한 서적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책은 마키아밸리의 공직에 대한 ’간절함’을 바탕으로 쓰여졌고 조금은 ’애국심’ -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에서 나왔다.
그가 살던 시대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세의 질서가 차츰 무너지고 근대 국가의 기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때였다.
그가 친구인 ’프란체스코 베토리’와 주고받은 서신을 보면,
그가 오랜 공직 생활을 통해, 당대의 권력자인 프랑스의 루이 12세,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황제, 교황 율리우스 2세, 그리고 체사레 보르자를 직접 만나면서, 강력한 힘을 지닌 군주가 나타나 위기에 처한 조국 이탈리아를 구원해 줄 것을 염원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쉽고 간결하고 나름(?) 재미있다.
그가 직접 ’헌사’에서 말하고 있듯이 책 속에는 어려운 용어나 화려한 미사여구가 없다.
간결하고 직설적이다.
1532년에 출간된 고전(저자 사후에 발간)임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20~21세기의 상황에 대입해 보아도 일정부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가 역설하는 군주의 자질은 "21세기의 리더를 위한 텍스트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출판사의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차라리 그의 군주에 대한 특징이 21세기 독재자와 안하무인격의 정치인에게도 발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알아둘 가치는 있을 것 같다.  
 
[마키아밸리즘(machiavellism)]이란 일반적으로 국가의 유지 발전을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도 허용된다는 국가 지상주의적인 정치 이념을 뜻한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는 "국가의 운영이나 일반적인 행위에서 속임수와 표리 부동한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윤리의 규범으로부터 현실정치의 해방을 지향하는 사고방식으로, 이 사상은 근대적인 국가관이나 정치학의 출발점이 된다.
절대왕정시대에 군주나 정치가가 목적달성을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고 권모술수를 다하는 것을 ’마키아밸리즘’이라고 부르게 되어서 그와 같은 정치이념, 체계, 방법일반을 가리키게 되었다.
 
* 마키아밸리의 어록...

- 행운이나 타인의 호의가 아닌 자신의 능력으로 군주가 된 인물로는 모세, 키루스, 로물루스, 테세우스 등이 있다. (마키아밸리는 신화와 전설로만 전해지는 인물들을 실존했던 군주인 것처럼 인정하고 다룬다.) p.51

- 잔혹행위는 단번에 행하고 은혜는 조금씩 행한다. p.77

- 권력을 보존하는 데 필요한 악덕으로 인해 악명을 떨치는 것을 걱정해서는 안된다. 모든 것을 신중히 생각해 볼 때, 고결해 보이는 행동은 파멸을 초래할 수 있는 반면, 사악해 보이는 행동은 지위를 강화하고 반영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p.119

- 군주는 짐승처럼 행동하는 법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여우와 사자르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p.130

- 군주의 총명함은 우선 군주 주변의 인물들의 자질로 알 수 있다. p.164

-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지 않기 위해 운명이란 우리 행동 절반에 대해서만 중재자이며, 나머지 절반은 대체로 우리 인간이 통제한다고 생각하고 싶다. p.175   

[ 2010년 10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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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다 (반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 1주기를 맞이하여 [노무현재단]에서 펴낸 책이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책이 이미 여러 권 출간되었음에도 특별히 재단에서 1주기 기념으로 발간하였다. 이 책이 다른 책, 즉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나 <성공과 좌절>과 다른 점은 출생에서 서거에 이르기까지 인생역정 전체를 기록한 '자서전'이라고 재단측은 설명한다. 그러나 실제로 다른 점은 아마 외부적으로 알려진 노무현 대통령의 이야기와 노무현 전대통령이 스스로 초안으로 정리했던 자서전을 위한 기록들, 그리고 노무현 전대통령과 함께 한 많은 사람들(유가족, 옛 참모들 등)의 이야기를 함께 묶어냈다는 것이 다를 것이다.
 
