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한창 기승이던 2021년 [전쟁과 농업]을 읽었습니다. 읽고 저자의 생각에 굉장히 공감한지라, 오프라인 책모임을 꾸려 보려도 했었죠(제목이 좀 딱딱했는지, 제 광고에 딱 1분 호응하셨더랬죠). 그 때 제가 적었던 리뷰는 다음과 같습니다. 



국제 무대에서 언어의 비빔밥 먹으며 살 인생도 아니고, 요즘 한국 출판계 외서 번역출간 주기가 짧아졌으니 외국어 몰라도 사는 데 지장 없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전쟁과 농업: 먹거리와 농업을 통해 본 현대 문명의 그림자]를 읽다가, 처음으로 '일본어'를 몰라서 안타까웠습니다. 저자인 후지하라 다쓰시 교수에게 팬레터를 보내고 싶었거든요.

*

저는 '음식과 먹기' 관련 신간은 매의 눈으로 업데이트 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정작 가까운 나라 일본 학자의 목소리를 귀기울여 본 적 없다는 자기 반성을 [전쟁과 농업 戰爭と農業] 읽으며 했습니다. 교토대학 후지하라 다쓰시 교수는 식량체계와 식생활 연구를 통해 세계의 불공정한 시스템 파악하려는 학자입니다. 동시에, 인간을 길들이는 한 줌의 자본가와 시스템으로 일그러진 모래시계 자체를 뒤엎고 싶어하는 활동가이기도 합니다. 석사 시절부터 한결같이 민생기술(특히 농업기술)과 군사 기술이 얽혀 만든 블랙홀로 인간성이 분쇄되어 들어가는 과정에 관심을 두고 이 분야에서 계속 연구를 심화하고 있습니다. 다른 학자들이 상아탑 밖으로 나오지 않아 아쉽다던 다쓰시 교수는 직접 대학강단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가 일본의 풀뿌리 시민정치 활동가, 자연육아 모임, 원전난민 등 일반인 대상으로 진행한 대중강의를 엮어낸 책이 바로 [전쟁과 농업]입니다.


[전쟁과 농업] 전반부는 각각 "농업 기술," "폭력의 기술," "기아"로 20세기를 돌아보는 역사적 접근을 취합니다. 톱니바퀴처럼 각 장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데, "dual use 이중사용"이 그 연결 키워드입니다. 20세기 인구 증가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던 "농기계(특히 트랙터), 화학비료, 농약, 품종개량"이 군사기술 및 산업자본주의 세력과 어떻게 얽혀 있으며, 인간의 생 감각을 마비시켜왔는지를 시적인 우아함과 학자적 냉철함으로 분석합니다.


1. 19세기말, 트렉터가 등장함으로써 자연산 비료인 분뇨를 내지못하니 화학비료 개발을 촉진.

2. 화학비료는 마치 실제 음식 섭취가 아닌 "영양제"라는 지름길을 통해 인체에 영양 공급하듯, 즉효성 추구하는 방식으로 땅에 양분 줌.

3. 농약은 세계대전 당시 화학무기와 뿌리를 같이함. 특히 미국은 1925제네바 의정서에서 금지시킨 독가스를 자국 목화밭에 살포함. 일본은 금지된 독가스를 1930년 대만 게릴라전 진압에서 사용하였음.

4 품종개량과 친환경 식물공장의 알려지지 않았던 대가 (친환경 식물공장 운영 위해서 필요한 에너지를 원자력발전소 통해 해결)


