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자들>
커버를 장식한 뒤렌마트의 이 개구장이 같은 표정을 진작 눈치챘어야 했다! 이웃 툐툐님의 리뷰로 읽게 된 《뒤렌마트 희곡선》에서는 그의 희곡 두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물리학자라는 제목에 끌려 뒷부분부터 읽었는데, 맙소사. 작가가 웃기기로 작정했다는 걸 단박에 알았다. 줄거리는 이렇다.어찌어찌하다보니 엘리트 출신의 부유한 정신병자들이 한 요양원에 모여있다. 이것부터가 너무 솔깃하지 않은가?!
찬트 박사: 저는 환자를 분류하거든요. 작가는 작가들끼리,기업가는 기업가들끼리,여성 백만장자는 또 그사람들끼리,물리학자는 물리학자들끼리 말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정신병자들의 요양원에서 느닷없이 살인 사건이 발생해 경찰이 수사에 나선다. 게다가 이곳에서 사건이 처음도 아니었다. 벌써 두 번째로 간호사가 살해당한 것이다.
수사반장: 살인범은?
수 간호사: 저, 반장님.....그 가여운 사람은 환자랍니다.
수사반장:아 좋아요. 범법자는?
수 간호사: 에른스트 하인리히 에르네스티. 우린 아인슈타인이라 부르죠.
수사반장: 왜요?
수 간호사: 자기가 아인슈타인인 줄 알거든요.
첫 살인에 이어 3개월도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발생한 사건으로 수사반장은 강한 의혹을 제기한다.
수사반장:8월 12일에 자기가 위대한 물리학자 뉴턴인 줄 아는 헤르베르트 게오르크 보이틀러라는 사람이 도로테아모저 간호사를 목 졸라 죽였어요. (수첩을 다시 넣는다.)역시 이 살롱에서요. 남자 간호사였다면 절대로 그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살인 후 범인이 정신이상 탓을 하는 경우를 뉴스로 어렵지 않게 접한다. 그러나 대게의 경우 피해자는 미성년자이거나 연약한 여성이어서 대중은 분노하며 묻는다. '정신이상인데 어떻게 일부러 그런 것처럼 자기보다 약자만 골라 괴롭힌 거냐고 정신이상이면 상대를 가리지 않아야 하니 건장한 남자도 피해자에 포함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 작품에서 수사반장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여기 간호사가 대답한다.
수간호사: 그럴까요? 도로테아 모저 간호사는 여성 레슬링 클럽 회원이었고 이레네 슈트라웁 간호사는 국가 유도 연맹의 주 챔피언이었어요.
수사 반장: 그럼 댁은요?
수간호사: 저는 역도를 합니다.
이쯤에서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다른 작품들을 검색해 장바구니에 퐁당퐁당 담았다. 히틀러 정권이 몰락한 다음 해 부터 활동을 시작한 스위스 출신의 극작가 뒤렌마트는 당시 여건상 냉전시기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반제국주의적 사회 비평가'라는 평가가 알려주듯 그는 사회 문제에 거침없는 비판을 퍼붓는 등 아웃사이더로 살았다. 소련에 대해서는 "소련 공산주의자가 낙원으로 가기는 은행가가 천국으로 가는 것만큼 힘들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 작품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냉전 체제의 모순과 풍자, 철학적인 메시지도 놓치지 않는다. 짧은 분량이 아쉬울 정도다.
<노부인의 방문>
아내의 유혹을 보면 얼굴의 점이 그녀의 분노와 전남편에게 복수하려는 결의의 상징이란 것을 알게된다. 뒤렌마트의 노부인은 좀 더 화려한 장식을 안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온다. 비극적인 과거를 나타내는 의족과 의수를 한 몸, 수많은 남편들과의 결혼경력에 새로운 남편까지 동반. 그리고 폐허가 되고 찢어지게 가난해진 고향 마을을 재건할 만한 부유함과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채로 말이다. 젊은 시절 버림받고 외면받아 떠났던 그녀가 돌아와 마을 사람들에게 정의를 요구하는 동시에 딜레마를 선물한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마이클샌델교수도 곤란해질 정도의 문제인데 상대적으로 희극적이어서 오히려 더 여운이 남았다. 뒤렌마트의 다른 작품들이 너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