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이 병을 만든다
이반 일리히 지음, 박홍규 옮김 / 미토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작년 11월 22일 국회에서 집권당이 한미FTA 조약을 기습으로 날치기 처리한 이후 한 달 넘게 전국이 항의시위로 몸살을 앓았다. 한미FTA 조약은 5년 전 참여정부에서 추진할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문제제기를 했고 당시에는 이번 날치기 이후 상황보다 더 큰 국민적 저항이 있었다. 
한미FTA는 2007년 체결 전후의 상황버섯 시작하여 그 처리과정에서도 민주주의적인 절차를 무시했고 내용도 '불평등 조약'으로 점철되어 있다. 또한 명칭인 '자유무역협정'이라는 표현도 그렇고 정부나 집권당에서 '통상협정'이라고 우기지만, 자세히 공부해보면 볼수록 실제는 통상협정 이상의 법적,제도적,문화적 변화를 가져올, 가히 '혁명적'인 조약이라는 본질이 드러난다.(통상관료나 총리가 여러번 그런 취지의 발언을 언론에 내비치 경우도 있지만...) 
 
2007년 참여정부에서 추진한 미국과 조약 체결 당시보다 현 이명박정부의 FTA 내용이 상당히 후퇴한 것은 분명하지만, 일부 전정권처럼 참여 인사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2007년 FTA 내용은 괜찮고 2011년 FTA는 나쁜 문제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FTA 관련 책을 한 권 만 읽어보아 알 수 있다. 실제 누구라도 한미FTA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공부한 시간 만큼, 알아본 내용만큼 더욱 맹렬하게 한미FTA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밖에 없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한미FTA는 우석훈씨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50~100년 이상의 한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조약이고 그 내용과 국내 처리과정, 미국과 협상과정, 비준 후 처리과정 등이 모두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느냐, 전진시키느냐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앞으로더 크게 그 영향을 줄 것이다. 또한 한국사회가 1%의 기득권 사회로 더 심하게 고착되고 공동체가 붕괴되느냐, 아니면 양극화와 빈부격차가 줄어들어 바람직한 사회로 나아가면서 공동체가 재건되느냐의 갈림길이 될 수 있다.
 
한미FTA가 가져올 여파 중 하나가 바로 '의료민영화'에 대한 것이다.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료민영화'란 개념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한국의 의료기관은 대부분 '민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미FTA를 반대하는 이들이 '의료민영화'라고 하면서 문제를 삼는 핵심부분은 사실 '영리병원'이다. '영리병원'이라 함은 현재 한국민 전체에 적용되는 국민건강보험 공공시스템에서 벗어나 영리만을 목적으로 영업하는 민간병원을 말한다. 정부는 송도지역 등 이미 전국 수십 곳에 지정되어 있는 경제자유구역에 이러한 민간병원을 허용하는 것을 계획 중이다(최근 정부관계자가 그 사실을 인정). 영리병원은 의료비의 폭등을 불러오고 기득권만의 전유물로만 이용되면서 사회의 의료양극화를 초래하고 그렇지 않아도 폭발적으로 성장 중인 민감보험이 건강보험을 좀 먹을 가능성을 증대시키고 된다. 그렇게 되면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병원들도 경쟁이나 형평성을 이유로 점차 의료비를 증가시키고 건강보험 재정을 붕괴시키는대 기여하기 된다. 

이미 치료시설 기준으로는 우리나라 역시 '민영화'되어 있다. 공공의료시설은 전국 병의원 중 10%도 안된다. 건강보험 보장이라도 아직 60% 선에 머물고 있다. 삼성의료원 등 재벌병원은 고급화, 대형화를 선도하면서 대학병원에서 국공립병원까지 경쟁 대열에 끌어들이고 과다한 진단과 의료시설을 투입하여 건강보험 재정을 좀 먹고 환자들의 자부담을 계속 늘려가고 있다. 건강복지 차원에서 앞으로 의료의 공공성을 늘려가고 함에도 불구하고 한미FTA는 오히려 공공성을 약화시킬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한미FTA와 의료만영화, 영리병원은, 의료공공성을 모두 인정하고 앞으로도 꾸준히 강화시켜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버릴 수가 없다. 
한 나라의 모든 정책과 복지가 공공성을 키우는 것으로 만사형통일까? 의료공공성에서 우리나라보다 백년 이상 앞섰던 서구에서도 궁극적으로 공공성을 달성하는데 실패했기 오히려 20세기 후반부터 의료복지가 축소되는 것은 왜일까? 스스로 건강을지키기 보다 조금만 기인하고 아픈 것 같으면 의사에게 가고 약국에서 약을 사는 상황에서 정말 의료가 필요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도대체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고 근원적으로 해결방안이있을 것인가? 
한국의 경우 건강복지 뿐 아니라 생계복지, 아동복지, 교육, 주거복지 등 무수한 문제가 산적해 있다. 경제성장 역시 이제 저성장 구조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재정운영 여력도 한정되어 있다. 현재 구조에서 전체적인 복지수준을 늘려가면서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늘려간다면 아마도 보장을 90%를 달성하는데 것은 요원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태어나면서 지금까지는 크게 병을 앓은 적이 없다. 그래도 살면서 여러차례 식중독이나 급성 근육걸림, 몸살, 감기 등 누구나 한 번쯤 앓을 만한 불편은 겪었다. 다년 간의 경험으로 생각컨대 몸살, 감기는 의사가 처방전을 내리고 약을 사 먹은 것은 병을 치유하기 보다 시간을 단축시키는 정도였다. 즉 며칠 간 집에서 끙끙 앓으면서 내 몸 스스로 치유할 수 있음에도 그 자연치유 시간이 아깝고 고열과 무기력을 피하기 위해 약을 사 먹은 것이 아닐까 싶다. 식중독의 경우에도 결국은 구토, 설사를 여러번 반복하고 난 후 병원에 실려가면 포도당 주사를 맞고 쓰린 위와 장을 진정시키는 약을 처방할 뿐인 것 같다. 구토, 설사를 반복하여 기진맥진할 때까지 내 몸속의 식중독 균을 모두 배출하고 몸이 자연치유하는 과정이 기본적인 진행과정일 뿐이고 나머지는 보조수단이라는 것... 병원은 식중독에 걸린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피를 뽑아 혈액검사를 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소변검사를 하는 등 병원은 자신들의 진단시설의 유지비와 인건비를 뽑아내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 내 건강과 치유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 입원 소감이다. 급성 근육걸림의 경우에는 의사와 약사에게 의존하게 되면 마찬가지로 쓸데없는 진단비용만 낭비될 뿐 파스와 알약을 조제해 주는 것은 핑계일 뿐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내가 움직임을 조심하고 스스로 치유하는 것이다. 근육통은 웬만한 한의사를 찾아가면 돌리지도 못하던 목이 하루 만에 움직일 수 있고 숨쉬기도 고통스러웠던 근육통이 단 한번의 침 치료로 절반 이상 낫게 된다. 내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아도 나와 비슷한 사례는 무수히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병원과 의사가 병을 치료한다는 것이 사실일까? 