이 모든 기술의 기저에는 '즉효성' 극대화라는 강박이 작용합니다만, 저자는 '슬로우, 슬로우' 지효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삶의 방식, 식량생산 방식, 정치구조까지 전환해보자고 주장합니다. 추상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해법이 모호해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먹는 음식, 음식과 맺는 관계, 먹기에 부여하는 생각 자체를 유연하게 바꿔간다면 그 파동으로 '현재 불평등한 식량체계'라는 모래시계를 깨버릴 수 있을지 모릅니다. 실제, 혀로 농지의 흙을 핥아서 염분을 가늠했다는 농부를 할아버지로 둔 저자는 먹는 행위에 우주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현대 먹거리시스템에서야 편의점 방문이나 온라인 클릭 한 번으로 식품 구매에서 상상력이 종결되버린다고 저자는 안타까워합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먹기의 본래적 의미는 "인간 주도의 행위가 아니라, 우주를 몸에 관통시키는 장대한 행위 (163)"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후지하라 다쓰시가 제시한, 현시스템을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실천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기업이 유발한 폐해에 항의하기

2. 유기농법을 상업화하여 변질시키지 말고, 시스템의 가치적 생태적 핵심으로 복원하기

3. 종자 지키기.

4. 발효식품 활성화

5. 먹거리의 대량 고속 생산, 고속 폐기를 부추기는 시스템에 대항하기 위해서 유통기한 늘이기.

자포자기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입니다.




논밭에 뿌리는 콩과식물은 '녹비'라고도 불립니다.

번개도 같은 힘을 지닙니다. 번개는 방전에 의해 공기 중의 질소를 암모니아로 바꾸어 비와 함꼐 토양에 뿌립니다...옛날 사람들은 번개가 치면 벼가 잘 자란다는 것을 감각으로 알고 있었던 게지요.

[전쟁과 농업] 35쪽


민간기술을 군사 기술로 전용하는 것을 '스핀온spin-on'이라고 하는데요...트랙터는 말하자면 '탱크의 어머니'인 것입니다.

*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기가 전부 폐기된다 하더라도 언제든 민간 기술이 곧바로 전쟁에 동원될 수 있는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전쟁과 폭력이 발생하기 쉬운 이 시스템에 옴싹달싹 못하게 결박되어 있습니다. 이 정도로 무기, 그리고 무기로 전용될 수 있는 민간 기술로 가득한 지구에서 전쟁이 없어진다는 것은, 재미난 장난감이 널려 있는 공원에서 아이들이 장난감 없이도 놀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무명한 일이겠지요.

62쪽* 80쪽


전후(WW2)에도 굶주림은 무기로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팔레스탄인에 입식한 이스라엘은 국제법에 위배되는 군사 행동과 점령을 70년 가까이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의 이스라엘에 의한 가자 지구 봉쇄와 포탄 공격은 굶주림을 무기로 삼는 잔혹한 사례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108쪽


일본군은 병참을 등한시했습니다....아시아 대륙과 도서부, 태평양의 섬들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식량은 현지에서 빼앗는' 현지 조달을 기본 방침으로 삼았습니다.

116


현재 먹거리체계의 정의는 인간이 식품을 구입하는 데서 끝납니다. 식품 기업으로서는 식품이 입에 들어가지 않아도 구입만 해주면 그만입니다...그러나 식품이 불러일으키는 피해는 입속에 들어간 뒤에 나타납니다. 이 time lag가 식품화가 품은 문제의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155



식사와 배설은 사실 동일한 행위의 경과를 드러내는 말일 뿐입니다.

...

교육 현장에서는 식사와 배설을 이러한 관계성 속에서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배설물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158, 159


농민의 지식은 추상이 아니라 구체입니다...벼농사를 생업 삼았던 할아버지께서는 흙을 핥아 염분을 가늠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각은 기계나 화학의 발달과 함께 점점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흙을 핥는 감각에서 멀어져도 농업을 경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좋든 실든 그것이 20세기 농업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173


인간은 생물이 교류하는 세계를 모험하는 주체라기보다는 생물의 사체가 통과하고 또 많은 미생물이 서식하고 있는 하나의 취약한 관이라는 것. 요컨대, 생명이 변화하는 과정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데에서 존재의 기반을 찾아야 한다는 것. 그 기반을 전제로 시스템을 꾸리는 것, 결과를 재촉하는 세상에서 사는 것만이 인간의 유일한 양식이 아닙니다

...

