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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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이 존재하는 미국 남부에서 백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경멸과 멸시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늪지에서 숨은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로 법을 피해 숨어 사는 도망자 거나 범죄자 혹은 각종 중독자들이 대부분이라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일컬어 늪지 쓰레기라 칭하고 상종하길 꺼린다.

그런 늪지에서 마을 유지의 아들이자 자신 역시 여자들에게 인기 있는 체이스 앤드루스가 망루에서 떨어져 죽은 사건이 발생하면서 늪지에 사는 한 여자가 관심 대상으로 떠오른다.

처음엔 단순히 실족사나 사고사로 생각했던 마을 보안관은 그가 올라갔던 망루의 울타리 문이 열려있었고 망루로 들어가는 문에서조차 어떤 지문도 안 나왔을 뿐 아니라 죽은 이의 발자국을 비롯해 어떤 흔적도 습지에 남아있지 않은 점을 들어 누군가에 의한 살인일 수도 있다 생각하면서 사건은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에 의해 단박에 용의자로 떠오른 인물은 일명 마시 걸이라 불리는 늪에서 홀로 사는 여자 카야

그녀는 어느 날 아침 가방을 들고 떠난 엄마를 시작으로 몇 년 새 어린 그녀만 남겨두고 모두가 떠난 후 빈 집에서 배고픔과 외로움을 견뎌내고 살아남았지만 그런 그녀를 마을 사람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에게 카야는 굶주리고 어느 누구 하나 도와줄 사람 없는 가여운 어린 소녀가 아니라 그냥 보고 싶지 않고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습지에 사는 쓰레기일 뿐... 그런 카야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낸 사람은 백인들이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던 흑인 점핑의 가족뿐이었다.

그들이 카야를 꺼리고 멀리하는 만큼 카야 역시 마을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떤 해를 끼치거나 놀리는 걸 피해 사람들과 어떤 교류도 원치않았으나 그런 카야의 방어막을 뚫고 그녀에게 다가온 사람은 한때 오빠의 친구였던 테이트였다.

글도 모르는 그녀에게 다가온 유일한 소년 테이트에게 글을 배우고 점점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습지에 대해 배우는 즐거움도 잠시... 사랑한다 고백하던 테이트 역시 자신의 길을 걷기 위해 그녀 곁을 떠나고 또다시 홀로 남게 된 카야는 다시는 자신의 마음 한편을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겠다 결심한다.

테이트가 사라진 이후 유일하게 그녀와 가까이 지냈던 체이스의 죽음은 당연하게도 마시 걸이라 칭하던 카야에게 의혹이 쏠리게 하고 연이어 그녀에게 불리한 증언들이 나오면서 그녀는 법정에 살인죄로 서게 되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지 못하면 사형에 처할 일측 즉발의 위기에 처하게 되지만 카야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변호조차 거부한다.

카야가 진짜 범인인 걸까? 아니면 사람들의 선입견이 그녀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걸까?

사건의 단서를 쫓는 것과 더불어 그녀가 늪에서 가족 모두가 떠난 후 홀로 살아남아 마침내 자신이 쓴 책으로 습지생태전문가로 인정받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한 소녀의 성장기이자 자연 문학이기도 하고 범죄를 추적하는 미스터리 소설이기도 하다.

우리는 잘 몰랐던 습지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살아가는 생명체의 생생한 생동감 그리고 누구도 볼 수 있지만 그 속에서 생활하면서도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 비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몸속 깊이 느끼는 카야가 점점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주 흥미로웠다.

하지만 자신이 살아가는 곳인 습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는 똑똑한 카야지만 너무 어렸을 때부터 혼자여서 당연히 알아야 하는 사람들 간의 기본적인 정서와 교류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게 그녀에겐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당연하게도 그녀의 이런 어리숙하고 순진한 면을 노리며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혼자인 시간이 너무 길어 외로움에 지쳐 덫일 줄 알면서도 스스로를 속이고 그 덫으로 걸어들어가는 카야의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앞으로 벌어질 일이 예상되면서 언제 사건이 터질지 몰라 긴장감을 놓을수가 없다.

