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파울루 프레이리 혁명의 교육학
피터 맥라렌 지음, 강주헌 옮김 / 아침이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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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수 세기에 걸쳐 '진보'해 왔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현실을 돌아보면 전혀 그런 것 같지가 않다. '만민평등'이라는 개념이 각국의 헌법과 교과서에 담겨 있음에도 실제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인종적, 성적인 불평등과 양극화는 심해지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자체가 그러한 불평등과 양극화를 가져오는 시스템이지만 최근 몇 십년 동안 전세계에 위세를 떨친 신자유주의는 그러한 경향을 훨씬 강화시키고 있다.
국가 내의 양극화, 국가 간 양극화, 대륙 간 양극화, 인종별 성별 양극화가 지나친 상황이다. 결국 제도와 시스템 뿐 아니라 각 개인의 의식과 집단적 사회문화까지 고려하지 않는 현실, 무한경쟁으로 인하여 그러한 '더불어 삶'과 공동체 문화를 파괴하고 해체시키는 작용이 훨씬 강하게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요즘 정치경제나 사회문화와 별도로 배움과 학습, 교육과 학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은 20세기 남미의 두 인물, 체 게바라와 파울루 프레이리의 삶과 철학을 되돌아보며 그들이 지향한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란 무엇이며 이를 위한 교육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모색한 책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쓴 동기는 “프레이리와 게바라에게서 느껴지는 공통점”이었다고 말한다. 일찍이 <페다고지>로 널리 알려진 프레이리는 비폭력 저항과 투쟁을 주장했지만, 브라질에서는 그의 반(反) 패권적 사상 때문에 위험한 반체제주의자로 찍혀 투옥되었고 오랜 정치적 망명생활을 했으며, 게바라는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제국주의자들에게 토지반환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방위이며, 폭력적 저항은 파시즘과 양키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신처럼 군림하는 식민주의를 꺾을 수 있다는 것을 대중에게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한 게릴라였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가슴을 나눈 형제였다. “그들은 감옥, 전쟁터, 교육 투쟁의 현장 등 어디에서도 얼굴을 맞댄 적이 없었지만, 머리와 가슴으로 비슷한 세계관을 지녔으며, 지적 정치적 동료로써 인간 정신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모습을 보여주었다.”(p.09)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인간은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공부를 통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한 점에서 공통점을 지녔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해 순교자처럼 거칠고 엄격한 게바라, 부드러우면서도 대담한 파울루에게서 그들이 공유한 세계관을 풀어내고 그들의 삶이 갖는 현대적 의미를 분석하고 있다.

책은 1967년 10월 9일 체 게바라의 처형 당시의 모습부터 시작하여 게바라의 일생과 그의 철학이 라틴아메리카의 현실과 글로벌 자본주의의 횡포, 사파티스타 민족해방전선 등의 혁명투쟁과 교차되어 서술된다. 처형 직전에도 현지의 교사와 교육에 관해 토론하는 모습과 전투 현장에서도 게릴라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일기에 대한 비평을 해주는 등 끊임없이 교사 역할을 수행했던 게바라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피터 맥라렌은 두 사람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전 세계를 지배하려는 자본주의의 파우스트적 욕망이 세계를 생태적 위기에 몰아넣고, 북아메리카인이 향유하는 경제적 안락이 남아메리카의 형제자매의 빈곤과 직접적 관계가 있기 때문”이며 게바라와 프레이리가 “지역적, 범세계적으로 권력의 비대칭적 관계를 청산할 수 있는 교육부문에서의 행동방향을 남겨주었기 때문”(p.279)이라고 말한다.
피터 맥라렌의 정의에 따르면, 혁명적 교육학은 비판적 교육학에서 한 걸음 더 전진해서, 권력과 지식의 관계를 내적인 모순에 따른 충돌상태에 놓는 교육학이다. 혁명적 교육학의 핵심은 ‘지식’과 ‘존재’ 및 그 둘의 관계에 대한 우리 사고방식을 인식론과 존재론 모두에서 혁명적 변화를 모색하는 데 있다. 프레이리와 게바라의 교육학은 이 특징을 고스란히 담아내서 비판적 문해능력을 강조하며 정치 프로젝트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데, 게바라는 보다 직관적이고 프레이리는 보다 체계적이나 상호배려를 말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두 사람의 견해에 따르면 민중을 억압의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성공이 아니라 민중이 스스로 해방의 길을 모색할 수 있는 수준까지 키워내야 진정한 성공이다. 그것은 미완적 존재로서 ‘다양성 안에서의 통일성’을 바탕으로 자신과 사회를 끊임없이 변증법적으로 변화시켜가는 ‘새로운 인간’들로 구성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혁명의 과정이다.

'왜 지금 게바라와 프레이리를 다시 되살려야 하는가?' 이 문제 제기는 이 책의 목적이기도 하다. 맥라렌은 이러한 의문을 제기하며 두 선각자가 남긴 세계관을 추적하며, 21세기를 맞아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데에 필요한 교육과 정치에서 핵심적 역할을 그들로부터 발견했다. 그것은 곧 프레이리와 게바라가 제시하는 새로운 인간의 가능성이었고 그것은 사회경제적 측면이나 정치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었다.
맥라렌은 세계화된 세계를 부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용납할 수 없는 세계로 정의한다. “‘족쇄가 풀린’ 자본주의와 끝없는 자본축적에서 비롯된 ‘자유시장혁명’은 모두에게 혜택을 주지 않았다. 실제로 그 ‘혁명’은 미국사회의 하부구조를 만신창이로 만들었으며, 방위산업과 금융산업의 이익을 도모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남아메리카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고혈을 짜냈다.”(p.60)
“사기극에 능한 깡패 정치인들은 공익, 공공서비스, 공적 권리, 그리고 최근에는 캘리포니아 법안 187호, 209호, 227호에서 보듯이 시민권까지 무시하면서 민간산업을 위한 충견노릇을 하며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정의보다 기업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게다가 케인스식 복지국가를 미친 듯이 와해시켜, 착취라는 개념은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개인과는 동떨어진 공허하고 추상적인 개념이 되어 버렸다. 자본은 선의의 진보적인 교육자들에게도 뿌리치기 힘든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p.69~70)
그는 두 사람을 통해 족쇄 풀린 자본주의, 자유시장주의, 자본과 노동의 세계화가 안고 있는 사회경제적 병폐를 척결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은 ‘혁명의 교육학’이었으며 ‘저항의 교육’, ‘사랑의 교육’이었다.