재단측은 특히 2009년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를 맞이하여 국민장 기간 동안 봉하마을과 전국의 분향소를 찾아와 애도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발간했다고 서문에 기록했다. 재단의 상임이사인 문재인 변호사는 서문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노력하는 사람', '당당하게 살고자 분투했던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 * [노무현재단]이란?..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의 가치와 철학, 업적을 유지·계승·발전시켜 그 뜻이 국가 발전과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토대가 되도록 하기 위해 설립된 재단법인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생애와 활동,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한 기록물 보존 및 기념관 건립, 묘역 조성 지원을 비롯해 사상과 정책을 다각도로 연구하고 저술하는 교육 및 학술·출판, 국제협력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사료편찬특별위원회, 기록관리위원회, 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문화예술위원회, 출판위원회, 홈페이지 편집위원회, 묘역조성지원위원회, 해외온라인위원회, 기금모금위원회 등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다양한 추모기념사업을 펼쳐 나가고 있습니다. ---------------------------------
 
1부. [출세]에는 출생에서 부림사건 변론을 맡기 전까지, 변호사 노무현의 성장과정을 기록하였다. 유년의 기억, 은인 김지태 선생, 부산상고, 막노동판, 부인 권양숙여사, 사법고시, 변호사에 이르는 기록이다. 대부분의 내용은 이전의 저서,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와 <성장과 좌절>과 대동소이하다.
 
2부. [꿈]에는 부림사건 변론을 맡은 때부터 해양수산부 장관직을 마칠 때까지, 인권변호사 노무현과 정치인 노무현의 도전과 시련을 기술하였다. 부림사건 변호로 시작된 운동 전문의 인권변호사,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꿈, 1987년 대통령 선거의 분열과 좌절, 국회의원 당선, 청문회 스타와 의원직 사퇴파동, 3당 합당과 김영삼과의 결별, 조선일보와의 투쟁, 첫번째 낙선과 야권통합,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설립과 두번째 낙선, 세번째 낙선과 정권교체의 감격, 종로에서 국회의원 당선과 포기, 네번째 낙선과 [노사모]의 탄생, 해양수산부 장관에 이르는 기록이다.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설립과 운영에 관한 이야기, [노사모] 탄생 비화,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의 행정 업무에 대한 기록, 문재인, 안희정, 이광재, 천호선, 정윤재, 윤태영 등 참모들에 대한 이야기가 새롭게 들어있다.
 
3부. [권력의 정상에서]에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국민경선에 출마한 시점부터 대통령직을 마치고 청와대를 떠난 때까지, 주로 국정운영과 관련한 대통령의 노무현의 고뇌를 담고 있다. 조선일보의 인터뷰 거부,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과정에서의 광주의 기적, 정몽준과의 후보단일화와 단일화 파기, 대통령 당선과 대북송금특검의 우여곡절, 양극화와 부동산 정책, 방폐장과 세종시, 탄핵과 이라크 파병, 한미 자유무역협정, 남북 정상회담, 국정원장 독대보고, 검찰 개혁의 실패, 정치권력과 언론권력, 대연정 제안 등에 대한 이야기다.
 
기존의 인터뷰나 발간도서의 내용과 다른 내용은 거의 없으나, 2002년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과 정몽준과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 주요 정책에 대한 입장과 평가, 부문 개혁에 대한 평가 등이 들어있다.
 
4부. [작별]에는 고향 봉하마을로 돌아온 후부터 서거 시점까지, 전직 대통령 노무현의 희망과 좌절을 기록하였다. 귀향 후 봉하오리쌀을 추진하던 이야기, 화포천과 둠벙, 무논 등 생태 농법에 대한 연구, 장군차, 국가기록물 사건에 대한 소회, '노무현의 실패'에 대한 심경 등을 담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노무현 전대통령의 평소 스타일을 고려해보면, '노무현의 자서전'이라고 하기에는 담지 못한,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아무도 그 분이(노무현 전대통령 자신마저도...) 그렇게 서거하시리라 생각하지 못했기에 시시콜콜하고 자세하게 인터뷰하지 못했기에 안타까울 뿐이다. 재단측이 여러가지로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은 들지만, '자서전'이라 하기에는 노 전대통령의 생애를 비교하면 이 책은 너무 초라하고 부족하다.
 
