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성교육? 하품 나와요”

대담한 ‘10대들의 性’
상담내용, 자위행위서 임신·동성애로
청소년 성표현 다룬 문화상품도 급증

“엄마도 아빠랑 ‘펠×××’ 해봤어?”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배혜정(가명·43)씨는 얼마 전 고1 딸이 ‘구강성교’를 뜻하는 단어를 서슴지않고 말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느냐”고 다그치자, 아이는 소설책을 내밀었다.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2005년 올해의 책’이라는 문구가 적힌 ‘사립학교 아이들’이란 책이었다. 딸이 피식 웃었다. “뭘 그런 걸 갖고 놀라요? 그것도 모르는 애들이 어디 있다고?”

◆性, 내가 누려야 할 당당한 권리

10대들이 성(性)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했다. 부모 몰래 성인용 잡지를 뒤지는 수준이 아니라, 성을 자신이 누려야 할 당당한 ‘권리’로 인식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청소년을 위한 내일여성센터 김영란 소장은 “요즘 청소년의 성에 관한 지식은 상상을 초월한다. 대개 5년 주기로 상담 내용 변화가 두드러지는데 요즘은 성 테크닉, 임신 걱정 같은 성 행위 자체에 관한 상담이 가장 많다”고 말했다.

청소년들의 고민 패턴을 보면, ‘자위행위’에 대한 상담은 2000년 681건에서 2004년 391건으로 줄어든 반면, ‘성관계, 생식기 기능 등 구체적인 성 지식’에 관한 상담은 601건에서 915건으로 늘었다. 임신과 낙태에 관한 상담 역시 273건에서 480건으로 늘었고, 동성애에 관한 상담도 25건에서 39건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성에 대한 고민이 ‘골방형’이 아니라, ‘관계형’으로 바뀐 것이다.

조선일보가 서울시내 중·고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 및 면접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2.9%가 ‘거의 매일’, 31.4%는 ‘일주일에 한두 번’ 성에 관해 친구들과 이야기한다고 답했다. ‘영화나 TV에서 성애 장면이 나오면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에도 ‘자연스럽다’(51.4%)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 ‘성 관계 묘사 외에는 괜찮다’(7.1%)고 답한 10대들도 있었다.

◆성? 불량 청소년 전유물 아니다

성에 대한 관념이 달라지면서, 대중문화는 이들의 욕망을 그대로 문화상품에 투영하고 있다. 고3 남학생의 성장통을 그린 영화 ‘피터팬의 공식’에서 주인공 한수는 옆집에 사는 음악교사를 향해 “자위시켜주세요!”라고 말하고, 6월 개봉을 앞둔 ‘다세포 소녀’는 원조교제부터 동성애까지 10대 성에 관한 민감한 이슈를 과감하게 다룬다. 남자 중학생들의 성적 호기심을 정면으로 다룬 ‘몽정기’(2002년)로 시작, 여고생들의 성적 욕망을 다룬 ‘몽정기2’(2005), 청소년 임신을 다룬 ‘제니와 주노’(2005)까지 영화 속 아이들은 일탈 청소년이 아닌 평범한 아이들이다. 청소년이 즐겨 듣는 시간인 밤 10시부터 방송되는 MBC FM의 ‘펀펀 라디오’의 ‘눈을 떠요’ 코너는 ‘여자친구와 더 키스를 잘하고 싶다’ ‘남자친구의 스킨십 요구가 너무 지나치다’는 질문을 두고 진행자들이 ‘노하우’를 전수해준다.

청소년 문학도 이를 놓치지 않는다. 미국 명문 사립고교생들의 정신적·육체적 사랑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사립학교 아이들’은 한국에 출간된 지 2주일 만에 3쇄를 찍을 정도로 10대, 20대의 반응이 폭발적이다. 창작소설 ‘나’는 성인문학에서조차 금기로 분류되는 ‘동성애’를 정면으로 다뤘다.

◆우리나라 성교육, 너무 ‘후져요’

청소년들은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는 성교육에 대한 불만도 드러낸다. 학교 성교육의 효율에 대해 설문조사 응답자들의 77.1%는 ‘학교 성교육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중학교 3학년 조민희(가명·16)양은 “섹스 하면 임신한다는 식의 협박성 결론뿐이라 하품만 나온다”고 말했다. 이명화 아하청소년 성문화센터 소장은 “청소년보호법보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성교육이 더 중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이 기사 작성에는 방희경(동국대 신방과)·윤서현(중앙대 영문과) 인턴기자가 참여했습니다.