체 게바라는 티셔츠, 핀, 포스터, 열쇠고리, 스티커 등의 형태로 상업화되고 소비문화에 코드화되어 자유분방한 혁명가로 전락되어 버렸다. 미국의 교사들과 교수들에게 체는 오늘날 세계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들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필요한 삶을 살고 메시지를 남긴 사람이 아니라, 먼 과거에 이상적인 꿈을 꾸었던 낭만적 아이콘이고 제3세계의 상징적 인물일 뿐이다. 심지어 교회까지 체의 상징적 이미지를 이용해 왔다. 혁명가 체의 이미지를 이용해서, 영국의 ‘교회홍보네트워크’는 체에게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남성적인 매력을 과시하는 포스터를 제작해 5만여 개 교회에 그것을 구입하라는 전국적인 포스터 캠페인을 벌이며 이상스런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교회신도들이 부활절에 교회를 찾도록 체의 포스터를 미끼로 쓰라는 것이었다.
체 게바라에 대한 많은 책이 출판되었지만, 맥라렌은 이 책에서 체 게바라가 팽배한 자본주의 상품사회와 교육, 정치 등에서 교육자, 정치인, 포스트모던 좌파들에 의해 어떻게 상품화되고 왜곡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드러내 보여준다.
또한 짜맞추기 교육, 은행예금식 주입교육을 비판하며 억업 받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꿈과 욕망을 채워주는 부속물로 살아가는 가혹한 현실을 극복하는 철학과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 파울루 프레이리로부터 비판적, 혁명적 교육을 이끌어내고 있다.

‘새로운 인간사회’를 모색하는 젊은이에게 프레이리와 게바라는 용기를 얻고 본받아야 할 표본을 남겨주었다. 일확천금이나 무소불위한 권력을 꿈꾸거나 자극적인 환상, 무자비한 폭력, 무절제한 섹스로 공허한 정체성을 채우는 반면에 게바라와 프레이리의 사상과 실천에 담긴 혁명적 자아는 정치와 교육에서 새로운 표본을 제시해줄 것이다. 맥라렌은 탈정치화된 프레이리나 게바라를 거부했다.
“우리 시대는 꿈의 시대이다. 그 길을 개척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 앞에 놓인 도전은 혁명가의 교육학적 프락시스를 되살려내고, 자본의 착취에 신음하던 사람들의 세계사적 행동을 재연해내는 것이다. 오늘날 교육의 권위자들이 유행병에라도 걸린 듯이 변절을 밥 먹듯 하지만, 이런 흐름에 혁명의 교육학까지 제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p.311)

이제 체 게바라를 전체적으로 알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 2012년 4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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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교실 혁명 핀란드 교육 시리즈 1
후쿠타 세이지 지음, 박재원.윤지은 옮김 / 비아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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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년간 계속된 '무한경쟁' 시장근본주의, 신자유주의로 인해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이 몸살을 앓고 있다. 국가간 격차와 자국 내 계급,계층간의 사회적 양극화를 확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무한경쟁'의 입시교육이 교육 자체와 학교와 아이들을 미쳐버리게 만들고 있다. 그 뿐 아니라 교사와 학부모들까지 이 미친 교육에 희생양이 되어 사회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마음 속의 '병'을 카워가고 있다. 꿈과 희망을 키우고 즐겁게 뛰어 놀아야할 어린 나이에 아이들은 학원에, 영어에, 특기교육에, 시험에 골병이 들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부모가, 학교가, 학원이 제공하는 틀과 방식, 일정과 제도 속에서 자율성과 창조성을 갉아먹고 있는 우리 아이들의 현실이 무슨 대량생산 공장의 부속품처럼 '양육'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아이들의 교육문제는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님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입시교육이 점점 빈부격차와 사회적 양극화의 유력한 이유로 정착하고 있고 사회와 세대의 활력과 창의성, 공동체를 붕괴시키는 원인으로 작동한지 오래라 할 수 있다.

한국은 1945년 타의에 의해 민족해방이 되고 분단이 되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치른 끝에 지금에 이르렀다. 조선시대 봉건제도에서 일제 식민지라는 암울한 억압을 거친 후 이 땅의 대다수 민중들은 1948년 헌법 1조에서 규정된 '민주공화국'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채 타의에 의해, 일부 기득권자들에 의해 그냥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 1조가 사람들애게 소중하게 다가온 것이 2008년 첫불시위 때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 피땀을 흘려 쟁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도 헌법의 가치, 인권, 민주주의의 가치, 정치의 역할, 교육의 역할, 국가의 존재이유, 만민평등의 원리, 유권자의 권리 등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아이들이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와 이에 반하는 교육제도가 아직도 이 땅에 군림하는 이유 역시 지난 과정과 따로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도 없는 문제이기에 각각의 사안에 대해 그 때 그 때마다 깊게 생각해보고 주변을 둘러보고 서로 이야기해보고 가장 나은 방향과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 차선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이들에 대한 교육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교육(교육)'이라는 단어가 주는 타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느낌 때문에 단어 사용에 부정적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우리사회의 교육을 놓고 교육 철학, 목표, 정책, 시스템, 운영방식 등에 대해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의견을 교환할 때만이 그나마 시행착오를 줄이고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나는 작년 6월 지자체 선거와 동시에 진행되었던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8월에 전임 시장인 오세훈이 저지른 '무상급식 주민투표'와 11월에 벌어진 '곽교육감 사건'에서도 교육적인 관점보다 일반적인 상식과 사회복지, 민주주의, 선거제도 등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행동했을 뿐이다. 나 역시 교육문제에 대해서는 보통의 학부모들이 생각하는 정도와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동안 큰 탈 없이 잘 자라주던 내 아이도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고 1년만 지나면 입시재도와 현실에 빠져든다고 생각하니 이제는 더 이상 남일이 아닌 문제가 되었다. 마침 공부모임에서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가 제시해야할 교육정책에 대해 세미나를 하기로 했기에 이 기회에 교육과 관련한 책을 집중적으로 읽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교육이나 학교와 관련해서는 작년에 <학교 없는 사회 Deschooling Society>를 비롯해 '학교화'와 '제도화'에 관한 몇 권의 이반 일리히의 저작을 읽었고 이번에 약 20년 만에 <페다고지> 등 파울로 프레이리의 저작을 읽어보았다. 국내에서 발간된 교육개혁이나 교육문제에 대한 책 몇 권과 더불어 한꺼번에 읽어보고 내 생각을 정립해보려는 것이다. OECD 국가 중에서 교육에 있어 가장 훌륭한 철학과 시스템과 결과를 낳고 있는 핀란드 역시 이번에 공부해봐야할 과제일 수 밖에 없다.
 