이렇게 카야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살아남는 방법을 깨우치고 첫사랑의 안타까움을 배우며 자라는 과정이 잔잔하면서도 역동적으로 그려지는 것과 동시에 현재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시점이 교차되게 편집해서 어느 한순간도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하고 있다.

또한 재판이 벌어지면서 드러나는 증거와 상관없이 그녀의 겉모습과 사는 환경만으로 그녀의 유죄를 자신하며 단죄하려는 사람들을 상대로 치열하게 법정 싸움을 하는 장면도 상당히 흥미롭게 전개되고 있어 이 책을 어떤 장르에 넣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스토리 자체도 굉장히 흥미로웠고 카야라는 캐릭터 역시 상당히 매력적이며 생동감 있게 그리고 있어 더욱 이 책이 빛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왜 이 책이 입소문을 타고 계속 계속 순위가 뛰어올랐는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테이트를 사랑하면서도 다시 버려질 것이 두려워 그를 외면하는 마음도... 아닌 줄 알면서도 혹시 하는 마음으로 달콤한 거짓말에 속아넘어가 주는 그 마음속 내면의 갈등도 너무나 세심하게 표현해내고 있어 러브스토리로도 매력적이지만 사건 당일의 증언들을 바탕으로 한 그날 밤 사건을 재구성하는 장면 역시 마치 사건 현장을 보는 듯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 미스터리 소설로의 재미도 만족시켜주고 있다.

오랫만에 만난 아주 흥미로우면서도 아름다운 책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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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몬태나 특급열차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처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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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현대문학에 큰 발자취를 남긴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작품집 도쿄 몬태나 특급 열차는 작가의 말년의 이야기가 많이 실려있는데 이 작품을 쓴 후 4년 뒤 스스로 생을 마감한 그는 그래서인지 이 작품 안에서도 죽음이나 묘지에 대한 글이나 나이 듦의 허무함 같은 글들이 종종 보인다.

작가가 제목에서도 썼듯이 몬태나와 일본에서 살았을 때의 이야기가 제법 많은데 특히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서구의 문화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는 인식하에 동양의 일본에 대한 관심이 많았으며 리처드 브라우티건 역시 그래서 동경하던 일본으로 직접 건너가는 적극성을 보였다.

당시의 일본은 지금과 달리 남성 중심의 사회였고 서구에서 건너간 작가에게 비치는 그런 모습은 신기하면서도 은근한 부러움이 깔려있는 듯한데 일본의 눈에서 특히 그런 마음이 드러난다.

식사 준비를 한 아내는 남편과 손님의 자리에 같이 합석하지 못한 채 멀리 떨어져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불만은커녕 행복한 눈을 하고 있다는... 서구에서는 그런 일이 있다면 남자의 시중을 드는 대신 강력한 한방을 날릴 거라고 하는 대목에서 여자의 순종적인 태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일본 문화에 대한 은근한 부러움이 담겨있다고 느껴졌다.

또 판타지 소유권에서는 좀 더 나아가 스스로 레스토랑을 소유해 다양하고 상냥한 일본의 웨이트리스를 매일 볼 수 있다면 하는 자신만의 판타지를 풀어놨는데 이런 걸 보면 그의 눈에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상당히 매력적으로 비친듯하다.

이에 비해 서구의 모습은 조금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이 많은데 특히 390장의 크리스마스 사진 찍기에서는 그런 마음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모두가 즐기고 환호했던 크리스마스트리는 크리스마스가 지나가면서 무용지물처럼 여기고 여기저기 집 앞을 비롯해 아무 데나 버리는 걸로 모자라 길거리에까지 버려둔 채 나 몰라라 하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버려진 크리스마스트리의 사진을 찍어 사람들의 경박함을 고발하고 있다.

죄를 짓고 쫓기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엄마가 택한 방법이 경찰이 잡아갈 수 없도록 아들을 깔고 앉는 것이란 글에서는 그의 시니컬한 유머감각이 느껴지고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지나면서 우연히 한 남자가 자살하려는 걸 목격하고서도 차를 세워 그를 저지하지 않고 단지 그가 자살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 그의 죽음을 막기 위한 어떤 수고도 하지 않으면서 그 청년이 폭풍 속에서 길을 잃은 인간성의 외로운 수로 표지 같다는 글을 보면서는 삶에 대한 짙은 허무가 느껴진다. 어쩌면 그 청년의 모습에서 자신을 오버로크 시킨 건 아닐지...

