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애정영화의 주연은 대부분 잘생긴 남녀배우 차지였다. 그 까닭이 짐작된다. 관객석을 채워줄, 평범하게 생긴 사람들의 대리만족을 위함이었다. 평범하게 생긴 사람들은 화면 속의 잘생긴 배우가 자기 자신인 듯한 환상 속에서 한 두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렇기에 영화가 끝나면 아름다운 환상이 깨진, 기분 나쁜 상실감마저 들게 마련이었다.

 

 

그래서일까, 요즘의 애정영화에는 잘생긴 남녀배우들 못지않게 평범하게 생긴 남녀배우들도 주연을 잘 맡는다. 내 개인적으로는 전자의 경우보다 후자의 경우가 더 마음에 든다. 잘생긴 남녀들보다 평범하게 생긴 남녀들이 훨씬 많은 주변 현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 자신도 평범하게 생긴 남자에 속할 듯싶다  

 

그래서 나는 외화 스윗 프랑세스를 높이 쳐준다. 잘생기지 않은, 평범하게 생긴 남녀 배우가 등장하여 현실감이 나는데다가, 벅찬 감동까지 선사했기 때문이다. 극히 평범하게 생긴 남자 배우(독일군 장교 역)가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듯싶다가 드물게 보여주는 미세한 표정연기는 잔잔한 호수에 퍼져나가는 동심원 물결처럼 여운이 깊었다. 영화가 끝난 뒤 상실감보다는내밀한 사랑이 준 감동에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기 힘들었다.

 

이 영화는 본래 2015년 겨울에 개봉했다는데 무슨 까닭인지 대중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이내 간판을 내렸단다. 내가 우리 집 거실에서 TV로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그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래서 귀 따가운 총소리 대포소리가 난무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 그렇지 않았다. 간간이 총소리가 나긴 했지만 주된 흐름은 독일군 장교와 점령지 프랑스 여자와의 내밀한 사랑 얘기이다. 두 사람은 끝까지사랑이란 단어를 말하지 않고(혹은 못하고) 헤어지는데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참된 사랑은 이런 것이다!’하는 감동을 남겼다.

 

 

 

사람은 남자이거나 여자이다. 이것이 사람의 존재방식이다. 이런 존재방식에서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세계대전을 일으켜 많은 나라를 점령한 독일군의 장교 또한 남자였다. 점령당한 비참한 나라 프랑스 어느 시골의 부녀자 또한 여자였다. 전쟁 중이라는 재난 상황에서 한 집에서 지내게 된 둘의 사랑은 당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끝난 뒤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감동에 젖어 있는 객석( 우리 집 거실 소파)의 분위기는 당연함을 넘어 특별했다.

스윗프랑세스’. 대다수의 우리처럼 평범하게 생긴 남녀 주연배우들이 뜻밖에 주는 벅찬 사랑의 감동이 이 영화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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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은

죽도록 오해한다는 말과 같다는

어느 스님의 말씀이 내 머리를 후려쳤다

그래, 너를 사랑했던 것은 큰 오해였다

더 이상 오해하지 않기로 했다

너와의 순간들 모두 잘못이라고 정리한다

모래 바람에 외투 깃 세우고 방황하던 날들도

쓸데없는 치기였다

너와 내가 헤어졌지만 한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생각도

휴지통에 꾸겨서 던져버린다

과학의 하늘 아래 어떤 마음 하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황사는 건강에 안 좋다는 뉴스에 귀 기울이며

그 날의 밤 내다보던 유리창들 단단히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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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나린 2016-11-02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픕니다..ㅜㅜ
 

 

 

 

 '이별 노래'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이 시는 정호승 시인이 지은 이별가이다. 근래에 이동원이란 가수가 특유의 쓸쓸한 음색과 창법으로 불러서 대중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면 나 자신도 이동원의 노래를 듣고서 이 시를 알았기 때문이다. 뒤늦게 가사로 쓰인 시를 확인해 보고서 그 뛰어난 감성에 나는 놀랐다. 근래에 보기 드문 역작이라 느낀다. 이제 이 시에 대한 나의 분석 및 감상을 적어 본다. 그저 느끼는 대로 번호를 매겨서 적는다.