실제 자서전일 경우, 1981년 부림사건 변호 이후 인권변호사 시절의 여러 가지 경험과 자의식을 다져가는 이야기부터 소중했을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 의정기간에 대한 깊은 이야기와 낙선 이야기, 대통령 후보 경선부터 당선까지의 엄청난 숨은 이야기들, 대통령 집권 기간 동안의 수 많은 이야기들이 묻혀 버린 것이다. 어찌 보면 김대중 전대통령의 자서전과 더불어 '대통령학'에 대한 본격적인 정치적, 학문적, 대중적 논의의 토대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 없다.
 
그렇다면 노무현 전대통령 곁을 오랫동안 지켜오고 보좌해온 과거의 참모들과 주변 동지들에게 그 숙제가 넘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이제부터라도 국가적인 중요 비밀이 아닌 내용들은 모두 공개하고 정리하여 후배들과 후손들이 국가권력과 통치, 행정업무와 행정부 관리, 주요 기관에 대한 평가와 대안, 정책과 정치 등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기반을 준비해야 한다. 노 전대통령이 아직도 살아 계셨다면 반드시 추진했을 일이다. 노 전대통령은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에서도 '대통령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고민했다. 별도로 강의할 생각까지 하셨으니...
 
[ 2011년 6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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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큐멘터리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 1990-1995
박성미 지음 / 백산서당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1990년부터 1995년까지 한국 KBS, MBC, SBS에서 방송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활약한 열 세 명의 인터뷰와 한국방송다큐멘터리 연보를 정리한 책으로 1995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당시 다큐멘터리에 몰입해 있었던 저자는 자신이 감히 선배라고 부를 수도 없었던 10년~20년 연배의 프로듀서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들의 열정, 사명감, 그리고 그들의 세상에 대한 애정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다큐멘터리로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했고 그것을 위해 마치 내일 죽을 사람들처럼 매달려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저자는 그 현장에서 그들을 보았고 그들의 작품에서 그들의 눈빛 속에서 그것을 확인했다.
 
책 속에 등장하는 PD들은 한 마디로 한국의 다큐멘터리 제작을 선도하고 정착시킨 ’방송인’들이다.
그들은 1984년 한국 방송인의 자체 능력으로 안방 TV에 최초로 다큐멘터리를 보여주었고 한국 방송업계 최초로 외주전문제작 ’프러덕션’을 차리기도 했다.
처음 방송국에서 제작하는 다큐멘터리이니만큼 그들은 다큐멘터리에 대한 정의와 개념, 제작방식과 절차, 기획과 구성, 촬영과 편집, 영상과 음악 등 모든 부분을 하나에서 열까지 틀을 만들어야 했고 모범을 보여야 했다.
그러한 그들의 노력으로 한국 방송사와 방송업계에서도 ’다큐멘터리’가 정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열 세 명의 PD 중에서 ’일벌레’가 아닌 사람이 없는 것 같다.