 
이 책은 일본의 핀란드 교육전문가인 후쿠타 세이지(츠루문과대학 문학부 비교문학과) 교수의 핀란드 교육 리포트다. 그는 수십여 차례 핀란드를 방문하고, 핀란드 교육 성공의 비결을 연구한 일본의 핀란드 교육전문가다. 후쿠타 교수는 이번 책에서 핀란드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 현장인 교실을 200여 컷의 생생한 사진과 함께 독자들에게 생중계하고 있다. 현장에서 벌어지는 하나하나의 사례에서 출발해 핀란드 교육의 성공을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설득력게 전달된다. 여기에 학습법 전문가, 교육평론가인 박재원 비상교육 공부연구소장의 해설이 곁들어져 있어서 남의 얘기가 아닌 지금 이곳, 대한민국 교육 현장과 생생하게 대비된다. 박재원 소장은 이 책의 번역과 해설을 통해 현장의 분위기는 사실적으로 전달하되, 각 꼭지 말미에 해설을 달아 한국적 상황에 맞는 핀란드 교육을 독자에게 제안하고 있다. 이는 기존 번역서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시도로 책 한 권에서 담아낼 수 있는 것 이상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마지막 5장에서는 우리에게 핀란드는 어떤 존재이고, 왜 핀란드 교육 모델이 우리 교육의 희망인지,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국제학생평가(PISA:Program for International Student Assessment)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감독하에 실시하는 15세 이상 학생의 읽기·수학·과학 평가다. 지난 2000년부터 3년마다 실시하며 국가별 학업성취도 비교지표를 도출하는 게 목적이다. 2003년도 평가결과 우리나라는 수학 542점, 과학 538점으로 핀란드(수학 544점, 과학 548점)에 이어 2위에 올랐다.,"
"2003년 OECD의 국제학업성취도조사(PISA)를 비교한 결과 핀란드는 청소년들의 일주일간 수학 학습 시간이 4시간22분으로 한국(8시간55분)의 절반에 불과했지만 점수는 544점(한국 542점)으로 한국보다 높았다. 한국 청소년의 주당 공부 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33.92 시간)에 비해 15시간 많으며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길다."
"2008년 우리 국민이 쓴 사교육비 규모는 약 21조원, 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23만 3,000원으로 집계됐다(교육과학기술부 통계)."

위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는 핀란드에 이어 학력이 2번째로 높은 나라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한국 학생들이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워낙 길어서 나온 결과일 뿐이다. 2009년 8월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발표한 ‘아동·청소년 생활패턴에 관한 국제 비교연구’에 따르면 학습시간 대비 성취도로 순위를 매기면, 한국은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으로 떨어진다. 한마디로 학습효율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 뿐인가. 사교육비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아이들은 억지로, 부모에게 이끌려 '울면서' 공부하고 있다. 매년 성적과 시험 스트레스로 고통받고 자살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사회는 학생들에게 공부를 시키기 위해 정말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지불하고 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학생들을 억지로 공부시키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을 생각해보라. 자발적으로는 공부하지 않는 아이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우리는 지금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시간적 낭비, 비용의 낭비, 정신력의 낭비, 행복의 낭비, 마지막으로 국가 경쟁력의 낭비라 할 수 있다.(자세한 사항은 책 속에서 참조)