 

1. 이 시의 제목부터 유의한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별의 노래라고 할 것을 ‘-라는 조사를 쓰지 않고 이별 노래라고 한 것에 유의한다. 얼마나 호흡이 간결하고 선명한가. ‘-라는 관형격 조사를 쓸 일 없이 이별이란 단어와 노래란 단어를 곧바로 연결함으로써 바로 이별가란 단어를 풀어 쓴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별가라고 쓸 수 있는데 왜 굳이 이별 노래라고 한 음절이 긴 제목으로 썼을까? 그것은 아마도 한자어를 최대한 피하고자 함이다. 놀랍게도 그의 시에서 한자어라곤 오직 이별이란 단어밖에 없다. 제목에 쓰인 이별이란 단어 이외에는 철저하게 순수한 우리말로만 표현한 그 언어구사력에 나는 경탄한다.

그렇게 이별이란 한 단어만 한자어를 썼기에 역설적으로 이별의 이미지는 더욱 선명하게 강조되는 효과를 낳았다.

 

2. 이 시가 전개되는 스토리의 시간적 배경을 본다. 이별이 노을지는 저녁부터 별 뜨는 밤으로 이어지고 있다. 곧 서서히 어두워지다가 깜깜해지는 하루의 늦은 시간대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밝은 오전의 스토리가 있다면 그에 비교되어 어둡고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배경이다. 더구나 늦은 밤에서 스토리는 끝난다. 그렇기에 독자들에게 답답한 심사를 안겨줄 수 있음에도 그것을 벗어난 것은 을 등장시켰기 때문이다. 결코 희망적인 별은 아니지만단지 떠나는 그대를 잊지 못한 마음의 설렘일 뿐이지만 이 별이 놓임으로써 심연에 떨어질 수 있는 어둠의 위험을 막았다.

 

3. 내가 이 시에서 가장 맘에 들어 하는 구절은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이란 부분이다. 왜 굳이 사람의이란 표현을 생략하지 않았을까. 생략해도 별 문제는 없는데 말이다. 이것은 시인의 세계관에 닿아 있는 표현이라 본다. 노을’‘’‘어둠등의 자연물과 어우러지는 하나의 자연물로서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냥 이라고 표현한다면 당연히 사람이 거주하는 주택을 의미한다고 우리는 간주하지만 시인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동물들도 집이 있으니까 (‘새집’‘호랑이 굴등등) 굳이 사람의 집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 생각 속에서 표현된 사람의 집이므로 그 집은 모든 자연물 속의 하나일 뿐이다. 곧 그대와의 이별조차 대자연 속의 한 사건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대와의 이별조차 자연 현상의 하나임을 암시하기 위해서 주변의 집조차 사람의 집이라고, 자연물의 하나라고 시인은 노래 부르고 있다.

 

4. 이 시가 노래로 불릴 때 안정적인 느낌으로 와 닿는 원인 중의 하나는, 4연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면서 각 연 또한 4행으로 이루어진 구조에 있다. 게다가 제 1연과 제 4연이 같은 수미상관적 구조이다. 곧 이별이란 슬픈 스토리를 앞뒤로 막아주면서 마치 별 하나 떠 있는 밤하늘이 담긴풍경화 한 편을 보는 느낌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수미상관에 의한 제 1연과 제 4연이 풍경화가 담긴 액자의 테두리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각 연마다 한 문장(sentence)으로 끝나면서 각운까지 사용하였다. '-‘’-‘’-‘-가 그것이다. ‘l'모음으로 일관해 끝나는 각운 구조가 이 시에서 안정감을 주는 역을 더한다.

 

5. 이 시에서의 시인의 유일한 동작이라면 제 3연의 옷깃을 여미'는 동작밖에 없다. 나머지는 생각뿐인 동작이다. ( ‘되리니) 시인은 떠나가는 그대에 대하여 조금만 더 늦게 떠나주기를 바랄 뿐이다. 떠나가는 님에 대하여 진달래꽃을 뿌려주며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김소월의 정서에 닿아 있다. 세상이 변했지만 이러한 정서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어서, 이 노래를 좋아하는지 모른다.

옷깃을 여미'는 구절이 유일한 동작이면서 제 3연의 첫 구절에 쓰이니까 기승전결의 구조 속에서 전()의 역을 충분히 하였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이 시에서의 유일한 움직임은 전에서 조금 존재하더니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다.

 

6. 이 시에서는, 같은 표현을 끊임없이 사용했으되 조금도 상투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체가 16행인데 무려 8행에 걸쳐서 떠난이란 표현이 나온다. 그러고도 조금도 식상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아마도 어둡게 변해가는 시간적 배경을 깔고 그저 조금만 남아 주기를 바라는 시인의 가슴 아픔이, 그런 반복적 표현을 깨닫지 못하도록 만든 게 아닐까. 말하자면 어둡게 장막을 치는 가운데 진행되는 일종의 최면 기법이다.

