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많으면 소심해진다. 아니 소심해서 생각이 많은 건지도 모르겠다.  - P9

기사는 공원 입구에차를 세우고 3만 원을 불렀다. 이미 기가 꺾인 나는 뭐라 항변은 못하고 불편한 표정으로 그에게 카드를 건넸다. 그가 내 표정을 읽었는지여기 들어오면 남는 게 없다며 다시 한 번 지역사회를 강조했다.
돌아갈 길을 생각해 그에게 미터기를 켜고 기다려달라 하려던 마음은 이미 달아난 지 오래였다. 소심하지만 뒤끝은 있는 나는 3만 원이 결제되고 돌아온 카드를 받고는 있는 힘껏 택시 문을 닫았다.
앙갚음이라도 하듯 먼지를 일으키며 택시는 사라졌다.
- P14

일주일 뒤 회사 앞 카페에서 그녀와만났다.
화사한 꽃무늬 남방에 청바지를 입은, 작은 얼굴에 보조개를 파며인사하는 그녀의 첫인상은 충분히 의외였다. 스모키 화장에 고스 롤리 복장을 즐기는 소설 속 여주인공을 떠올려왔기에, 저자의 완전히다른 스타일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 P22

애써 호감을 감추긴 했지만 문제는 그녀가 가고 나서였다. 다음 주에 그녀를 만날 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단정한 이목구비와 꾸민 듯 꾸미지 않은 옷차림, 그리고 그런 외모와는 상반되게 거침없는 호흡과 도발적인 상상력을 보이는 그녀의 작품도 좋았다. 그부조화가 신선했고 과연 그녀의 어디에서 그런 이야기가 튀어나왔는지도 궁금해졌다.
- P23

그녀는 잔을 비우고 반찬으로 나온 생오이를 손으로 집어 먹었다.그 모습이 도토리를 먹는 다람쥐처럼 예뻐 보였다
- P24

"다 내 잘못이죠. 내가 잘못해서 재연이가 이렇게 된 거라고요. 다나 때문이라고요."
놈이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과속방지턱을 지나며 차가 덜컹댔다.
덩달아 내 감정도 들썩이는 게 느껴졌다.
"진짜 내가 신경을 썼으면 이럴 일 없었는데……. 진짜 내가 상병신이지 뭡니까. 다 내 잘못입니다."
"제 잘못도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자책에도 경쟁심이 있나 보다.
"아닙니다. 당신보다 내가 더 문제였어요. 내가 더 재연일 힘들게했어요."
- P30

민망한 미소와 함께 혀를 쏙 내밀며 그녀가 말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이대로 그녀를 보내기가 싫어졌다.
뭐 하나 제대로 결정 못하는 나였지만 그때는 결정하고 자시고도 할거 없이, 방언 터지듯 말이 튀어나왔다.
"좋은 날이니까 우리 한잔 더 할까요? 제가 살게요."
"아뇨."
그녀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심장이 덜컹 멎었다.
"택시비 내실 거잖아요. 술은 제가 살게요."
못 들은 척 우리의 대화를 듣던 택시기사가 허허, 하고 웃음을 흘렸다.
- P39

"예. 그때 제 유일한 위안은 남자친구를 만나 개 자취방에서 요리해먹고 〈무한도전〉 같이 보며 지내는 거였어요. 둘 다 넉넉지 못해도 음식 사서 해 먹으면 싸거든요. 그리고 한강 같은 데 산책하며 데이트하면 돈도 안 들고….….. 아무튼 그 친구가 취업만 되면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리게 하려고 했어요. 번듯한 남자친구가 있으면 더 이상 선을 보라고도 하지 않겠지, 라고 생각했죠.  - P41

"마음을 독하게 먹고 집에 들어갔어요. 아무것도 부모님께 묻지도따지지도 않았어요. 그러곤 독립을 준비했어요. 스스로 사는 법, 혼자살 공간, 나만의 일, 그런 걸 위해 부모님 말에 복종하며 살았어요. 월급을 모으고, 선보라고 하면 옷을 사 입는다는 핑계로 돈을 받아 모으고, 선은 보지만 계속 거절을 하면서 시간을 벌었어요. 부모님과 함께저녁을 먹기 싫어 일부러 야근을 하고, 아니면 극장에서 시간을 때우다 들어갔어요. 그거 알아요? 비교적 싸게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곳이야구장과 극장이라는 거? 
(도서관도 있는데ㅋ) - P42