그렇지만 눈을 돌려보면 지구상에 우리와 전혀 다른 나라가 있다고 한다. '공부가 재미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을 위해 스스로 공부한다. 학교는 기꺼이 가고 싶은 놀이터 같은 곳이다. 철저하게 학생 개개인의 발달을 돕는다. 단 한 사람의 낙제생도 만들지 않는다. 서열화가 아니라 피드백을 위해 평가한다….'
바로 핀란드다. 핀란드 교육 관계자의 말을 옮긴다. “핀란드의 교육개혁은 무척 단순한 경제적 필요성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적은 인구에 척박한 자연환경, 단 한 명도 버릴 수 없는 절박한 처지에서 나온 생각들을 실천한 결과입니다.”
우리나라는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특목고, 자사고 등 수월성 교육을 실행한다고 한다. 핀란드에서는 같은 이유로 학교간, 학생간 격차를 없앴고, 세계 최고의 학력과 학습효율성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흔히 핀란드 교육을 얘기하면 우리와 너무나 다르다는 식으로 냉담한 반응을 한다. 그래서 이 책은 교육이 이뤄지는 교실 현장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핀란드 교육이 아니라 소박한 핀란드 교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핀란드 교육이라는,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이상적인' 이야기보다는 당장 실천이 가능한 소박한 핀란드 교실의 비밀을 들여다본다.
핀란드 교육 경쟁력은 세계 최고다. 초·중·고교는 물론 대학교육 역시 다른 나라를 압도한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15세 이상 학생의 학업성취도를 평가하는 PISA(국제학업성취도평가)에서 단골 1위 국가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고, 높은 신뢰도로 정평이 나 있는 스위스 IMD(국제경영개발원)의 대학교육 경쟁력 조사에서도 매년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핀란드 교육의 성공 요인은 무엇일까? 
핀란드 국가교육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나라 교육현실과 너무도 정반대의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가정, 성, 경제력, 모국어와 관계없이 교육 기회가 평등한 점. 어떤 지역에서도 교육에 대한 접근이 가능한 점. 성별에 따른 분리를 부정하는 점. 모든 교육을 무상으로 실시하는 점. 종합제로 선별을 하지 않는 기초교육. 전체는 중앙에서 조정하지만 실행은 지역에서 실시할 수 있도록 교육행정이 유연하게 지원을 한다는 점. 모든 교육 단계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협동하는 점. 동료의식. 학생의 학습과 복지에 대해 개인별로 맞춤 지원을 하는 점. 시험과 서열을 없애고 발달의 관점으로 학생을 평가하는 점.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전문성이 높은 교사. 사회구성주의적인 학습 개념(socio-constructivist learning conception)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과연 어떤가? 기회균등이 하향평준화의 주범으로 거론되고 있다. 여전히 교육 관료들의 권한은 막강하다. 가르치는 교사들이 중심이 아니라 관리하는 관료들이 중심이다. 협동 학습은 교과 성적과는 무관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수업 모형이다. 학생 개인보다는 학교와 학급의 평균 성적과 명문대 진학 실적이 최우선이다. 모든 교육은 서열화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지나치지 않는다. 교사들은 진급에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연수교육에 소극적이다. 3번에 해당되는 성적(性的) 차별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서 큰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핀란드 교실의 모습을 살펴보면 선생님들이 재미있는 수업을 만들고, 학생들은 즐겁게, 스스로 공부를 한다. 역자는 핀란드의 교실 모습을 사례로 우리 교육도 인상적인 모델을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한때 화제가 된 전북 임실의 기적이 너무도 허무하게 성적 조작으로 판명나면서 ‘한국의 핀란드’라는 표현이 잠시 나오다가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최근 시도되고 있는 방과 후 학교의 성공 사례들을 보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설자는 우리 교육에도 희망의 성공 사례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교육의 대혼란에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희망의 성공사례 만들기를 핀란드 교실 현장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역자는 이에 따라 대한민국 교실 개혁의 키워드 몇 가지를 제시해본다. 첫째는 학생들의 내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사들의 강압적인 통제나 일방적인 주입식 수업이 과연 학생들의 내면에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교사들이 알아야 한다. 둘째, 학생 전체가 아니라, 학교나 학급의 평균이 아니라, 학생 개개인에게 관심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선생님 입장에서는 수많은 학생들 중 한 명일 수 있지만 학생 입장에서는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정해진, 정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 한 명의 존재가 바로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셋째, 학생들이 과연 무엇에 관심과 흥미를 느끼는지 교사들이 좀 알아야 한다. 재미를 찾아주기 위해 분투하는 사교육 강사들과의 경쟁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최소한 지겹고 따분한 수업이라는 혹평에서는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넷째, 학생들의 성적이 부진하면, 반 평균 성적이 떨어진다고 학생 개개인을 탓할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나는 잘 가르쳤는데 네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그랬다는 식의 태도는 이제 버리자. 조금이라도 학생들의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모색하는 선생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책의 제목은 '교육 혁명'이 아니라 '교실 혁명'이다. 우리에게 교육이란 너무나 민감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야하는 거대 담론이다. 그래서 원작자나 해설자는 먼저 교육이 실시되고 있는 공교육의 현장, 교실에 렌즈를 들이대고 있다. 교실에서 이뤄지는 작은 변화를 모델로 사회적 합의를 거쳐 교육 개혁을 이뤄내자는 것이다. 이는 좌와 우, 보수와 진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법으로, 교실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대다수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어 보자는 얘기다. 앞서 얘기한 방과후학교가 그 작은 시작일 수도 있고, 핀란드 교실에서 행해지는 사소한 차이들이 우리 교육 개혁의 단초가 될 수 있다고 해설자는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은 이미 회자되고 있는 핀란드 교육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면서 실천적 대안을 찾기에 적합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자칫 핀란드 교육은 너무 좋지만 이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치부하는 냉소주의를 경계하면서 핀란드 교육 모델을 우리 현실로 끌어와 실현 가능한 과제로 녹여내고 있다.
 
현재 우리사회 교육, 교실이 바로 서려면 교사들의 역할과 노력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이 학부모이고 학교이고 시도 교육당국이라 할 수 있다.
 
[ 2012년 3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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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의식화
파울로 프레이리 지음, 채광석 옮김 / 중원문화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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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만에 파울로 프래레이리의 <페다고지 : 피억악업자의 교육학(1970)>을 다시 읽고나서 프레이리의 교육철학이 궁금해 찾은 저작이다. 이 책 <교육과 의식화>가 처음 발간된 해가 1978년이니 <페다고지>를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21세기 한국 상황과 전혀 다른 맥락과 조건에서 쓰여진 글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나는 다만 <페다고지>만 읽고서는 프레이리의 교육철학을 제대로 알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 책과 다른 책(<체 개바라, 파울로 프레이리의 혁명의 교육학>,2012)을 한 권 더 읽어보려고 했다.