몇몇은 이 책의 제목처럼 ’세상을 바꾸어 보기 위하여’, 방송이 개인이나 권력이 아닌 ’국민의 것’이라는 생각으로 방송이 사회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이 되도록 청춘을 바친 PD도 있고,
그 중에는 80~90년대 방송사의 답답한 구조와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의 비전과 능력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하여 독립한 PD들도 있다.
또한, 여전히 지상파에 남아서 궂궂하게 자리를 지키는 사람도 있고...
8명에 대해서는 인터넷 검색이 쉽지 않아 현재의 지위와 역할을 찾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열 세 사람의 이력을 열거해보면,
- 권재홍 : 다큐멘터리답게 만든다.
 58년 영월생, 1981년 서울대 생물학과 졸업 및 MBC 입사, 1984 한국방송 최초의 자연 다큐멘터리 [한국 야생화의 4계] 제작, 보도국 앵커, 편집부장, 워싱턴 특파원 역임 및 ’MBC 100분 토론’ 진행자 역임, 2010년 5월부터 ’뉴스데스크’ 앵커
- 윤기호 : 프러덕션 시대를 열다.
 48년 서울생, 1973년 외대 불어과 졸업 및 KBS 입사, 1988년 [한국인의 건강] 연출, 1992년 퇴사 및 ’제3채널’ 설립, 1995년 ’제3영상’ 설립, 1998년 ’제3비전’ 설립 및 현재 대표이사
- 김태영 : 잘 닦인 길은 나의 길이 아니다
 57년 서울생, 1983년 서울예전 방송연예과 졸업, 1984년 [벽]으로 대한민국 단편영화제 우수작품상 수상, 1991년 ’다큐멘터리 서울’ 입사, 1988년 광주항쟁 진압군을 소재로 한 [황무지] 제작, 1989년 [황무지]로 벌금형, 1992~1993년 [베트남 전쟁, 그 후 17년] KBS에 방영, 1994년 [카리브해의 고도, 쿠바] KBS 방영, ??
- 전용길 : 정직하지 않으면 프로그램이 아니다.
 56년 서울생, 1982년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및 KBS 입사, 1984년 [추적 60분] 제작, 1985년 [사람과 사람] 연출, 1987년 [뉴스비전 동서남북] 제작, 1988년 [히말라야 오지를 가다] 연출, 1994년 [세계는 지금] 제작, 1996년 뉴욕특파원, 2004년 제작본부 시사정보팀 팀장, ??
- 장윤택 : 프로듀서는 저널리스트다.
 49년 평양생, 1973년 TBC 입사, 1974년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1983년 [추적 60분] 기획/팀장, 1987년 [미국을 다시 본다] 연출, 1987년 [뉴스비전 동서남북] 기획/팀장, 1993년 보도제작국 제작3부장, 2005년 편성본부 본부장, 2007년 KBC미디어 감사, ??
- 유창영 : 영원한 약자, 그대 이름은 프로듀서이니라.
 55년 거창생, 1983년 서울대 국어교육과 졸업 및 행정공시 합격, 1984년 MBC 입사, 1990 [인간시대] 연출, 1993 [신인간시대] 연출, 2005 편성국 국장, 2006 홍보심의국 국장, ??
- 김종오 : 시를 쓰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47년 부산생, 1969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1973 MBC 입사, 1975 [카메라출동] 제작, 1984 [한국 야생화의 4계] 제작, 1986 [그때를 아십니까] 제작, 1988 파리 특파원, 1992 보도제작국 국장, 1994 [시사매거진 2580] 제작, 1995 보도국 편집국장, 2003 대구MBC 사장, 2010 OBS 대표이사
- 정 훈 : PD들이여, 땅으로 내려오라
 51년 정읍생, 1977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및 TBC 입사, 1981 EBS 입사, 1983 AFP 입사, 1984 KBS 입사, 1987 [이제는 파란 불이다] 제작 및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 창설, 1989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 사무국장, 1992 SBS 프러덕션 입사, 1995 A&C 코오롱 편성제작본부장, 2004 OBS 전무이사, 2005 한국DMB 회장, ??
- 신언훈 : 나의 색깔로 승부한다.
 54년 대구생, 1978 서울대 미학과 졸업, 1980 국립영화제작소 입사, 1984 MBC 입사, 1985 [인간시대] 연출, 1991 SBS 입사, 1993 [그것이 알고싶다] 연출, 1998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 부회장, 2001 제작본부 교양1CP, 2005 제작본부 제작위원, ??
- 진기웅 : PD가 PD인 이유
 53년 마산생, 1978 서울대 독문학과 졸업, 1981 KBS 입사, 1984 [추적 60분] 제작, 1990 [양자강] 제작, 1994 SBS프러덕션 입사, 2001 프리랜서로 [몽골리안 루트] 제작, ??
- 이동석 : 아들아, PD가 되고 싶지 않으냐?
 48년 김제생, 1974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및 TBC 입사, 1981 KBS 입사, 1989 [김용운교수의 한민족탐험] 제작, 1991 MBC프러덕션 입사, 1992 [잊혀진 전쟁] 연출, 1993 ’리스프로’ 설립, 현재 대표이사
- 이규환 : 영원한 아마추어
 52년 경북생, 1980 성균관대 불문과 졸업 및 부산방송국 입사, 1983 KBS 3TV 입사, 1985 [사람과 사람] 연출, 1989 [제3의 선택] 연출, 1993 [다큐멘터리 극장] 연출, ??
- 전형태 : KBS의 필요악
 55년 서울생, 1981 KBS 입사, 1983 연세대 독문과 졸업, 1989 [진도] 연출, 1990 [해방과 분단] 연출, 1992 [자본주의 100년 한국의 선택] 연출, 1994 SBS프러덕션 입사, 1997 (주)제이알엔 설립, 1999 [병원 24시] 제작, 현재 대표이사

