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드니 뵐뇌브 Denis Villeneuve 감독을 좋아한다. 오래전 1월 1일, [그을린 사랑 Incendies] (2010)으로 처음 이 분을 알게 되었는데, 영화가 준 정서적 충격이 압도적이었다. 새해 첫날 다이어리에 적은 글이나 희망찬 계획들이 갑자기 허무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 후로, 드니 뵐뇌브는 나의 최애 영화감독이자 존경하는 예술가가 되었다. [시카리오] (2015), [Arrival](2016), [Blade Runner 2049] (2017) 그리고 [Dune](2021)까… 이 분의 천재성과 장인정신에 감복하고 감사하며 영화를 보아 왔다.



 특히 [Dune](2021)은 사회적 거리두기에 아랑곳 안 하고 극장에서 4번(2D 2번, IMAX 2번)이나 보았을 만큼, 모든 면에서 판타스틱했다.


  • 음악: 한스 짐머 _ 흰 리넨 로브를 입은 꿈속 여인이 사막에 등장하는 장면에서 터지는 사운드, 사막행성의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 연기: 레이디 제시카 역의 레베카 퍼거슨을 오래전부터 좋아했는, [Dune] 보고 난 후에는 젠데이야 콜먼과 티머시 샬라메의 매력에 새로 눈 떴다. 배급사에서 영화 판권을 딴 계약을 마치고 감독을 발탁하는 데 불과 15분 걸렸듯, 샬라메 역시 폴 아트레이드 역 적임자로 바로 낙점되었다.


  • 대본: 923쪽인 소설 [Dune]을 읽는 데 하루 종일 걸렸다. 그나마 전체 시리즈 중 시작에 해당하는 1권뿐인데도 말이다. 이런 압도적 스케일과 방대한 서사를 어떻게 2~3시간 상영시간에 담아낼까? 그래서, 드니 뵐뇌브 감독은 1편과 2편으로 나누어 제작하기로 결정한다. 손 보고 또 손 보아서 최선을 대본을 뽑아낸다. 현란한 스펙터클과 속도감을 기대하는 관객과 인물의 내면과 내적 성장에 초점을 둔 원작 사이에서 균형 맞추기가 어려운 작업이었을 텐데, 역시 "프랭크 허버트 찐팬" 드니 뵐뇌브 감독답다.


  • 영상: 숨을 잠시 멈추게 하는...... [DUNE] 4차 관람의 유!

그래픽 노블로, 소설로 그리고 영화관에서 4번 관람까지 총 6번 [DUNE]을 횡단했는데도, 놓친 부분이 많았다. [듄: 메이킹필름북] 덕분에 그 놓친 부분, 영화 만으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디테일을 확인했다. 토요일을 무겁고 두꺼운 [듄: 메이킹필름북]과 보낸 보람이 있었다.


[아바타: 물의 길]은 최근 2번이나 보았으나, 흥미롭게도 줄거리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마치 놀이기구 탑승 체험처럼, 객석에서 일어나는 순간 신기루처럼 화면의 잔상도 흥분감도 사라진다. 사운드트랙도 희미하다.

반면 [DUNE]은 소설과 그래픽 노블로도 접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잔상이 마음속에 뻐근하게 남아 있다. 두 작품 모두, 엄청난 자본과 어마한 전문인력이 투입된 장기 프로젝트였던 만큼 감히 저울질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관객으로서나 개인으로서 나는 아날로그 스타일을 더 좋아하는구나를 깨달았을 뿐이다. 


예를 들어, 아트레이드의 전사 던컨 아이다호가 사막행성에 착륙(?)하는 장면도 영화 [DUNE]에서는 중장비까지 동원하여 사막 혹은 세트장에서 직접 찍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오니셉터( ornithopter)를 여러 기종 (+ 낡은 것과 새 것)으로 제작하고, 상당한 수송료를 지불하고 사막으로 직접 실어 날라 촬영했다 한다. 새삼 드니 뵐뇌브 감독의 장인정신에 감복한다.