프래이리는 제1장 '자유실천으로서의 교육'에서 브라질의 근대사를 통해 브라질 사회가 어떻게 변해왔으며 외세(포루투칼)에 의해 어떻게 브라질의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체계가 왜곡되어 구축되어 왔으며, 그 과정에서 브라질 민중들의 뿌리 깊은 굴종과 체념의 인식이 각인되었는지 말한다. 외세의 의해 심어지고 유지된 사유대토지하의 브라질 사회에서 인간관계의 특징은 사회적 거리감이며 이는 '대화'를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반대화' 사회체제는 브라질 민중의 침묵증의 근원이 되었고 이는 사회적으로 정치사회적 연대감과 대화, 참여, 정치, 사회적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 사회, 정치제도가 자라날 여지가 전무하였다. 여기에서 브라질 사회와 민중에게 대화식 교육과 의식화의 과제가 도출된 것이다.
프레이리는 자신이 브라질 동북부 농촌에서 직접 실험한 문맹퇴치교육의 경험을 소개하면서 '대화식 교육을 통한 민중의 의식화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그는 착 속애 농촌에서의 문화 써클에서 농민들과 토론했던 구체적인 과정을 소개하면서 참여를 통해 민주적 과정을 겪으면 어떻게 농민들의 주체성을 일으킬 수 있고 의식화가 가능한지 설명한다.

프레이리가 규정하는 억업자는 호령, 명령, 지시, 착취, 거짓 관용, 거짓 사랑을 행하는 지배엘리트와 이른바 혁명을 운운하면서도 반대화적 행위를 일삼는 좌익 분파주의자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들의 행동 이론은 민중을 피보호자로 보는 가부장주의, 지배문화의 이데롤로기를 신화화시키는 조작주의, 존재가 아니라 소유를 추구하는 물화주의 등의 "죽음을 긍정하는" 정신으로 보고 이의 구체적 양상이 분할 지배, 조종, 문화적 침략, 정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분석한다. 이로 인해 피억압자들에게는 심리적 왜곡 현상의 하나로 '자유에 대한 공포(fear of freedom)'라고 말한다. 반대로 그는 인간화의 주체인 피억압자의 행동 이론이 해방을 위한 일치, 조직, 문화적 종합, 협동이어야 하며 이의 밑바탕에는 민중에 대한 믿음, 신뢰, 사람, 희망이 자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저서 <페다고지>와 이어진 주장으로서 그의 근본적인 문제의식과 분석, 해결방향은 21세기인 지금 한국 상황에서도 발견되고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제2장 '지도나 교호나(Extenttion or Communication)'에서는 브라질 농촌사회에서 실시된 농업 기술자들(technicians)과 농민들이 새로운 농촌사회를 이룩해가는 과정에서 어떻게 서로 상호 의사소통할 수 있는가에 관해 분석했다. 그는 '지도'라는 용어를 낱말의 언어학적 의미, 철학적 지식론에 입각한 비평, 지도와 문화적 침략의 여러 개념 간의 관계 등 서로 다른 여러 가지 관점에서 분석함으로써 '지도'에 대해 종합적으로 비판한다. 그는 지도의 개념이 어떻게 해서 농민을 믈건으로 만드는 여러 행위로 전개되는가를 밝혀준다. 따라서 일반적인 교사와 마찬가지로 영농기술자인 교육자는 그가 역사적 현실 속에서 사람들과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관계를 맺으려 하는 한 반드시 지도와 교호 중 교호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프레이리는 다시 한번 인간화를 위한 '문제제기식 교육'의 개념과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는 교육 행위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어야 하며, 방법, 기술 과정 전체가 인간 해방의 구현 방법이어야 한다고 본다. 그는 인간 해방으로서의 교육은 실제나 상황에 대한 반성 이상의 것 즉 프랙시스(praxis)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 교육으로서의 프랙시스는 실재에 대한 반성과 그 실재를 변형시키는 행동 사이의 통일점을 뜻한다.
 
이 책은 <페다고지>와 마찬가지로 주로 성인문맹퇴치교육을 중심으로 한 민중교육론인 까닭에 상당히 주의 깊게 읽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프레이리의 브라질과 남미에서의 교육대상이 가난과 억압에 찌든 농민과 도시지역 빈민들이면서도 우리나라의 경우와는 달리 문맹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만 그의 교육론의 틀과 방법론이 명확히 이해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서의 전편을 꿰뚫고 흐르는 프레이리의 브라질 근대사 인식을 우리나라 역사와 비교하여 읽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어쨌든 리챠드 쇼올이 지적했듯이 프레이리의 이론과 방법론은 브라질의 경우뿐만 아니라 소외된 민중 일반의 교육에 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21세기 한국에서 같은 인간존재로서 동등하게 인정받지 못하고 평등한 사회적 기회를 보장받지 못하며 인간적 노동도 성취도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사람들을 여전히 '민중'이라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상당수가 역사의 주인으로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하고 지배계급으로부터 미디어와 시스템을 통해 음으로 양으로 세뇌되어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사회의 숙제가 아닐 수 없다.
또한, 프레이리의 교육철학은 그런 사람들 뿐 아니라 어떻게 보면 현대인 모두가 참된 인식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도구적 존재이므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되찾고 역사적 존재로 되살아나려면 한 번쯤 숙고해 볼만한 교육론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책 속의 프레이리의 사상, 교육철학은 깊이가 있고 어떤 때는 따라잡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그는 정곡을 찌르고 있으며 진리의 세계와 이들 진리 간의 연관관계 및 논리 정연한 개념설정을 보여준다. 인간들의 여러 행위, 자연의 세계를 지배하고 자기들의 문화와 역사를 창조하려는 인간의 투쟁 등이 개별적으로만이 아니라 전체적 기능 속에서도 중요한 뜻을 지니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음을 제시한다.
이반 일리히와 비교해 아쉬운 점은 프레이리가 억압자와 피억업자의 대립 구조를 중심으로 민중의 교육학에 집중하는 대산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 위계적인 관계로 구성하면서 근대사회의 반환경, 반생태, 산업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반 일리히가 생활하고 분석했던 사회경제적 제도와 구조가 프레이리의 그것과 전혀 달랐기 때문에 '학교의 교육 독점'과 '학교화'애 대한 문제의식은 프레이리의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 2012년 3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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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다고지 (30주년 기념판)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5
파울루 프레이리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처음 이 책을 읽었던 것은 대학시절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고나서 교육이나 학습, 연구, 의식화 등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 때 누군가를 통해 '몰래' 추천받아서 읽은 것이다. 당시로서는 저자의 관점과 주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당시 나는 재수까지 하면서 나름 꿈에 부풀어 대학에 입학했으나 3월 첫 일주일 동안 미적분학, 물리학, 화학 수업을 듣고나서 고등학생 때 꿈꾸면서 동경하던 대학생활이 TV 프로그램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와 전혀 다르다는걸 알아버린 후였다. 대학의 교육은 고등학교 시절 교실의 규모가 좀 더 커지고 고등학교 수업과목에 몇 가지 더 포함시킨 후 '선택'을 위한 강제에 불과했다.
토론과 논쟁은 고사하고 교수는 오간데 없이 조교가 강의실에 들어와 교재를 요약해 설명하고 출석과 주,객관식 시험은 고등학교와 다름 없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 선배들에게 들으니 나 뿐 아니라 5~10년 전 선배도 나와 동일한 교재로, 동일한 방식의 수업으로, 동일한 시험을 치렀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초,중,고 12년간 우리나라의 '학교교육'에 진절머리가 나있던 나였기에 대학의 모습은 충격아닌 절망이었다. 27년이 지난 요즘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1970년 처음 발간된 이 책은 2000년 미국에서 발간된 <페다고지>(Pedagogy of the Oppressed ; 피억압자의 교육학) 30주년 기념판의 국역본이다. 우리 세대에게도 낯설지 않은, 아니 어느 한때 금서 목록의 한 칸을 차지했을 만큼 잘 알려진 책이다. 이 책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암울했던 군사독재 시절 금서 목록에 올라 비합법적으로 유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진보적 지식인, 노동자, 학생 들에게 민중의 의식을 깨우치는 책이자 교육자 자신이 교육받는 책으로 널리 읽혀진 바 있다.