세계 평화를 위해 만난 지미 카터와 이집트 대통령 두 사람을 태운 열차를 보면서 그것이 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 모두는 역사에서 각자가 맡고 있는 역할이 있다고 하는 대목에서는 삶을 살아가는 그의 철학을 조금은 엿볼 수 있다.

시니컬하고 조금은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의 세상은 온갖 부조리함과 모순으로 가득한듯하다.

그래서일까 그의 글들은 쉽게 읽히는 게 있는가 하면 왜 이런 걸 썼을지 짐작하기 어려운 글도 있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글이 있는가 하면 무슨 말인지 난해한 글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이 많은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칠 정도로 그의 글에는 매력이 있고 힘이 있다.

미사여구 없는 군더더기 없는 문장들을 보면서 그가 왜 포스트모더니즘의 거장으로 대우받는지 이해가 갔지만 역시 쉬운 글에 익숙한 나에게는 함축되고 생략된 그의 글이 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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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느 메디치의 딸
알렉상드르 뒤마 지음, 박미경 옮김 / 레인보우퍼블릭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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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크리스토 백작과 삼총사로 유명한 알렉상드르 뒤마의 또 다른 작품인 카트린느 메디치의 딸은 그의 특기인 궁중암투와 치열한 권력투쟁이 세심하게 묘사되고 있다.

때는 바야흐로 구교와 신교가 대립하던 시기의 프랑스

종교의 화합을 위해 가톨릭의 대표인 프랑스의 국왕 샤를르 9세의 동생인 마르그리트 드 발로아와 신교도 즉 위그노의 대표인 나바르의 왕 앙리 드 나바르의 국혼이 결행된다.

마르그리트는 궁내 제일 가는 미녀지만 앙리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고 이를 알면서도 마르그리트는 결혼을 허락할 수밖에 없다.

당연하게도 당시에는 결혼과는 별개로 연인을 두는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 두 사람의 결혼으로 서로가 이익을 얻는 게 많았기 때문인데 결혼식이 끝나고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축제를 즐기는 이때 결혼 조약을 깨고 가톨릭에서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을 포함, 거리의 위그노들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른바 대학살의 밤이었다.

나바르의 왕 앙리 역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갓 결혼한 마르그리트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난다.

이 모든 것이 사전에 철저하게 계획되었던 음모였으며 사건의 뒤에는 아들의 뒤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철의 여인 카트린느 왕후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자식인 딸의 미래를 희생하는 것쯤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을 정도로 냉혈한이었다.

또한 당연하게도 자신의 딸인 마르그리트가 자신의 편에 설 것이라 예상했지만 마르그르트 역시 마음속에는 깊은 권력에의 의지가 있었고 자신이 결혼한 앙리가 죽으면 자신은 아무런 힘도 권한도 없는 그저 미망인이 될 뿐이란 것 재빠르게 계산한 후 앙리의 편에 베팅을 한 것이다.

그녀의 이런 계산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앙리는 마르그리트와 전략적으로 동지가 되어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카트린느 황후는 거칠 것이 없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잔인하고도 치밀하게 음모를 펼치고 덫을 놓아 앙리와 마르그리트 그리고 신교도들을 위기로 몰아넣는다.

사실 카트린느가 이렇게까지 하는 데에는 그녀 나름의 사정이란 게 있는데 점술을 상당히 신뢰하는 그녀에게 자신의 핏줄이 아닌 앙리가 새로운 권좌에 앉는다는 예언은 믿고 싶지 않을 뿐 아니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바꿔야 할 운명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국왕이자 자신의 아들인 샤를르 9세는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을 뿐 아니라 25살을 넘지 못한다는 운명을 가지고 타고났기 때문에 반드시 다음 왕좌 역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앙주가 이어받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아들들의 사이는 좋지 못해 남보다 못한 사이... 서로에게 약간의 틈이라도 보여선 안된다.

이렇게 이야기 전반이 왕후가 음모를 꾸미고 이에 위기에 처했다가 자력으로 혹은 조력자의 도움으로 앙리가 위기를 탈출하는 모습이 그려져있는데 중간중간 그 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비롯해 주변국의 정세를 곁들이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물론 이야기 전체가 음모와 권모술수가 판치는 건 아니고 당연하게도 이런 위기 상황에서도 로맨스는 피어난다.