김윤덕기자 sion@chosun.com
류정기자 wel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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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01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들이 더 민망하다고 하더군요 ㅠ.ㅠ

stella.K 2006-05-01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월중가인 2006-05-01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치만 지금의 성교육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게 사실이에요. 성교육의 목적이 수정란이 발생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알려주기 위한게 아니라면요..
 

 

내가 못난게 아니었어 그놈의 말투때문에…

말솜씨가 ‘女사원 운명’ 바꾼다
“언니~” “어~야~” 등 소녀 말투 버려야
“결근해요 봐주삼” 상사에 메시지 금물

4월쯤이면, 갓 입사한 여성 회사원들이 부서 배치를 받고 업무를 할당받아 능력을 선보이는 시점이다. 문제는 적잖은 여성들이 이미지관리에 실패해 능력을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 새내기 여성직장인들, ‘서바이벌’을 위해 무엇을 점검해야 할 것인가.

◆뿌리 뽑자, 사소한 말 실수

여성들이 입사 초기 첫 인상을 망치는 것은 사소한 말 실수 때문이다. 호칭에 철저하지 않은 것도 여성들의 약점 중 하나. 최근 잡지사에 입사한 송미나(24)씨는 ‘편집장님’을 ‘팀장님’이라고 부르다가 “우리 회사에 팀이 어딨냐”며 면박을 당했다. ‘선배님’ 대신 ‘언니’ 같은 사적인 호칭을 쓰는 것도 공사 구분이 분명치 않다는 인상을 준다. 회사원 김미영(32)씨는 “여자 후배들은 ‘네, 갖다 놨습니다’ 하고 문장을 종결짓지 않고 “갖다 놨는데…” 하며 끝을 흐리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쓰던 말투를 직장에서 남발하는 것도 신입사원들이 버려야 할 태도. 입사 2년차인 유희정(25)씨는 상사의 농담에 “아, 뭐야~” 하고 반응했다가 건방지다는 오해를 샀다. 입사 8개월 된 회사원 김선미(23)씨는 출근이 좀 늦을 것 같다는 보고를 전화가 아닌 문자 메시지로 상사에게 보냈다가 “내가 네 친구냐?”는 꾸지람을 들었다. 초등학교 교사 윤화숙(41)씨는 “‘라인이 죽이시네요’ ‘짱 좋아요’ 같은 속어를 쓴다든가, 일 시켰을 때 ‘웬일~’ ‘꼭 해야 돼요?’ 하며 토 다는 후배들을 보면 신임이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화 전문가 이정숙씨는 “연대감을 중시하는 여성들은 윗사람이 친근하게 대해 주면 너무 격의 없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며 “직장은 세대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인 만큼, 권위적이지 않은 조직이라도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때 자신도 존중받는다”고 말했다.


◆청중의 뇌리에 핵심을 심어라

광고회사 입사 1년차인 김은영(가명·26)씨는 회의 시간에 충격을 받았다. 남자 동료의 광고안이 “기발하고 재미있다”는 좌중의 호평을 받으며 채택된 것. 표현 방식은 좀 달랐지만 본질적으로는 두 달 전 회의석상에서 은영씨가 제기했던 아이디어였다.

전문가들은 “많은 경우 ‘능력’이 아니라 ‘전달력’ 부족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프레젠테이션 컨설턴트인 SB컨설팅의 심재우 대표는 “여성들은 발표 준비도 많이 해 오고 발음도 명료한데 ?말이 너무 빠르거나 ?설명이 장황하거나 ?목소리가 작거나 ?시선이 산만하거나 ?너무 현란한 제스처를 구사해, 말하려는 바가 권위 있게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청중과 눈을 맞추면서 천천히, 단순 명료하게 말하는 훈련, 싸늘한 분위기에서도 기죽지 않고 의견을 표명하는 훈련도 필요하다. ‘남자처럼 일하고 여자처럼 승리하라’의 저자 게일 에반스는 “여자들은 회의 시간에 눈에 띄지 않는 뒤쪽 자리에 앉는 경향이 있다”며 “앞쪽에 앉을수록 의견 반영률이 높아진다”고 충고한다.