이 책은 이러한 나의 문제의식에 대해 방향을 잡아주었다. 이 책은 1973년에 처음 발간되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의 서구와 아메리카 대륙의 건강과 현실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으며, 21세기 한국에서도 의료현실은 동일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크게 '병원병'과 '건강의 정치학'을 다루고 있다. 먼저 1장 ~ 3장에서 의사와 의료제도가 만들어 내는 '병원병(病院病)'을 다룬다.
우선 1장 <임상적 병원병>에서는 의료 기술성과의 대차대조표를 제시하고 있다. 과거 3세대에 걸친 비교 검토를 통해 질병의 변화와 소위 의료의 진보라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병을 일리히는 임상적 병원병이라고 불었다. 
제 2장 <사회적 병원병>에서는 의료의 사회적 조직이 건강을 직접적으로 부정하는 효과를 다룬다. 일리히는 이것을 사회적 병원병이라고 불렀다. 
제 3장 <문화적 병원병>에서는 의료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활력에 대해 초래하는 부정적 영향을 다룬다. 일리히는 이것을 문화적 병원병이라고 불렀다.
'건강의 정치학'과 관련하여 저자는 4장 <건강의 정치학>을 통해 의료제도의 불합리함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일리히는 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병원에서 비롯되는 질병으로부터 사회를 회복시키는 것은 정치의 임무이지 전문가의 임무가 아니라고 선언한다. 최근 세대 동안 건강관리에 대한 의료(제도)의 독점은 한 번도 점검되지 않고 확대되어 왔으며 우리들의 몸에 관한 자유를 침해해 왔다. 이것이 일리히의 주장이다.

저자 일리히는 "의료기술의 진보와 질병간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고 단언한다.
14세기 전 유럽을 강타했던 페스트(흑사병)는 16, 17, 18세기에 걸쳐 정점에 이른다. 하지만 예르생(Alexandre Yersin)이 페스트 균을 발견한 건 19세기, 그것도 한참 후반인 1894년이다. 중세 사회사를 연구한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의 분석에 따르면 페스트가 잦아들게 된 것은 의사의 치료나 항생제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유럽 전역에 걸쳐 일어났던 도시의 대화재들 때문이었다. 화재가 주택형식을 바꿔놓았다. 사람들은 목재 주택에서 석조 주택으로 주거형식을 변형시켰고 이에 따라 실내와 사람들이 청결해지기 시작했으며, 작은 가축들이 사람들의 주거 공간과 멀리 떨어지게 됐다. 이것이 사람들과 페스트를 멀어지게 했다.
이 책에서 일리히가 제시하고 있는 자료도 이 같은 내용을 뒷받침한다. 일리히의 자료에 따르면 미국 뉴욕에서의 결핵 사망자수는 1812년에 1만 명당 7백 명 이상의 비율이었다. 코흐가 처음으로 결핵균을 분리 배양했던 1882년에는 1만 명당 3백7십 명까지로 저하되었다. 나아가 최초로 결핵 용양소가 설치된 1910년에는 1만 명당 1백80명까지로 저하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후 항생물질의 사용이 일반화되기 이전에 결핵에 의한 사망률은 1만 명당 48명이었다. 결핵은 그 병원(病原)이 이해되고 특수한 치료법이 발견되기 전에 그 독성의 대부분을 상실했고, 따라서 그 사회적 중요성도 대체로 잃고 말았다. 콜레라, 이질, 장티푸스 등도 이와 유사하게 의사나 병원의 통제와 무관하게 정점에 이르렀다가 차차 감소해왔다. 이런 질병을 잡아낸 것은 의사나 병원이 아니었다. 우선 주택의 개선과 미생물 유기체가 갖는 독성의 감퇴 등이 지적될 수도 있겠고, 역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영양의 개선으로 인간의 저항력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항상 이런 문제는 뒤로하고 의사의 숫자가 늘어나면, 의료 기계가 현대화 되면, 병원이 늘어나면 건강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오해에 젖어 있다. 사람들은 의료의 진보와 질병의 상관관계에 대해 일종의 환상을 갖고 있는 듯하다.

"의료비는 매년 치솟고 평균수명은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
의사의 숫자가 늘어나면, 의료 기계가 현대화되면, 병원이 늘어나면 건강 치료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철저한 오해다. 1970년을 기준으로 과거 20년 간 미국의 물가지수는 74% 상승되었으나, 의료 관리 경비는 330%나 급상승하였다. 1950년부터 1971년 사이 건강보험을 위한 공적 비용의 지출은 10배나 증가되었고, 사적 보험의 급여는 8배나 증가되었다. 그리고 직접 주머니에서 지불된 액수는 3배나 되었다. 프랑스, 독일, 영국 등 다른 나라의 총 의료비도 미국에 병행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산업국가-대서양, 스칸디나비아, 동구-에 있어서 보건 부문의 성장률은 GNP 그 자체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한다고 하여도 건강에 대한 경비는 1969년부터 1974년 사이에 40%나 증가되었다. 이건 부유한 국가만의 특권이 아니다. 콜럼비아-부유한 자를 우대하는 곳으로 악명 높은 빈곤국이다-에서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10% 이상이 건강관리에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의료비용의 급상승이 평균 수명을 눈에 띄게 연장시키거나 결정적 질병을 잡아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의사가 병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론적으로 의사는 첫 진단으로 그의 환자가 어떤 질병에 걸려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더라도, 안전 장치(fail-safe)의 원칙에 의해 환자에게 질병이 없다고 말하기보다는 언제나 어떤 질병이 있다고 말하는 쪽으로 행동한다. 의학적 결정의 규칙이 의사를 압박하여 건강하다기 보다는 질병이 있다고 진단하는 것으로 안전함을 추구하게 한다. 하지만 의사의 이런 행위는 존재하지 않는 병을 양산해 내고 있다.
이와 같은 왜곡의 고전적 실례로 일리히가 제시하고 있는 것은 1934년에 행해진 뉴욕 공립학교에서의 실험을 들 수 있다. 뉴욕 시의 공립학교 1천 명의 11세 아동에 대한 조사에서는 61%가 편도선을 제거하도록 요구되었다. 61%의 아동 외에 39%가 다시 다른 의사 그룹의 진단을 받았는데, 그 중 45%가 편도선 절제를 받아야 하고 나머지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쳐 수술이 필요 없다고 했던 아동이 또 다른 의사 그룹에 의해 재진단을 받게 되자 남은 아동의 46%가 편도선 절제를 권고 받았다. 이 중에 또 다시 남은 학생을 대상으로 제 3회의 진단을 받았을 때, 거의 같은 비율의 아동이 편도선 절제를 필요로 한다고 보고가 나왔다. 그 결과 편도선 절제를 받지 않아도 되는 아동은 1천명 중 단지 65명에 불과했다. 기하급수적인 의료비 상승을 유발하는 고가의 장비에 의한 검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1966년 미국에서 실시한 한 검사에 의하면 83개의 골반 수술을 권유받은 증세 중 인간과 기계 모두가 옳았던 것이 22개, 그리고 37개의 예는 컴퓨터가 옳았고 의사의 진단은 틀렸으며, 11개의 예에서는 의사가 컴퓨터가 틀렸음을 입증했고, 10개의 예에서는 의사도, 기계도 모두 틀렸다. 단순히 진단만이 문제는 아니다. 1968년을 기준으로 1968년, 영국의 경우 캐나다에서 보다 남자가 1.8배 여자가 1.6배의 외과 수술을 받았는데 대부분 편도선 절제술, 치질 절제술, 사타구니 탈장 수술과 같은 임의의 수술이 2배 이상이었다. 이러한 차이를 결정하는 중요한 인자는 이용 가능한 침대 수, 지불 가능한 병원비, 외과의사의 수 등이었다. 현재 의료비 중 가장 급격한 상승을 보이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노인에 대한 치료비다. 그것도! 충분히 돈을 지불할 수 있는 노인에 대한 치료비가 급상승하고 있다.