'음식을 먹는 것'이 위장에서 끝나지 않는 영원성과 순환성을 가진 현상인 이상, 인간은 타인이나 다른 생물과의 즉흥적인 상호작용 속에서밖에 살아갈 수 없습니다. 지효성이 즉효성을 앞서는 시스템이야말로 살기 좋은 시스템이 아닐까요?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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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원 2023-07-21 16: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읽기 모임에서 읽어봤는데, 농업의 자본주의 발전과 전쟁을 일본사를 통해 잘 분석했다는 점에서 저도 추천합니다.

페크pek0501 2023-07-21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많은 공부가 될, 멋진 책이네요. 저도 이런 책을 좀 읽어야 한다는... 장바구니에 담겠습니다.^^
 

"문해력"증진,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명저 100선, 수능 필독서 등등. 요즘 꼬마님들 책 읽으려면 따라붙는 목적이 참 많죠? 조건 따지지 않고 그저 책 읽는 재미에 폭 빠져드는 경험이 요즘 꼬마님들에게 필요한 데 말입니다. '어떤 책이 있을까?' 고민해 봤어요. 아! 삐삐! 빨강머리 삐삐가 떠올랐습니다. 말 한 마리쯤은 번쩍 들어 올리는 천하장사에, 엉뚱하기로는 당할 자 없는 9살 꼬마이지요. '삐삐' 드라마의 테마곡을 흥얼거리면서, 수십 년 만에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1945)을 다시 찾았습니다. 책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른인 저도 푹 빠져드는데, 꼬마 독자들은 얼마나 열광할까? 80살 다 된 이 스웨덴 동화는 왜 21세기에도 세계적으로 사랑받을까?


?


그 대답은 바로 캐릭터의 힘, 말괄량이 삐삐의 매력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삐삐에게는 천사 엄마와 식인종의 왕인 아빠가 계시다지만, 어른들은 알죠. 돌봐줄 어른이 없는 9살이라는걸. 즉, 차가운 언어로 규정하자면 삐삐는 '고아'입니다. 하지만 '고아'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진부한 스테레오 타입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 캐릭터이죠. 스스로 자장가를 불러 자신을 잠 재우고, 발가락 꿈지럭거릴 여유 공간을 확보하려 발 사이즈 2배나 되는 큼직한 신발을 신습니다. 똑바로 걸으면 덜 신나니까 뒤로 걸어보고, 말도 타보고, 지붕 위에도 올라가는 등 반복적 일상성을 비웃기라도 하듯 삐삐의 하루하루는 알록달록 다채롭게 변주합니다. 삐삐는 당당하고, 독립적이고 진취적이며 쾌활하죠. 빳빳하게 다린 면 원피스가 더러워질까 봐 얌전하게 놀아야 하는 옆집 소녀 아니카네 남매와는 딴판이지요.

*

삐삐 캐릭터는 1940년대 스웨덴 사회, 그리고 2020년대 한국 사회에도 만연한 '이상적인 가정과 어린이'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흔듭니다. 삐삐는 정상가족 틀거리에 맞진 않지만, 1인 가족 체계를 멋지게 구축했죠. 또 남의 도움에 의존하지 않으며, 주체적 판단이 가능하고 실행력도 뛰어나며, 시스템의의 날개 아래 있지 않아도 스스로 보호할 수 있으며, 엄마아빠가 보고 싶다고 밤마다 몰래 울지 않습니다. 이처럼 삐삐는 그 빨강머리의 상징성만큼이나 전복적인 캐릭터이지요.