◆어설픈 남 흉내? 안 하는 게 낫다

남성적인 기업에서 살아남기 위해 말과 행동을 ‘남성화’하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다. 대학강단에 서기 전 직장생활을 한 경험이 있는 강혜련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남자들처럼 양 팔을 의자에 걸친 채 삐딱하게 앉아 의견을 말했다가 역효과가 난 적이 있다”면서, “맹목적으로 남을 따라하기 보다는 자기다움으로 승부를 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협상’같은 중요한 순간에도, 어색하게 180도 돌변한 태도를 보일 게 아니라 평소 스타일을 유지하고, 본심을 솔직히 털어놓는 게 도움이 된다. 대기업 팀장인 박광현씨는 “어색한 권위를 갖추려는 것보다는, 솔직함을 무기로 삼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고 조언했다.

이자연기자 achim@chosun.com
윤서현=중앙대 영문학과 4년
방희경 인턴기자=동국대 신문방송학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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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오리 2006-04-05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모두들 아시겠지만' 이런 식으로 말을 시작하는 사람 싫어요.
이건 모르는 사람은 기죽이고 아는 걸 왜 말해 하는 생각을 하게 하드라구요.

stella.K 2006-04-05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ceylontea 2006-04-05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이런 기사 화가 나요..'말솜씨가 ‘女사원 운명’ 바꾼다' 그럼... 남자 신입사원들은 제대로 말한답니까? 아니잖아요...
남자 신입사원들은 모두 말솜씨가 좋고 예의고 있고, 분위기 파악도 잘하는데, 여자 신입사원들만 덜 떨어져서 말솜씨도 없고, 예의도 없고, 분위기도 없답니까? 남자 여자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ㅠㅠ;;
"말솜씨가 ‘신입사원 운명’ 바꾼다"로 바꾸고 기사를 썼어야 된다고 봐요..(음... 괜히 흥분...^^;;)

stella.K 2006-04-05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론티님은 현장에 계시니 더 실감나겠죠? 실론티님 같은 분을 ch일보가 모니터 요원으로 발탁해야 하는데 뭐하는지 모르겠어요.^^

비로그인 2006-04-06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은 사회생활 오래하면 늘던데..남자들도 말 못하는 사람 많고.. 요즘애들 말잘하던데요. 발표도 파워포인트로 잘하고.
근데 여자들 직장에서 언니 하는거 거슬립니다. 떼지어 다니는것도 보기 싫고. 공사감정 구분 못하는것도 있고.. 삐지는것도 눈치 보이고.
따뜻한 여자 상사도 있고, 술자리에서 술 억지로 먹이는 여자들도 있고. 일반화하기에는 무리죠.
 

 

재취업도 창업도 막막… 한숨 속에 시드는 중년

버는건 턱도없는데 교육비만 月4~5백
건물 샀다 있던 돈마저 날리고 이혼까지
죽어라 자격증 따서 年 30일도 일 못해

퇴직 2년반을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일정한 수입이 끊어졌지만 달마다 꼬박꼬박 나가는 생활비와 교육비에 자신감은 더 오그라들었다. 친구들과의 왕래는 점차 뜸해졌다. 억대의 명예퇴직금은 물에 젖은 소금처럼 흔적 없이 녹아내렸다. 손대는 것마다 몇 달 만에 참담한 실패로 돌아왔다. 학원비를 들여 자격증을 따도 재취업을 보장하지 못했다. 대기업체인 KT직원으로 58세 정년을 꿈꾸던 그들이었지만 퇴직하는 순간 대부분 돈도 없고, 직업도 없고, 희망도 없는 신빈곤층으로 떨어져 있었다. ‘절망’은 중년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월 100만원 벌기 힘들어”

기술직으로 근무한 강모(47)씨는 사표를 내면서 퇴직 이후를 자신했다. 우선 3층짜리 건물을 한 채 샀다. 임대 수입으로 살아볼 요량이었다. 퇴직금과 주식, 아파트 등 전 재산을 털어 승부수를 던졌다. 그러나 경기가 나빠지면서 사무실은 텅 비었고, 건물관리비와 생활비, 세금은 밑빠진 독처럼 매달 150만∼200만원씩 나갔다. 자구책으로 치킨집을 냈지만 장사가 안돼 6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생활비마저 없어 건물을 담보로 7000만원을 융자받았지만 수중엔 1000만원만 남았다. 돈문제로 부부 갈등이 심해져 급기야 지난 1월 이혼했다. 강씨는 “그래도 아직 건물 한 채가 있으니 나는 퇴직자 중 중간은 간다”고 말했다.