장인 정신은 소품과 의상 등 물질적인 요소뿐 아니라 전투씬의 무술 동작과 사막행성의 독특한 걸음걸이, 언어와 문자 등 비물질적인 요소에서도 드러난다. 드니 뵐뇌브 감독은 영화의 완성도를 극대화하기 위해, 무술 전문가, 언어학자, 리넨 디자이너, 현대 무용가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했다. 


영화를 네 번이나 보면서도, 사막 부족 프레멘의 칼, 아트레이드 가문의 칼, 잔혹한 용벙 사우르카의 무기를 눈여겨 보지 않았다. 하지만, 무기 디자인과 색감은 해당 무기를 다루는 집단의 에토스까지 반영하는 식별 표지라는 걸 [듄: 메이킹필름북]을 통해 알았다. 마찬가지로 하코넨의 야수적인 잔혹함과 탐욕을 드러내는 장치로 캐릭터의 몸집과 의상이 중요한 기여를 하는데, 드니 뵐뇌브 감독의 디테일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심지어 하코넨의 식탁에 올라간 메뉴들도 캐릭터의 성격을 반영한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원작과 달리, 사막행성의 카인즈 박사가 여성인 까닭이 궁금하면서도 흡족했다. 원작자 프랭크 허버트가 사막지역 출장을 계기로 [DUNE]을 쓴 지 거의 6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인지라 이 캐릭터를 여성화하여도 큰 무리가 없다. 드니 뵐뇌브 감독이 다른 스태프들과 나눈 대화를 들여다보면, 감독의 Dune 세계관을 희미하게나마 유추할 수 있다. 뵐뇌브 감독은 베니 게서리트로 대표되는 여성 캐릭터들은 세계를 움직이과 역사의 흐름을 설계하는 면에서 남성 권력자들과 차원이 다른 시간관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한 마디로, 매우매우멀리 내다보고 큰 스케치를 해두는 장기적인 설계가 여성적 접근이다.


그 맥락에서 베네 게서리트들이 타고 다니는 우주선의 모양이 계랸형인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한다. 달걀 EGG는 난자, 즉 다산성과 생식력으로 볼 수 있는데, 장기적 설계도를 현실화시키는 이음매들은 바로 그 생식력이다. 아! 뵐뵈느 감독 천재!





사막은 자비를 모른다. 적응하지 못하면 죽음뿐이다. [듄] 대본 첫 페이지 문구 


사막을 좋아한다는 드니 뵐뇌브 감독은 이 문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듄>은 고향에서 뿌리 뽑혀 새로운 환경으로 이주당한 뒤 대다수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곳 토착민들의 문화를 배울 만큼 호기심이 있는 사람은 생존을 위한 지식과 지혜를 얻을 겁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정치, 기술, 환경이 모두 빠르게 변하죠. 여기서도 역시 가장 많은 지식을 얻는 사람이 살아남을 겁니다...

나는 <Dune>이 젊은이들에게 울림이 있는 작품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 프로젝트의 DNA 곳곳에 이 적응이라는 개념이 배여 있어요.

나는 젊은이는 아니지만, <DUNE>의 메시지에 충분히 진동한다. 물을 비롯 자원이 풍요로운 행성의 이방인 눈에는 사막행성 프레멘의 문화가 무자비해 보일 수 있다. 프레멘은 회복이 어렵게 다친 동족의 피와 체액을 취하여 생명수로 바꾼다. 100사람을 살릴 수 있는 귀한 물을 야자수 한 그루에 퍼부으며, 미래의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를 담는다. 생존에 우호적인 환경 속에서 풍요를 누리던 사람들의 눈에는 기괴하고 가혹한 삶의 방식이다. 하지만, 그런 적응력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야말로 그들을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세대를 걸쳐 생존시킨 힘이다. 프레멘에게서 무엇을 배울까? 신념은 단단하게 가지되, 상황에 따라 말캉해질 수 있는 적응력. 자비를 모르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환경을 인공위성 시야로 내려다보며 좌표 찍는 치밀함. <Dune> 대본집의 대사가 나를 진동시킨다.