영화를 보며 늦게야 깨달았어요. 말하자면 영화가 제 스승이었던 거죠."
"그중에서 특히 좋았던 영화는 뭐가 있어요?"
"미스 리틀 선샤인>? 그거 알아요?"
"잘 모르겠는데요."
"거기에 엉망진창 가족이 나와요. 근데 그들은 서로 구제불능이란걸 알기에 한편이 돼요. 우리 집과는 정반대죠. 누군가 못나게 굴면 우리 집에선 추방될 거예요."
- P43

먼저 식사를 마친 놈이 카운터로 향했다. 밥값을 계산하려는 건가?
보쌈을 추가로 시킨 건 녀석이니 녀석이 내려는가 보다. 나로서는 생큐다. 근데 아니다. 놈은 카운터에 놓인 녹말이쑤시개를 집어 들고 문옆 커피 자판기로 향했다. 그럼 그렇지. 덩치만 큰 좀생이 녀석 같으니라고. - P53

내가 신발을 신으며 시간을 끌자 놈이 계산을 했다. 쌤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놈이 가게에서 나오며 길 건너 모텔의 네온사인을 향해 턱짓을 했다.
"밥은 내가 샀으니 모델비는 형씨가 내쇼."
내가 어처구니없어 하자 놈이 덧붙였다.
"상행선인지 하행선인지 결판이 안 나는데 어딜 가. 가서 끝장날 때까지 따져보자고."
- P55

노래를 따라 부르던 녀석이 휴게소 표지판을 보고 기성을 지른다.
마치 밥그릇을 맞이하는 개처럼 좋아한다. 짐승 같은 놈,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놈을 더 볼 이유도 없다. 조금만 참자. 하지만 그러려면 목줄 정도는 채워야 하겠다.
- P65

재연과 함께 떠난 첫 여행지가 남해였다.
그녀는 바다와 산이 겸비된 곳을 사랑했다. 설악산에 오르고 미시령을 넘어 속초에 내려가 1박을 하고, 강화도에 갔다가 마니산에 오르고, 그렇게 산과 바다를 한꺼번에 섭렵할 수 있는 곳을 좋아한다고내게 말했었다. 그것이 힌트가 되어서 나는 그녀에게 남해를 여행지로 제안했다.
- P72

"아따. 이모, 여전하요?"
"나가 바빠 와볼 새가 없었구먼요. 내려오면 볼쎄 들러부렀지."
"거시기, 잘 있지요잉?"
앤디의 사투리가 짙어지고 있었다. 나는 몰리는 관심과 그에 따른앤디의 오지랖이 심히 부담스러운 나머지 1미터 정도 그에게서 떨어져 걸어가야 했다.
- P101

"여그 누가 왔는지 나와봐라."
그러자 식당 안쪽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보던 30대 후반의 여자가앤디를 보고는 놀라서 일어났다. 여자는 집 나간 개라도 본 듯 급히슬리퍼를 신고 앤디에게 다가왔다.
"도련님, 갑자기 뭔 일이다요!"
(집 나간 개ㅋ) - P102

놈의 등판을 보고 달리며 방금 전 상황을 복기했다. 아까의 사내는앤디의 친형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앤디는 집에 민폐를 끼친 동생인것이고…. 근데 강병균이라고? 앤디가 왜 영어 이름을 쓰는지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 P105

"아따. 인나라, 제주 안 갈 거나?"
숙취에 골골대는 나를 앤디가 깨웠다. 아침 일곱시였다. 비행기 놓친다며 녀석이 반말로 재촉해댔다. 지난밤 말을 트기로 한 게 떠올랐다. 반말로 전라도 사투리를 들으니 좀 함부로 대해진다는 기분이 들었다. 녀석이 고향을 뜨는 대로 사투리를 자제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 P122