저자는 그들이 자신이 처한 조건에서 다큐멘터리를 시작하고 제작,연출하고 방송하기 위해 노력한 것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적어도 1990년~1995년에는 한국의 시청자들에게 TV방송에서 ’다큐멘터리’가 무엇인지를 알도록 해주었고 (많은 주관적, 객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많은 PD들이 다큐멘터리로 한국사회를 조금이라도 바꾸어 보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의 노력만으로 사회는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고 그들이 철학과 의지를 가지고 ’사회변화’를 일관되게 추구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눈으로 25년 뒤의 현재 방송업계 PD를 보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들까?
 
1995년 이후 15년이 지난 2010년을 뒤돌아 보면 어째 과거로 회귀된 듯한 느낌이다.
뉴스와 심층보도 프로그램은 사회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고 정부의 정책만 일방적으로 홍보할 뿐더러, ’사회에 유익한’ 프로그램보다 ’재미’와 ’시청율’로 기울어진 온갖 예능 프로그램과 스포츠가 범람하고 있다.
지상파 종사자들은 거시적인 안목보다 무기력과 집단 이기주의 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20년 넘는 그러한 관성과 무기력, 보신주의가 MB정권 이후 지상파 종사자들의 수난과 허탈함을 가져온 근본적인 이유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들과 더불어 1990년대와 2000년대 방송사에 몸담았던 PD, 기자, 제작진, 기술진, 전문가들은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까?
 
작년부터 전두환 정권 이래로 다시 한 번 ’권력의 시녀’라고 불리고 있는 KBS...
천천히 한 단계씩 자율성과 객관성을 읽어가고 있는 MBC...
개국 이래 상업방송 이상의 아무런 기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SBS...
도저히 방송이라고 하기에 멋쩍은 케이블과 IPTV...
하루하루 여의도에서 사라져 가는 외주제작사와 각종 프러덕션...
장기적인 안목도, 조직력도, 단결력도, 업계의 최소한의 생존도 보장하지 못하는 KIPA를 비롯한 각종 협회와 단체들...
3D업종으로 이미 자리잡은 방송프로그램과 영상물 제작분야...
의사협회나 변호사협회는 고사하고 간호사협회, 법무사협회, 음식업협회, 영화인협회의 반에 반도 따라가지 못하는 방송영상업계 종사자들...
 
작금의 상황은 아직 방송영상업계가 아직 ’밑바닥’까지 내려가지 않아 그렇다고도 보인다.
하지만, 왜 사람들은 꼭 ’밑바닥’까지 간 다음에 바닥을 쳐서 올라가야 하지?
언제까지 정부탓, 정치권탓, 지상파탓, 소비자탓만, 경제탓만 하고 있을 것인지...

p.s) 근데 1996년 이후 한국 다큐멘터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은 왜 없을까?
 
* 저자 소개 : 박성미
1968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서울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원 영상대학원을 수료했다.
현재 다큐멘터리, 방송프로그램 및 영상전문 제작회사인 (주)디케이미디어 대표이사다.
시민단체인 미디어연대와 남북경제문화교류재단의 이사를 역임했으며,
인문콘텐츠학회와 광주전남영상진흥협회 운영위원이다.
저서로는 <김홍재, 나는 운명을 지휘한다>가 있다.  