저자가 이 책을 발간하는데 적용된 연구의 대상은 1980년대 또는 2010년대 우리나라의 현실과 전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1960년대라는 시점의 차이와 더불어 동양권과 전혀 다른 문화와 역사를 가졌던 남미라는지역적 특성, 그리고 문맹율(당시 70%)과 경제구조, 종교 등 사회적 특성도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다. 21세기에 들어서도 브라질의 사정과 한국의 사정은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다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와 두 번째 읽었을 때 모두 저자의 말에 공감할 수 밖에 없다는 걸 느낀다. 그것은 50년 넘는 시간이 경과했음에도 저자가 교육과 학습에서 제기하는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점들이 우리사회 전반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앍는 내내 사울 알린스키의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과 이반 일리히의 <학교 없는 사회> 등 여러 저작들이 오버랩되었다.


프레이리가 인식하는 사회구조는 억압자 대 피억압자의 대립구조였다. '억압'은 폭력을 유발시키는 부당한 질서가 내면화된 결과이며 이는 억압자와 피억업자 양쪽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비인간화의 총체이자 '길들이기'다. 이런 비인간화의 길들이기에 순응하지 않고 의식의 눈을 떠 자신을 찾는 것이 바로 '의식화'다. 사람이 억압의 힘에 더 이상 먹이가 되지 않으려면 거기에서 탈츨해서 그 힘에 대항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왜'라는 질문을 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의식화'는 '의식을 발달시키는 과정'이면서 '현실을 변혁시키는 의식적 힘'이다. 의식화는 현실을 단순히 반영시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재성찰하는 의식이다. 의식화는 억압적 현실에 길들여져 있는 순종의식에 눈을 뜨고 각성하게 되는 의식이다.

억압자들은 사회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의식의 태동을 가로막고 그러한 의식을 태동시키는 교육체계를 하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억압자들은 권력을 유지하고 억압을 재생산해내기 위하여 '은행저금식 교육' 방식을 취한다.
따라서 프레이리는 교육방식에 있어 요점정리식 기계적 암기를 통해 지식을 축척하기만 하는 '은행저금식 모델'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는 은행저금식 교육이 '억압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음과 그런 교육의 전제와 개념을 폭로했다. 은행저금식 교육은 교육자와 피교육자 사이에서 모순을 일으키게 되고 양자 모두를 '비인간화'시킨다고 주장했다.

은행저금식 교육에 대한 획기적 대안으로 프레이리가 제시한 교육은 '문제제기식 모델'이다. 이는 인간과 세계를 분리하여 상호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를 결합시키는 문제인식을 갖도록 하는, 곧 이론과 실천의 교육을 지향한다.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프레이리는 프락시스(praxis)라고 정의했다.

프레이리는 또한 인간집단의 의사소통과 활동에 있어 '반대화'와 '대화'의 차이점을 강조한다. 억압자들은 억압 도구로서 진정한 의사소통을 차단시키는 반대화의 행동이론을 이용한다. 반대화적 행동이론은 정복, 분할통치, 조작, 문화침략을 특징으로 한다. 하지만 진정한 의사소통은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대화는 객체를 주체로 변화시키고 억눌린 자를 해방시키는 의식화의 수단이다. 대화적 행동이론은 협동, 단결, 조직, 문화통합을 특징으로 한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마음이 요구된다. 대화 자체가 사랑인 것이다. 대화는 사랑하고 겸손하고 소망을 가지고 신뢰하고 그리고 비판적이어야 한다. 주체적 인간은 '대화적 인간'을 기대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억압자의 교육에서는 학생들이 세계 바깥에 있는 하나의 대상이 되어 사물로 전락하는 반면, 피억압자의 교육에서는 학생들이 세계 속에서 세계와 더불어 한 인격체가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학생들과 교사들이 세계 속에서 주체와 주체로 만날 때 교육은 비로소 교육자와 피교육자, 선생과 학생 모두에게 ‘자유의 실천’이 된다는 것이다.