"사막은 자비를 모른다. 적응하지 못하면 죽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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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1-29 1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네 번이나 보시다니... 하긴 저는 오디오북으로 단편소설을 열 번 이상 들어 본 신기록이 있어요.
체호프의 단편이었죠.ㅋㅋ

얄라알라 2023-01-29 16:55   좋아요 2 | URL
와! 역시 페크님!!! 열 번 이상!
문장을 외우셨겠네요!

저는 필름 메이킹북으로 복습하다 보니,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봤어도 제가 놓친 부분이 많아서
재개봉하면 다시 극장 가고 싶어졌어요

고양이라디오 2023-01-29 1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듄 2번(2D, IMAX) 봤지만 더 보고 싶은 마음이네요! 재개봉하면 달려가고 싶네요!

<컨택트>도 보셨나요? 저도 드니 뵐뇌브 최애 감독입니다^^b <그을린 사랑>도 보고 싶은데 감당하기 어려울까봐 아껴놓고 있네요ㅠㅋ

얄라알라 2023-01-29 23:06   좋아요 1 | URL
최애!!! 저에게도 그러하옵니다!
그을린 사랑,... 감당 어려웠어요.

1월 1일이었는데, 살짝 후회되었을 만큼 진동을 심하게 남긴 영화였어요...

오늘 Dune OST 첨부터 끝까지 다 들으며 장면들을 상상했는데
아무래도 IMAX로 다시 보고 싶어요 ㅎ
 
천 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 - 호스피스 의사가 전하는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
김여환 지음 / 포레스트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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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_ 死 _ ◆(검은색) 


F층.

21세기. 2023년인데, 아직도 4층을 "F"로 표기한 엘리베이터 버튼을 종종 본다. 영화관에서건, 음악회 객석에서건 "4열" 좌석을 강박적으로 피했던 친구도 생각난다. 그 친구, 여전히 숫자 "4"에서 도망가며 살고 있을까? 포천시 모현 호스피스의 수녀님들은 하늘색 베일을 쓰신다. 검은색 베일은 상복 혹은 "死"를 연상시키니까...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죽음"과 "죽어감"은 금기의 화두인가? 입 밖으로 내뱉지만 않는다면, 초대장 발권을 막을 수 있는 불청객인가? 아. 니. 그렇지 않다는걸, 우리는 안다. 호스피스 의사 김여환이 [천 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에서 전하는 핵심 메시지 역시 그것이다. 죽음은 피하거나 덮을 수 없으며, 독학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간은 타자의 경험을 통해 죽음을 배운다. '너/그것/그들' 주어로 전개되는 죽음의 현재성은 내가 필연적으로 도달할 미래라는 것. 발화하지 않거나, 초대하지 않는다 해서 나를 피해가지 않을 죽음. 그러한 죽음관이 있기에, 호스피스 의사 김여환은 환자와 환자의 보호자들에게 친절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에세이에서 저자 김여환은 자신의 과거를 많이 드러내진 않는다.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와 정신분열증을 앓는 어머니 밑에서 컸고, '공부를 잘해서'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노력 끝에 의대를 졸업했다는 정도? 저자는 그 귀한 졸업장을 묵혀둔 채 13년간 전업 주부로만 살다가, 40세에 수련의 과정을 시작했다.

저자가 소설가 박완서를 좋아하는 이유는, 박완서 역시 40세로 늦게 등단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비록 우여곡절 끝에 45세라는 늦은 나이에 직업세계에 본격 입문했으나, 김여환은 대구의료원 호스피스 완화의료 센터장까지 역임했다(현재는 가정의학과 전문의). 의사로서 천 번도 넘게 임종을 선언했던 경험을 토대로 [천 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을 썼다. 환자, 환자의 가족,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등등 다양한 인물들이 에피소드에 등장한다. 읽으며, 유난히 와 닿았던 문장들을 옮겨 본다.