나도 울고 있었다. 휴지로 눈물을 닦아도 곧 또 젖어들었다. 코도나와 풀어야 했다. 반면 그녀는 오래 준비된 변론을 마친 변호사처럼침착하게 자리를 정리했다. 카페 구석에 앉은 우리 둘은 이별을 나누며 감정이 폭발한 연인의 클리셰였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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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monster의 라틴어어원인 ‘monstrare 의 뜻이 ‘보여주다‘ 예요. 괴물이란 말 자체가보여주다‘라는 거죠. 실은 언제나 보여주는 상태로 등장하는 거예요. 동일률로 포착되지 않아서 그렇지, 언제나 등장하는 형태로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괴물이라는 존재는 신화는 성서든,
많은 텍스트 안에서 지혜를 획득해야 할 존재가 거쳐야 할 관문으로 등장했어요. 그런 점에서 타자와 괴물은 굉장히 긴밀하죠.
- P35

이 이야기 속에서 처음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해명한 사람은 오이디푸스지만, 그 질문은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던진 거예요. 괴물이라는 존재는 실은이토록 많은 지식과 경험의 원천인 거죠.
- P36

‘철학은 보편자에 대한 것이 아닌 게 아닐까?‘ 철학이 보편자의 학문만이 아닐수 있다는 가능성이 이야기되기 시작하고, 철학에서 보편자라고했던 것들이 비판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보편자가 아니었던 존재들, 혹은 철학에서 타자라고 이야기했던 영역들이 철학의 새로운 입지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위치에 서게 돼요. 

철학을 더 이상보편적이라고 하기 어려워졌고, 보편학문으로서 철학이라는 말이 무용해지기 시작했으니까요. 예전에는 철학이 모든 걸 다 했어요. 만학의 학문이었던 거죠. 철학이 과학, 수학, 심리학……… 온갖 걸 다 했어요!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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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2-02 01: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주문하고 아직 배송은 못받아서 계속 설렘만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읽으시는 미미님의 리뷰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

청아 2022-02-02 10:16   좋아요 1 | URL
다른 책이랑 번갈아 보느라 조금씩 읽고 있어서요^^; 난티나무님도 쟝쟝님도 좋다고 하셔서 구입하고 이제 시작했는데 잘샀다는 생각이 들어요!

공쟝쟝 2022-02-02 2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청아 2022-02-02 23:27   좋아요 0 | URL
🥰
 

「내가 당신을 사랑해도 될까요?」 제비는 대뜸 말했습니다. 곧장 요점에 이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갈대 아가씨는 나붓이 고개 숙여 절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녀 주위를 빙빙 돌며 날개로 수면을 스쳐 은빛 물살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이 그가 사랑을 나타내는 방식이었고, 그사랑은 여름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 P10

그런데 이제 그 사람을 만난 거야. 그의 머리칼은 히아신스 꽃처럼 짙고, 그의 입술은 그가 원하는 장미처럼 붉구나. 하지만 열정 때문에 그의 얼굴은 상아처럼 창백하고,
이마에는 슬픔이 새겨져 있어.」 - P30

왜냐하면 사랑은 제아무리 현명한 철학보다 더 현명하고, 제아무리 강한 권력보다 더강한 것이니까 말이에요. 사랑의 날개는 불꽃처럼 타오르고, 사랑의 몸 또한 불꽃처럼 붉지요. 사랑의 입술은 꿀처럼 달고, 사랑의 숨결은 유향(乳香)과도 같답니다.」 - P34

그래서 나는 이상한 짓을 했어. 그게 뭔지는 말할 것 없지만, 난 여기서 하룻길쯤 떨어진 동굴에 그 부(富)의 반지를 숨겨 놓았지, 여기서 하룻길밖에는 안 되고, 반지는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 그 반지를 갖는 사람은 세상의모든 왕들보다 더 부자가 되는 거야. 그러니 가서 그걸 가견 그귀며 세상의 모든 보화가 네 것이 될 거야.」 - P83

골짜기의 폭포는 마치 얼음 왕에게 입맞춤이라도 당한 듯 공중에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 P103

