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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평점 :
여자들이 직장에서 일을 하고 정치적 발언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 것이 불과 수십 년 전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현재를 살아가는 여자들이 옛날 우리의 할머니나 우리 엄마들 세대에 비해 혜택을 받는 것은 분명하지만 들여다보면 아직까지 뿌리 깊은 남존여비 사상이나 남성 중심주의가 많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도 모르는 새 어릴 적부터 여자다움을 강요당하고 또 그런 걸 당연하다 교육받으면서 자신도 모르는 새 세뇌당해왔음을 이제는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책에는 열두 명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들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 할머니와 우리 엄마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비록 그들과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다른 곳에서 살아가지만 여자들이 겪는 온갖 부조리함과 불합리함 그리고 억압의 역사는 우리와 다르지 않은 걸 보면서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대부분의 여자들보다 휠씬 더 힘든 환경에서 살아왔는데 현재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 뿌리를 들여다보면 먼 조상이나 혹은 부모 세대가 아프리카나 아시아와 연관된 유색인종이기도 한데 백인 중심의 사회에서 그네들이 뿌리를 내리기가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을지는 굳이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여기에다 여성이고 성 적 소수자이기도 하다면 그 고단함이 말해 뭐 할까
시작을 12명의 여성 중 앰마로 시작한 것은 그래서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뛰어난 연극 연출가이자 극작가인 그녀가 걸어온 길은 일단 평범하지 않다.
그녀 자체부터 보통의 사람들과 다른 성 소수자이기도 하지만 예전의 남편들이 그러하듯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남편 밑에서 굴종하듯 살아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자라 스스로를 구속하는 걸 못 견뎌하고 그런 의미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이며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게이 친구와의 결합을 통해 사랑하는 딸 야즈를 출산하고 양육한다.
더더욱 힘든 환경을 이겨낸 캐럴... 수학과를 나온 엄마를 둔 덕분인지 남보다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타고났지만 단 하루의 일탈이 불러온 불행은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다.
여자들의 불행은 그녀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든 비난을 들어야 할 뿐 아니라 여차하면 그녀의 인생 전체를 바꿔 버릴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지만 다행히도 캐럴은 그녀 스스로 일어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캐럴이 자신의 길을 갈 수 있게 도움을 준 사람은 셜리
그녀 역시 집안의 남자형제들 때문에 늘 순위에서 밀리고 제대로 된 처우를 받지 못했지만 뛰어난 머리와 노력으로 집안에서 혼자서만 대학을 나와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데 성공... 자신과 같은 처지 즉 약간의 기회만 주어지면 스스로 가난과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이들을 위한 교육에 힘쓰지만 쉽게 현실에 안주하고 노력조차 하지 않으려는 아이들에게 점점 지쳐 모든 희망을 버릴 때 캐럴을 만나게 된다.
캐럴에게 셜리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듯이 셜리에게도 캐럴은 신입 교사일 때의 의지를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가 되지만 셜리의 생각과 달리 캐럴은 기회를 잡아 원하는 바를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캐럴에 대한 고마움은 없다.
오히려 노력은 자신이 하고 셜리가 그 대가를 얻었다 생각한다.
이렇듯 오랜 세월 힘든 세월을 거치고 그런 할머니와 엄마의 노력과 희생으로 현재의 자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자신이 처한 현실이나 자신이 보면서 자랐던 과거를 통해 자신처럼 하지 못하고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남자들에게 종속된 삶을 살아왔단 이유로 할머니를 엄마를 연민하면서도 경멸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그 말...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의 영국식 버전이랄지
이렇듯 누구보다 불리한 환경에서 버텨내고 자식을 양육하고 마침내 여자들의 권리의 일부분을 쟁취해냈지만 이번에는 여자들 간 세대 불화가 기다리고 있다.
서로를 연민하고 애정 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던 여자들의 이야기가 세대를 넘나들며 서로의 삶에 얽히고 관계를 맺어가며 역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지루하지 않고 흥미롭게 그려내고 있는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왜 많은 찬사를 받고 호평이 이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