[ 2010년 10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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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과 지식인
한완상 / 정우사 / 198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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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모임 100회 특집 ’내 인생의 책’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읽은 때는 1985년 6~7월 경이었다. 대학 신입생이 된 후 처음 맞이한 방학 기간이었다. 본디 6월 하순에 과학생회에서 진안군으로 농촌활동을 떠나는 일정이 있었고 나는 먼저 고향에 내려간 후 시간에 맞추어 익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함께 농촌활동에 참여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농촌활동에 참가하지는 못했고 고향에 틀어박혀 시간만 때웠다. 그 와중에 읽은 것이 선배로부터 선물받은 이 책이었다.
 
당시의 내 지적 수준이라는 것이 형편 없는 상태였기에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한 것으로 기억한다. 책을 1/3 가량 읽은 후 머리가 복잡하여 덮어버렸다. 어렵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단어와 개념 하나하나가 생소하고 낯설었다. 그래도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성미였는지 책을 선물해준 선배에게 무엇인가를 물어보기 위해 엽서를 보냈다. 답장은 오지 않았고. 그렇게 책을 덮고 나서 나중에 3학년이 되어서 다시 읽었다.
 
이 책은 ’엽서’라는 매개를 통해 그 선배와 나를 엮었다. 나는 선배에게 엽서를 보낸 사실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고 선배 역시 한 동안 책과 엽서에 대해 나에게 아무런 애기도 하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난 후, 어느 술자리에서 선배는 엽서 이야기를 꺼내며 나를 나무랐다. 내가 보낸 엽서의 내용은 조금 구구절절한 이야기인데, 가장 핵심적인 질문 중 하나가 "민중이 무어냐?"였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회과학적, 역사적 의식이 전혀 없던 신입생으로서는 저자가 정의하는 ’민중’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튼, 1985년이면 전두환 군사정권이 시퍼렇게 눈을 번득이며 사상과 양심의 자유,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압살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입생 하나가 선배에게 공개된 엽서 뒷장에 ’민중이 무어냐?’라고 써서 보냈으니 선배가 잔뜩 쫄아서 기가 막혔을 것이다. 당시 이 책은 ’금지도서’ 리스트에 올라 있었고 ’민중’이라는 단어도 ’금지된 단어’였다. 그것도 그 엽서의 수신처는 선배 집이 아니라 과사무실이었다.ㅋㅋ
 
그렇게 이 책과 인연을 맺었고 민중, 지식인, 지식기사, 자유, 평등, 노동자, 자주, 통일, 종교 등에 대한 개념은 나에게 1학년 내내 화두이자 고민거리였다. 그렇게 개념을 터득하고 배우고 익히며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배워야 할지에 대한 나 스스로의 가치관을 세우고 살아나가는데 있어 이 책도 큰 역할을 한 셈이다. 
 
-------------- * 한완상(韓完相, 1936년 3월 5일 生)은 누구인가? ----------
사회과학자, 행동하는 양심, 자원봉사자의 본보기가 되는 한완상. 그는 교육계, 정치계, 학계, 종교계를 넘나들며 참 지식인상을 보이고 있으며, 한국 사회와 교계의 환부를 예리하게 진단, 처방하는 소명을 다하고 있다. 엄혹했던 현대사의 격랑으로 두 번의 해직과 수형 생활을 겪어야 했지만, 힘의 논리 위에 서 있는 ‘평화 지키기’보다 나눔과 비움을 통해 세우는 ‘평화 만들기’를 끝까지 주창한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6.25 전쟁을 경험하고, 껍데기뿐인 민주주의로 말미암아 독재와 비리, 사회의 부조리를 일찍부터 경험했기에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치료하는 예수 같은 의사’ 곧 소셜 닥터(social doctor)의 길이 그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소명이었다. 그 이력은 높고 범상치 않으나 지향점은 항상 ‘낮은 곳’이었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에모리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유니온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서울대 문리대 교수, 한국방송통신대학교와 상지대 총장,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대한적십자 총재를 역임했다. 저서로 <예수 없는 예수 교회>, <현대사회와 청년문화>, <지식인과 허위의식>, <대학생이 된 당신을 위하여> 등 다수가 있다. ------------
 