어쩌면 이런 설정은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랜이 사회에 전하려 했던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전하는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10대 시절, 상사와의 불륜으로 아들을 낳은 후 싱글맘으로서 잠시 살면서, 사회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겪었죠. 그러나 사회적 시선에 주눅들기보다는 뒤엎기를 꿈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삐삐를 1940년대, 이상적인 가정과과 이상적인 어린이 유형에 들어맞지 않는 비정형적 인물로 창조한 것도 그 저항의 한 방식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1924년(17세)의 Astrid Lindgren


저는[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을 읽으면서, 제가 얼마나 타인의 시선과 평가, 나아가 관습적 틀에 매여 굳어졌는지 깨닫고 슬펐습니다. 제가 자꾸만 삐삐의 구김살 없이 밝은 모습을 부모 잃은 슬픔을 애써 위장하는 것으로 분석하려 든다든지, 삐삐를 '고아,' '돌봄이 필요한,' 혹은 '가정 교육이 결여된' 아이로 평가하더라고요. 삐삐의 예의범절, 특히 테이블 매너도 매의 눈으로 날카롭게 판단했고요.(미안해 삐삐야....내 안의 예의 바른 어른이 고집스러워 부끄럽구나!) 예를 들어 삐삐가 친구 아니카와 토미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손님용 다과로 나온 케이크를 혼자 몽땅 다 먹어 버리거나 응접실 바닥에 설탕을 뿌린 후 맨발로 돌아다니기는 장면에서, 저는 '흐아! 저 바닥 청소를 어찌 다하누! 테이블 매너가 빵점이야.'하여 걱정을 하더라고요. 이제 저는 삐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굳어버린 걸까요?하긴, 저만 그런 것도 아닌 듯 합니다.

2023년 대한민국의 꼬마들, 여름 방학인데도 '게임 - 학원 - 숙제'의 삼각편대를 벗어나지 못한 채 밍밍하게 사는지, 표정이 굳어 있는지, 만약 삐삐가 1945년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와서 대한민국의 친구들을 만난다면, 적응하기 어려울 것 같네요. 삐삐라면 어떻게 '게임 - 학원 - 숙제'란 반복적 일상에 활기와 변화를 불어넣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삐삐라면? 우리 자신이 삐삐 되기에는 너무 굳어 버린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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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7-20 10: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게 스웨덴 도라마였던가요?

제 어릴 적, 최애 도라마였거든요.

힘이 장사인 빨간머리 삐삐의 활
약상에 넋이 나갔더라는.

그리고 보니 삐삐야말로 자유로
운 영혼의 표상이 아니었나 싶습
니다.

얄라알라 2023-07-21 12:42   좋아요 1 | URL
ㅎㅎ 도라마!! 역시 매냐님의 언어유희!!!
네네,
제가 원래 작품이 맘에 들면 유투브 열심히 뒤져서, 작가 인터뷰며 관련 영상 싹 찾아보는 편인데, 스웨덴 말을 하나도 모르는 관계로 ㅎㅎㅎ패쓰했어요.

독서괭 2023-07-20 1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삐삐롱스타킹을 읽지 못했어요^^;; 아이들과 함께 읽어봐야겠네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에게 그런 아픔이 있었군요.
그나저나, 저도 읽으면 ‘어른‘으로서 그런 생각 할 것 같은데 ㅋㅋㅋ 아이들은 다를 것 같아서 궁금합니다.

얄라알라 2023-07-21 12:43   좋아요 1 | URL
ㅋㅋㅋ맞아요. 독서괭님

저 바닥 청소 누가 다하나, 어찌 다하나... 옷 망가뜨려 놓으면 또 사야하는디.....ㅋㅋㅋ

자꾸 이런 생각이 올라와서, 민망스러웠네요.

아이들은 따라 해보고 싶겠죠?^^

잉크냄새 2023-07-20 1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 안의 고지식한 어른의 힘이 너무 세군요.

얄라알라 2023-07-21 12:44   좋아요 0 | URL
ㅎㅎ저만 그런 게 아니어서,
살짝 위안이 됩니다.

삐삐가 저희 집에 놀러온다고 하면.....‘아! 우리 야외에서 만날래?‘ 그럴 것 같습니다 ㅋ

페크pek0501 2023-07-21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삐삐는 티브이로 본 적 있어 반갑네요. 80년이나 되었나요?
작가는 떠나도 작품은 그렇게 남는 거군요.
 