일리히는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건강한 세상의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한다.
"의료의 개입이 최저한으로 우연적으로 밖에 행해지지 않는 세계가, 건강이 가장 좋은 상태에서 너리 행해지는 세계이다. 건강한 사람들이란 출산, 성장, 노동, 치료, 죽음의 어느 것에 대해서도 적합한 환경 속에서 건강한 집에 살고 건강하게 식사하는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인구의 제한, 노화, 불완전한 회복, 그리고 항상 절박한 죽음의 의식적인 수용을 높이는 문화에 의해 유지된다. 건강한 사람들은 결혼, 출산, 인간조건의 공유, 그리고 죽음에 대한 관료적 간섭을 최소한으로 요구한다. 인간에 의해 의식적으로 유지되는 위약함, 개성, 관련성은 고통, 질병, 죽음의 경험을 삶의 불가결한 것으로 만든다. 이 셋과 자율적으로 싸우는 능력은 그의 건강에 기본적인 것이다.(p.296)"


저자는 <학교 없는 사회>, <성장을 멈춰라(공생의 사회)>,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등 일련의 저작 속에서 일관되게 주장해 왔듯이 타율적 관리를 배제하고 자율적 통제가 지배하는 사회 패러다임을 꿈꾸고 있다. 의료부분의 있어서의 자율적 공생의 계획을 꿈꾸는 일리히는 보건 전문가에 의한 관리에 대해 제한을 목표로 삼는 정치적 계획 그리고 자신의 건강 관리를 위한 힘을 민중들이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계획은 산업적 생산양식에 대한 철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 
 
근대 이후 국가의 안전은 무력(군사력)의 균형이라고 선전되었다. 사회복지 사업은 사회생활의 개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못박아 놓았다. 경찰의 증가와 경찰의 보호는 안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호도되었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생산활동인 것처럼 인식케 했다. 심지어 아동이 학교에 가는 것과 학습은 동일시되고 있다. 또 의사한테서 치료를 받기만 하면 건강치료를 받은 것처럼 누구나 오해하게 만든다. 건강, 학습, 존엄성, 독립, 창조적 노력 등의 가치가 이들 가치에 봉사하고 있는 제도의 수행보다 못한 것으로 ‘신화화’된 것이다. 때문에 이런 분야의 예산이 늘어나거나 인력이 확충되는 것에 반대하는 자들은 시대착오적인 사람으로 오해되거나 반동으로 취급되기까지 한다.
일리히는 이런 오도된 가치관, 타율이 지배하는 사회에 메스를 들이댔다. 때로 그의 주장은 급진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그의 정치한 분석은 서구 학자들과 언론이 그에게 20세기 최고의 지성인 중 한명이라는 칭송을 아끼지 않게 했다.
<학교 없는 사회>와 더불어 일리히의 최대 화제작으로 꼽히는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서 일리히는 전문가의 의료 통제가 낳은 파괴적 경향에 대해 다룬다. 그는 진찰과 치료가 도리어 병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 주목하고, 질병의 치료에 의해 생기는 역설적인 피해에 대해 고발한다. 그는 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병원에서 비롯되는 질병으로부터 사회를 회복시키는 것은 정치의 임무이지 전문가의 임무가 아니라고 단언한다.(우리는 이미 의사와 병원이라는 전문가에게 너무 많이 속아왔다)


저자가 이 책을 처음 발간한 1970년대 미국과 2012년 한국사회는 많은 부분에서 크게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황금만능의 자본주의, 산업생산양식에 근거한 사회경제구조, 무한경쟁 시스템, 모든 가치의 상품화와 제도적/근원적 독점이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21세기 한국이 20세기 미국보다 더 심각한 상황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새롭게 꿈꾸는 미래사회, 우리가 만들어가고자 하는 희망이 무엇일까? 단순히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은 답이 아니다. 전문가와 단일한 제도에 의존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스스로를 얽어매는 족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학교와 선생에게 아이들의 학습을 의존하고 에너지와 교통시스템에 이동의 자유를 의존하고 의사와 전문가에게 우리의 건강을 의존하고 정치가와 관료에게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의존하고 기업가와 시스템에 우리의 생활을 의존하는 근본적인 독점구조에서는 다양한 가치와 자유로운 삶은 불가능할 것이다. 

현실에 닥친 학교와 교육의 개선 문제, 에너지 문제, 정치와 경제, 사회복지 문제 등을 현재의 커다란 제도와 시스템 내에서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풀어내어 시급한 현안을 해결해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제도와 시스템에 가려 우리가 꿰뚫어보지 못하는 근원적, 근본적인 독점 문제가 숨어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독점은 경제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이루어진 사회 각 분야의 독점과 그 독점에 대한 사람들의 의존이야말로 근본적이고 장기적으로 우리가 풀어내야 할 숙제이지 않을까 싶다. 이 사회를 벗어나 무인도로 도망갈 계획이 아니라면...
 
[ 2012년 1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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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 이반 일리히 전집 3
이반 일리히 지음, 박홍규 옮김 / 미토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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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 '내가 얼마나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가'하는 것은 자주 고민하는 사항이다. 이미 1년도 훨씬 전부터 기본적인 이동수단을 자동차에서 '도보 + 대중교통'으로 바꾸었고 집안에서 에어콘을 제거했으며, 난방도 '외출' 밖에 설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너지와 이동(교통)에 대한 고민을 계속된다. 무언가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되는 것이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내게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이해의 단초를 제공했고 내 삶에 있어서 '자유'와 '자율'을 추구하는데 있어 한 가닥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또한, KTX와 고속도로 등과 우리나라의 교통.수송 정책에 대한 문제의식도 많았다. 일차적인 문제의식은 물론 '토건발전' 패러다임과 토건시스템으로 인한 '부정부패'다. 교통 등 사회간접자본(인프라)는 현 정권 들어 또 다른 문제를 가져왔다. 그것은 '국가 정책과 예산의 사익화'다. 아직까지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아래 그림에서 나타나듯이 무리한 토건사업을 추진하고 국가의 세금으로 외국계 회사(또는 재벌회사)에게 이익을 보장해주는 정책이 남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권, 정치권의 성격이나 구성원과 관계없이 이러한 사회간접시설 투자가 계속 이루어지는 상황의 이면에는 국민 전체적으로 이에 대한 무관심 또는 암묵적인 동의가 전제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늘 있었다. 저자는 그런 문제제기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주기도 했다.


'Energy and Equity'를 한국어로 직역하면 '에너지와 공정(공평)'이다. 즉, 이 책은 에너지를 매개로 하여 '평등'을 고찰한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에너지의 양적인 확대,발전이 생산을 향상시키고 생활을 산업화시키고 물질적인 풍요함을 이룩하여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은 산업사회의 '신화'이며 '오류'라고 주장한다. 곧 그것은 사회적 '공정(공평)'에 반하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그는 에너지를 이용하는 산업 중에서 교통을 예로 들어 '속도'를 패러다임으로 하여 에너지-소비의 한계 설정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저자는 18세기 경 서구에서 시작하여 21세기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근대화(또는 현대화)란 병의 가장 심각한 증세인 에너지 중독 내지 속도 중독이 이미 우리를 혼수상태에 빠뜨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고도 기술 산업화를 향한 '발전'과 '개발'이 초래한 에너지의 찬미와 과잉소비는 자연파괴를 가속화시켰고 인간에게서 자유와 자율적 능력을 빼앗아 사회적 불공정을 확대시켰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도 자신의 일관된 논리로서 근현대 산업사회가 초래한 하나의 법칙을 주장했다. "산업생산물이 어떤 것이던 간에 1인당의 양이 일정한도를 넘기게 되면 욕구의 충족에 대한 근원적인 독점이 발휘된다."