지금의 로맨스와는 조금 다르지만 삼총사에서 보인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인 사랑이 여기에서도 보이는데 갓 결혼한 마르그리트를 보고 단숨에 사랑에 빠져 목숨까지도 아깝지 않다 생각하는 라 몰 백작의 조건 없는 사랑은 현재의 관점에선 불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당시에는 이런 것에 어느 정도 관용적인 분위기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역시 삼총사에도 보인 남자들 간의 뜨거운 우정 역시 여기에도 나오는데 라 몰 백작과의 의리로 어떤 일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코코나 백작의 종교를 넘어선 우정은 당시에 어떤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보는지를 알려준다.

읽으면서 드는 의문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사람은 카트린느 메디치인데 왜 제목이 그녀가 아닌 그녀의 딸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원제 대로인지 문득 궁금해질 만큼 이야기의 주체는 카트린느 메디치와 그녀의 숙적 앙리의 대결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역사적 사실과 매력적인 스토리의 결합으로 아주 흥미진진한 드라마가 탄생한 듯... 뒤마가 왜 당대에 그렇게 인기가 있었는지 어느 정도 짐작 가능하게 해준다.

책 속에 나오는 기발한 독약이 진짜 가능한지 문득 궁금해지고 점성술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게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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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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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어떨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가?

실수를 했을 때와 같은 의도치 않았지만 내 행동이 때와 장소에 맞지 않았을 때를 제외하곤 나의 행동과는 상관없이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인식했을 때 혹은 내 가족이 남들과 달라서 그들로부터 멸시하는 눈초리를 받았을 때 부끄러움을 넘어 모멸감을 느낀다.

이 책 부끄러움의 저자인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일만을 어떤 미사여구나 과장 없이 그대로 글로 옮기는 작풍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그녀의 글은 소설 형식을 따왔지만 엄밀히 말해서는 소설이라 할 수 없고 스스로도 소설이라 칭하지 않는다.

스스로 경험한 일을 약간의 과장이나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글로 옮기는 일은 굉장히 용기가 필요한 일일 것이다.

자신을 비롯해 글 속에 등장하는 가족 모두는 사람들 앞에서 숨길 수 없이 발가벗고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것도 상대방은 옷을 입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일생 중 가장 강렬하게 남은 기억인 12살 때의 그날의 일은 이제껏 나온 책 속에는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아빠와 엄마에 대한 이야기며 자신이 겪은 일들을 마치 고해성사하듯 쓴 글에서조차...

그만큼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지만 그래서 더욱 그날의 일을 쉽게 끄집어 낼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아버지가 엄마를 죽이려고 시도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부끄러움은 그게 실화이자 그녀가 12살 어린 나이에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이 그대로 전달된다. 잘 벼린 낫으로 엄마의 목을 겨눈 그날의 아빠는 자신이 잘 알던 평소의 아빠가 아니었고 평범한 가족이라 생각했던 그녀의 일상이 무너진 그날의 기억은 오랫동안 그녀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깊이 각인되었으며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계기가 된다.

식당과 식품점을 겸한 곳에서 생활하는 자신을 그때까지 별다르게 인식하지 않았던 그녀는 자신이 다니는 사립학교 학생들과 자신의 처지의 극명한 차이를 깨닫게 되면서 부끄러움을 처음 느끼게 된다.

사람들과 욕을 하면서 싸우고 늘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처지라 잠옷 같은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남들에게 속살을 보이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는 엄마의 상스러움은 분명 그녀의 학교 학생들의 부모에게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그제서야 서서히 눈에 들어오고 자신의 위치를 극명하게 깨달으면서 같이 공부하지만 그들과 자신의 처지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음을 자각한다.

이윽고 그런 자각은 그녀에게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안겼고 그전까지는 자신 역시 그들과 같은 사립학교 학생으로서 다른 사람과 사물을 바라봤다면 그 차이를 인식하고서부터는 그렇게 그들과 같은 시선으로 마을 사람들과 자신을 분리해서 바라볼 수 없게 되었음을 불현듯 벼락처럼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도 그때의 부끄러움은 사리지지 않고 더욱 큰 자리를 차지해 스스로를 가두는 역할을 한 게 아닐지...