 

7. 이 시는 근래에 보기 드문 역작이다.

나는 이 시의 주인공을 서정적 자아라고 보지 않는다. ‘시인으로 본다. 언젠가부터 모든 시의 주인공을 한결같이 서정적 자아라고, 시인이 아닌 별도의 인간으로 보는 견해가 자리를 잡았는데 나는 이에 반발한다. 서정적 자아가 바로 시인일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봐야 한다. 나의 주장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시가 나올 수가 없다.

 

얼마나 아름다운 헤어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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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나는 짧은 이 시를 보는 순간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일에 지친 화자가 이제는 그만 편히 쉬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느꼈다. 삶이란 어차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뤄지는 것이기에 좋으나 싫으나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 그래서 아주 작은 공간이나마 내(화자)가 쉴 수 있는 곳을 그리는 마음이 나타난 것이라는 해석이다.

 

우리에게 이란 단어는 어떤 이미지인가? 고립이나 소외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도 있지만마음 편히 쉬는 곳이란 긍정적인 이미지도 분명히 있다. 모든 게 복잡다단한 현시대에 이르러 이 휴양지로서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제주도라든가 그리스의 섬들이라든가 발리 섬 등이 휴양지나 신혼 여행지로써 인기를 끄는 것만 봐도 충분히 납득될 것이다.

 

그렇기에 복잡다단할 일이 없는 예전에는 은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공간이었다. 유배지로나 쓰였을 뿐이다.

   

 

한편, 이 시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이렇다.

“(상략) 시인이 꿈꾸는 섬은 먼 바다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공감의 세계, 혹은 그것을 향한 꿈이다. 정현종은 무척 외로울 때 이 시를 썼다고 회상한 적이 있다. 그 섬에 가는 길은 우정이나 연대(連帶)에서 찾을 수 있다. 동시에 홀로 있더라도 시를 읽거나 춤과 음악·그림에 몰입하는 영혼의 항해를 통해 이르는 섬이기도 하다. 그 섬에서 사람은 삶의 진짜 알맹이를 실감할 수 있다.(하략)”-박해현/기자, 조선일보 '문학산책'-

 

 

내 감상이나 해석과 다르다. 하지만 나는 어느 쪽이 옳다는 주장을 하지 않겠다. 현대시의 맛은 난해한 데에 있기 때문이다. 평이하게 해석되거나 정답 같은 감상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란 시에서의 을 절대자나 잃은 조국으로만 보다가, 근래 들어 실제 연인으로서의 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 시작하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최순실 국정농단일로 온 국민이 패닉에 빠진 것 같은 요즈음, 이 시가 선하게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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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은 어느 날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업하던 남편이 암에 걸려 병석에 눕자 아내 되는 여자가 어떻게 해서든지 남편을 살려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결국 남편은 세상을 떴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들 형제와 작은 아파트 한 채. 그나마 아파트는 많은 빚에 저당 잡혀 있었다. 그러자 그녀는 고민 끝에 상식을 넘는 선택을 하였다. 아들 형제를 내팽개치고 다른 남자랑 따로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문제는 그 남자와 옆 동네에서 살림을 차렸다는 사실이다. 모자간에 길에서 맞닥뜨릴 상황이 되면 그녀는 먼저 다른 길로 피해 감으로써 자신이 원치 않는 만남을 용케 면하며 산다고 한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모성애만은 천고불변의 진리인 듯 영원할 거라 믿어온 무심으로는 정말 믿기지 않는 실화였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형제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를 다니는 어린애들이 아니라 하나는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고, 다른 하나는 군대에 갔다가 막 제대한 청년이라는 사실이다. 하긴, 형제가 열 살 미만의 어린이들인데 그녀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법의 심판을 받았을 테다.

그렇다 해도 무심으로서는 가난 앞에 무너진 모성애라는 차원에서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생각 끝에 지인들에게 과연 그런 비극이 가능할 수 있는지그 의견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경제난이 심화되면 그럴 수도 있다는 의견들이 다수였다. 뜻밖이었다.

결국 무심은 그 이야기를 작품화하여 허구로나마 못된 어미를 응징하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하지만 그녀를 응징했다고 해도 비극은 여전히 남을 수밖에 없었다. 소설은 허구이긴 하지만 개연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한 비극의 재생산에 무심의 가슴은 다시 아팠다.

박쥐가 된 아이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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