그는 이 책에서 이동을 뜻하는 '교통', 신진대사 에너지의 소비에 의한 교통을 뜻하는 '통행', 기타의 에너지원에 의한 교통을 뜻하는 '수송'을 구별한다. 그리고 통행과 수송의 균형이 깨어진 산업적 교통을 참여민주주의의 정치에 의해 복구시키고자 한다. 대안의 방향은 참여를 통해 수송의 속도에 제한을 가하고 통행과 수송의 균형을 제도적으로 이루어내는 것이다. 
역자인 박홍규교수는 '역자 해설'에서 이에 더하여 도로 건설, 자동차 이용에 대한 명확하게 대가를 요구해야 함을 주장한다. 보행자와 주민의 피해 보상과 권리 획득, 환경훼손에 대하여 자동차 회사와 자동차 이용자에게 '사회적 비용'을 부담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에너지의 소비와 수송산업의 발달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1970년대 기준으로만 보아도 미국에서는 총에너지 사용량의 45%가 수송수단에 의해 소비되고 있다. 곧 수송수단을 제조하고, 움직이게 하며, 그 주행, 비행, 주차 등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그만큼의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 이 에너지의 대부분은 장소와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을 이동시키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2억 9천의 미국인을 수송하기 위한 하나의 목적에만 할당하고 있는 연료는 13억의 중국인과 인도인이 모든 목적에 사용하고 있는 연료를 양적으로 압도하는 것이다. 이 연료의 거의 대부분이 가속을 촉진하는 마술에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에너지 소비가 아무리 높아지고, 수송수단이 속도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해도 우리는 도리어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안달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수송수단에 의해 하루 평균 32km정도를 움직이고 있으나 이러한 수송수단은 사실상 반경 8km 이하의 범위 내에서 움직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수송수단에 의지하는 인간의 발은 결코 지면에 닿지 않는다. 땅에 발을 딛지 않은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는 세계로부터 자신은 자기 세계의 중심에 서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상실하고 있다. 자신이 급속도로 수송되어 갈 때에 창밖을 흘러가는, 직접 접촉할 수 없는 풍경을 자기의 활동범위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자신의 영토를 확립하고 그것에 스스로의 발자취를 남기고 그것에 대하여 자신의 주권을 주장하는 힘을 우리는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가 시간에 가치를 부여할 때 공정성과 수송수단의 속도는 반비례한다. 무제한의 속도는 엄청난 고가이고, 그에 비례하여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더욱 적어지고 있다. 고속은 극소수 인간의 시간을 거액의 값으로 자본화시키지만, 동시에 불합리하게도 이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시간을 희생시킨 결과이다. 미국에서 사람들이 노상에서 보내는 모든 시간의 5분의 4는, 비행기를 타는 경우가 결코 없는 통근자와 물건을 사려는 손님들이 보내는 시간이다. 한편 회의나 휴양지에 가기 위하여 이용하는 항공기 비행거리의 5분의 4는, 매년 정해진 인구 중 동일한 1.5%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리히가 제시하고 있는, 우리가 속도에 의해 생활시간을 박탈당하고 있는 사례로 들어가 보자. 
전형적인 미국의 남성은 자기의 차와 관련해 1년에 1,600시간이상을 소비하고 있다. 차가 달리고 있을 때에도, 정지하고 있을 때에도 그는 차 속에 앉아 있다. 차를 주차장에 넣고, 주차한 차를 찾기도 한다. 또한 차를 사기 위한 계약금과 다달이 지불해야 할 월부금을 벌어야 하고, 연료비, 고속도로 통행료, 보험료, 세금, 교통위반시의 벌금 등을 지불하기 위해 노동한다. 그리하여 하루에 일어나 있는 16시간 중 4시간은 차를 운전하거나 그것을 위하여 필요한 재원을 모으기 위하여 소비하고 있다. 게다가 이 숫자는 수송에 의해 강제되어 다른 활동에 소비되는 시간을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다. 즉 사고로 병원이나 검?경찰, 법원, 또는 자동차 수리공장에서 보내는 시간, 다음에 더 좋은 차를 사기 위해 자동차 광고를 보거나 소비자 교육집회에 참가하여 소비하는 시간 등은 계산에 넣지 않았다. 결국 전형적인 미국인은 7,500마일을 달리는 데에 1,600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이는 시속으로 치면 5마일에도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수송산업이 없는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시속 5마일 이상으로 자신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에라도 걸아갈 수 있다. 이미 1천8백만대가 넘는 자동차를 보유한 우리나라도 미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본래 인간은 걷도록 만들어졌다. 모든 움직임의 기본은 걸음이다. 그리고 길은 인간의 걸음터였다. 인간의 걸음은 그 본래의 기능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인간의 걷는 기능, 걷는 권리가 쇠뭉텅이 기계에 의해 박탈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4,500만의 걸음을 단 몇 백만 대의 자동차가 정지시킬 수는 없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는 (자동차화된) 가속도의 무익성을 주장하며 자전거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자전거는 보행자보다 3~4대 빠르고 현실에서 종합적인 계산으로 따지면 자동차보다 빠르다. 또한 공간 점유, 도로 구성, 제반 설치/운영비용, 사고와 환경 등 간접비용 등 모든 면에서 자동차, 전차보다 인간에게, 사회에게 유리함을 설명해 놓았다.

그의 주장을 최종적으로 요약하면, 대량의 에너지 소비는 필연적으로 자연 환경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경, 나아가 인간의 자유와 자율적 능력까지도 파괴한다는 것이다. 곧 높은 에너지 소비가 환경을 오염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설령 오염이 없는 에너지가 발견된다고 하여도 한계를 넘는 에너지의 사용은 인간을 정치적으로 불능으로 만들고 자율적 공생사회를 위한 조건들을 제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소위 정치적인 '좌파'나 '진보주의자'들도 받아들이는 '발전, 성장, 진보'라는 가치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이반 일리히 저작은 모두 ‘타율적 관리’ 사회에 대한 ‘자율적 공생’ 사회의 대응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있다. 이 책 역시 타율화된 학교제도의 폐지를 주장한 <학교 없는 사회 De-schooling Society>, 관료화된(타율화된) 병원제도가 만들어낸 병원(病原)에 대해 다룬 <병원이 병을 만든다 Limits to Medicine, Medical Nemesis>처럼 자율화된 인간을 지향하는 그의 사상이 오롯이 녹아 있다. 이 책에서 이반 일리히는 최적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에 대해 논의하고 있으며 그 한도를 정치적으로 결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 책에서 일리히는 산업의 근본적 독점으로부터의 해방은 최적교통의 옹호를 기초로 한 정치과정에 사람들이 참가한 경우에 처음으로 가능하게 된다는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이 책을 비롯한 몇 개의 저작에서 나타나는 저자의 일관된 주장, 특히 '근원적 독점'이 나에게는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현대사회의 근본적 문제, 특히 사회적 양극화와 민주주의의 후퇴, 99% 일반대중의 자유와 자율성 상실, 중앙집중의 가속화와 분권화의 실패 등에 대한 대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자가 주장하는 '산업사회의 근원적 독점'은 경제분야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근원적 독점'은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정치행정, 문화, 미디어(여론), 과학 분야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정치와 행정분야는 '엘리트 독점'이란 현상으로, 문화 역시 '산업화,상품화'와 '신자유주의'와 결합되어 '자본과 엘리트에 의한 독점'으로, 미디어와 여론 역시 마찬가지의 독점 현상이, 과학기술 분야 역시 '전문기술관료 독점'이 두드러지고 있다.
나는 현존하는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의 산업생산양식을 고려할 때 막연하게 '생산수단의 소유 문제'가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 대안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내가 에너지 및 '이동의 자율'과 관련하여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음력 설 이전에 자전거를 구해 나의 '자율적인 이동' 거리를 더 늘리는 것이리라...^^

[ 2011년 12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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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희망을 만나다 - 행복을 일구는 사람들 이야기 박원순의 희망 찾기 1
박원순 지음 / 검둥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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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울시장으로서 바쁘게 지내고 있는 저자는 인권변호사에서 참여연대 사무처장,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 상임이사, 희망제작소를 설립,운영한 바 있다. 그는 시민사회운동 진영에서 아무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영역을 개척한 것이다. 지금도 그가 설립하고 운영했던 각 단체와 조직들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한국사회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저자는 2006년 3월 희망제작소를 창립하면서 "진리는 현장에 있다"는 신념을 발표하고, 이 시대의 문제를 푸는 대안과 해결 방법을 추상적 이론보다는 현장에서 찾고자 했다. 전국 방방곡곡 현장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자 수첩을 들고 노트북과 카메라를 둘러메고 길을 나선 저자는, 개발 열풍으로 파괴되고 소외된 지역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는 '21세기 신실학 운동을 구현하는 민간 싱크탱크'를 만들고자 희망제작소를 설립했고 설립 이후 3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길 위에서 살았다. 지역에서 새로운 대안을 만들고 있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인터뷰하면서 '지역이 희망이다'라는 믿음을 거듭 확인했다. 자신의 삶을 던져 지역을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사람들과 그 현장에서 충전한 아름다운 에너지를 우리 사회에 되돌리기 위해 부지런히 전국을 돌아다녔던 것이다. 이 책은 그 3년간의 결과물이다.
그런 그의 노력이야말로 서울시장으로서의 그의 역량이 기대되는 이유 중 하나이다.