  • 우리는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우리의 마지막과 접촉해야 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연예인의 일상은 꿰고 있으면서, 한 번도 입밖에 내지 않을 영어 단어를 외우는 데는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정작 미래에 반드시 닥칠 죽음의 길에.대해서는 아무 지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7

  • 죽음은 독학할 수 없다. 타자로부터 배워야 한다.8

  • 의학적으로 말기 암이란, 죽기.직전의 상태가 아니라 더는 항암제가 암세포를 죽이지 못ㅎ는 시기를 뜻한다 66

  • 죽음은 숨기고 싶었던 삶의 비밀을 서슴없이 내보인다. 이 가족에게도 말 못할 갈등이 있는 게 분명했다.67

  • 3명 중 1명이 암에 걸리는 현실에서 암 환자의 현재는 우리의 미래일 수 있다. 79

  • 병마로 눈빛이 흐려지고 나무껍질처럼 피부가.거칠어져도 한국 사람들은 후회나 미련보다 전성기의 추억이남겨준 자신감을 간직하고 있다.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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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1-27 15: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죽음은 독학이 불가하다.
타자로부터 배워야 한다.

전적으로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말이지 싶습니다.

얄라알라 2023-01-27 17:13   좋아요 2 | URL
안녕하세요? 레삭매냐님
저도 저자인 김여환 선생님이 정서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지칠 수 있는 상황에서도 환자와 환자의 보호자에게 친절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이 경험하는 죽음이 곧 나의 것이라는 성찰 떄문이지 않은가 하며 이 책 읽었어요^^ 2023년 차차 죽음학에도 손을 대고 싶어집니다^^

혹시 생각나시는 소설이 있으실까요? 넓고 깊게 읽으시는 레삭매냐님께 제가 부담을 드려보아요 ㅎㅎ

바람돌이 2023-01-27 16: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죽음은 타자로부터 배워야한다는 말이 들어오네요.
언제 닥칠지 모르지만 반드시 닥치고야 마는 것이 죽음인데, 죽음에 대한 터부를 깨는것부터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얄라알라 2023-01-27 17:16   좋아요 0 | URL
당연한 말인데도, ˝죽음은 독학 불가˝ 이 표현 읽고 저 잠시 멍 때렸어요
다 아는 이야기인데, 막상 누가 입 밖으로 혹은 문장으로 확 고정 시켜 놓으면 현타 겪는 기분이랄까요.
1월도 이렇게 휘리릭 가버리네요...
죽어감의 순간에서는 이전 수십 년이 수초처럼 휘리릭 지나갈테지만요..


제가 좀....이상한 이야기를 했나봐요....자꾸시간이 가니 초조해서 하는 말이네요.

바람돌이님, 행복한 금욜 오후 보내시기를.....항상 제 서재 들려주셔 따뜻한 댓글 남겨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고양이라디오 2023-01-27 1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핵심 문장들을 보니 이 책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새해 죽음으로 시작하는 것도 아주 좋을 거 같습니다!

2023-01-27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27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양이라디오 2023-01-29 16:44   좋아요 1 | URL
벌써 읽으셨군요ㅎ 전 어제 도서관에서 빌렸습니다. 겨울이라 확실히 추워서 처지네요ㅠㅋ

독서괭 2023-01-27 1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40세에 수련의 과정을 시작하셨다니 대단하네요!
사람의 죽음을 천번 선언한다는 게 참 어떤 경험일지 상상이 안 갑니다. “한번도 입밖에 내지 않을 영어 단어를 외우는 데는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정작..” 이 부분에 뜨끔합니다^^;

얄라알라 2023-01-27 23:49   좋아요 1 | URL
네, 독서괭님.

정말 대단한 결단이 아니고서는 13년간 전업주부로 지내다가 전문직에 도전한다는 게...

의학 지식적으로나 숙련도나 여러 면에서 수련의 과정에서 수모와 힘든 일을 많이 겪으셨던 것 같아요.

다 이겨내고 우뚝 커리어를 세우니 멋진 분이신 듯..