전기 파트에서 19년을 근무한 최모(47)씨는 아직까지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퇴직 후 독학으로 전기 자격증을 4개나 땄지만 대기업에선 나이가 많다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월급 150만원을 주는 중소기업에 두 번 취직했지만 몇 달이 안돼 그만뒀다. “연봉 4300만원을 받았었는데…. 아무리 급해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곳에 취업할 수는 없잖아요.” 그 사이 퇴직금·적금을 합쳐 2억7000만원이던 통장 잔고는 눈에 띄게 줄어갔다.

기술직 부장으로 퇴직한 서모(57)씨는 “희망은 생각할 수도 없고 다만 건강이 걱정스러울 뿐”이라고 말했다. 연봉 6500만원을 받던 그는 특별한 일을 겪지 않았는데도 4억원의 재산이 반토막났다. 그는 “예전엔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느꼈고 자부심도 있었지만 지금은 빈곤하다고 느낄 뿐”이라며 “30년 경험을 활용하고 싶지만 써주는 데도 없고, 직업이 없으니까 소외감만 느낄 뿐”이라고 말했다.

김모(54)씨는 퇴직 후 1년간 직업훈련학교에서 보일러 등 자격증 4개를 딴 뒤 건설 현장이나 가정집에서 보일러를 수리하는 일을 한다. 하지만 지난 1년간 일한 날이 30일도 되지 않는다. 그는 “불황인데다 경쟁이 치열해 처음 목표였던 창업은 엄두도 못낸다”고 했다.

◆“준비된 퇴직만이 보증수표”

민윤기(51)씨는 자신이 성공한 퇴직자 중 하나라고 믿고 있다. 기술직 과장 출신인 그는 회사에 다니면서 2년간 부동산을 공부했다. 이 지식을 바탕으로 지인이 운영하는 공인중개사 사무실에 출근하며 월 150만원을 번다. 아내도 옷가게를 시작해 든든한 버팀목이다. 그는 “퇴직금까지 합치면 퇴직 전(연봉 6000만원)과 비슷하다”며 “아내가 바가지 안 긁고 응원해주는 것도 큰힘이 됐다”고 했다.

직원 5명을 두고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는 김모(52)씨는 퇴직 후 6개월의 창업 준비기간을 거쳤다. 그랬는데도 인테리어 회사를 정착시키는 데 1년 이상이 걸렸다. 그는 “회사에 다니면서 별도로 창업 준비를 하는 것은 회사 일을 제대로 하지 말라는 얘기”라며 “회사에서 ‘퇴직 예고제’를 두어 1년간 공무원처럼 ‘공로 휴가’를 주고, 회사에서도 적극적으로 재취업 알선 부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동섭기자·팀장 dskim@chosun.com
나지홍기자 willy@chosun.com
김승범기자 sbkim@chosun.com
탁상훈기자 if@chosun.com
최규민기자 min4sally@chosun.com
조의준기자 joyjun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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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車 잘 사고 싶으면 車생각 대신 딴생각 하라


네덜란드 연구팀 “뇌 쉬게 할수록 판단 좋아져”
“지나치게 심사숙고하면 되레 판단 그르칠수도”

자동차를 살 때 아무리 설명서를 꼼꼼히 살펴봐도 도무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는 사람들이 많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럴 땐 일단 잊어버리는 게 상책이다. 그 사이 뇌에서 정보를 정리하고 잊고 있던 기억들과 연결시켜 제대로 된 판단을 하게 해준다는 것.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의 압 데이크스테르하위스 교수팀은 상품을 구매할 때 어떻게 해야 최선의 판단을 할 수 있는지를 심리실험과 함께 실제 소비자들의 쇼핑 만족도 조사를 통해 알아봤다. 그 결과 연구팀은 “살지 말지 끝까지 고민하는 것은 주방용 장갑처럼 간단한 판단에 적합하며, 자동차처럼 어려운 판단을 할 때는 잠시 고민을 접고 무의식에 맡기는 게 좋다”고 17일자 ‘사이언스’지(誌)에서 밝혔다.

데이크스테르하위스 교수는 어려운 판단을 할 때는 당시에 입수한 정보와 함께 무의식적인 사고과정에서 형성되는 요인들도 필요하다는 가설을 세웠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대학생들에게 가상의 자동차 4종에 대한 설명서를 읽고 4분간 고민을 한 뒤 선택을 하도록 했다. 연구팀은 선택을 쉽게 하기 위해 연비나 내부공간 등 단 4가지 특성만이 적힌 설명서를 만들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누가 봐도 월등한 한 모델을 선택했다.