21세기 한국의 '마을'은 어떤 모습일까? "귀에 익은 사투리, 눈에 익은 농촌 풍경들이 여전히 친밀하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읍내는 아파트로 뒤덮여가고 농촌을 폐가로 무너져 내린다. 우리들이 다니던 학교들은 폐교로 변한 지 오래고 동네에는 띄엄띄엄 노인들만 보인다. 시골에 남은 친구들도 거의 없다. 아무도 없는 있는 길 옆으로 또 다른 도로들이 건설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도로인가." 이러한 모습은 단지 고향만이 아니다. 전국 방방곡곡이 똑같은 문제들로 몸살을 앓는다.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농촌 사람들은 중소 도시로, 중소 도시 사람들은 대도시로, 대도시 사람들은 서울로 간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시골에는 아이들이 없다. 한 면에 초등학교 하나라도 유치하고자 결의한 어느 시골 군에는 한 명이 다니는 학교가 남았다고 한다. 그렇게  떠나간 농촌 마을에는 돈 많은 도시 사람들이 와서 양계장을 짓고 골프장을 짓는다. 시골 군청이나 공공 기관의 직원들도 그 지역에 살지 않는다. 오히려 도시에서 농촌으로 출퇴근한다. 

우리의 농촌은 그렇게 버려졌고, 도시는 언제나 만원이다. 그러나 그 만원인 도시에서조차 지역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아니다. 아파트의 옆집 사람과 서로 인사조차 나누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과 도시 사람들조차 '부평초같은 삶'을 산다. 한국에는 일정한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정주성'이 희박한 것이다.

그런 농촌에서, 마을에서 저자는 희망을 찾고자 했다. 그는 3년 동안 지역 순례를 하면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지역사회 공동체를 복원하고 활성화하려는 집요하고도 다양하며 눈물겨울 만치 노력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 책 등장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살리는 희망의 제작자들이며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들이고, 이 사회를 올바르게 이끌어갈 리더들이라고 말한다. 절망과 불가능 속에서 희망이 있는 정화수를 길어낸 두레박 같은 존재들이며, 바로 이들이 증명한 사례들로 우리는 지역과 농촌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능성의 땅임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

교육 부흥에 앞장서는 교사들, 농업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 농민들, 갈등을 극복하고 화합으로 마을을 이끄는 이장들, 지역 환경.여성.복지.언론.정치 등 여러 영역에서 캠페인을 벌여온 활동가들, 지역 주민과 지역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장과 지역 관리 등 다양한 층위에서 우리 사회를 올바르게 이끌어가고 있는 희망의 제작자들이 그들이다. 저자는 그들의 경험과 사례를 통해 삶의 공동체를 건강하게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과 환경, 제도와 정책을 연구하고 구체화해야 하는지를 살피고자 했다. 

희망제작소가 펼치고 있는 다양한 사업들, 즉 지역홍보센터, 주민참여클리닉, 농촌희망본부, 조례연구소, 자치재정연구소, 소기업발전소와 커뮤니티 비즈니스 연구소 등 다양한 지원 조직을 만들고, 전문가들을 네트워킹하고, 다양한 자료와 정보를 축적하는 동시에 이를 자료집과 보고서, 책으로 발간해내고, 이러한 주제들에 관한 다양한 세미나와 간담회, 강연회를 개최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구와 실천을 바탕으로 한 구체적 노력의 일환이다. 
책 말미에 인터뷰에 응해 마을 또는 공동체 이야기를 들려주신 분들에 대한 정보를 실었다. 필자가 프롤로그에서 밝힌 대로 이 책에 실리지 않은, 필자가 만난 수천 명의 지역 리더들과 현장 이야기는 다양한 형태로 소개될 예정이며, 현재 희망제작소 홈페이지[www.makehope.org] '박원순의 희망탐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저자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발로 뛰는 사람들, 안전한 먹을거리를 고민하고 환경 친화적인 세상을 일구는 사람들, 마을만의 독특한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사람들, 지역 주민들의 교육, 건강, 복지를 위해 연대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선별하여 담았다.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발로 뛰는 사람들 이야기에는 마을 운동의 새로운 모델을 만든 단양 한드미마을, 불모의 땅을 정감 넘치는 농촌 테마 마을로 이끈 남해 다랭이마을,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청주 육거리시장, 사회적 기업을 넘어 지역경제공동체를 꿈꾸는 태백 태백자활후견기관, 산으로 둘러싸여 농사지을 땅이 부족해 늘 가난하기만 했던 마을에서'한국 치즈의 원조 고장'이 된 임실 치즈마을 이야기를 담았다.

일곱 가구가 모여 친환경 다품종 소량의 농산품들을 생산하며 한국 농업의 '잔뿌리 강화론'을 펼치는 괴산 솔뫼농장, 유기농 사회를 꿈꾸며 유기농 정책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대안을 모색하는 부안 산들바다공동체, 농민운동에서 출발하여 지속 가능한 생명 농업, 환경 농업공동체를 꽃피운 의성 쌍호공동체, 여성농민회가 주도해서 만든 두부 공장을 시작으로 영농 조합 법인으로 이어진 횡성 지역순환영농조합법인 '텃밭', 유기농도 과학이라는 슬로건 아래 농민들에게 친환경 농자재를 공급해 안전한 농산물을 생산하게 하는 괴산의 친환경 농자재 은행 '흙살림'이야기 들은 안전한 먹을거리를 고민하고 환경 친화적인 세상을 일구는 사람들 이야기로 묶었다. 

마을만의 독특한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지역 미술인들의 노력으로 재래시장에서 갤러리로 탈바꿈한 마산 부림시장, 양반들이 만든 전통 체험 마을 고령 개실마을, 최규하 전 대통령 생가 복원과 기념관 건립 반대 운동을 전개하다가 한지가 원주의 전통임을 알게 되어 시민 축제인 한지문화제를 열고 파리까지 진출한, 원주한지문화제를 이끄는 사람들, 역사와 문화가 산적해 '인천의 살아 있는 박물관'으로 불리는 인천 배다리마을에서 지역공동체 운동과 문화, 환경운동을 펼치고 있는 대안 미술 커뮤니티 '스페이스 빔', 지역 문화인들과 지역 주민들이 함께 만든 문화 공간 장흥'오래된 숲'이야기를 들려준다.

떠나고 싶은 마을을 살고 싶은 마을로 바꾼 부산 반송동 '희망세상',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장학금을 조성해 마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청주 금천동 마을장학회, 경제적으로 열악한 지방에서 일반 시민들이 뜻을 모아 재단을 설립하고 사회복지법인 등록을 한 김해 생명나눔재단, 시 보호수인 느티나무 살리기 운동에서 시작하여 주민 리더, 주민 정치가를 탄생시킨 천안 한국청년연합회, 공공 보건을 지키기 위해 시민들의 참여로 의료 기관을 만든 원주 원주의료생협 사람들 이야기는 지역 주민들의 교육, 건강, 복지를 위해 연대하는 사람들 이야기로 분류했다.