오해 하나! 책표지 소녀가 "샬롯"이라 생각했어요. 오해 둘! 주인공인 "인간" 샬롯이 돼지 혹은 거미, 즉 인간 아닌 존재들과 우정을 나누는 동화인 줄 알았습니다. 사실, [샬롯의 거미줄]을 처음 다 읽고도 크게 달리 생각하진 않았어요. 물론, "샬롯"은 소녀가 아니라 거미였지만, 전 이 작품의 키워드를 우정으로 봤거든요. 먼저 읽은 분들도, 책 광고 문구에서도 한결같이 "우정"을 강조했으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을 두 번, 세 번, 그리고 네 번쯤 읽으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샬롯의 거미줄]은, 어느 하나의 키워드로 규정할 수없이 인생의 희로애락을 응축한 품위 넘치는 작품이더라고요. 40 즈음에 농장 생활을 시작했다는 작가 엘윈 브룩스 화이트(Elwyn Brooks White, 1899-1985)가 얼마나 여유롭게 사색하고, 농장의 모든 생명체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관찰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지요.




많은 독자들이 [샬롯의 거미줄]을 '우정"이라는 깔때기 안에 담아두는 게 아쉬워서 제 감상을 끄적여 봅니다. 물론 샬롯과 윌버는 서로 지극히 아끼고, 지지하고 서로에게 고마워합니다. 우정의 속성을 다 갖춘 관계이지요.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둘은 '부모-자녀' 관계의 은유로도 읽힙니다. 제가 이렇게 해석하는 건, 단지 샬롯이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암컷 거미이고 윌버가 어린 수퇘지여서가 아닙니다. 둘 사이의 관계성은 돌봄을 제공하는 모성과 그 돌봄 속에서 성숙함으로써 다시 사랑의 호혜성을 보여주는 자녀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샬롯은 베이컨이 될 숙명을 타고난 식용돼지가 느끼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주고자, 어려운 약속을 합니다. '살려 주겠다'라는, 신도 지키기 어려운 약속. 그리고, 비롯 작은 몸집의 거미이지만 그 누구도 할 수 없었을 기적, 바로 윌버를 살게 해주는 약속을 지켜냅니다. 그뿐만 아니라, 윌버가 거친 세계에서 현명하게 대처하며 생존하도록 지혜와 용기도 불어 넣어 주지요.

반면, 철없는 어린 돼지 윌버는 그런 샬롯에게 고마워는 하지만, 받는 존재로서의 위치에 익숙해진 모습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샬롯이 알을 낳아야 하는데도 샬롯에게 품평회에 같이 가면 재미있을 거라며 동행을 기대합니다. (사람으로 치면 출산 임박한 산모에게, 나 혼자 놀이동산 가면 무서우니까 같이 가서 거기서 출산하면 재미있을 거라는......). 죽어가는 샬롯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자기의 운명에 대한 불안감만 토로하기도 하고요. 물론, 윌버는 삶의 경험이 적은 어린돼지이기 때문에 타인을 섬세하게 배려하는 연습이 되어 있진 않습니다.

감동적인 점은, 샬롯에게 받기만 했던 윌버가 위기의 순간, 즉 샬롯이 514마리 새끼들만 남겨 놓고 죽어가는 그때, 냉철한 판단 주체로서 우뚝 서서 샬롯을 돕는다는 점입니다. 성장의 단계를 몇 단계 뛰어넘어 성숙해진 윌버의 모습에서, 사랑의 힘을 봅니다. 사랑은 베푸는 자 자신을 성숙시키고, 또 사랑받는 이를 다음 단계로 끌어올립니다. 돌고 도는 사랑의 힘, 사랑의 호혜성입니다.