솔직히 평범하고 행복했던 소녀가 처음 자신이 사는 환경의 위치를 깨닫고 친구들과의 부와 신분의 차이를 문득 느끼는 대목에선 그녀가 느꼈을 그 곤혹과 외로움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고 그게 지극히 현실적이라 슬프기도 했다.

처음 읽어본 작가의 글은 솔직하고 담백해서 그녀가 느꼈을 충격과 부끄러움이 더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조금은 미화를 하거나 우회적인 표현을 써도 될 것을 꾸밈없이 쓴 글은 분명 작가 자신이나 그 글 속에 등장하는 사람에게도 대미지가 컸을 것 같은데 돌아가지 않고 정면으로 승부하는 작가의 우직함이랄지 고집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작가의 다른 책도 한번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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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지막은, 여름
안 베르 지음, 이세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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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생애 마지막이 될 라일락을 보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저자는 불치병인 루게릭 환자이며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만큼 자신의 자유를 사랑했고 또 그랬던 만큼 자신의 삶 역시 사랑했다.

정원에 핀 라일락을 보면서 자신의 상황과 상관없이 꽃은 피고 질 것이며 올해에도 그리고 그 꽃을 바라봐 줄 자신이 없을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계속 라일락은 필 것이란 걸 깨달으며 담담하게 써 내려간 이야기는 감정을 절제해서 더 가슴에 와닿는다.

매일매일 달라지는 몸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자신의 상태에 매일매일 절망하면서도 하루라도 더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그녀가 얼마나 자신의 삶과 자유를 사랑하는지를 알게 해준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자신의 조국인 프랑스가 아닌 벨기에로 가서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수많은 청원과 기자들과의 회견이 있었고 그런 그녀의 죽음 이후 나온 이 책은 당연하게도 많은 반향을 일으켜 그녀의 사후 존엄사 개정안이 국회에서 논의가 되는 중이다.

우리나라 역시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존엄사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데 얼마 전 스위스로 가서 스스로 삶을 중단한 사람의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많은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다.

이제는 우리도 존엄사, 인간답게 죽을 권리에 대해 심도 있게 생각해봐야 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치료에 의미가 없고 치료의 가능성이 없는 환자라면 더 이상 고통을 감내하도록 강요할 수 없고 또 그 고통받는 모습을 그냥 지켜봐야만 하는 환자 가족을 위해서라도 원하는 사람에겐 존엄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기에 저자가 스스로 인간답게 살고 인간다운 죽음을 선택하고자 한 결심에 동의한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까지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만 한다면... 그리고 그런 자신의 치욕을 감당해도 더 이상 나을 가망은 없고 그저 손놓고 죽기만을 기다려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자신의 의지가 살아있을 때 원하는 죽음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은 그래서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조금씩 주변 사람들과 안녕을 준비하는 그녀의 담담한 모습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누구도 자신의 장례식에서 훌쩍이거나 작게 속삭이며 엄숙하게 애도하는 걸 바라지 않았던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여행을 통해 이별을 준비했고 그곳에서도 슬프지만 유쾌한 모습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그런 그녀의 바람을 친구들과 가족 역시 말없이 동참해 그녀의 작은 파티에 우울함과 비탄은 보이지 않고 그저 추억과 지금 현재를 즐기려고 하는 성숙된 모습만 보일뿐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을 힘들여 해내고 기분 좋아하는 모습도 어제는 할 수 있었던걸 오늘은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느꼈던 절망감과 체념도 그리고 문득문득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그들과 나눌 수 없는 절대 고독의 심정도 자극적이지 않고 덤덤하고 간결한 필체로 그때의 심정을 이야기하고 있어 그녀가 느꼈을 그 기쁨 그 슬픔 그 외로움이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누구나 유한한 삶을 살아가면서 언젠가가 되었던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순간이 온다면 어떤 죽음을 맞고 싶은가 생각하면 나 역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유지한 상태로 죽고 싶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연명장치에 의해 생명이 유지되고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고통을 연장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그녀의 선택에 찬성하게 된다.

인간답게 죽는 것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었고 묵직하게 와닿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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