다음 실험에서는 설명서의 항목을 12개로 늘려 판단을 어렵게 했다. 그러자 가장 좋은 모델을 선택하는 비율이 눈감고 찍는 수준인 25%로 줄었다. 반면 같은 실험에서 최종 판단을 하기 전에 4분간 퍼즐게임을 하게 하면 60%가 최고의 모델을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려운 판단을 할 때는 무작정 고민을 하기보다는 잠시 딴 생각을 하는 게 좋다는 말이다.


실제 쇼핑에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될까. 연구팀은 가구점과 잡화점의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상품을 사는 데 걸린 시간과 구매 몇 주 뒤 상품에 대해 느끼는 만족도를 조사해 비교했다. 조사 결과 간단한 소비재를 산 잡화점의 고객들은 상품 선택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일수록 상품 만족도도 높았다. 그러나 가구점에서는 정반대로 고민을 덜 한 경우에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나왔다.

주방용 장갑이나 샴푸처럼 간단한 소비재는 판단에 그리 많은 정보가 필요하지 않다. 앞서 실험에서 4가지 항목만으로 자동차를 선택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이때는 정보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처리할수록 제대로 된 판단을 하게 된다.

반면 가구나 실제 자동차처럼 아무리 시간을 많이 들여도 고려할 사항이 너무 많을 때는 판단이 잘 서지 않게 된다. 이때는 ‘무의식’에 맡겨야 한다는 것. 연구팀은 “잠시 고민을 접으면 뇌에서 각종 정보를 종합, 처리해 자신도 모르게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쥐에게 반복 학습을 시킬 때도 도중에 적어도 한 시간 이상 휴식기를 줄 때 학습효과가 크다고 한다. 또 밤새 문제에 매달린 사람보다 도중에 잠시 잠을 잔 사람이 두 배나 더 문제를 잘 풀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KAIST(한국과학기술원) 김대수 교수(생명과학과)는 “잠을 자든 딴 생각을 하든 뇌가 정보를 처리하고 분석할 시간을 주는 것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신희섭 학습기억현상연구단장은 “이번 연구는 잠을 잘 때와 마찬가지로, 깨어있는 동안에도 고민거리에서 벗어나 있으면 뇌에서 그 전에 받아들인 정보가 정리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뇌가 여유가 없을 땐 판단이 제대로 되질 않아 반품이 늘 수 있다. 김대식 교수는 홈쇼핑에서 반품이 많은 이유를 “입학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거나 마감이 임박했다는 식으로 판단을 재촉해 뇌가 정보를 제대로 처리할 시간을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게다가 상품과 전혀 관련 없는 현란한 복장의 도우미가 등장해 뇌에서 상품과 상관 없는 이미지가 자리잡게 만든다는 것. 반품이 늘어도 워낙 많이 팔리니 밑지지 않을 터. 홈쇼핑엔 뇌 전문가가 있나 보다.

이영완기자 y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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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혁신 못하면 强大 기업도 간다


영원한 강자(强者)는 없다. 글로벌 시장을 지배하는 초강대 기업들의 전쟁터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 숨가쁜 흥망성쇠의 스토리가 펼쳐지고 있다. 68년간 세계 1등이던 제너럴모터스(GM)는 한순간에 파산 위기를 맞았다. 반면, 7년 전 16억원의 가격에도 팔리지 않던 구글은 삽시간에 세를 불려 마이크로소프트(MS)의 아성을 위협한다. 그 게임의 법칙은 변화와 혁신이다. 전통적 강자들은 환경변화에 대한 안이한 대응으로 급전직하하는 반면 ‘재빠른 추격자(fast follower)’로 불리는 후발 주자들은 혁신으로 무장해 신흥 강자로 급부상하고 있다. 강대(强大)기업의 흥망성쇠 주기는 갈수록 짧아지는 추세다.


◆추락하는 전통 강자

미국적 풍요함의 상징이던 코카콜라의 ‘120년 제국’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세계 톱 브랜드인 코카콜라가 ‘영원한 2위’이던 펩시콜라에 추격당한 것이다. 펩시는 웰빙 음료의 다각화에 성공하며 매출과 총이익에 이어 지난달엔 시가총액마저 코카콜라를 추월했다. 건강 바람으로 탄산음료 시장이 내리막길에 접어들었지만, 코카콜라는 대변신에 실패했다. 코카콜라는 7년여 사이 최고경영자(CEO)를 세 번이나 교체하는 등 개혁에 나섰으나 사업 내용을 크게 바꾸지 못한 채 침체에 접어들었다.