아직 [샬롯의 거미줄]을 읽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꼭 시를 음미하듯 천천히 여러 번 읽기를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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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의 저출산 현상을 걱정하는 일반 시민의 대화를 가까이에서 들을 기회가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오가던 이야기의 80%는 잡아두려 애써도 귀 밖으로 새어 나갔다. "저출산이 진짜 심각해. 빨리 해결해야 나라가 산다" 식 주장은, 질리도록 들어온 데다가 공허했기 때문이다. 마치, 언젠가 여의도 국회의사당 쪽에서 보았던 "아이 울음 소리 들리는 대한민국 만들기" 홍보 포스터처럼 말이다.

*

"우리 옆집은 애가 안 생긴대요."

"아들 내외가 애를 안 낳겠다니, 우리 집부터 저출산이야."

"학원비가 월 몇백씩 나가는 데 어떻게 애를 낳나요?"

* *

슬슬 뻔한 대화가 지겨워질 즈음, 누군가가 '금쪽이'를 화두에 올렸다. 늘어져 있던 귀가 갑자기 쫑긋해졌다. 예능 프로그램 전혀 안 보는 나조차도 알만큼 인기 많은 '금쪽이' 왜 갑자기 저출산 연관어로 튀어나온 거지? 궁금했다. '금쪽이'를 비판하던 분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 육아 예능 프로그램에서 '금쪽이,' 소위 자녀계의 문제아이를 출연시켜서 "전투 육아" 9단용 고난이도 육아의 고단함을 과장한다.

  • 젊은 세대는 ('금쪽이'같은 자녀의) 양육에 대한 공포감을 느낀다.

  • 자녀 낳고 기르기를 차라리 포기한다.

이런 주장이었다. 아울러 그는 해법도 내놓았다.

  • 양육 경험 스펙트럼의 부정적 극단에 있는 '금쪽이들'대신, '키우기 쉽고 사랑스러운 자녀들'을 출연을 늘려야 한다. 육아의 행복과 보람을 강조하는 콘텐츠에 젊은 세대를 많이 노출시키자.

  • 그래야 젊은세대가 '애 키워보고 싶은' 욕구를 느끼고 육아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 궁극적으로는 자녀 출산으로 이어진다.


육아의 행복, 과장 보태자면 육아를 통해 '자아실현'하는 긍정 부모상을 보여줌으로써, 출산과 육아를 유도할 수 있다는 주장이 조금 억지스럽게도 들렸지만, 흥미로웠다.

그런들, 이런들......'금쪽이들'을 출연시키든, '금쪽이들'의 노출을 자제하든,

큰 틀에서의 구조적 흐름이 안 바뀌고 있는데, 생존 문제가 여전히 치열한데 저출산 경향성이 어찌 급반전 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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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7-06 12: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의 혁명에 가까운 대대적인
사회 개혁을 수반하지않는 이상,
저출산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흐
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고 생각
합니다.

20년 전에, 저출산 문제가 앞으
로 심각해질 거라는 어느 산부
인과 의사님의 진단을 듣고 무
신 소릴~ 이랬던 적이 있었는데
현실이 되어 버렸네요.

교육개혁, 부동산개혁, 취업 등
이 연계되어 있다는 걸 위정자
들이 모르지 않을 텐데, 허구헌
날 소모성 저출산 대책만 양산해
내는 모습이 고저 안타깝습니다.

2023-07-06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망고 2023-07-06 14: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육아의 행복, 사랑스러운 아이 키우기의 육아예능은 이미 있지 않나요? 근데 그런 프로그램은 또 부모들 박탈감 느끼게 한다고 내가 저정도 수준으로 내아이에게 못 해주는데 애를 어떻게 낳으란 말이냐고 등등의 소리를 많이 하던데요ㅋㅋㅋ누구는 또 나혼자산다같은 프로그램이 저출산 원인이라고 하질않나...참 재밌어요

얄라알라 2023-07-06 17:26   좋아요 2 | URL
오, 망고님, 감사드립니다!!

올려주신 이야기 다 재미있어요.^^ (저는 몰랐던...슈퍼맨이 간다?인가 요 프로그램만 들어본..)

‘나혼자 산다‘ 프로그램에 그런 비판도 있군요.