「지구가 결혼을 하나 봐. 이건 신부 옷일걸.」 사이좋은멧비둘기들은 소곤거렸습니다. 비록 분홍빛 나는 작은 발은 동상에 걸렸을망정, 그들은 모든 일을 낭만적으로 보는것을 자기들의 임무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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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2-02 00: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고 있는책 60권이네요 ^^

청아 2022-02-02 00:19   좋아요 2 | URL
1월에 좀 많이 구입해서 이책 저책 왔다갔다 욕심내고 있어요😅

scott 2022-02-03 00:40   좋아요 2 | URL
ㅋㅋ
미미님 작년 구매 량
짐작이 ㅎㅎㅎ
이제 꽂아둘 공간 없을 것 같습니다 🤩

청아 2022-02-03 07:46   좋아요 2 | URL
앗ㅋㅋㅋㅋㅋ맞습니다ㅋ공간 없어요 스콧님😅
책 사이에 끼어서 읽어야해요🤦‍♀️
 

인간은 평등하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현실에서
남성과 여성,흑인과 백인, 식민지와 제국.어린이와 어른,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권리가 다르다.




우리가 보편적이라고 하는 인간, 이성적이라고 하는 인간이 마치 모든 인간을 다 호명하는 것 같지만, 인간이란 무엇인가그 내용을 들여다보니까 그 인간은 대체로 남성이고, 유럽, 그것도 서유럽에 살아요. 인간에 대한 개념이 만들어진 시기도 있어요. 18세기 정도부터죠. 그리고 이들이 문명이래요. 또 이 사람들은 기독교인이고, 결혼한 남성, 아버지가 된 가부장이에요. 가부장이 되어야 우리가 진정한 남성이 된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렇죠? 그들은 이성애자이기도 하고요. 예전에 이 사람들은 노예 소유자이기도 했어요. 얼마만큼의 재산도 있어야 해요. 너무 가난한 사람들도 아닌 거죠. 이런 존재들인 거예요.
- P20

따지고 보면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름을 갖는 것도 아니고,
‘남성 아님‘ ‘비남성‘이 여성의 지위예요. 여성은 자신의 특질을 이야기한 적이 없는 거죠. 부르기는 여성이라고 부르지만, 여성의특질이라는 건 남성이 아님의 특징인 거예요. 

남성은 과묵한데여성은 수다스럽다, 남성은 명예를 추구하는데 여성은 배신을 한다, 남성은 의리가 있는데 여성은 의리가 없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잖아요.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무엇무엇 아님‘으로 표시가되는 거죠. 그렇게 아님‘으로 표시되는 걸 ‘타자‘ 라고 해요. 

타자의 ‘타‘는 다를 타‘를 쓰는 거잖아요. ‘같다‘가 아니라 다르다‘ 예요. ‘무엇무엇이 아니다‘ 라는 뜻이에요. 여자는 이름이 없고 언제나 아니다‘ 예요. 그러니까 억울한 거죠. 여자는 자기를 설명한 적이 없어요. 항상 남자의 반대항이죠. 

여자는 어떻다 하면서 말하는 걸 들어보면, 남자의 반대항이 여자인 거예요. 여자가 아니라
‘비非남자‘. 그리고 남자가 인간이니까 여자는 뭐예요? ‘비非인간‘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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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로‘라 하면 통상 장시간 노동을 말한다. 이는 시간의 길이차원에서 말하는 과로다. 그런데 길이 차원의 장시간 노동뿐만아니라 시간의 배치 차원의 야간노동도 과로에 해당한다. 또한실적 압박이나 직장 내 괴롭힘 workplace harassment 도 과로 요인에 들어간다. 이렇게 업무 시간대를 비롯해, 업무 특성, 성과 평가, 동료관계, 조직문화, 역할과 책임 같은 질적 요인을 포함한다. - P23