이번에 중고책으로 구해서 다시 읽어보니 대학생 시절에 내가 제대로 책을 읽지 않았던 것 같다. 책 내용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전체 4개의 장 중에서 첫 번째 장에 불과했다. 책은 그동안 내가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것보다도 훨씬 깊이도 있고 내용도 충실하다. 국가와 사회, 시대와 역사, 민중과 지식인, 대학과 대학생, 학문과 교육, 종교와 교회, 젊은이와 문제의식, 제국주의와 제3세계, 여성과 차별 등 1970년대에 한국이 처해있는 모든 사회적, 시대적 문제와 과제들에 대해 저자가 풀어놓은 문제제기와 방향은 놀라운 수준이다.
 
제1장. [민중과 지식인]에서 저자는 민중, 지식인, 사회과학 등 중요한 개념을 정의한다. "정치적 통치수단과 경제적 생산수단과 사회문화적 군림수단으로부터 소외되어 부당하게 억압받고 빼앗기고 냉대받는 사람들이 바로 ’민중’이다."(p.14) 따라서 민중의 대립개념은 지배엘리트다. 민중을 성격으로 분리해보면 즉자적 민중과 대자적 민중이 있다. 그리고 저자는 지식인을 ’유토피아’의 정열을 가진 대자적 민중으로 정의하면서 민중에 포함시킨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지식의 창조와 분배와 보급을 하는 사람은 둘로 나뉜다. 그것은 지식인과 지식기사다. 지식기사는 지식의 분석과 관찰에 그칠 뿐 인간과 사회의 아픔에는 무관심하다. 사실은 말하되 진실을 증언하지 않는 비겁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지식기사는 지배집단의 조역이나 주역으로 자리하게 된다. 지식인은 일상성의 세계의 두꺼운 뚜껑을 열어보려, 꿰뚫어 보려고 한다. 따라서 지식인은 민중과 사회의 아픔을 공감하고 진실을 증언하며 의식화되지 못한 즉자적 민중을 의식화된 대자적 민중으로 승화시키는 일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대자적 민중이다. "오늘을 사는 한반도의 지식인들은 민중의 사람들로서 민중이 주체가 되는 역사를 만드는 일에 온갖 힘을 다 바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 정치, 경제구조를 엮어가는 일에 마음과 뜻을 다 바쳐야 할 것이다."(p.31)
 
제2장. [이 땅의 젊은이와 문제의식]에서 저자는 편지글의 형식을 빌려 젊은이들에게 주어진 현상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질 것을 주문한다. 중고등학교의 군사적,제국주의적 시스템, 사회 전반의 전체주의적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호연지기를 기르고 상대방의 이견을 경청하고 이성적으로 비판할 것을 당부한다. 그러면서 지도자가 될 젊은이들은 민중과 여론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하며, 여론의 심판보다 역사의 심판이, 역사의 심판보다 진실의 심판이 더 무섭다는 것을 강조한다.
 
젊은이들을 무자비한 경쟁자, 영악한 개인주의자, 호연지기나 의분심을 상실한 창백한 기능주의자, 원칙 없이 적응만 잘 해나가려는 요령주의자로 변질시키고 있는 현실에서 내일의 엘리트가 되어야 할 젊은이들이 옳으냐 아니면 그르냐의 도덕적 질문을 던질 것을 당부한다. 또한 역사 이래 한국의 여성들이 억압받고 길들여져온 현실을 깨닫고 여성들이 ’현모양처’의 허위의식에서 벗어나 민중을 중심으로 여성의 지위향상과 여성해방을 위해 나설 것을 주문한다.
 
저자는 또한 학생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그 방향은 학생운동이 기성세대의 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 남북 분단 상황에서 스스로 오해받을 구실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 조국통일에 대한 뜨거운 정열과 날카로운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 민주화와 사회적,경제적 평등을 중심으로 삼아야 하는 것 등이다.
 