이 책에 소개된 사람들은 아주 평범하고 소박한 옆집 아저씨, 앞집 아줌마이다. 그러나 '살기 좋은 마을 우리 손으로 만든다'는 일념으로 정성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그들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진정한 리더라고 저자는 말한다.  
 
각각의 지역 사례에서 드러나는 현실은 정부와 지자체의 정책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 또 얼마나 철학과 비전이 없는지 새삼 느끼게 해준다. 동시에 21세기 들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발전방향, 속도와 규모, 토건개발과 환경파괴, 마을과 농촌에 대한 방치와 무대책이 변하지 않고 있다. 정부는 정부대로, 지자체는 지자체대로 국민에게 위임받은 업무에 책임을 다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대통령 뿐 아니라 행정부 책임자, 국회, 공공기관, 지자체장과 의회 모두가 개혁대상이고 재교육 대상인 셈이다.
 

현재 박원순 시장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 중인 정책 중에 하나가 '마을만들기' 프로젝트로 알고 있다. 그가 3년 넘게 전국의 농촌과 도시지역의 모범적인 '마을사업'에 착안하여 서울시 여러 곳에서 자율적인 지역공동체가 되살아나게 하기 위하여 주거,복지,환경,경제,생협,교육,문화에 이르기까지 네트워크가 살아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물론, '성미산 마을' 등 서울시내 모범적인 사례에서 보여지듯이 지역공동체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투여되어야 하고 적지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공동체가 붕괴된 시간이 오래된 만큼 그것이 복구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각 지역에서 헌신적인 주민들이 나서지 않은 채 서울시가 위에서 조건과 기회를 제공한다고 하여 이루어질 문제도 아니다. 그럼에도 지역주민들이 기존의 시장들과는 전혀 다르게 '자발성'과 '공동체'를 지향하는 박원순 시장의 정책취지를 이용하기만 하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서울시를 이용하여 지역공동체를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모두 읽고 나서 저자에게 아쉬운 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마을과 농촌의 지금 현실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왔는지,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는 어떤 것인지, 세계적인 흐름과 국가적인 관계 속에서 마을과 농촌이 어떤 상황인지, 저자가 이야기하는 '블루  오션'이 어떤 시대적 흐름이나 철학적 비전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지 않다. 각각의 마을과 농촌이 새로운 활력을 위해, 공동체 재건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여 국가와 지자체의 정책과 제도, 경제현실과 사람들의 인생역정을 마을,농촌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각 지역에서의 노력과 결실이 어떻게 제도적이고 정책적으로 보완되어야 하는지 궁금하다. 
물론, 그것을 설명하고 풀어내는 것이 또 다른 전문가나 학자의 몫이 될 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저자가 다른 책과 글에서 담아냈는지도... 내가 저자의 모든 글과 책을 읽은 것이 아니기에 더 알아봐야 하겠지...^^
  
[ 2011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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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노혜숙.유영일 옮김 / 양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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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어느 날,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불현듯 책 제목에 이끌려 구입했다.
아마도 당시 나이 과거와 미래가 많이 혼란스럽고 답답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무언가에 홀리기도 한 것 같고 ’10년 연속 아마존 베스트셀러’라는 표현에 넘어간 듯...
 
책을 읽기 위해 처음 붙잡은 것은 3월 초순 경이었는데, 거의 한 달 만에 읽었다. 읽기가 무척이나 어렵고 지루했고 어디 절이라도 들어가지 않는 이상 저자의 글에 몰입하기가 어려웠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말과 미래를 생각하여 현재를 희생하지 말라는 말은 기억에 남지만, "지금이 아닌 삶이란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는 선언은 선뜻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나서 역시나 그다지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얼핏 ’이 사람이 통일교나 새로운 종파같은 종교를 탄생시킬 수도 있겠다’라는 느낌이 들긴 했다.  
 
깨달음을 찾는 사람들 중 일정한 부류에게 21세기 영적 교사로 추앙받고 있는 저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내일이나 10분 후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으로 삶을 좁히라고 촉구한다. 바로 거기에 참다운 평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1997년 출간과 동시에 폭발적인 호응을 받으며 단숨에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가 된 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하며 전 세계 무수한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출판사와 번역자 왈... 아마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동시에 올라있는 책이 100권이 넘지 않을까하는 호기심이 생긴다^^)
 
이성과 과학적 사유구조가 지배하고 있는 서양에서 저자의 외침은 실로 짧은 기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고 하고 무엇보다도 그는 인간 의식의 심오한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특이했나보다. 그는 어떻게 하면 마음의 노예가 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날의 삶 속에서 선연한 깨달음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를 깊이 다룬다. 그의 가르침은 저 멀리 떨어진 세계의 것이 아니고, 특별한 수단이나 방법이 요구되는 것도 아니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단지 ’지금 이 순간’ 깨어 있으라는 것뿐이다. 모든 답은 그 안에 들어 있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지금 이 순간’ 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책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독자 스스로 시간도 공간도 없는 ‘지금 여기’에서의 현존 상태에 강하게 집중할 수 있도록, 책을 읽는 가운데 새로워진 의식 속에 직접 들어갈 수 있도록 유도함으로써 독자들이 지금 이 순간의 변화를 체험하도록 유도하려 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과거의 굴레나 최근 어마어마한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이면 모를까...
 
저자는 자신의 체험을 간단히 전하면서 우리가 ‘지금 여기서’ 평화를 위한 깨달음의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방법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나 근심 걱정 없이 살 수 있다. 그러자면 우리는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이나 바깥세상이 아닌 우리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실제로 우리의 마음은 거의 끊임없이 생각을 하면서 언제나 불행했던 과거를 돌아보고 두려운 미래에 대해 걱정한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다음과 같이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다.
’삶은 지금이다. 지금이 아닌 삶이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지금만이 유일하게 존재한다. 지금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영원한 현재야말로 우리의 전체 삶이 펼쳐지는 무대이며 언제나 우리와 함께 남을 것이다. 지금만이 마음이 제한하는 범위 너머로 우리를 데리고 갈 수 있다. 지금만이 시간도 없고 형태도 없는 존재의 영역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다.’

 

하지만, 저자의 '지금 여기서'가 잘 다가오지는 않는다. 말이나 글로서는 느끼기가 어려운 것인지... 



- 출판사 책 소개 -
우리는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 때문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도리어 불안해하고, 결국은 그칠 줄 모르는 그 생각의 행렬이 소음이 되어 내면의 고요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 의견을 내놓고 추측하고 판단하고 비교하고 불평하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등의 마음의 생각들을 ‘나’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거짓된 자아가 만들어지고,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고통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이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진정한 깨달음을 위해 자기 자신을 마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풀어놓고 생각의 사슬에서 벗어나 영원한 현재로 들어가라고 요구한다. 영원한 현재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을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라,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 마음이 만든 허구에서 벗어나라, 마음속에서 나를 찾지 말라고 조언하며, 영원한 현재로 들어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
 
세미나와 강연, 개인 상담을 통해 받은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책은 인간 의식의 심오한 변화, 머나먼 미래의 일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창조할 수 있는 변화에 대해 일관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어떻게 하면 마음의 노예가 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나날의 삶 속에서 선연한 깨달음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톨레는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하는 동시에 독자 스스로 시간도 공간도 없는 ‘지금 여기’에서의 현존 상태에 강하게 집중하도록 함으로써 생생하게 깨달음을 맛보도록 한다.