과로죽음은 한 개인의 비극적인 죽음이지만 사회 조직의 구조적 모순을 담지한다는 의미에서 집합적인 비극이다.  - P24

과로죽음으로 추정됨에도 ‘과로‘가 사장되어버리는 경우가 사실은 더 많다. 다시 과로와 죽음을 거리로 표현해보면, 그 거리는 꽤 먼 것도 분명한 현실이다. 죽음과 업무와의 연관성이 없다는 담론, 프레임, 이데올로기, 언어가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 P24

《자살에대하여》의 저자 사이먼 크리즐리는 자살이 우울증이나 무력감으로 인해 일어난 것으로 본다면 자유로운 행위의 여지는 닫혀버린다고 지적한다 - P25

억압적이고 규율적인 맥락에서 발생하는 정신질환과작금의 경쟁적 환경에서 발생하는 정신질환은 구분된다. 발전국가 시기에도 과로죽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질식할것 같은 경쟁 시스템이 유발하는 정신적 고통, 공황, 우울증, 불안, 고독, 공격성이 흘러넘치는 시대의 과로죽음과는 그 결이 다르다.
- P26

이와 관련한 실태조사나 법제도적 개념이 부재한 상황에서 증가 추이라고 말하는 것은 섣부른 진단일 수 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가 가속화되는 맥락, 노동과정이 헬조선화되는 맥락, 그리고 코로나19 이후 모래시계의 밑바닥이 깨진 것(깨진 모래시계형 계층구조) 처럼불평등과 불안이 한층 심화되는 맥락에서 치솟는 불안정성이 과로죽음과 연결되고 그 추이가 증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따져본다 - P27

과로죽음이 반복되는 비극에도 불구하고 법제도는커녕 실태조사도 빈약한 게 우리네 현실이다. 과로죽음의 원인 규명도 유가족이 홀로 까다로운 절차와 지난한 과정을 감당해야하는 몫으로 남는 상황 또한 어처구니없는 지점이다. 과로죽음을 유발하는 착취와 폭력성은 탈정치화될depoliticized 여지가 매우높다. 그런 가운데 과로죽음은 반복된다. 사회적 부정의가 체계적으로 생산되는 배경이다. 이 모든 것이 과로죽음을 주목해야하는 이유다.
- P27

벼락 맞는 일은 매우 예외적이고 우연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연coincidence에 가까운 일이라 하더라도 벼락이 특정한 장소와 조건에서 반복 발생한다면 (구체적인 상황), 그 특정 장소에서의 노출 위험으로 발생한 사고는 더 이상 우연으로 취급해서는안 된다. 그 구체적인 상황에 노출되지 않았더라면, 벼락 맞을 우연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벼락 맞는 일이 우연적 사건이라 하더라도 특정 장소에서 반복되어 일어난다면 그것은필연inevitability일 가능성이 크다.
- P29

(과로를) 읽지 못하게 하는이란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과로는 탈정치화되어 있다. 저인지는 탈정치화의 산물이다. 이런 상태는 착취와 폭력이 아주 손쉽게 작동되는 상태와 같다. 과로+성과체제가 재생산될 여지가 높아진다.
⭐⭐⭐ - P30

경쟁적인 성과 장치는 생존의 절박성만을 높이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침묵과 무관심을 조장하는방식으로 우리의 권리를 침해한다. 자살 감정 suicidal emotions 이 양산되는 맥락이다.
⭐⭐ - P31

‘어디에서는 마음 아픈 사람이 아니라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터와 과로 + 성과체제에 문제제기의 시선이 향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어떻게‘는 마음 치유나 정신 상담, 심리 치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괴롭힘 방지나 실적 쥐어짜기 을 .
기 장치를 근절하는 데 시선을 돌려야 함을 말한다. 
⭐⭐⭐ - P31

일찍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육체적·정신적 고갈, 수명 단축, 아동 사망, 돌연사 등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문제를 ‘사회적 살인‘이라 규정하며, 노동자의 불건강, 노동자의 불구화는 착취적 관계에서 빚어지는 산물임을 분명히 했다.  - P33

생산성, 혁신, 소비자 편의, 비용 절감, 위기 돌파.
경쟁력의 언어로 무장한 신기술은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을근사한 이름으로 채색하면서 노동을 탈시간화·탈공간화된 형태로 빠르게 바꿔나가고 있다.  - P35

초기업자본주의 시기 샤를 푸리에가 공장을 <완화된 감옥>‘이라 불렀던 것에 비춰보면, 디지털 모바일 기술은 <투명한 감옥>의 외연을 비가시적인 형태로 일상에까지 확장한다. - P36

동시에 우리가 직면하는 또 다른 현실은 노동(과정) 이 탈공간화·탈시간화되면서 과로죽음을 규명하는 일이 더곤란해졌다는 점이다. 

