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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의 평온을 깼다면
패티 유미 코트렐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평점 :
요즘은 좀 덜하지만 우리나라가 한때 해외 입양아를 많이 보내는 나라로 부끄러운 이름을 날릴 때가 있었다.
지금은 국내 입양을 쉬쉬하지 않고 처음부터 공개입양을 하는 사람도 있고 입양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조금 개선된듯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기의 핏줄에 연연하는 국민성 때문인지 보호받아야 하는 아이들의 국내 입양이 여의치 않아 해외로 보내지는 경우가 여전하다.
그래서 해외입양아가 성인이 되어 자신의 조국이라고 찾아와 부모를 찾는 방송을 볼 때마다 편치 않았던 기억이 있는데 이 책의 저자 역시 해외 입양아이고 자신과 같은 입양아이면서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동생이 있다.
그런 이유로 저자는 부정하지만 책과 저자의 삶을 분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룸메이트의 새로 산 소파를 정리하다 남동생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되는 헬렌
새로 산 룸메이트의 소파에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헬렌은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는 듯 동생을 단순히 동생이라 칭하지 않고 입양된 남동생이라 칭하면서 선을 긋는다.
헬렌의 태도는 줄곧 이런 식이다.
마치 자신의 양부모와 남동생과 함께 살았으나 가족은 아니라는 것처럼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알고 있는 남동생은 자살할 이유가 없어 보였기에 장례식에 가서 왜 자살을 한 건지 그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그래서 이곳 뉴욕으로 온 지 몇 년 동안 찾아가지 않았던 밀워키의 고향집으로 가지만 그녀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문한 것에 대한 양부모의 태도는 여느 가족을 잃은 부모의 태도와는 확연히 달랐다.
헬렌의 방문을 어리둥절해하고 당황해하며 꺼리는듯한 그들의 모습에서 헬렌이 양부모와의 사이가 평탄치 않았음을 짐작게 한다.
그리고 그런 양부모에 대한 헬렌의 태도 또한 성숙한 성인의 모습이라기 보다 짜증스러워하고 거추장스러워하며 냉소적인 10대의 반항적인 모습에 가깝다.
서로를 못 견뎌하는 모습을 보면서 양부모가 왜 아이들을 입양했는지 의문이 들지만 책을 읽다 보면 그런 그들이라도 남동생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학교를 졸업한 후 독립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살면서 별다른 취미도 없고 직업조차 없이 부모의 돈으로 살아가던 남동생은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면 도대체 무슨 낙으로 산 건지 의문이 들면서 조금은 한심스럽게 여겨지지만 헬렌이 그런 남동생의 발자취를 더듬어가다 보면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된다.
29살이 되도록 여자친구도 없었던 것 같고 별다른 꿈도 없어 보였던 남동생이 그녀는 몰랐지만 친하게 지내온 친구도 있었으며 자신이 태어난 조국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았을 뿐 아니라 친부모를 찾기 위해 한국으로 가는 적극적인 노력을 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더욱 동생의 자살의 이유가 궁금해진다.
여유가 있으면서도 늘 극단적일 정도로 절약하는 구두쇠 부모의 간섭과 억압 때문에? 혹은 입양아라는 트라우마를 끝내 극복하지 못해서? 그것도 아니면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집안에만 눌러 앉은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나 우울감 때문에?
그가 자살할만한 이유는 여럿이지만 하나하나 더듬어간 헬렌에 의해 이 모든 게 그의 자살 원인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가 글에도 남겼듯이 자신의 삶에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다는걸...
그렇다면 그는 왜 자살한 것일까?
그가 자신의 사후, 장기를 기증하기 위해 여러 곳에 기증 의사를 밝히고 그 절차를 밟았다는 게 밝혀지면서 오랫동안 준비한 죽음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헬렌은 이 모든 게 동생이 단순히 우울감이나 충동에 못 이겨서 한 결정이 아니라 오랫동안 죽음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조금씩 그의 죽음을 납득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자살의 이유나 목적 따위 없이 그저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 택한 죽음이라는걸...
두껍지 않은 분량임에도 헬렌이 느끼는 의식대로 흘러가는 대로 쓴 글은 쉽지 않았다.
차라리 헬렌이 짐작했던 것처럼 자살의 원인이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면 좀 더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지만 그냥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어 택한 죽음이라는 것 역시 쉽게 이해되지 않아 이 책이 더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헬렌이 나름대로 잘 알고 같은 입양아의 처지라 서로 친밀한 관계였다고 생각한 남동생의 삶을 추적하면서 새로 알게 되는 사실을 보며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안다고 생각하는 게 얼마나 오만한 착각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각자의 삶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듯이 각자의 죽음 또한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