저도 ˝영어 단어를....˝ 이 부분에 뜨끔해서 책 읽다가 적어둔 문장입니다요 ㅎㅎ

서니데이 2023-01-28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0대에 수련의 과정이면 이전에 배운 것들은 다시 배워야 할텐데, 시도하기 많이 어려웠을 것 같아요.
매일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얄라알라님, 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시고,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2023년 설 연휴 기간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을 찾았습니다. 이곳에 올 때면 "노래하는 사람" 앞에서 걸음을 멈추곤 했는데 보존처리 기간인지라 제 모습을 보진 못했습니다. 어렸을 땐 이 작품의 금속성을 낯설게 느꼈고 거대함에 압도되었는데, 차디찬 금속성에 과노출된 도시민의 삶을 살다 보니 "노래하는 사람"이 되레 따뜻하게 느껴지더군요.


한결같이 자리를 지켜준 고마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미술도서관은 공간개선 공사 중인지라 2월 13일에 재개장한다더군요. 몰랐습니다. 설 연휴 기간에, 미술관 입장 무료 이벤트도 몰랐습니다. 덕분에 "백남준 효과 Paik Nam June Effect" 관람도 무료로 했습니다. 제 1, 2 전시장에서만 5000보 동선이 나올만큼, "백남준 효과"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미있었습니다! 



"백남준 효과"는 백남준이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기획했던 전시 위주로 1990년대 한국 미술의 상황을 살펴보는 전시입니. 안내 팸플릿의 문구를 좀 옮겨볼게요.

이 전시는 백남준의 작업들과 1990년대 활발히 활동하였던 한국 작가들의 작업을 함께 병치하며 새로운 시대의 다음 장을 준비하였던 이들의 복잡다단한 고민의 역사를 소환한다. 그럼으로써 근대적 희망과 세기말적 불안이 함께 타올랐던 1990년대 한국적인 상황을 30년이 지난 현재로 호출하여 동시대의 관객들과 함께 공유할 것이다.


흥미로운 많은 전시작 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게 뇌리에 남은 작품은 바로 <비밀이 해제된 가족사진>!

이 작품을 보자마자, '예전에도 사진 보정술이 이렇게 발달했나?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 남녀 커플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형이 모두 갸름하고 (앉은)키도 비슷비슷했거든요. "남녀이형성"이 아니라 "동형성"이라 할까요? 



그런데, 가족 사진 등장 인물들 위로 백남준 작가가 써놓은 흰글씨를  보니 제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바로 알았습니다. 백남준 일가친척 중 여성만 10명 모여 찍은 기념 사진입니다. 따라서 . 커플로 보였던 이들 5명 모두 남장여자입니다! 2023년에도, 이런 연출하기 어려운데 그 옛날 백남준의 어머니가 이 사진 연출을 진두지휘하셨다는군요. 그 대범함과 유쾌함이라니!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서, 입이 벌어지게 미소가 올라오더군요. 아! 비범한 자녀 위에 비범하신 어머니! 비범한 백남준, 그 위에 비범하신 어머니! 이 가족사진을 찍으신 후 백남준 가족들이 '남사스러워서' 한동안 외출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통쾌유쾌하지 않습니까?  오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나들이의 가장 큰 수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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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1-25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과천 미술관 가고싶은 글이에요. 얼마전에 백남준 책 읽었는데 저 전시도 보고싶네요. 당시로서는 저런 사진 연출은 진짜 파격이었을텐데말이죠.

얄라알라 2023-01-25 08:49   좋아요 1 | URL
네네, 파격이었겠죠?ㅎ^^ 옷을 빌려주었을(?) 친척 남성분들도 있었다면
가족이 통으로 다 멋진 거죠.
바람돌이님 읽으신 백남준 책이 뭔지 서재 놀러가서 뒤져봐야겠습니다!
저도 전시회 다녀오니 좀 더 알고 싶어졌어요 ~

레삭매냐 2023-01-26 1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천 미술관에는 십여년 전에
가보고 못가보고 있네요.