’태어나면 죽어야 하는 무수한 형태의 생명체 너머에는 영원한 ‘오직 하나의 생명’이 자리한다. 그것은 저 너머에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 안에도 깃들어 있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고 영원히 부수어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당장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우리 자신, 우리의 진정한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생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된다. 이해하려고 하지 말라. 생각이 정지되었을 때만 그 본질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 충만하고 강렬하게 집중하고 있을 때만이 진정한 ‘존재’ 상태를 느낄 수 있다. 마음의 헤아림으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한 ‘있음’의 상태에 활짝 깨어 있으면서 그 느낌, 그 앎에 머무는 것이 밝은 ‘깨달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허상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기 자신과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깊은 내면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사람이라면,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겹겹이 쌓여 있는 사고의 층을 헤치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우리 내면의 그곳, 진리를 듣고 알아차리는 그 자리에 도달할 것이다. 그 자리에 이르게 되면 가슴이 벅차고 충만한 느낌이 들면서 내면에서 뭔가가 말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다지 주변에 소개하고 싶지 않은 책...
그리고 책 산 것을 후회하는 몇 안되는 책... 
 
* 저자 소개 :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
종교나 사상에 관계없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고 있는 정신적 스승입니다. 독일에서 태어나 런던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했고, 오랫동안 마음공부를 하여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NOW],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등의 베스트셀러를 발표했습니다.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살고 있으며, 유럽과 미국 등에서 강연을 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 2010년 4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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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세상의 조건 - 나눔과 희망의 전도사 박원순 에세이
박원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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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에서 나타나듯이 박원순씨는 지금으로부터 1년 전만 해도 "나눔과 희망의 전도사"를 자처했다.
세계 최초의 직업이라는 ‘소셜 디자이너’(Social Designer : 한 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사회의 설계 및 디자인 방법을 고민하는 직업)의 명함을 들고 다니던 박원순이 제시하는 바람직한 사회상은 아주 단순하다. 모두가 함께 행복한 사회이다.
그리고 이것을 이루기 위한 첫발을 ‘기부와 나눔’이라고 단언했다. 기부와 나눔을 21세기 키워드라고 믿는 그는 이성적인 기부를 권했다.

그러던 저자는 지난 10월 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다음 날부터 서울시장으로서 공직을 시작했다.
왜 그는 공직에 출마했을까?
2010년 6월 전국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시 야당으로부터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를 권유받고도 거절했던 그가 1년이 조금 지난 후 마음을 바꾼 것이다.
 
언론기사에 나타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주변에서 문제제기한 것이 크게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당신만 편하게 지내고 시람들의 절망에 대해 왜 몸을 던지지 않느냐", "강연때마다 사회변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이야기하면 '왜 그걸 실천할 수 있는 공직으로 가지 않느냐'는 질문을 수천번 받았다",  "이명박 정부들어 정부와 시민사회의 균형과 협력관계, 감시 시스템이 완전히 깨졌다", "무상급식 문제만 해도 야당과 시민사회와 논의해 풀 수 있는데 쓸데없이 정치쟁점화되면서 어마어마한 경비가 낭비됐다"고 직접 말했다.
또한 2009년에 불거진 국정원의 사찰과 MB정권의 아름다운재단과 희망제작소에 대한 외압도 한 원인이 될 것이라는 애기도 전해진다.
 
사실 개인적으로 나는 박원순이라는 사람이 살아온 길을 되짚어보면, 그가 정치인이나 관료보다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로 이어지는 삶의 궤적을 따라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중간지대, 즉 NGO 쪽에서 한국사회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1% 기득권들과 그 대리인인 MB정권, 관료기관, 우익언론, 우익정당은 기본적으로 작동되는 사회시스템마저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 연장선 상에서 박원순의 NGO 활동도 불편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앞으로 박원순 시장이 서울시장직을 잘 수행해 나갈 지, 3년 후 서울시장 선거에 재선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스스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할 지 그렇지 않을 지도... 본인 스스로 재선하여 서울시를 "시민이 시장이 되는 지자체"로 만들겠다는 다짐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3년이 지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고 유권자들이 판단하겠지...
 
이 책은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던 저자가 서울시장에 나선 이유보다 그 전에 국정원 사찰까지 받아 자신의 활동과 단체의 활동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박원순이 계속 가고자 했던 길에 담겨있는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를 통해 자신이 실천하고자 했던 '나눔과 기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여러가지 사례들 속에서 발견한 희망을 이야기...
 
그는 "사실 우리가 지금 가난해서 불행하거나 힘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마음이 가난한 탓에 불행하고 힘든 것이지 않을까"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삶의 가치를 외형과 물질에 두기 때문이다. 물질과 상품은 행복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요소일 수는 있지만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역으로 우리들 스스로가 정작 잘 사는 것이 무언인지, 방향감각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소중했던 가치들, 나눔과 배려, 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 마음, 따뜻한 이웃 간의 정, 형제애, 부모에 대한 공경과 존경, 공동체 정신, 농부들이 정성들여 키워 열매를 맺은 쌀 한 톨과 배추 한 잎까지도 귀하게 생각하는 그런 마음들을 다 잃어버렸다는 것... 그리고 자기를 희생해서 사회와 공동체를 위하는 헌신, 세상에 바른 목소디를 내고 기꺼이 좋은 사회를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용기도 사라졌다...
그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편하고 든든한 직장이라고 공무원과 교사가 인기라고 하는데, 이런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이 많은 사회가 희망이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더 인간적인 사회, 더 합리적인 사회, 더 민주적인 사회, 국민과 지구촌 시민들이 더 행복한 사회, 지속가능한 미래가 담보되는 사회, 누구나 자신의 인격과 삶을 풍요롭게 실현하는 사회, 누구나 절망하지 않고 좋은 세상을 꿈꿀 수 있는 사회, 이런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어야 한다.”

미국의 부자들이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이유도 부자들이 갖고 있는 기부의 습관에 있다. 빌 게이츠도 4년 동안 자기 자산의 60%인 20조원을 기부했다고 한다. 박원순은 스탠포드 대학을 방문했을 때, 미국의 기부 문화를 직접 보고 깜짝 놀란다. “도서관 건물에서부터 그 안의 장서에 이르기까지 큰 대학건물에서부터 작은 벤치에 이르기까지 기부되지 않은 것을 찾는 게 어려울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기부의 형식은 다양하다. 돈일 수도 있고, 시간일 수도 있고, 물건일 수도 있으며, 자신이 가진 재능일 수도 있다. 소리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오태양 군은 틈틈이 무료 공연을 기부한다. 나눔의 습관이 어릴 때부터 몸에 배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생각 때문이다. ‘사랑의 고물상’이라는 별칭이 있는 아름다운가게는 기부 받은 물건을 팔아 나온 수익을 전부 공익을위해 쓴다.
지금은 상당히 널리 퍼진 1% 나눔운동은 자기 수입의 1%를 기부하자는 운동이다. 가게에서 나오는 수입의 1%, 책 판매 수입의 1%, 강연료의 1% 등 전국에 106개의 점포가 있는 아름다운가게에 1%씩 기부하는 사람은 4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어떤 것이든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1%를 이웃과 나누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훨씬 더 따뜻해지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실제로 무엇이든 기부한 사람은 보람과 즐거움을 얻는다.
 
“눈앞에 굶주리는 사람을 보고 돈을 내는 즉자적이고 감성적인 기부보다는 어느 쪽에 돈을 내는 것이 사회의 풍요와 발전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인지 잘 판단하는 이성적인 기부로 바뀌어야 한다. 상속 관행도 바뀌어야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보람 있고 훌륭한 삶이며 삶의 성취인 자산을 어떻게 정리하는 것이 가장 보람 있는 삶인지 철학적으로 성숙해야 한다.”