미국 2위 자동차업체인 포드는 지난달 23일 14곳의 공장을 폐쇄하고 3만명(북미 지역 인력의 25%)을 감축한다는 대규모 구조조정을 발표했다. 10년 전 26.4%였던 포드의 미국시장 점유율은 17.4%로 추락했다.

세계 1위 자동차업체인 GM도 마찬가지다. 신용등급이 정크본드(투자부적격)로 추락하고 1992년 이래 처음으로 지난해 연간 손실을 기록하면서 3만명의 인력 감축과 공장 9곳 폐쇄를 발표했다.

작년 한 해 GM과 포드의 주가는 각각 48.4%와 45.1%씩 반토막 수준으로 떨어졌다. 다임러크라이슬러 역시 실적 악화로 6000명 인력 감축에 나서면서 ‘미국 빅 3’ 자동차업체가 모두 혹독한 구조조정을 치르고 있다.

현대증권 김학주 리서치센터 팀장은 “GM과 포드의 신차(新車) 개발 기간은 38개월로 도요타(18개월)의 두 배에 달한다”며 “브랜드 이미지에만 의존한 채 고객이 요구하는 신차 개발을 게을리한 것이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3·4위 항공사인 델타와 노스웨스트 항공은 저가 항공사들의 공세와 유가 급등이란 내우외환(內憂外患)에 무너지며 결국 파산 신청을 했다. 미국 최대 장거리 전화회사인 AT&T는 한때 자신의 자회사였던 지역통신업체 SBC커뮤니케이션즈에 인수됐다.

미국 2대 장거리 전화 업체인 MCI 역시 이동통신 업체인 버라이존에 인수됐다. 무선 통신이라는 신기술의 발전에 발빠르게 대응하지 못한 게 몰락의 원인이다.

성공신화의 주역도 속속 퇴출당하고 있다. 10년간 ‘소니 제국(帝國)’을 이끌던 이데이 노부유키 소니 회장은 애플의 ‘아이포드(MP3플레이어)’에 따라잡히는 등 실적 부진 속에서 지난해 씁쓸히 불명예 퇴진했다.

휴렛패커드의 ‘여제(女帝)’ 피오리나 회장 역시 주주 반발에도 불구하고 컴팩을 인수하고도, PC 부문에서 델에 추월당하는 등 실적 악화로 낙마했다.


◆급부상하는 신흥 강자

인터넷 검색업체 구글은 ‘100년 광고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키워드 중심의 타깃광고로 수요자 중심의 광고로 옮겨간 것이다. 인터넷 검색시장 1위로 급부상한 데 이어 세계 최대 IT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와 타임워너의 AOL 지분 인수전에서 승리했다. 구글은 2004년 9월 나스닥에 상장된 이후 1년 4개월여 만에 시가총액이 1300억달러(약 120조원)로 불어나 인텔과 IBM을 제치고 세계 2위의 IT기업(시가총액 기준)으로 올라섰다. 불과 9년 전 단 2명에서 시작한 회사의 종업원수는 5000명에 육박한다. 작년 한 해 동안 하루 10명꼴로 실리콘 밸리의 브레인들을 채용, ‘인재 블랙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매킨토시의 신화를 만들었던 컴퓨터 업체 애플은 새로운 비즈니스모델인 ‘아이포드’로 MP3플레이어 시장의 70%를 석권했다. 휴대용 단말기와 콘텐츠를 융합한 차세대기술을 바탕으로 동영상 유통 시장까지 넘보고 있다.


한 우물을 넓고 깊게 파면서 1위로 뛰어오른 기업도 있다. 대표적인 곳이 도요타다. 끊임없는 신차 개발과 ‘가이젠(改善)’으로 요약되는 도요타식 경영으로 시가총액과 이익에서는 이미 GM을 제치고 세계 1위가 됐다

‘파나소닉’ 브랜드로 알려진 마쓰시타와 사무용 기기 메이커 캐논은 조직문화를 확 바꿔 초우량기업으로 변신했다. 종신고용에다 미국식 실적주의를 접목한 캐논은 5년 연속 최대 실적을 경신하고 있으며, 마쓰시타는 경영 부진에서 탈출, ‘V자(字) 회복’을 달성했다.

정혜전기자 cooljju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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