제3장 [학문, 교육, 사회]에서 저자는 한국 교육의 부조리와 대학의 이념이 실종된 상황에서 사회에 필요한 학문과 교육의 방향을 제시한다. 한국의 교육현장이 학생들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파괴하고 있고 이타주의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을 파괴하고 경쟁위주의 이기주의자를 양성하고 있다. 자유, 정의, 진리 등을 이념으로 삼고 연구, 교수, 사회봉사를 기능으로 삼는 대학이 스스로의 이념과 기능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공동체마저 파괴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에 따라 대학이 연구만 하는 연구소로 전락하거나 교육이 아닌 교수만 하는 강습소로 전락하고 국가에 통제되어 이데올로기나 PR 제조공장이나 사회인력조달소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저자는 대학이 자신의 상황을 수정하고 개선 발전시킬 자유를 지녀야 하고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인력을 길러야 한다. 저자는 또한 한국 사회가 뿌리깊게 가지고 있는, 척결해야 할 병폐로 이분법적인 사고양식과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관용의 부족, 권위주의의 횡행, 주체성과 유연성의 상실, 체면 치례와 허위의식 등을 지적한다.
 
제4장 [이 시대와 이 상황의 의미]에서 저자는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30년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압축적인 개발과 성장을 지상구호로 삼아온 것에 대한 폐해를 먼저 지적한다. 그러한 폐해는 사회 전반적으로 속도 지상주의와 능률 지상주의, 외형적 성장으로부터 발생하고 있으며 비극으로 향하고 있음을 우려한다. 성장의 달콤한 열매는 전체적인 민중이 아니라 소수의 지배 엘리트와 기득권자에게 돌아가고 있음이 명백하다.
 
TV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고 있던 1970년대의 사회상황에 대해 저자는 크게 우려하고 있다. TV가 대중적인 소비욕구를 결정적으로 자극하고 있고 지배엘리트가 공중파 언론을 독점하여 대중을 우민화하고 상대적 불행감을 자극하여 사회불안을 조성하고 각종 비행과 범죄를 유발시키고 가족안의 인간관계를 둔화시키고 사회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인간의 가치관을 혼란시킨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한국이 나아갈 길로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을 모색해야 함을 주장하면서 그 중심 주제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적 평등의 가치를 제창한다.
 
 
이 글이 1970년대 폭력적인 파시스트로 널리 알려진 박정희 군사정권의 유신시대에 쓰여졌기에 저자가 단어와 문단을 풀어나가는데 있어 많은 애로가 있었음이 행간마다 읽힌다. 그럼에도 책 속에는 저자가 사회와 대중에게 발언하고 싶은 내용, 젊은이들에게 문제제기하고 제시하고 싶은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 그동안 후배들에게 꾸준히 이 책을 소개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고 아쉽다.
 
저자가 처음 이 책을 발간한 시점이 1978년이고 발간한 이유를 "민중이 역사와 구조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의 문제를 생각하면서 틈틈히 썼던 글을 모아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 보았다."라고 말한다. 이 책은 판매 금지 도서 목록이 사라진 후 어느 정도 서점에서 판매된 다음에 현재 절판되었다. 그렇다면 저자가 책을 발간한 이유가 한국에서 사라졌을까? 민중의 한국사회의 주역이 되었는가? 아직 그렇지 않다. 저자가 소박하게 정의하고 문제제기한 민중을 둘러싼 사회적, 역사적 상황은 크게 변하지 못한 상태다. 한 때는 민중보다는 계급이 더 앞서기도 했고 이제는 민중이라는 개념과 정의보다 시민이나 국민이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한국 사회의 사회적, 역사적 의식은 아직도 전근대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라는 뜻일 것이다. 
 
어제 광주 518 민중항쟁 기록에 대한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서평을 썼다. 광주민중항쟁은 518 사건이라는 단일한 역사의 주인이 민중임을 증거하고 있는 책이다. 극우보수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 분단 이데올로기를 넘어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 되기 위해 먼저 ’민중’이라는 단어가 사회적, 역사적인 제자지를 찾는 것도 우선 과제라고 생각한다. 
 
[ 2011년 6월 0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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