퇴근 후 SNS 업무 지시를 노동시간으로산정하는 문제, 배달앱 노동을 포함한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문제, 재택근무 시 보안 유지나 생산성 측정이란이름 아래 스태프캅, 타임닥터, 티메트릭, 데스크타임, 인터가드, 클레버 컨트롤, 테라마인드 같은 보스웨어 bossware 프로그램(보스를 위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이란 뜻)을 통해 마우스 움직임이나키보드 타이핑, 심지어는 SNS 활동 추적이나 화면 캡처 (스크린샷)까지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데이터 감시 data surveillance의 문제 모두 새롭게 부상하는 쟁점이다. - P36

일터 은어는 노동의 상태를 경험적으로 살필 수 있는 렌즈다. 은어隱語는 어떤 특수한 환경이나 집단에서 오랜 시간 공통된생활을 경험하면서 구성원 사이에서 생겨난 독특한 언어다. 주지하듯 일터 은어는 노동 일상의 축적된 경험을 함축하고 업무관행과 감각 그리고 태도나 관계의 상태를 반영한다. 은어를 통해 우리는 노동자의 마음과 몸에 각인된inscribed 집합적 특성을 읽을 수 있다.
- P43

일터 은어들

게임 노동자를 포함한 IT 개발 노동자의 크런치 모드(uremode(게임 출시 전 짧게는 몇 주에서 길게는 몇 달에 이르는 야근+밤샘근무 기간을 뜻함)‘ ‘구로의 등대‘ ‘갈아넣다‘ ‘반프리 (A업체와는4대보험 적용되는 정규직 근로계약을 맺어 최저임금을 받고, B업체와는 프리랜서 계약을 통해 나머지 급여를 받는 형태의 이중계약을 일컬음)‘ ‘

보도방(통상 유흥업소에서 인력을 공급하는 곳을 말하는데, 이에빗대 IT업계에서 IT 노동자를 수급하는 파견업체를 일컫는 말, 이런 고용 관행은 하청의 하청의 하청구조를 양산하는 문제로 지적되고 있음)을 비롯해 간호 노동자의 ‘태움(‘영혼이 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선배 간호사가 신임 간호사를 교육하는 과정에서 괴롭힘 등으로 길들이는 규율을 지칭)‘, 

콜센터 노동자의 콜수‘ ‘화출·화착(화장실로 출발하고 화장실에서 나올 때마다 메신저로 보고하는 상황을 일컬음)‘ ‘욕받이‘, 방송 노동자의 ‘디졸브disolve(영상 편집 기법으로 화면이 흐려지면서 다른 화면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데, 오늘과 내일의 경계가 없을 정도로 장시간 밤샘 촬영하는 것을 말함)‘,.... - P44

고용불안이 높을수록 번아웃 정도가 높은데, 소득 불평등이심한 사회일수록 고용불안이 번아웃에 미치는 영향은 더 크다.
프로젝트를 따라 이동하는 거대한 철새집단의 무리처럼 이직률이 기이할 정도로 높고, 프로젝트별로 업무에 결합됐다 해체되는 과정을 자주 반복하고, 치열한 경쟁 상황에 내몰리고, 업종 내소득 격차의 정도가 높아 노동자들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번아웃에 노출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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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타하라는 시간 단축時短과 괴롭힘을 뜻하는 하라스먼트를합성한 신조어로 업무량은 줄이지 않으면서 업무시간을 줄여라는 회사의 지시가 괴롭힘을 자아내는 상황(업무 강도 강화, 실적 압박 스트레스)을 일컫는 말이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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