나름 집에서 가차운데 말이죠
ㅋㅋㅋ

하늘이 참 시원합니다.

얄라알라 2023-01-26 22:24   좋아요 0 | URL
니키 드 생팔의 작품이 야외에 있어서 기분이 좋더라고요.
야외 전시품들은 종종 바뀌나도 싶었어요^^ 아님 제 눈에 새롭게 들어왔거나.

추울수록 하늘은 예쁜 하늘색인 것 같아요^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바타2: 물의 길] 을 2번 보았습니다. N차 관객분들이 꼼꼼 리뷰해주신 그대로, [아바타2] IMAX3D와 ScreenX2D 관람은 각각 미묘하게 다른 경험입니다. IMAX_3D는 입체적 영상미 덕분에 스크린이 오직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양, 관객을 몰입시킵니다. 다만, 배치된 좌석에 따라 호불호가 달라질 수 있겠어요. 스크린 측면에서 192분 내내 눈을 부릅떴던 관객이라면 '어지럼증, 멀미증'을 호소하실 수 있어요. 게다가, 코로나 시대 3D 안경은 1회용 취급 당해 바로 플라스틱 쓰레기가 된다 합니다.

*

제 경우엔, 2D 관람이 더 만족스러웠어요. 3D 안경을 썼을 땐, 도드라진 하얀색 자막에 시선이 쏠려서 배경의 풍성한 디테일을 놓치기도 했거든요. 사나흘 간격을 두고, 똑같은 영화(그것도 무려 러닝타임 192분짜리!!)를 두 번 연거푸 본 이유도 그 때문이기도 합니다. 비록 줄거리는 밋밋했으나, [아바타 2]를 디테일까지지 이해하고 싶었거든요. 1차 관람 때는 못 보았던, 디테일을 제 나름 꼽아보았습니다.(이하 스포일러~주의하세요^^)

* *

다섯번째 아이 _ 몽키보이



"몽키보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스파이더'는 이야기를 불러내는 캐릭터입니다. [아바타2]에 등장하는 어떤 캐릭터보다도 인간 관객의 눈에 친숙한 외피를 입었으나, 영화 속에서는 이방인 중에서도 이방인 취급 당하거든요. 마치, 걸리버가 인간 외형을 가졌어도 소인국, 대인국, 공중도시, 야후의 나라에서 이질적 존재였듯. 스파이더는 인간 부모에게서 DNA를 받았으나,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과 어울리며 자랐습니다. 누르스름한 인간의 거죽을 파란색 위장무늬로 얼룩덜룩하게 칠하기도 하죠. 나비족처럼 보이고 싶어 합니다. 소속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스파이더는 온전한 개체로 인정받을지언정, 한 집단에 온전히 속하지는 못합니다.

* * *

일단, 나비족 네이티리는 대 놓고 스파이더를 못마땅해 합니다. [아바타] 1편을 본 관객이라면 네이티리의 심정(핀더리 행성 파괴자인 아버지를 둔 인간, 스파이더에 대한 불신과 미움)을 이해하더라도, 이방인 취급받는 스파이더가 불쌍할 것입니다. 특히, 생명을 건 전투에서 네이티리가 스파이더의 목을 협상의 도구 삼는 장면에서 불쌍함은 최고조에 달할 테고요. 저는 2024년 개봉 예정이라는 [아바타 3]에서 스파이더가 변심(?)하여 판도라 행성의 판도를 가를 캐릭터로 흑화하지는 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해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후반부에 주인공 제이크 셜리가 죽은 첫째 아들이 비워버린 가족의 자리에 스파이더를 초대한 점이 마음에 걸립니다. 큰 아들 자리에 스파이더가 들어오면, 제이크 셜리와 네이티리 부부의 자식은 여전히 '아들 둘에 딸 둘'이 됩니다. 하지만, 과연 DNA 자체가 다른 "Monkey Boy"가 가족으로서 이 집단에 어느 정도로 융화되고 소속될까요? 스파이더는 제 목에 칼날을 들이밀던 네이티리를 신뢰할 수 있을까요?