역자(남경태)는 책의 말미의 해제에서 프레이리의 주장과 논리에 대해 그가 변혁의 대안적 이론으로서 하부구조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과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식화 교육)의 연결이 미흡하다는 점, '혁명적 교육'에 대한 언급을 기피한 점, 그리고 '억압'과 '억압자'라는 개념이 모호하고 주관적이며 계급적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 비판받았음을 지적한다. 
내가 프레이리의 사상과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니 역자의 평가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할 말이 없다.


교육당국이 말로는 '전인교육' 등을 내세우지만 실제 일류대학을 목표로 교육정책과 학교수업을 진행시키고 사교육을 방치,조장하여 청소년들과 학생들이 입시교육과 성적을 이유로 자살하고 방황하는 한국의 교육현실을 지켜보노라면, 프레이리의 교육관점과 방식이 '꿈나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정부가 재벌과 기득권자를 위해 아이들을 '생각없는' 경쟁의 노예, 소비자 노예, 비정규직 노예를 양성하기로 작심한 것이 아닐까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굳이 혁명이나 변혁, 억압이나 피억압을 내세우지 않아도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는' 것이 학습과 교육의 목적이지 않은가? 아이들이 오로자 대학입시를 위해 10대, 20대를 보내고 나서 대학에 들어가고 다시 취업을 위해 매달리고 나서 취업을 하거나(이제는 정규직 취업 자체도 바늘구멍이지만..) 전문직에 종사한다 한들 그들의 인생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 남는 것은 커녕 그 오랜 과정에서 아이들은 행복이나 자아실현은 고사하고 자본과 제도의 부속품이 되고 소비의 희생양이 되고 삶의 목적을 상실한 채 죽을 때까지 방황할 수 밖에 없을 것이 뻔한데...ㅠ

도대체 우리 세대의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왜 자식들에게 무언가를 원하는가? 자신들도 신자유주의식 무한경쟁에 휘말려 개고생하고 있으면서 무언가 집단적, 조직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기 보다 아이들마저 학생 때부터 무한경쟁의 정글에 던져버리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게끔 도와주기만 하면 안되는 것일까? 실로 답답하고 암울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일선 교사들 역시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교육자(선생)이 지식을 알면 얼마나 아는가? 그들이 아이들의 개별 부모들보다 더 잘 알까? 그렇지 않다. 부모들은 나름 자신들이 일하는 분야에서 일정한 전문가다. 지식이든, 정보든, 업무방식이든, 제도나 이론이든 간에... 아이들에 대해서도 선생들보다 아이들 스스로가 더 잘 안다. 선생들이 학원강사보다 과목에 대한 깊이가 있나? 그렇지도 않다. 선생의 역할은 다른 것이다. 다른 역할 속에서 선생들도 더 배우고 깨닫고 역량을 키워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생의 역할과 권리는 학부모, 학생들의 권리와 역할과 함께 스스로 만들고 갖춰야하는 것일텐데...

[2012년 3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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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 2016-05-24 2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평소에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토록식 교육을 해야하리라고 생각 했습니다.
지금과 같은 교육은 개인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미래를
위해서도 지극히 좋지 못한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미래 세대가 한국정치를 담당할때에야 바꾸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뭏든 한국교육 미래를 위해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니 앞으로 개선이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붉은 구름님의 글이 좋아서 제 블로그에 복사해갔습니다.
출처 밝혔습니다. 원치 않으시면 karamos@naver.com 으로 연락주세요
오늘도 평안한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사기본기 - 개정판 사기 (민음사)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 민음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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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사회를 이해하려면 서구 유럽이 겪어온 유럽역사를 알아야 하고 그 중에서 특히 그리스,로마 시대와 기독교 시대를 알아야 한다. 서구 언어와 습성, 문화와 학문, 정치와 경제의 근원적인 뿌리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동양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특히 중국과 한국(북한 포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역사를 아는 것이 필수적이다. 한반도 문화와 정치경제 역시 중국 고대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과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경우 중국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 역시 고대의 문헌이 상당수 전해져 내려온다. 현재 전세계를 정치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사상과 학문, 문화가 서구이기 때문에 세계적인 학문 분야에서는 서구식 내용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동양의 각국이 정치경제적으로 성장해 나가면서 동양의 고대 유적과 학문이 전세계에 전파되고 있고 서구 연구진들 사이에서도 전공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 뿐 만 아니라 20세기 후반 이후 서구 중심의 학문과 문화, 정치경제가 많은 문제점을 보이고 한계에 봉착하면서 역으로 동양의 그것들애 대한 탐구가 본격화되는 측면도 크다.

그런 면에서 1945년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번도 흔들림 없이 서구 중심, 특히 미국 중심의 학문과 문화, 정치경제가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20세기 말부터 사상학문에서의 통섭이 활발해지고 동양적인 가치와 제도가 일정 부분 인정받고 연구되고 있음에도 한국 내 학계와 문화계, 기득권 집단들 사이에서는 미국식 문화와 제도에 대한 과도한 편중, 잡착과 추종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사회 전체를 위해 실로 심각하게 우려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 막연하게 중국을 싫어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역사의 뿌리 중 하나인 중국에 대해 아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이 책을 읽게된 이유다. 이 책 말고도 읽어야할 책은 앞으로도 무수히 많지만...ㅋ

이 책은 중국 24사(史)의 필두이자 전 세계에서도 역사서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사기> 130편 중 제왕들의 전기를 담은 <본기> 12편을 역자가 한글세대에 맞춰 현대적으로 옮긴 것이다. <사기 본기>는 황제(黃帝)부터 시작하여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하던 당시의 왕인 한나라 무제까지 각 시기별로 패권을 장악했던 제왕들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각양의 인물들을 호령하고 이끌었던 제왕들의 일대기를 담은 [본기]는 역사의 중심에 ‘인간’을 두고자 한 사마천의 역사관이 그대로 녹아든 <사기>의 근본이 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진시황이 중국 영토를 통일했다면, 사마천은 관념적 ‘통일 중국’을 처음으로 만들어 냈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사마천의 <사기>가 가진 영향력은 오늘날까지도 지대하다고 평가된다. <사기>는 <본기> 12편, <표> 10편, <서> 8편, <세가> 30편, <열전> 70편 등 총 130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전체 형식으로 쓰인 첫 역사서이다. 일반인들에게는 <본기>보다 <열전>이 많이 알려져 있다.
시간적으로는 상고(上古) 시대부터 한나라 무제 때까지 아우르며, 공간적으로는 옛 중원을 중심으로 주변 이민족의 역사까지 다루었다.

