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 거꾸로 읽기>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권
-게르망트 쪽1
p.20 내가 만약 그 풍선을 터트려 안에 담겨 있는걸 나오게만 한다면, 나는 그해의 콩브레 향기를, 바람에 살랑거리는 산사나무 꽃향기가 섞인 그날의 콩브레 향기를, 광장 한 모퉁이에서 비를 알리는 전조인 바람이 차례로 햇살을 날아가게 하고 성당 제의실 붉은 모직 양탄자를 펼쳐 놓고 거의 제라늄 분홍빛에 가까운 반짝이는 살색으로, 말하자면 환희속에 그토록 축제에 고귀한 빛을 띠게 하는 바그너풍 부드러움으로 덧칠하던 향기를 호흡할 수 있으리라.
5권은 내내 지루할 틈 없이 읽었는데도 저자인 마르셀의 성향에 어느정도 동요된 탓일까? 정신을 차려보니 리뷰를 안쓰고 그동안 미뤄둔 것들을 하나하나 해치우고 있었다. 몇달을 쌓아만 두던 책장 한켠을 말끔히 정리하고 기존에 읽은 책들을 책장 뒤켠으로 옮기고 먼지를 털고 깨끗히 닦고 아예 서재에서 몰아낼 오래되고 진부한 책들을 솎아냈다. 다른 분들 리뷰를 읽다가 밥을 먹고 어제 주문한 책을 받고 한 곳에 쌓인 알라딘 박스를 접어 모아서 대문앞에 내놓고 나간김에 빗자루 질을 하고 저 멀리 산을 한 번 바라보고 '오늘은 안개 낀 하늘이 참 운치좋고 예쁘다'하고 돌아서다 말려놓은 우산을 접어 장에 넣었다. 자 정신차리고 5권을 마무리짓자! 책을 펼치니 민음사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완결을 언제 내 놓을 건지 궁금해 진다. 전화를 해서 안내에 따라 내선을 눌러 담당자와 통화를 한다. 올해 11권이 나올 예정이고, 내년즈음 12,13권으로 완간이 될 것 같다고 한다. 음 그럼 일단 오늘 읽은 책의 리뷰를 쓰자.
5권에서 마르셀의 가족들은 게르망트 저택 별채로 이사해 살게된다. 선망의 대상인 게르망트 공작부인을 보기 위해 거의 매일같이 그녀가 지나는 길에서 우연을 가장해 마주치거나 홀로 엿본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마르셀의 하녀인 프랑수아즈마저 그 사실을 간파하고 못마땅해 하는 눈치다. 이후 오페라를 보러가서 눈이 마주친 게르망트 부인의 환한 미소로 마르셀의 가슴앓이는 더 깊어진다.
p.95 내 눈에 천배는 더 아름다워 보이는 공작 부인이 칸막이 좌석 가장자리에 올려놓은 하얀 장갑 낀 손을 내 쪽으로 들어 우정의 표시로 흔들었고, 그 순간 내 시선은 부인이 누구에게 인사를 하는지 보려고 자기도 모르게 타오르는 반사적인 불길로 작열하는 대공 부인 눈길과 마주친 듯 느꼈으며, 또 공작 부인은 나를 알아보고 반짝거리는 천상의 미소 세례를 내게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이 후 더 열심히 그녀와 마주치기 위해 매일같이 길목에서 기다리는데 그녀의 태도가 어쩐지 냉담하다. 프루스트만의 장점이 살아나 문장으로 아름답게 표현되어 그렇지 요즘 상황에 비추어보면 이건 스토킹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게르망트 부인 입장에서 본다면 매일 아침마다 불쑥불쑥 눈에 띄는 마르셀이 꺼림직 했을것이다. 하지만 김영하 작가도 말했듯이 문학은 도덕을 벗어난다. '죄와 벌'에서는 도끼로 노인을 찍어 죽이고 '변신'에서는 한 집의 가장이 '벌레'로 탈바꿈하고 괄시받지만 독자는 그 자체를 도덕적으로 문제삼지 않는다.
p.96 처음 며칠 동안은 그녀를 놓치지않으려고 보다 확실하게 그녀 집 앞에서 기다렸다. 마차가 드나드는 대문(내가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연이어 통과시키는)이 열릴 때마다 대문의 흔들림이 마음속까지 길게 퍼져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마음이 가라앉곤 했다.
'대문의 흔들림이 마음속까지 길게 퍼졌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내 마음도 덩달아 흔들렸다. 목소리 좋은 국어선생님이 유달리 좋았던 나는 담임 선생님이 또 그렇게 좋았다. 국어시간이 되어 담임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심장이 쿵쾅대서 자칫하면 교실에 다 들릴것만 같아 얼굴이 곧잘 빨개지곤 했다. 이런저런 경험이 있는 누구라도 프루스트의 문장문장을 읽는 순간 급속도로 매료된다. 결국 주인공 마르셀은 절친이자 게르망트부인의 조카인 생루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다시 게르망트 부인에게 잘 보이려 갖가지 노력을 하게 된다.
아무래도 내게는 금사빠로 결론이 난 마르셀이 5권에서 이렇게 사랑하는 상대는 게르망트 부인이고 이 과정에 친구 생루에 대한 에피소드와 더불어 여러 인물들의 개성넘치는 인상과 대화, 또다시 '드레퓌스 사건'에 관한 논쟁, 귀족 사회의 이면과 정치가 흥미롭게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