최근 읽은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가 겹쳐 생각납니다. 스파이더 역시 물리적으로는, 셜리네 다섯 번째 (유사 가족 관계의) 아이인 셈이거든요. 레싱의 소설에서 '다섯째 아이'는 '이상적 가족' 판타지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못다 한 이야기도 많지만, 3편 개봉을 기다리며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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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1-24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단 다르게 보이면 어느집단에서든 배척당하기 쉬운거 같아요 ㅡㅡ

이 영화가 요새 인기작인가 보네요. 전 아바타 1편을 안봐서 2편을 보긴 힘들거 같긴 하지만 ㅎㅎ

얄라알라 2023-01-24 1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새파랑님 프사 넘 이쁜 파랑이라 와 소리가.절로^^ 극중 셜리네 자식들은 인간과 혼종이라.손가락이 5개라고 놀림받거든요...정상성의 기준이 얼마나.자의적인지에.대해.찾아보면 리뷰가 많을것 같아요 ^^

coolcat329 2023-01-24 1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파이더의 이야기가 다음 편에는 좀 더 비중있게 다뤄질 것도 같아요. 마지막 네이티리의 행동에서 저도 놀랐는데 그 당시의 스파이더의 심리가 드러나지 않아 참 궁금하더라구요.

얄라알라 2023-01-24 23:19   좋아요 1 | URL
coolcat님께서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셨나봐요. 반가워요^ ^
저도 목에 칼이 들어와, 당장 죽을 수도 있는데 자신이 아끼는 친구 키리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스파이더의 모습과 대사에서 의아함이 들었어요. 중간중간 스파이더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셜리나 나비족의 야수성을 지닌 네이티리를 무서워하는 듯한 표정을 보일 때가 있는데, 목에 칼이 들어왔을 때는 그 표정이 없더라고요...

소령의 부성(?)도 두번째 관람에서는 확 들어왔던 재밌는 관전 포인트였어요.

coolcat님과 저의 예측이 맞는지 2024년 3편 개봉하면 알 수 있을텐데, 아직 한참 기다려야 해서 아쉽네요 ㅎ

감은빛 2023-01-24 2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바타 2d와 3d를 모두 보셨군요. 저는 처음에 2d로 보고나서 3d로 한번 더 보고싶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들을 꼬시지 못해 못 봤어요. 사실 안경을 끼는 입장에서 3d 안경을 그 위에 겹쳐 끼고 긴 시간 영화를 보는 일은 꽤나 거북하고 답답한 일일 것 같긴해요. 아바타는 워낙 긴 영화라 아마도 더 갑갑하겠죠? 이렇게 못본 것을 합리화해야 덜 아쉬울 것 같아요. ㅎㅎ

얄라알라 2023-01-24 23:23   좋아요 0 | URL
아이들 192분짜리 또 보러가자하면, 팝콘세트로는 어림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네요^^ ㅎ

감은빛님, 3D보러 가기 전에도 주변에 먼저 다녀오신 분들이 멀미난다 하셨는데, 제가 극장뒷줄에서 걸어 나오면서도 ‘어지럽다‘ ‘토할 거 같다‘고 호소하는 분들 목소리를 몇 명 들었어요. 저 역시 계단에서 잠시 휘청^^;;; 3D 시야를 얻은 대신 치뤄야할 작은 대가였나봐요.

3D도 너무나 환상적인데^^ 감은빛님 SF 좋아하시면 한 번 더 보시기를 ㅎㅎ
 


다른 책을 읽는 중간중간,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가 생각난다. 어느 소설을 읽고도 이렇게까지 오래 찜찜해 한 적 없는데...... 왜일까?.....그건 아마도 "다섯째 아이"의 엄마, 헤리엇을 싫어하는 마음이 영 떳떳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내가 헤리엇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혼자 아이 넷을 돌봐야 하는 와중에 다섯째로 태어난 아이가 '半사피엔스 + 半네안데르탈인' 돌연변이로  느껴진다면? 그 누구라도 "모두에게(다른 아이들, 남편, 시댁 어르신, 친정 어머니...등)" 만족스러운 선택을 내릴 수 없음은 뻔한데, 내가 헤리엇에게 너무 가혹했나 보다. 