저자는 정부의 예산만으로는 빈부격차의 양극화를 해소할 수 없다고 본다. 일반인의 힘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해 100억대를 모금하고 매출하는 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가 100개, 1000개가 되면 그 과정에서 고용이 창출되고 또 수많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사회마저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
헌 물건을 거래하다보면 일자리뿐만 아니라 서로 소통을 하게 되기 때문에 지역 공동체의 사랑방 구실을 하고 지역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는 장까지 된다.

저자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으로 재단법인제도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한낱 물질에 지나지 않던 돈이 재단법인에 출연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재단들이 편법 상속의 수단으로 많이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 발전에서는 재단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토크빌에 따르면 19세기 NGO가 활성화했는데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NGO의 역할이 필수적인데, 이를 뒷받침한 게 시민들이 자벌적으로 참여하여 재정적 기원을 아끼지 않은 재단이었다는 것이다. 15년 전에 이미 미국의 재단은 4만 개가 넘었고 자산도 300조가 넘었다 하니 어마어마하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이 재단들이 개인재단이라는 것이다. 재단 재원의 90% 가까이를 개인이 기부한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재벌의 재단이 지배적이고 이들은 NGO 지원에 인색하다. 향후 한국이 질적으로 도약하려면 개인재단이 많이 만들어지고 이들이 NGO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게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이 책은 강조한다.
우리가 바라는 대안적 사회, 좀 더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사회를 위한 기업의 역할도 중요하다.

“기업은 기업이되 일반기업처럼 이윤만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기업처럼 수익과 효율성을 추구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회적 기업은 공공의 이익이나 사회적 목적을 기업이라는 형식을 통해 추구하고 달성하려는 것이다. 사회적 목적 실현을 위해 이윤의 대부분을 재투자한다.”

새로운 기업 정체성의 모델로 사회적 기업은 그만큼 중요하다. 결국 21세기에는 어떻게 하면 기업이 공동체와 자신의 지역에 공헌할지 생각하는 않으면 기업의 성장과 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현장 그 자체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저자는 2006년부터 지금(2010년)까지 지역투어를 계속하고 있다.
우리나라 농촌과 지역을 구석구석 돌며 리더들을 만나 지역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발전을 위한 과제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인 것이다. 지역을 살려 전체를 살려가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동일 건물 건축금지 조례에서 보듯 개성 있는 도시 만들기, 지역 특산물 사업, 다랭이마을에서 보듯 단점이었던 환경을 오히려 장점으로 되살리는 사업 등이 좋은 사례라고 지적한다.
은퇴한 사람들의 제2의 삶을 돕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96세까지 산 피터 드러커는 “60세 이후 30년 동안이 내 황금기였다”고 말한다. 희망제작소에서는 전문직 은퇴자들에게 사회공익을 위해 일하는 비영리단체에 일자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호스피스 운동을 오랫동안 해온 능행 스님은 사람들이 영원히 살 것처럼 죽음을 미리 준비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매우 안타까워했는데 특히 재산을 미리 정리하지 않는 것은 남은 사람들에게 큰 짐을 지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만 제2의 갑부이며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던 왕융칭의 유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유언한다. “돈은 하늘에서 잠시 빌린 것이니 내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라”고. “자식이 능력이 있으면 물려줄 필요가 없고, 자식이 무능하면 물려주더라고 간수할 수가 없다”는 이유다.

이 책에는 세계의 구두쇠 할머니들 이야기도 등장한다. 라디오 한 대도 없이 살거나, 남루한 아파트에서 살거나 한겨울에도 전혀 난방도 하지 않고 살다가 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전재산, 많게는 수백억에서 수십억원을 공익을 위해 쓰라며 사회에 돌려주고 간 사람들.
말 그대로 ‘개미같이 벌었지만 거지같이 살다가 정승같이 기부한’ 사람들이다.
나눔의 길에 동참했던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도 만날 수 있다. 가게의 수익 중 1%를 기부하다가 여덟 형제 남매 모두 아름다운재단의 기부자로 이끈 사람, 택시 승객에게 기부하라고, 좋은 일에 돈을 쓰라고 쉼 없이 권하는 택시 기사, 저소득 지역 공부방 아이들에게 산타클로스가 되어 해마다 선물을 하는 기업, 생명나눔실천회를 만들고 안구와 장기 기증운동을 벌이다 운명하자 자신의 몸마저 의과대학 실험실에 남기고 간 스님, 엄혹한 시절 변호사로서 모범을 보여주었던 선배의 이야기까지.

“운동은 늘 마이너리티 운동이다. 사람들이 반대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일을 가지고 온갖 고난 끝에 마침내 많은 사람이 동의하고 지지하도록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사회운동의 본령이다.”

참여연대, 아름다운가게,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까지 어찌 보면 무모하고 사회를 바꾼다기에는 ‘너무 낭만적일 것 같은’ 비전과 방식으로 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 박원순은 이 책에서 보듯 우리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사회의 설계 방법과 디자인 방법을 얻고 함께하기 위해 발로 뛰고 있다. 희망제작소에서 벌여오거나 벌이고 있는 작은 지자체에 대한 컨설팅, 지자체 공무원에 대한 교육, 조례연구소, 주민자치 클리닉, 간판문화연구소, 공원연구소 사업 등도 그런 실험들이다.
‘21세기 실학운동’의 일환인 희망제작소의 모험이 어디까지 갈지 어떤 결과를 얻어갈지 많은 사람들이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박원순 변호사의 서울시장 출마를 내 맘대로,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싶었다. 한 사회의 거대한 시스템과 문화가 일부의 노력만으로, 특정 집단만의 힘으로 바꾸어질 수 없기 때문에 시민사회단체의 자발적인 '나눔과 기부' 문화와 더불어 정부,정치권의 제도와 시스템을 바꾸어야 하기 때문에 박변호사가 출마한 것이라고...
박변호사 말대로 정부 예산만으로 빈부격차를 해소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반대로 정부의 노력 없이 민간의 자발적인 운동만으로 빈부격차를 해소할 수 없는 것은 더욱 당연한 사실이다.
박원순 시장이 서울시장으로서 지자체의 정책을 통해 새로운 거버넌스와 '나눔과 기부'를 구현할 정책을 선보이고 민간에서 자기 역할을 수행하여 변화된 사회문화를 만들어내기를 기대해본다...
사실 박원순이라는 인물이 떠난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가 지금까지의 발전과 성과를 계속해서 만들어낼 지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한다.
 
책 속에 들어있는 박변호사의 NGO 활동이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것으로 나는 아주 모범적인 일이라 평가하고 싶다. 특히 다른 시민사회단체의 활동이 지지부진했던 지난 날을 돌아보면... 그는 '나눔과 기부'라는 키워드로 한국사회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그럼에도 시민사회단체에서의 그의 노력은 아직 크게 결실을 맺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2010년 기준으로는 '나눔과 기부'를 시작한 지 시간도 얼마 되지 않았고(7년 정도?) 한국사회의 문화와 정서가 제대로 그의 문제의식을 받아주지 못하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나 역시도 주변에 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럴 정도로 한국인 1%에게까지 영향이 확대되지 못한 상태였다.
물론, 이제 막 꽃이 피기 시작한 '나눔과 기부' 운동을 공권력을 악용하여 방해한 현 정권과 집권당, 기득권 세력은 정말이지 무지몽매하고 악질이었다.
 
저자가 서울시장이 되어 정책으로 구현하고 여전히 시민사회단체에서 '나눔과 기부' 운동을 펼치고 있는 와중에도 애초에 저자가 가졌던 문제의식, 즉 "잃어버린 가치의 회복"은 아직도 남아 있다. 그것은 단순히 '나눔과 기부' 운동을 활성화하는 것으로도, 빈민구제정책을 펼치는 것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사회의 문화와 시스템, 소통과 참여, 개방과 공유가 어우러져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하고 또 진행해야 할 지 막막하기는 하지만...
 
[ 2011년 12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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