갑자기 코에 걸면, 귀에 걸면이 생각났어요^^

보는 관점의 문제일수도 있겠네요.

금쪽이 유형이 많아진건지,(마치 중국 소황제처럼)
아님 언론에서 과장된 건지 모르겠지만
금쪽이가 육아에 대한 부모의 책임과 개념을 바꿔놓는 것도 같아요.
 

우물물 마셔보셨나요?

땅 속에서 끌어올린 물은 정수기 거쳐 나온 냉수보다 차갑나요? 


며칠 전, [토지] 읽기 회원분들의 대화를 우연히 곁들은 후 계속 궁금합니다. 저는 모임원이 아닌 데다가 [토지]를 읽지 않아서 대화에서 언급된 인명과 지명 대부분을 놓쳤지만, "우물물" 만큼은 귀에 담아왔습니다. 그분들은 우물물 목 넘김의 차가운 감각을 몸으로 기억하시는지 '아'하니 '어'하며 감각을 공유하시더군요. '차가운 감각' 의 공유면에서 잠시 소외되었던 제게 '우물물의 시원함'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습니다.

*

바로 "감각의 소중함"말입니다. 사실 저는 우물물이 정수기 냉수보다 더 차가운지 판별하는 데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보다는 인간 존재와 기억함에 감각이 얽힘이 궁금해졌습니다. 어쩌면 AI가 우리 인간을 대신해 노래해주고, 소설을 써 주고, 교란된 감각을 유도하는 21세기에 우리가 잊어가는지도 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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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물'에 생각이 꽂힌 이유가 있습니다.



최근 주말 밤, 최신공법으로 지어진 통유리 빌딩 안에서 소위 "멍 때리기" 하던 중이었습니다. 빌딩 내벽에 수직으로 설치된 거대한 스크린 속에서 새들이 날고, 미풍에 나뭇잎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부꼈습니다. 반복 재생되는 평면의 영상에서 저는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제 자신이, 그 조작된 자연의 이미지에서 평온함을 느낀다는 걸 문득 깨닫자 갑자기 불쾌해졌습니다. 사실 전기적 시각 자극을 받은 제 뇌가 속았을 뿐인데 저는 마치 실제 숲 속에 와 있는 듯한 평온감을 잠시나마 느꼈기 때문이죠.



다행히 저는 진짜 숲과 환영의 숲 이미지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실제 숲에서 다양한 감각을 느껴왔습니다. 하지만, 그럴 기회가 부족할 미래의 아이들은 어떨까? 마치, 우물물 목넘김의 시원함을 모른채 정수기 냉수가 전부인지 아는 저처럼......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두려워졌습니다. 이 존재론적 두려움을 언어로 명료하게 표현하기가 참 어렵네요.



대신 오늘 아침 산책하다 찍은 숲 사진을 올려봅니다. 1시간 사이에 일주일 필요량의 햇볕을 다 쬐었다고 느낄만큼, 숲 속의 햇살은 순도 높고 강렬했습니다. 햇볕이 세로토닌이 퐁퐁 솟아나게 한 탓일까요? 오후 내내, 졸음이 졸졸 따라다닙니다.

오늘 아침 온 몸에 쬐인 햇살의 강렬한 따뜻함은, [토지] 책 읽기 회원분들이 기억하시는 '우물물의 차가움' 만큼이나 제겐 경이로운 감각으로 오래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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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6-25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벤치 디자인이 넘 예뻐요
요즘 공원시설물이 멋진게 넘 많아요~♡

얄라알라 2023-06-26 10:14   좋아요 0 | URL
벤치 페인트칠한 부분이 저도 맘에 들었는데
산림욕장 내부에 있는 목공소 작품이 아닐까 혼자 생각했어요^^

장마라서 당분간 공원도 못가겠어요
비오지만 뽀송하게 월요일 시작하세요
그레이스님^^

고양이라디오 2023-06-26 15: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숲이쁘네요. 저도 일광욕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