 https://blog.aladin.co.kr/757693118/14262653


반면, 왜 나는 지난 리뷰에서 헤리엇의 아버지, 데이비드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이상적인 다산 가족의 환상이 산산이 깨졌는데도, 밑빠진 독 물 붓듯 양육비를 메꾸려 쉴 새 없이 일하는 데이비드를 나도 모르게 측은하게 보았나 보다. 늦었지만, 데이비드를 다른 관점에서 보려 한다. 

*

벤은 분명 데이비드의 자식이다. 하지만, 그는 다섯째 아이 벤에게 "어쨌건 그 앤 내 애가 확실히 아니야"(101)라며 선을 긋는다. 데이비드는 벤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고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본 적도 없다. 작가는 데이비드의 속마음을 한 문장으로 보여준다. "적어도 그가 생각하는 한 벤은 해리엇의 책임이었고 자신의 책임은 아이들, 진짜 아이들이었다. (122)"

*

벤을 짐승이나 외계인으로 비인간화했던 헤리엇.

벤에게 애정 커녕 증오감을 품고 망설임 없이 밀어낸 데이비드. 

*  *

눈물이나 후회, 한숨이 데이비드가 상상해온 행복한 삶에 들어올 여지가 없듯 "부족한" 아이는 데이비드가 품을 여지가 없나 보다. 재력이 대단한 데이비드의 친부와 사회적 지위가 번번한 데이비드의 친모 내외가 수를 써서 벤을 시설에 감금하기로 결정했을 때 데이비드는 도리어 농담하며 웃기까지 했다. 지구에 잠시 왔던 벤이 이제 화성으로 돌아가려나 보다고.  시설에 가면 그 아이가 머잖아 죽을 거란 걸 뻔히 알면서도.....그것이 바로, 남들 보기 부족함 없는 이상적 가정을 꿈꿨던 데이비드가 자신의 세계에 들이기에 부적합한 자들을 처리하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소설 읽은지 한 일주일 만에 벤의 아버지 데이비드에까지 생각이 미친 걸 보면, 나 역시 돌봄의 주책임자를 엄마로 한정짓는 낡은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게 아닐까? 부끄럽다. 반성한다.  여러모로, [다섯째 아이]는 여전히 내게 찜찜함을 남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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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1-13 05: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휴 전 이책 읽을 때 엄마에게 이입해서 너무 불쌍했어요 ㅠㅠㅠ <케빈에 대하여>랑 비슷한 시기에 읽어서 더 그랬던 듯도. 데이비드의 태도 지적해 주신 데 공감이 가네요. 순식간에 읽었던 것 같은데 기억에 오래 남는 소설 같습니다.

얄라알라 2023-01-13 15:02   좋아요 1 | URL
독서괭님도....여러 분이 그런 말씀 해주시네요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도 떨떠름(?) 합니다....그래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가도 싶고요^^

고양이라디오 2023-01-13 1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궁금해지는 책이네요. 순식간에 읽어진다니 한 번 읽어보고 싶군요ㅎ

얄라알라 2023-01-13 15:01   좋아요 1 | URL
저도 첫 번째 읽을 때는, 쉬지 못하고 읽었어요. 외출하려다가 [다섯째 아이] 때문에 외출포기^^;;
고양이라디오님께서도 혹시 읽으시면 한 자리에서^^

yamoo 2023-01-13 13: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내 애가 확실히 아닌데, 해리엇은 도대체 벤을 시설에서 왜 데려왔을까요?? 그냥 놔뒀다면 모든 가족이 해피했을 거 같은데...데려오고나서 무책임하게 부랑아 학생에게 맡겨버리고...우리나라 엄마였으면 대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듯해요. 끝까지 책임지고 키워서 올바른 아이로 성장했을거 같다는 생각을 햇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