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내가 옷을 벗을 때면 넌 분홍빛에 완전히 물든 조각상 같은 내 모습을 보게 될 거야. 나는 그 불 앞에 미동도 없이 서 있겠지, 그리고 일렁이는 불빛에 내 피부가 살아나고 떨리고 꿈틀거리는 걸 보겠지,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이 내 몸 위에 날개를 펼칠 때처럼, 이대로 함께 있어 줘!(...) 나는 너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바람과 불꽃 그리고 네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를 들어, 꽃잎이 반쯤 떨어진 분홍색 복숭아 가지가 폭풍 속의 새처럼 겁에 질려 초췌하게 검은 창문을 끊임없이 두드리는 동안.... -슬픔의 긍지, 가브리엘 콜레트
20살 때 밴쿠버 외곽에 있는 어떤 동네에서 마리 가와사키라는 친구에게 피우던 담배를 건네받았다. 나는 그녀가 하듯 담배를 물고 조심스럽게 빨아들였다. 그걸 보고 미소 짓던 마리는 다시 깊게 들이마시라고 재촉했다. 진부한 기침이 몇 초간 이어졌다. 그리고 내 표정은 '우웩'에 가까웠으리라. 마리가 터질 듯이 웃었으니까. 그 애는 지금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일본에서는 우리 나이에도 아직 섹스를 하지 않으면 뭔가 문제가 있다고들 생각한다고 말해서 내 얼굴을 붉히게 하던 그 소녀. 주말에는 잔디밭을 질주하며 축구를 하던 긴 머리의 그 애를 보며 언젠가 나도 축구를 해야지 했었는데.
왜 담배를 피우는지 그런 맛을 왜 즐기는지 알지 못했다. 말보로를 매일같이 즐기던 우리 집의 빌런, 아버지 때문에 간접흡연도 싫었다. 흡연자 뒤에서 걷다가 좌우로 피하면 담배 연기는 마치 나를 쫓듯 내 코로 침범했다. 화가 나서 죄 없는 누군가를 죽이거나 때리는 사람을 뉴스에서 볼 때면 '나라면 흡연자들을 공격할 텐데...' 생각했다. 그렇게 잔인한 생각을 할 만큼 싫었다. 담배가.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그랬던 내가 편의점에서 "레종 아이스 블랑 하나 주세요." 한다. 그 사람이 즐겨 피우는 담배가 가방 속 필수품이 되었다. 그를 볼 수 없어 그리운 날이면 창문을 활짝 열고 담배를 꺼내 문다. 연기를 들이마시면 그리움의 고통이 조금은 잣아든다.
나의 페렐만이 차 안에서 담배를 꺼내 문다. 당연한 듯 다음 모금은 내 차례다. 우리를 감싸 안던 자욱한 연기는 아쉬운 듯 열린 선루프 위로 흘러나간다. 이제 아무리 담배를 빨아들여도 기침이 나지 않는다. 나른 해진 나는 그 사람을 그윽하게 바라본다. 그가 건네는 담배. 다시 내 차례가 되어 깊게 한입 들이마시기 전 말했다. '이걸 꼭 한 번 해보고 싶었어요.' 깊게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입에 물고 그에게, 그의 다정한 입술에 다가간다. 우리는 오래오래 담배 키스를 나눴다.
그에게 말했다. 내 절친은 사람이 아니라 우울이라고. 우울이 나를 덮칠 때 끌어안고 매달렸더니 진저리 치며 돌아서는 뒷모습을 봤다. 이제 짓궂은 그 애를 다루는 법을 조금은 안다. 그걸 알게 되니 내게 사랑이 왔다.
상상해봐, 세상 어딘가에 온 하늘을 아우를 수 있는 꿈의 장소가 있다는 것을, 상상해봐, 도달할 수 없는 왕국을 상상하듯, 수평선 너머로 상상해봐, 대지와 맞닿은 하늘의 감미로운 침잠을.... 망설이는 이 봄날 울타리 너머 이제 막 물결치는 애처로운 지평선이 보여, 어린 내가 땅끝이라 불렀던. 과즙보다 더 달콤한 노을 속에서 지평선이 붉으락푸프락해.... -슬픔의 긍지, 가브리엘 콜레트
우리의 아지트 중 하나
그 사람 손이 너무 좋아서 키스하고 얼굴을, 머리를 기대니 내게 잘라주고 싶다고 했다.
-이 사람은 나 못지 않은
마조히스트다-
요즘 책을 못 읽고 있지만 그에게 나는 책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고 그는 내게 술 이야기를 한다. 이 책 저 작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러려고 그동안 책을 읽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것들이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한 과정인 것처럼 여겨진다. 안경을 쓰고 진지하게 내가 서재에 썼던 글을 읽고 있는 그 사람을 바라보면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복잡한 설렘이 가슴을 채운다. 나를 읽고 있는 이 사람. 의사가 마라톤을 추천할 만큼 남들보다 커다란 심장에 형용사를 품고 사는 이 남자가 나를 설레게 한다. 나를 살아있게 한다. 슬픔의 긍지를 느끼던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