<사기>의 첫머리를 이루는 <본기>는 중국의 시조로 여겨지는 황제(黃帝)부터 한 무제에 이르는 제왕들의 이야기다.
이전의 편년체 역사서에서 시간순으로 모든 인물과 사건을 한꺼번에 기술했던 것과는 달리, 사마천은 먼저 제왕을 내세워 뼈대를 잡은 다음 제후 등의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중심과 주변의 구분을 명확히 했다. 이로써 중국은 하ㆍ은ㆍ주 삼대에서 진나라를 거쳐 한나라에 이르게 되는 통일 중국의 맥을 가지게 되었다.
이전에는 다양한 민족의 크고 작은 나라들이 할거하며 패권을 다툴 뿐이었던 거대한 땅이 <사기> 이후 ‘중국’이라는 관념적 공간으로 전환되면서 수십 개 나라의 역사도 하나의 중국 역사로 편입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수천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어져,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공존함에도 통합된 중국을 가능케 하는 바탕을 이루고 있다. 

물론 저자는 사마천이 [오제 본기]와 [하 본기], [은 본기]를 통해 시도한 '신화의 역사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함과 동시에 사마천이 <사기 본기>에 실은 '오제'가 실존했는지에 대해서는 현대의 역사가들 입장에 서 있다. '오제'와 하, 은, 주 3국은 역사적 실체보다 신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은나라 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일부 유적이 발견되기는 하였지만, <사기 본기>애 담겨 있는 인물과 치세, 사건과 상황은 현대의 관점에서 평가할 때 실체보다는 신화에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처음 알게된 것이지만, <사기>는 사마천이 궁형을 당하는 치욕을 겪으면서도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발분(發憤)의 마음으로 쓴 역사서이다. 따라서 나라에서 관장한 관찬 역사서에서는 볼 수 없는 사마천만의 독특한 사관이 곳곳에 드러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사기 본기>에 실린 [항우 본기]와 [여 태후 본기]이다. 사마천은 역사는 개개인의 움직임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으로 <본기>의 시작부터 전설 속 제왕 황제(黃帝)를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덕을 지닌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함으로써 ‘인(人)’을 역사의 중심에 두고자 했다. 이러한 인식은 <본기>의 구성에도 파격을 일으킨다.
항우는 진(秦)나라 멸망 후 한(漢)나라가 패권을 차지할 때까지 실질적으로 천하에 권력을 행사했다. 항우는 한 고조 유방과 끝까지 대적하며 한나라를 멸망 위기까지 몰아넣었던 인물이지만, 사마천은 이러한 항우의 역할을 인정하여 <본기>의 한 편으로 [항우 본기]를 쓰고 [고조 본기] 앞에 두는 모험을 감행했다. 또한 한 고조의 정실부인이자 혜제의 어머니로 고조 사후 권력을 행사했던 여 태후를 내세워 [여 태후 본기]를 쓴 것도 이례적이다. 형식적으로 권좌에만 앉아있는 '허세'가 아니라 현실을 움직인 '실세'를 인정하고 인간의 활동을 중심에 두는 사마천의 사관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렇듯 사마천은 인간 중심적 역사관을 기저로 하여 탁월한 안목으로 인간과 세계를 탐구했고, 2000년이 넘도록 ‘인간학 교과서’라고 불리며 회자되는 <사기> 속에 생생한 인간상을 담아냈다. 

역자는 <사기>가 "역사서로뿐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한다. 그중에서도 항우가 입지를 굳히게 된 '거록'에서의 전투 장면이나 항우와 유방이 회동한 '홍문연'에서의 긴박한 장면 등을 묘사한 [항우 본기]는 독자마저도 숨죽이게 하는 명문으로 손꼽힌다. 또한 <사기>에 담긴 제왕들의 이야기는 '사면초가', '금의환향' 등 수많은 고사를 만들어 냈고 당시(唐詩)나 송시(宋詩) 등의 옛 문학뿐 아니라 현대의 여러 작품에서도 모티프가 되어 꾸준히 이어졌다.
[진시황 본기]는 <진용>이나 <영웅> 등의 영화에서 배경이 되었고, 항우와 우 미인의 이야기를 담은 [항우 본기]는 경극 <패왕 별희>를 낳았다. 그 외에도, 걸왕과 함께 폭군으로 유명한 주왕의 몰락을 담은 [은 본기]나 중국 3대 악녀로 일컬어지는 여 태후의 표독스러움을 그대로 묘사한 [여 태후 본기]는 중국 역사가 생소한 독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보여 준다.


<사기 본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사마천이 생각하는 정치의 이상적인 모습은 '덕치(德治)'였다. 나는 학자들과 역자의 분석과는 다르게 사마천이 [오제 본기]와 [하,은,주 본기]를 <사기 본기>에 앞세운 이유 중 하나가 역사자로서 자신이 생각하는 '덕치'를 당대의 한 무제와 이후 제왕들에게 이상적인 정치의 모습으로 제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기>는 한나라 이후 중국사 뿐 아니라 한반도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 흥망성쇠를 이어간 국가의 왕들과 정치가, 학자들은 모두 중국사의 주요 국가들과 인연을 맺고 영향을 주고 받았으며, 정치와 경제 뿐 아니라 학문과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 2012년 2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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